뮌헨 올림픽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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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진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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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Khalid Jawad).
1. 개요
2. 전개
3. 사망자
4. 원인
5. 이후
6. 영향
7. 등장 매체


1. 개요


Das Münchener Olympia-Attentat, Geiselnahme von München (독일어)
Munich massacre (영어)
(히브리어) טבח הספורטאים באולימפיאדת מינכן
1972 뮌헨 올림픽 기간에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서독으로 침투하여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 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아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서독 경찰의 대응 실패로 인질 전원이 사망한 사건.

2. 전개


1972 뮌헨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던 9월 5일 새벽 4시, 운동복을 입은 8명의 무장괴한들이 올림픽 선수촌 담장을 넘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침입했다. 이때 바로 옆이 한국 선수단 숙소였으나 이들은 불행 중 다행으로 전원이 무사히 피했다. 이스라엘 선수들 대다수가 괴한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인질로 붙잡힌 상태였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 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과 바더 마인호프의 두 리더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서독 경찰에서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 올림픽 주최측에서는 사람들이 죽었단 소식을 들은 후에도 경기를 지속했고,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은 뒤에야 모든 경기를 중단했다.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었던 게,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후 뮌헨 경찰서장인 만프레트 슈라이버가 현장 총책임자가 되었다. 슈라이버는 일반적인 경찰 업무에 있어서는 훌륭한 평을 듣는 경찰이었지만, 인질극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1] 슈라이버가 현장을 지휘하면서 여러 문제가 터져나왔는데, 사건 발생 후 인질극이 벌어진 선수촌 주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기자와 구경꾼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방송국에서는 아예 카메라로 생중계를 해버리는 바람에 테러범들은 경찰의 행동 하나하나를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해 경찰을 투입하지만, 투입된 이들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평범한 일선 경찰관들이었다.[2] 그나마 이것도 방송사 카메라가 생중계하는 바람에(...) 테러범들에게 들켜서 역시 실패했다. 이는 보도 통제 개념의 부재도 원인이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어설펐기 때문이다. 작전이란 게 운동선수로 위장한 경찰들이 스포츠 가방에 무기를 숨겨서 옥상으로 올라가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속에 방탄복 입은 게 뻔히 보이면서 자기 몸집보다 뭔가 이상하게 빵빵한 체육복을 걸친 남자 몇이 총들고 지붕 위로 올라갔고, 그게 또 하필 TV 카메라가 생중계를 위해 맞춰 놓은 곳에 그대로 잡힌 것이다. TV를 보던 테러리스트가 자기 머리 위 지붕에 거수자들이 얼쩡거리는 걸 보자마자 바로 테라스 너머에서 "쟤들 안 꺼지게 하면 인질 죽인다!"라고 외쳤고 서독은 그 위장 경찰관들을 결국 철수시켜야 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상부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24시간 안에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요구해서 인질들과 함께 비행기로 중동에 있는 나라로 가기로 명령 받았었기에 헬리콥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 당국은 테러범들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기에 서독 경찰 당국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헬리콥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 안에는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놓고, 외부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테러범들을 사살하려고 했으나, 비행기 내부의 경찰들이 겁을 먹고, 헬리콥터가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몇 분전에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해버렸다'''.[3]
결정적으로 작전이 시행되기 30분 전까지도 독일 경찰 당국은 테러범의 숫자를 5명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8명이지만, 올림픽 선수촌에서 인질의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간 IOC 위원이 "테러범 5명을 봤다." 라고 한 말을 검증도 없이 믿었고, 나중에 테러범들이 이동하는 헬리콥터에서 테러범이 8명이라는 소식을 전해오고 나서야 정확한 인원을 파악했다. 그러나 이미 작전에 들어간 경찰관들에게는 이 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착륙한 후 테러리스트들이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 와중에 테러범들이 탄 헬리콥터에 수류탄을 던져 넣어서 헬리콥터가 폭발하고 다른 헬리콥터에는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와중에는 나중에 온 경찰들이 헬리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저격수와 도망쳐 온 헬리콥터 조종사를 오인사격해서 중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 인질 사망 이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 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을 가지고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IOC와 독일 정부는 대회 재개를 결정하였다.
나치즘의 선전장이 되어버린 베를린 올림픽의 기억을 딛고 독일 부흥을 상징하는 가장 화려한 대회를 만들겠다는 서독 측의 결심은 검은 9월단 사건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올림픽에서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 대회이기도 하다.
한편 테러범 8명 중 5명은 총격전 중에 사살되었고, 남은 3명은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4]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보도(한국어 번역)에 따르면 뮌헨 올림픽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팔레스타인테러리스트들은 네오 나치의 지원을 받았었다고 한다.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묘사되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네오 나치 간의 커넥션이 형성된다는 그런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영논리,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극한을 보여준 사례. 게다가 이 참사를 지원해준 네오 나치 세력 중에서 구드룬 부르비츠의 개입까지 존재했다는 설이 있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외동딸인 구드룬 부르비츠는 이미 1951년부터 징역을 살고 있거나 도주 중인 슈츠슈타펠 단원들을 구원하는 '슈틸레 힐페'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1952년에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한 비킹 유겐트(Wiking-Jugend)를 설립하는데 일조했으며 전후 네오 나치 활동의 주축인 '블랙 위도우' 플로렌틴 로스트 반 퇴닝엔(Florentine Rost van Tönningen)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나치 옹호를 했을 만큼 이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3. 사망자


  • 선수: 다비드 베르게르, 제브 프리드만, 요세프 로마노(이상 역도), 엘리에제르 할핀, 마르크 슬라빈(이상 레슬링)
  • 심판: 요세프 구트프로인트(레슬링), 야코브 스프링게르(역도)
  • 코치: 아미추르 샤피라(육상), 케하르 쇼르(사격), 안드레 스피체르(펜싱), 모셰 바인베르그(레슬링)
요세프 로마노와 모셰 바인베르그는 범인들이 난입했을 당시에 바로 살해당했고, 나머지는 구출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4. 원인


당시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에 경찰 진압부대가 테러리스트들을 멀리서 정확하게 제압할만한 장비를 못 갖춘 탓은 물론이거니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던 탓에 테러리스트들을 초반에 제압하지 못하면서 피해가 컸다. 사건의 경과를 보면 어이없으리만치 황당한 대처를 비난할 수 있겠지만, 뮌헨 올림픽 참사가 발생하기 전까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뤄지는 민간인 상대 인질극은 벌어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테러전문팀이나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었고, 사건이 발생한 곳이 독일이니 독일이 맡아야할지, 인질이 이스라엘인이니 이스라엘이 맡아야할지, 테러범이 팔레스타인 계열이니 팔레스타인의 협조를 얻어야할지 등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5] 당시에는 대테러의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아 서독 경찰에는 대테러부대도 없던 것도 이유였다. 계획대로라면 경찰 저격수들이 공항에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저격수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아니라 그냥 사격이 취미였던 보통의 경찰들이었다. 물론 독일군에는 저격수가 있었으나 법적으로 독일군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된 H&K G3 소총에는 '''스코프도 없었다'''. 비견하자면 경찰중에 사격 잘한다는 애들 몇명 데려가서 무작정 K2 소총 쥐어주고 테러범들 저격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 당연히 재앙은 예견된 것이었다.(1972년 당시 뮌헨 경찰에 보다 뛰어난 저격용 소총인 SSG 69가 있었는 데도 G3 소총을 쥐어줬다.)
테러범이 비행장에 도착한 시각은 어두운 한밤 중이었는데,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헬리콥터가 활주로 조명이 들지 않는 곳에 착륙했다. 그에 더해 착륙 방향이 저격수들을 상대로 90도 가량 직각이어서 시야에 모든 테러범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많은데 독일이 아니라 미국이라도 이런 일이 당시 터졌다면 상당수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외려 이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으로 테러 대응에 경험이나 조치가 오래 걸렸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처럼, 인류 역사에서 당하기 전에 사건사고를 대응한 것보다 당해서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고치거나 대응한 게 더 많듯이. 사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에 이런 유혈 인질극과 같은 테러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5. 이후


이스라엘은 '신의 분노'라는 보복작전을 개시하였고 이것이 결국 지금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 심화로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 PLO 역시 국제적으로 비난대상이 되어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국제 테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밝혀 노선을 바꿨다.[6] 바로 다음 열린 1974 서독 월드컵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이 덕분에 안전경비 비용이 상당히 증가했고, 특히 몬트리올이 진 빚은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해소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육상 선수로 출전했던 샤울 라다니는 동료 선수들에게 재빠르게 상황을 알려 더 큰 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체육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 중 하나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받았다.

6. 영향


국제정치학자들 중에서는 뮌헨 참사를 현대테러리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대테러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나라는 테러 위협을 겪던 이스라엘프랑스, 영국 정도였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테러부대를 따로 두지 않았으나, 참사 이후 독일 최초의 대테러부대인 GSG-9를 비롯한 대테러부대들이 세계 각국에서 창설되었다.
또한 최초의 경찰부대용 전문 저격총이라 할 수 있는 H&K PSG1WA2000 등이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7. 등장 매체


영화 뮌헨은 이스라엘의 신의 분노 보복작전를 다룬다. 약간 고증상 잘못된 부분은 있으나[7] 영화 전개 중에 참사의 진행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가 1975년 출간한 소설 '검은 일요일'(Black Sunday)에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은 비행선을 몰고 다니면서 TV 촬영하는 조종사인데 원래 특수부대 헬리콥터 조종사였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전쟁 포로가 되어 고문을 당해 성불구자가 되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인생을 망친 미국 정부에 복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 손잡고 슈퍼볼 결승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비행선을 이용한 폭탄 테러를 계획하며, 이를 알게 된 FBI 요원이 테러를 막으려는 이야기이다.
1977년에 존 프랑켄하이머가 연출을 맡아 영화로 나오기도 했다. 또 여기서 다시 영감을 받아 톰 클랜시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슈퍼볼 경기장에 핵폭탄 테러를 한다는 내용과 레인보우 식스에서 올림픽 폐막식장에 테러단체가 죽음의 바이러스를 살포한다는 내용을 소설로 집필했다.
[1] 슈라이버는 더욱이 사건 발생 1년 전 은행강도 인질극사건에서 불확실한 대처로 인질 1명이 사망하여 기소당한 전적도 있었다.[2] 당시 옥상에 올라갔던 경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내에서 사격을 잘하는 사람을 찾길래 지원을 했더니 이곳으로 보냈다고 한다.[3]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수투표를 했고, 이후 모두 비행기에서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4] 체포된 테러범들은 루프트한자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석방되었다가, 그 중 2명은 모처에서 의문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죽음 역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유력하다. 나머지 한 명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피해 지하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5]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테러범들과 교섭을 하러 테러범들의 거처를 방문한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을 했다. 진압작전 때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 라며 당황했고 진압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6] PLO의 한 관계자는 사건과 관련하여 익명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전 세계인들이 볼 수 있는 높이 솟은 산 위에 '팔레스타인'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것과 같다''' 라고 의미를 부여했다.[7] 대표적으로 저격수들이 스코프 달린 H&K G3으로 원샷원킬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