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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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폭풍 작전 중 불타는 유정을 배경으로 편대비행하는 미 공군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6A, F-15EF-15C.
'걸프 전쟁'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사진이다.

히스토리 채널 영상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
1. 개요
2. 명칭
3. 전쟁의 원인
4. 전쟁 과정
4.1. 발단: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4.2. 전개: 사막의 방패 작전
4.3. 절정: 사막의 폭풍 작전
4.4. 결말: 완벽한 승리
5. 전쟁이 끝난 후
5.1.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5.2. 잘못된 교훈
5.3. 이후의 쿠웨이트
5.4. 이라크 전쟁
6. 전쟁사적 의의
7. 기타
8. 세기말 아마게돈?
9. 대중문화 속에서
10. 출처


1. 개요


걸프 전쟁(Gulf War)은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진, 이라크다국적군(Coalition Force) 사이의 전쟁이다. 다국적군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군을 섬멸하여 이라크에게 강제 병합쿠웨이트독립을 회복하였다.
한국 역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의료진과 군수송기 등 비전투병을 파병했다.

2. 명칭


걸프(gulf)는 바다(灣, 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 중국, 북한에서는 각각 '만안전쟁(湾岸戦争 わんがんせんそう)', '해만전쟁(海灣戰爭)', '페르샤만전쟁(Persia灣戰爭)'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줄여서 '만전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주변 국가들이 페르시아 만의 이름을 가지고 하도 싸워대서 페르시아 만은 아예 'The Gulf'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언론보도 초기에는 '''페르시아만 사태''' ,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상기의 이유 때문에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1]
걸프(gulf)는 만을 뜻하는 영어 일반명사로서 한국어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페르시아 만'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의 'gulf'의 용법이 새로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Gulf'라고 대문자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

3. 전쟁의 원인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전쟁이었던지라 당시 국제정세 전문가들과 해외 언론들은 이라크쿠웨이트 침공과 그 배경에 다양한 가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중동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원래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원래 하나의 나라였던 곳을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분할하면서 영국의 식민유산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설. 하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의문이다.[2] 그런데 이에 대해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영국이 이라크를 지배하기 전 역사/문화적으로 이라크와 하등의 관계조차 전혀 없는 나라였고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강제 합병을 정당화하려고 지어낸 소리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문서 참고.
  • 쿠웨이트의 석유가 탐났던 후세인 대통령이 더 많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으켰다는 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국경지대의 유전인 루메일라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개발한 석유 시추 기술이 이라크 영토 내부의 유전까지 캐가는 도둑질이라고 맹비난했고 쿠웨이트의 석유 도매로 유가가 하락하여 이라크 경제에 타격이 크다고 분노했다. 하우스 오브 사담에선 이쪽을 메인으로 밀었다.
  • 협소한 자국의 해안 국경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가 더 넓은 해안선, 영해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설. 실제로 이라크의 해안선은 이란과 쿠웨이트 국경 지역 부분에 약간의 해안가 영토만 있어 진짜 협소하다.
  • 이란-이라크 전쟁 때처럼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국가들이 뒤를 봐줄 거란 판단하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이는 사담의 전략적 오판을 의미한다. 이란 이라크 전쟁은 문서를 확인하면 알겠지만 당시 이란 혁명을 일으킨 호메이니가 말 그대로 전세계적인 어그로를 끌면서 서방, 아랍, 중국, 소련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몸빵을 자처한 이라크가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반면에 쿠웨이트는 당시나 지금이나 친미 걸프 왕정들 중 하나였고, 쿠웨이트 점령을 묵인한다는 것은 중동 지역의 동맹국,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완벽한 신뢰의 상실을 의미했다. 후세인의 침공은 미국 입장에서 전략적 이익을 심각하게 위협한 것이었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후세인은 처음부터 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자신이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이 묵인할 것이라고 혼자 망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가만히 놔둘리가 없어 전쟁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자 이번에는 소련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근거없이 믿었지만 당시 소련은 도와줄 처지가 안되었기에... 그래놓고 미국과 소련을 다 비난하는 추태를 보였다.
공식적으론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전비 조달 등으로 지게 된 막대한 차관상환 부담 등 국내외적으로 경색상태인 이라크의 국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훔쳐가는 건 물론 석유를 과잉 공급하여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전쟁의 원인은 전략적 목표와 다르지 않다. 미국의 대 중동정책과도 관련있지만, 미국은 현 상태를 유지해서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문제를 접근하는 시각이다. 여기에서 석유의 시레인(sea lane)이 나오는 것이고 시레인을 유지하기 위해 전세계 바다에 미국의 함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목표를 유지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미국은 지역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팔레비의 몰락 이후 이란 제재를 발동했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도 설명된다. 아프간 전쟁 내내 미국과 이슬람 수니파에서는 무자헤딘을 지원했고, 소련의 영향력이 중동으로 확장되면 곧바로 시레인이 위협받는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미국이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고 친소련 정책을 취할까봐 리비아 카다피, 이라크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즉 미국의 목표는 현상태 유지와 석유의 안정적인 수송로 확보였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시간을 끌면 미국은 시레인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 점령을 인정받으리라는 오판을 한 것이다. 애초에 이란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인구, 면적,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요소를 비교해도 이라크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8년이나 전쟁이 지속되며 이라크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 중 140억 달러 정도가 쿠웨이트의 채권이었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 또는 친 후세인 정권을 세움으로 부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쟁 양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도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잘 드러난다. 이라크군이 대량으로 학살된 '죽음의 고속도로'에서도 나타났고, CNN 중계 역시 미국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선전할 뿐 중동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쿠웨이트를 침공한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다만 1대 부시 정부의 후세인 온존 결정은 미국 내에서도 불만이 있었는지 2대 부시 정부때는 후세인을 없애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글자 그대로 지역에 헬게이트를 열어젖힘과 동시에 시리아-이라크-이란이라는 시아파 벨트를 완성시켰고, 이에 아라비아 반도 이남의 수니파 국가들이 반응하고, 터키와 파키스탄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즉, 미국은 여전히 중동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지만 예전처럼 주도권을 행사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국가적 이익에는 후세인이나 아사드가 존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가 돼버렸다.[3]

4. 전쟁 과정



4.1. 발단: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오전 2시, 이라크군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30만 대군을 전 국경에 투입하는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벽한 기습이었고, 이라크와의 갈등을 흔한 주변국과의 분쟁 정도로 생각하고 전쟁은 생각치도 않던 쿠웨이트군은 전쟁 준비도 안 되어 있었던데다 이라크군의 급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해도 애초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력 차를 감안하면 승리할 수는 없었고 대군의 기습에 대응하기에는 종심 자체가 매우 짧았다. 어쨌거나 3만에 불과한 쿠웨이트군은[4] 곳곳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동시에 이라크군은 헬리콥터 공중강습 부대를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공항과 활주로들을 점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한 데 이어 해군으로 이름뿐인 쿠웨이트 해군을 격파하여 쿠웨이트를 외부와 차단하였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공격한다. 이 와중에 쿠웨이트 왕실이 거주하는 다스만 궁으로 이라크군의 맹공이 펼쳐졌다. 개전과 동시에 벌어진 이라크 특수부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오전 5시에 감행된 이라크 해군육전부대의 공격까지 막아낸 쿠웨이트군이었으나 결국 시가지를 장악한 이라크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전차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쿠웨이트군은 더는 막아내지 못하고 수비부대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이때 쿠웨이트군 사령관인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나머지 왕족들을 피신시킨 후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하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같은해 8월 8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을 선포하고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인 쿠웨이트 주로 삼았다. 그 다음엔 쿠웨이트 국회 해산, 공항과 항구 폐쇄, 무기한 통금령 발동, 왕정 폐지 및 공화정 수립, 화폐 통합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강제 합병에 쿠웨이트인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이라크 점령군에 대항해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물론 이라크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을 했고 이와중에 많은 쿠웨이트인들이 이라크군에게 학살당했다.

4.2. 전개: 사막의 방패 작전


미국은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를 병합한 것에 반발하며[5] 이라크에게 당장 쿠웨이트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했다. 국제연합에서도 이라크에 쿠웨이트에 대한 합병 철회와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그러나 이라크는 배급제를 시행하며 버텼고 국민들이 전쟁에 익숙해서 평소 8~10개월분 식량을 가정마다 비축해두고 있었다. 거기다 접경 국가들로부터 밀수가 이뤄져 경제 제재의 효과가 없었다.
이렇듯 후세인의 야욕이 명백해지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을 통해 1차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보호해 교두보로 삼기로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만인 8월 9일 이미 2개 여단의 공수부대가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아파치 헬기등의 항공전력을 배치하여 방어를 굳건히 했다.
당시 세간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고 후세인 대통령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걸프전이 베트남전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과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베트남전은 사실상 미국이 치렀던 전면전으로는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여러 군사작전은 전개됐었지만 파나마 사태는 국지전으로 치러진 소규모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다. [6]
게다가 당시 이라크군은 중동의 군사강국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면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의 북한군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도 바그다드의 방공 능력은 저고도 구형 위주라고는 해도 웬만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뺨치는 수준으로, 바그다드보다 방공망이 강력한 곳은 '''모스크바''', '''바르샤바''', '''평양''', 캄차카 반도 등 모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미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중부사령부[7]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 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H.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은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1기계화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소모전을 예상한 것이다.
미군은 자국의 정예 병력은 물론 다수의 최신예 병기와 동맹 국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8]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다. 이들은 '다국적군'으로 불리며 사령관은 슈워츠코프 중부사령관이 맡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드문 규모의 '다굴전'이기도 한데 이걸 보면 납득이 가는데, 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미국은 이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베트남전의 악몽도 있었으며, 10월부터 4월까지 기간에 맞춰 전쟁을 끝내야 더운 기후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맞춰 철저한 작전 계획인 헤일 메리 기동과 정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섬멸 및 쿠웨이트의 해방이 목표로 세워졌으며, 속전속결을 의도하였다. 파월 의장이 유럽 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 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전사자들을 담기 위해 '''만 단위의 시체 주머니를 준비했고''', 전문가들 역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 명'''에 달했으므로 주머니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 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불필요한 작업이 되었다.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22만 발가량으로 어림잡고 미친 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 발 수준이었다. 아마 미군 역사상 전쟁 규모 대비 전쟁 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수십만의 미군의 대규모 해외 파병[9]을 하게 되어 병참 소요가 천문학적으로 엄청났는데 미 육군 제22지원사령부 사령관 겸 중부사령부 군수참모부장이던 윌리엄 파고니스 소장이 초기에 현지 배치되어 총지휘를 했고, 파고니스 장군의 노력으로 미군은 병참상의 혼란 없이 전쟁을 잘 치렀다. 파고니스 장군은 공로를 인정받아 사우디 현지에서 중장으로 조기 진급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쓰였던 생화학무기가 위협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엔진의 열로 화학 무기를 제독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것은 후세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미국을 소모전으로 몰아넣어 일정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이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80년대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각국이 준비했던 전쟁의 양상인 소모전식 전쟁을 생각하면 심각할 정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재미있게도 이라크군과 거의 완전히 동일한 군사장비를 운용하며 주요 교리 또한 이라크군과 비슷한 시리아군이 사단급 병력을 파견해 걸프전에 다국적군 편으로 참전해 이라크군을 견제하는 작전에 동참한 바 있다. 거기다가 양국의 정치 수반도 둘 다 바트당이란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예전부터 시리아-이라크 통일 문제에 대해서 시리아의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라크가 강한 국력으로 시리아를 병합할 가능성을 우려해 거절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 때 부터 시리아는 이란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고 사담과 하페즈 간의 노선 갈등도 있었으니 이 때다 하고 이라크를 친 것이다. 또한 시리아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원했고 미국에게 점수 따기 위해 다국적군 편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이에 화답해 전후 빌 클린턴하페즈 알아사드의 회담으로 양국간 수교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10]

4.3. 절정: 사막의 폭풍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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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 부터 '''제18공수군단, 제7군단, 북부합동군(아랍), 제1해병원정군, 동부합동군(아랍)''' 순이다.
세부적으로는 보자면 좌로부터 배치순으로
제18공수군단 - 프랑스 제6경기갑사단(미82공수사단 2여단배속), 82공수사단, 101공중강습사단, 24보병사단, 3기갑기병연대
제7군단 - 2기갑기병연대, 1보병사단, 1기병사단[11]
1기갑사단, 3기갑사단, 영1기갑사단[12]
북부합동군 - 이집트군(3기보사단, 4기갑사단, 레인저연대), 사아드군(사우디4기갑여단, 쿠웨이트15보병여단)&무탸안나하군(사우디 20기보여단, 쿠웨이트35기보여단)
시리아군(9기갑사단, 특수전연대)
제1해병원정군 - 2기갑사단1여단(타이거여단), 해병2사단, 해병1사단
동부합동군 - 아브 바클군(사우디2국경경비여단), 오스만군(사우디8기보여단, 알 파타하여단, 오만 자동차화보병대대, 바레인보병중대), 오마르전투단(사우디10기보여단, UAE자동차화보병연대), 타리크 전투단(사우디해병대대, 세네갈보병대대, 모로코6기보연대), 카타르기보대대, 동벵갈1보병대대
사진 최하단의 마크는 미 그린베레 제5특전단으로 전반적인 특수작전을 담당 하였다. 참고로 미군의 경우 보병사단은 기계화보병사단을 뜻한다.
위의 부대 중에서 18공수군단, 82공수사단, 101공중강습사단, 그린베레 제5특전단은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주역이며, 101공중강습사단, 24보병사단(보병3사단으로 명칭 변경), 영1기갑사단, 해병1사단, 82공수사단2여단, 2/3기갑기병연대는 참전하는데, 이들 부대에 제4보병사단이 추가된 5개 사단이 이라크전쟁의 주역이다. 걸프전 참전부대 중 이라크전에 불참한 제1기갑사단, 1기병사단, 해병2사단은 이라크 안정화 작전에 참전하며 유일하게 제2기갑사단만은 걸프전 직후 해체된다.
주공은 영국 제1기갑사단, 사령부 예비인 제1기병사단까지 배속받아 총 5개 기갑/기계화 사단을 거느린 미 7군단이었으며, 기동력이 강한 제18공수군단이 수차례의 강습 작전으로 치고 들어가 좌측방을 엄호했다. 미 육군 제1기갑사단 2여단전투단을 배속받은 해병대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방면으로 침공할 것처럼 기만 목적의 조공 작전을 수행하여 이라크군을 끌어들인다.
이라크가 합병 철회와 철군을 모두 거부하자 마침내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했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작전명이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변경되었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게 누구냐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으로 따지자면 B-52ALCM이지만, 가장 먼저 이라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외곽지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돌아다닌 AH-64 아파치 헬리콥터들이다.[13] 그리고 가장 먼저 국경을 넘은 유인기는 F-117. 보통은 Fail-Safe Line을 최초로 넘은 B-52의 순항유도탄 발사 시간을 개전 시점으로 보는 편.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의 F-117이라크의 심장을 찔렀으며, 곧바로 토마호크 미사일의 대공세, B-52의 폭격, 그 외 다양한 공군기의 공격이 이라크의 중심부를 강타하였다. 39일간의 강력한 미 공군 & 다국적군 공군의 공습으로 이라크는 생화학무기 생산처로 의심받는 공장들, 군의 지휘부, 통신시설, '''대공망''', 발전소가 무력화되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과는 또 다른 훨씬 발전된 정교한 화력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 전쟁과 달리 적의 목표물을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파괴하며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사실 베트남 전쟁남베트남을 방어하는 데 중점을 둔 방어전이었으므로 미군 정규부대가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으로 진격한 적이 없다. 비공식적인 특수부대의 침투 작전과 호치민 루트에 대대적인 폭격만 있었을 뿐. 그리고 사실 시야를 가리는 정글이 주 전장이던 베트남과 탁 트인 사막지대가 주 전장인 이라크 중 어느 쪽이 더 공습을 가하기 쉬운지는 명약관화했다.
당시 이라크는 세계에서 가장 고밀도한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서방과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시절 프랑스의 도움으로 방공망들을 거미줄같이 체계적으로 통합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미군은 먼저 이라크의 방공지휘시설과 발전소들부터 무력화시켰고 머리가 잘려진 이라크의 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은 다국적군의 방공망 제압작전에 의해 각개격파당하고 수천문의 구식 대공포들은 그저 한 발이라도 맞추자는 심정으로 허공을 향해 불을 뿜을 뿐이었다.
이라크는 방공망이 무력화당하자 공군기들을 전부 기지에서 계류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격납고에 전투기들을 숨겨두었고 이를 통해 전력들을 온전히 보존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다국적군은 정밀도와 관통력이 발달된 레이저 유도폭탄들을 투입했고 격납고 속에 숨은 이라크 전투기들은 고가치 지상 표적으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100대가 넘는 이라크 전투기들을 이란으로 도피시키기로 결정했고 많은 이라크 전투기들이 한때 전면전을 치렀던 이란으로 도망가게 되었다.[14]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사우디아라비아[15], 이스라엘 등을 보복 공격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는 이미 다국적군이 배치되어 카프지 전투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막았고, 스커드 미사일은 상당 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요격되거나 특수부대&항공전력에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유전들에 불을 질렀고, 걸프전 내내 이러한 풍경이 목격되었으며 이는 걸프전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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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쿠웨이트의 유전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공중 폭격이 주가 된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 4단계로 넘어가자 다국적군은 2월 24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30만의 지상 병력과 장비를 수백 km 기동시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하게 했고, 뒤가 막혀 도망치던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하였다. 이 데저트 세이버 작전(Operation Desert Saber)의 핵심인 우회기동은 헤일 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로 이름 붙여졌는데 고대로부터 이어진 불후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전에서 작전적인 차원으로 적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름의 유래가 된 미식축구의 헤일 메리 패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전 역시 군단을 넘어 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수백km 기동시키는 대규모 작전인지라, 이라크군과 직접 맞붙는 것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 준비 및 기동 중에 사고로 잃은 병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적국의 내로 크게 침투하여 우회하는 기동 특성상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특히 쿠웨이트 북쪽으로 포위한 부대의 경우 서남쪽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기동거리도 엄청났지만 측면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비록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전쟁 피해 복구에 열중해야 하는 관계로 미국과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지만 엄연히 적성 국가에 속하는 이란을 후방에 둔 형세가 된다. 이란 입장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는지라 상황에 따라 개입할지도 모르는 불안 요소였다. 헤일 메리 플레이란 이름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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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미군 제3기갑사단.'''
헤일 메리 기동작전 막판에 미군 제1기갑사단과 제3기갑사단은 바스라 서쪽 50마일 근처에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함무라비 전차사단과 조우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800대, 이라크군 300대의 전차가 격돌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소련군이 격돌한 쿠르스크의 프로호로프카 대 전차전 이래 최대 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양군의 선봉이 접촉하여 벌어진 '73 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에서 단 9대의 전차만으로 이라크 전차 80여 대를 무찌르는 눈부신 전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기갑기병중대장이 바로 허버트 맥매스터 육군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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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64헬파이어 미사일에 피격된 함무라비 사단 소속 T-72. 1991년 3월 2일
당시 미군의 기갑사단은 주로 M1A1(HA) 에이브람스를 운용했는데, 이는 열화우라늄 날탄인 M829A1과 함께 1988년부터 배치되었고 당대 최고의 화력과 방호력을 자랑하였다. T-72를 두려워하여 지휘관들이 야전에서 급히 열화우라늄 장갑과 포탄으로 보강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존의 M1A1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조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야전 개수가 아니라 제대로된 공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지휘관들의 성화 속에 상당한 속도로 빠른 시일 내에 교체가 된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이라크의 T-72는 '''1970년대에 개발된 수출용 날탄'''을 사용하여 공격력이 T-62 전차의 115mm 활강포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으며 때문에 에이브람스 전차들에게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미 공군과 육군의 A-10AH-64 등도 전장에 투입되어 함무라비 사단의 전차를 대부분 파괴했으며, 함무라비 외에도 메디나 사단, 타왈카나 사단 등 이라크 공화국수비대 소속 정예사단들을 거의 무력화했다. 반면에 이 전투에서 미군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30명뿐이었다.
이라크군은 나름 8년 간 치뤘던 이란-이라크 전쟁의 교훈으로 "대포밥 전술"로 미군의 진격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했다. "대포밥 전술"은 2선급 전력을 최일선에 내세워서 적이 2선급 전력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돌파하느라 전력과 보급이 소모되면 그때 정예 부대로 반격해 격퇴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란은 이러한 이라크군의 전술을 전혀 당해내지 못하고 만 단위의 사상자만 속출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라크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낙오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이라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대응했다. 군단급 병력들을 4백여km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로 우회할 수 있는 풍부한 보급능력은 물론이고 GPS를 통해 사막에서 전혀 낙오되지 않는 기염을 토해냈다. 무용지물이 된 이라크의 방어선들은 그대로 미군 항공기들과 포병의 먹잇감이 되어 박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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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죽음의 고속도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면서 이용한 이라크-쿠웨이트 간의 도로로, 모여든 이라크 전차들과 차량으로 인해 병목 현상이 생겨났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가해진 다국적군의 폭격은 치명적이었다[16].
사우디 북동부로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가 돈좌된 작전에 투입된 한 이라크 장교는 자기 여단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8년 동안 입은 피해보다 30분 간 미군 공습으로 입은 것이 더 크다고 말했다.[17]
그후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수만 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18]만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특히 대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대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즉 침공 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 만에 소수의 전투기와 ZU-23같은 구식 대공포,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19]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 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한 미라주 F1은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EF-111 조종사의 계략에 낚여 그대로 지면에 들이받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이라크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가량이 이 한 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생화학 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연합군의 핵보복 등을 우려해서인지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스커드 공격도 생화학 무기가 아닌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사용했다. 사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 무기를 자주 사용한 전력이 있어, 다국적군도 이라크군이 화학 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

4.4. 결말: 완벽한 승리


이라크군은 그야말로 개박살났다.
특히 이 전쟁에서 '''60만에 달하는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 체계를 초토화하고 사상자를 7만 명[20]이나 내는 동안 미군은 단 294명만 전사한다.'''[21] 이 오인사격의 숫자도 매우 적은 숫자이다. 피아식별이 극도로 어려웠던 과거 전쟁,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야간에 오인사격으로 연대 병력이 붕괴된 사례도 간간히 나온다. 통계를 보면 오히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극도로 적어진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은 적국과의 격차가 엄청났던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와 기동성으로 장비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막 지형의 특성 탓에 오인사격의 감소율보다 '''전투 사상자 자체의 감소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피아식별 기술이 훨씬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오폭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대규모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접 전투의 비중이 올라가는데, 이때 아군의 화력 지원에 오히려 아군이 당할 확률이 증가한다.
미군 외의 다국적군의 사망자 수는 세네갈군 92명[22], 영국군 47명, 사우디군 24명, 이집트군 11명, 프랑스군 9명, 아랍 에미리트군 6명, 카타르군 3명, 시리아군 2명 순이다. 이 또한 대다수가 비전투 손실이었다.
이런 적은 사망자를 낸 다국적군과 달리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약 2만으로 추정되며, 부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7만에 달한다.

'''미국공군력에 의존하고 있는데, 전쟁사를 통해 볼 때 공군이 결정적인 전력이 된 경우는 없었다.'''

사담 후세인. 이 발언 직후, 이라크와 후세인은 현대전에서 공군력의 역할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몸으로 체험했다.

엄밀히 말하면 공군은 2차대전 이래로 결정적인 전력 요소 중 하나였다.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공군력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치, 외교적인 마이너스 요인이 너무 많아 6.25 전쟁은 무승부, 베트남 전쟁은 패배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후세인은 이것을 잘못 알고 공군력이 별 것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낸 것. 물론 코소보 사태에서도 볼 수 있 듯 공군력만으로 전쟁에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걸프전 당시에는 여전히 지상군이 핵심적인 전력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지상군 전력'''도 다국적군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40일 가까이 되는 항공작전으로 인한 이라크군의 피해는 전체 피해 중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이후 단 100시간의 지상작전으로 절반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후세인의 기대와 달리, 이라크군은 가장 기초적인 보병 대 보병의 사격술에서도 다국적군에 크게 뒤지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공군력이 전쟁의 실질적인 전력으로 떠오르기 전인 1911년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가 "항공전력은 전쟁에서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항공기의 위력에 대해 깨닫고 이후에는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이미 반세기 전에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에 대한 전훈을 세뇌에 가까운 자만심에 무시된 유럽의 망상을 깨는 완전한 1차 충격이 내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걸프전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베트남전 이후로 군사적 힘을 의심받던 미국이 여전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례이기도 하다.

5. 전쟁이 끝난 후



5.1.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전쟁 후 이라크는 모든 무역을 미국에게 통제 받는 경제 봉쇄를 당하고, 1500억 달러라는 거액의 배상금까지 강제로 물게 되었다.[23] 특히 이라크가 조금이라도 미국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해 대놓고 반미를 표출하지 못했다. 왜냐면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할 때까지 반미노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라크는 그때 망가진 군대를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 년 후 다시 벌어진 전쟁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단지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더 커졌음에도 정작 병력손실은 절반 이하에 전투에서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 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과 소련, 중국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 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 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얼마 후 지원은 다시 재개된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 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 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의 가장 큰 적은 반전 여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에 반대하는 언론사에서 대놓고 반전 여론을 조성하는 감성 기사로 선동하였고, 북베트남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미국 정부를 곤란에 빠트린 적이 있었기에 걸프전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역사의 오점이라고 하지만, 그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얻은 교훈으로 미국은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이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은 셈이기 때문. 사실 미군 자신조차도 이 전쟁은 소모전이 될 거라고 예상했고, 1990년대에도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미군은 걸프전은 언제까지나 예외라고 봐서 북핵 파동 당시인 1994년에도 여전히 80년대식 소모전 개념으로 접근했다. 북한을 붕괴시키기까지 전쟁은 최소 3개월 정도 걸리고 한국은 군인 49만, 민간인 포함 100만명이 사상하고, 미군은 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카터의 방북은 그 결과였다. 완전히 바뀐 것은 이라크전 이후이다.[24]
그러나 미군 역시 입장이 개선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 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가 조금만 나오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은 이 때문에 PMC와 계약하고,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통제상명하복이니 슈워츠코프 장군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출구전략은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조지 H. W. 부시도 정치적으로는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은 승전했고, 지지율은 솟구쳤지만, 근본적인 문제. 즉 경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베트남전 후유증과 오일 쇼크, 누적된 무역 적자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던 데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강한 미국을 만든다며 군비를 늘려 재정 적자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금 인상을 강행했고 그 결과 부시의 지지도는 급락했다. 또한 새로이 등장한 로스 페로에게 표를 잠식당한데 이어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면서 12년 만에 지미 카터에 이어 재선에 실패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공화당으로 치면 제럴드 포드 이후 16년 만 말이다.

5.2. 잘못된 교훈


한편, 걸프전 당시의 빛나는 승리를 기억하고 있던 21세기 초의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어차피 이라크군도 붕괴되었고[25] 희생자도 많이 안 생길텐데 전투 병력은 조금만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2~3만에 불과한 규모의 지상전투병력만으로 이라크에 돌입했다가 베트남 전쟁 시즌 2를 찍게 된다.
이는 양자의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서 벌어진 것으로 걸프전의 경우에는 쿠웨이트의 여론이 우호적이었고 당장은 테러 조직 등이 대두되지 않은시점이었고, 치안활동등은 원래 정부인 쿠웨이트 정부에게 맡기고 미국은 사담이 헛짓거리 못하도록 병력만 주둔할 목적이었다.
문제는 걸프전을 전후로 해서 테러 활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 문서에 서술된 그가 2004년 알자지라에 나와 했었다는 TV 연설에 따르면, 걸프전 이후 미국은 친미 아랍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를 독재 정권에 대한 후원이라 생각한 빈 라덴이 미국과의 투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이는 그가 알카에다를 통해 아프리카 주재 미 대사관 폭파 사건 같은 테러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벌인 이라크전은 이라크 정부를 전복시키는 게 전쟁의 목표였고 이라크의 반발, 테러집단의 유입 등으로 치안공백이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기갑사단이나 공군으로 충분했지만 비정규군과의 전투는 공군이나 기갑사단이 아닌 병사와 게릴라들 간의 전투가 주인데 럼즈펠드는 걸프전의 전훈은 생각했어도, 베트남 전쟁의 전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사담 후세인을 처형했고 이라크를 점령하는 것엔 성공하였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두고 설계한 기본 뼈대가 달랐다. 당시 콜린 파월은 전쟁을 단시간에 종결짓고 바로 철수한다는 기본 전략 구상을 그대로 실천해 결과적으로 미군 주둔 및 기동으로 인한 후폭풍이나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반면 럼즈펠드는 미군의 첨단장비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정예된 소수의 고기동 부대로 이라크를 '''일정 기간 점유하고''' 거기서 또 이를 기반으로 중동 전체를 컨트롤해 보려는 터무니없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의 소수의 정예 기동부대를 통한 적 방어종심의 붕괴를 노리는 작전술은 전쟁의 목적에 따라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이스라엘군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다. 실제 전역의 전개에 있어서도 빠른 종전을 가능케 했고. 다만 이라크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 나아가서는 과도정부 구성까지의 안정적인 통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목표에 적합하지 않은 접근방식이었다.
게다가 군사력 운용 이전에 전략적인 견지에서 문제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라크 인구의 다수는 시아파 무슬림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투표를 실시하면, 아직 부족주의 성향이 강한 이라크에서는 당연히 시아파 공화정부가 수립되고, 이라크가 친이란 성향을 가지게 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라크 국내 수니파와의 내전 가능성을 높임과 동시에, 외교적으로는 소수 시아파가 독재하던 시리아를 왼쪽에, 그리고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을 오른쪽에 두고 지중해에서 걸프만에 이르는 시아파 벨트를 사우디(수니파의 종주국)-요르단-이스라엘-레바논 머리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당시에 전망못할 일이 전혀 아니었으며, 후세인 정권을 끝장내기로 작정했다면 당연히 그 대책도 마련해 적절하게 실시해야 했다. 그런데 훗날 알게 되었듯이 당시 미국 정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이것은 군사적인 해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정부의 미국이 한 것은, "우리가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고 경제지원을 해주면 이라크인들이 민주정부를 구성해 한국처럼 발전할 것입니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었다.
네오콘이 과신하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미국 혼자만의 단기결전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교훈을 이라크 전쟁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보여주었다. 그 뒤로 오바마 정부는 공약대로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발을 뻬기 시작했는데, 아랍의 봄 사태가 터져버렸다. 유럽 연합으로 밀려드는 난민의 처리, 그리고 오랫동안 NATO의 앓던 이였던 리비아 무하마드 카다피의 쇠락으로 유럽 연합이 시작한 개입에 미국이 끌려들어가면서 이라크IS와 시리아 내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이 이미 섬멸전이 끝나고 오랜 점령에 의한 게릴라식 전투 때문이기에 걸프전의 성공과 비교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여전히 미군이 작전하기는 하지만 해당 국가에서 신정권을 수립한 이후로는 현지 정부군이 주축을 맡고 미군은 소수가 보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도 결국 빠르고 적은 피해로 이라크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처형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과거와 비교하면 괴멸한 수준이고 이대로 주둔비만 신경 안 쓰고 적극 개입을 한다면 탈레반 세력도 ISIS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탈레반 자체가 9.11 테러 이후엔 미국에 어그로를 끌진 않으니 IS만큼 완벽히 조질 이유도 없기도 한 것이다.

5.3. 이후의 쿠웨이트


그들은 나라를 되찾았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에 감사를 표했다. 이때 일본은 130억 달러의 전비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에 의해 자위대를 파견하지 않아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개전 직후인 90년 10월에 10억 달러를 지불하려다 미국측의 압력으로 40억 달러로 증액했다.그러다 91년 추가로 90억 달러를 지불하려고 했으나 이 사이 엔-달러 환율이 급변하여 85억 달러만 주고 버티다가, 나머지 5억 달러 추가지급하는 굴욕을 겪었다.[26] 이때문에 걸프전의 패자는 후세인이 아니라 일본이다라고 할 정도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면서 일본의 재무장우경화를 가속화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 초기에 왕궁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왕제는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장이자 IOC 위원이었는데, 전쟁 발발 얼마 후 중동국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이라크아시안 게임 회원자격 박탈과 동시에 왕제의 아들에게 부친의 자리를 계승시켰다. 이라크는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인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이 되어서야 참가가 가능해졌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내에서는 전쟁 전 쿠웨이트의 국정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전쟁 중에는 국내에 잔류한 인사들에게 암살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는 카더라일 뿐이지만.. '국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국 군대가 국토를 거의 장악했는데도 국내에 잔류했다.' 이 말을 곰곰히 잘 따져보면 '친 이라크 성향'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쿠웨이트 정부 입장에서는 나라까지 뺏길 뻔했으니 제거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리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때까지 이라크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었던 쿠웨이트[27]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2017년 카타르 단교 사태에서 쿠웨이트가 사우디와 대립하고 있는 카타르의 편을 드는 근본 요인 중 하나가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에게 모국이 점령, 병합당한 트라우마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사실상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게 점령당한 쿠웨이트나 현재 진행형으로 사우디에게 외교 보복을 당하고 있는 카타르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이웃 영토 대국들에게 핍박 받는 소국의 처지라는 점에서는 다르지만은 않았던지라,[28] 그러나 쿠웨이트의 앙숙이었던 이라크도 이 사태 당시 쿠웨이트와 같이 사우디의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던 카타르를 지지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국제정세가 영원한 동맹국도, 영원한 적국도 없이 이합집산의 원리로 움직이는 세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5.4.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미국의 악연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쪽은 걸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여러 문제로 골머리만 잔뜩 앓고 있는 중. 하지만 결과적으론 빠른 시기에 후세인을 처형했다. 문제는 후세인 정권 말고는 제대로 된 야당도 없었던 이라크 신정부는 부패와 민심에서 멀어져 이미 후세인 처형하고 점령을 끝낸 미국 입장에선 소규모 군대로는 점령지를 계속 관리하는 것이 힘든 일이다. 또한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시리아 등지의 IS가 이라크에 건너오기도 하였다.

6. 전쟁사적 의의


현대전의 대표적인 예시로,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 아파치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으로,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미군이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에 부착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과정까지 선보였을 정도였다. 특히 공군을 비롯한 공중전력이 현대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력요소인가를 명확히 보여주기도 했다. 개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라크 군사 핵심시설 박살낸 것도 결국 항공기등의 공중 전력이었다.
때문에 군사학계에서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대중에게도 2차대전의 유럽 구릉지대, 월남전정글 이후 현대전의 새로운 무대인 '''사막에서 싸우는 전쟁'''의 이미지를 만든 첫번째 전쟁이다. 이후 20년 동안 모가디슈 전투[29], 9.11 테러로 인한 미국-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이 줄줄이 터진 덕분에 '이슬람 문화권'은 한동안 가상의 배경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30]
정리해서, 걸프전은 현대전의 대표격이자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전쟁이면서 '''전통적 의미의 전쟁으로서는 마지막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명확한 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 수십만의 대군이 맞붙는 야전(회전)과 기동 작전(헤일 메리 기동), 그리고 그에 걸맞는 기갑부대끼리의 대규모 전차전(양측 도합 7,000여대의 전차가 투입)이 실현된 마지막 전장이다. 걸프전 이후의 전쟁들은 테러와의 전쟁 등에서 볼 수 있듯, 명확한 전선을 규정하기 어렵고, 무장이나 세력 균형 등에서 비대칭적이며, 전쟁의 개시와 종료가 불명확하고, 대규모 지상군간의 회전이나 전차전은 성립하지 않는 전쟁들이다.
언론의 역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쟁 전 과정이 생생하게 전세계에 보도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야간에 바그다드 상공에 대공포탄이 빗발치는 모습이나, 카메라가 달린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이 날아가 목표물을 정확히 제거하는 장면 등이 방송되었다. 사실 매스미디어가 전쟁을 중계하고 그에 관한 여론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걸프전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베트남 전쟁부터 구정 공세 등의 현장이 방송되었고, 민주국가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도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미군 몇 명만 잡아다가 TV 앞에서 무릎을 꿇리거나 시체를 끌고 돌아다니거나 하면 반전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31]그러나 걸프전은 다국적군 입장에서는 그러한 희생이 드물었고, 새 하이테크 병기들이 대량으로 등장해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목표물을 파괴하였으며 더 생생한 영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마치 오락거리처럼 흥미를 불러일으킨 측면이 크다. 구정공세의 뉴스를 본 사람들은 당혹스러웠겠지만, 걸프전의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호기심과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상황이 다르며, 대중이 두 전쟁에 대해 기억하는 감정 자체가 크게 다르다.
베트남 전의 교훈에 따라 전쟁 당시 다국적군은 종군기자단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실시했으며 민간인들에게 작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사막의 폭풍). 이는 이라크도 마찬가지였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라크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언론 중 하나가 CNN이었다는 사실. 실제로 당시 다국적군 병사 및 지휘관, 특히 미군은 CNN을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바그다드 시내에서 CNN의 기사를 송출하던 통신사를 F-117이 날려버릴 때 해당 부대원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소련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소련 또는 그것의 중국의 파생형이었기 때문. 특히 T-72가 이번 전쟁에서 에이브람스를 만나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체제가 무너지고 있어 별 다른 대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반론을 해보자면 당시 이라크에 있던 T-72가 많은 숫자는 아니였고,심지어 다운그레이드된 전차에(T-72M) 미군 전차병들이 T-55, 69식 전차등을 T-72라 보고한 사례가 많았기에 잘 판단하고 믿는 것이 좋다.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의 교시를 받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이기는 전략을 생각하던 중국은 베트남과의 중국-베트남 전쟁 이후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쟁이 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과학 병기에 밀려서 정규전에서는 100% 진다며[32] 군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경제난에 무너지는 소련군을 붙잡고 간신히 부활한 러시아군도 양보다는 질적인 성장으로 방향을 바꾼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에게 열세라서 러시아군과 중국군은 군사 협력을 하며 미군을 견제하는 중이다.
걸프전에 병력까지 파견하던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9년,냉전 종식으로 인해 미국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국방비 감축 기조로 인한 위기감을 안그래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걸프전에서 보였던 전황을 보고 처음으로 국방개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달 간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나쁜 해상 수송 부대가 주요 군사 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 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정일은 허세 겸 내부 자신감 고양을 위해 "당초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한 미군을 강하게 타격하고 가스관과 송유관을 폭파하는 등 대담한 군사 작전을 폈더라면 이라크가 이겼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물론 그렇다고 전쟁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전후 처리가 그만큼 골치 아파졌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이는 당시 사우디군이 미군한테 신속기동에 따른 효율성을 보여준 사례를 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일방적 주장으로 오히려 사우디의 중동 패권이 더 강화되었을 기회라 미국이 전후 골치 아팠을 것으로 생각 해 봐야 할 것이다.

7. 기타


이라크는 종종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극히 안 좋을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미국의 브래들리 장갑차가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이라크 T-72 전차를 뒤늦게 보고는 기관포로 쏴서 잡은 일이 있다. 이후 2대의 브래들리가 TOW로 4대를 더 잡아서 총 5대를 잡았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 25mm 기관포로 T-72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차 포탑 위의 얇은 장갑을 기관포로 때릴 수 있는 아주 운 좋은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전쟁 초반에 이라크군은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실상은 속이려고 만든 가짜 기사였고, 예상 상륙지점에 미국이 네이비 씰 팀1 대원들을 약 12명 정도 파견해 해변가에 C4를 무더기로 설치한 다음 터트려서 진짜 다국적군이 상륙해서 교전하는 것처럼 속였다. 근데 이라크는 또 여기에 속아서 2개의 사단을 그 해변으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그 후는 이라크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미합중국 해병대 2개의 사단이 상륙작전 대신 이라크의 지뢰지대를 신속하게 돌파하여 육상으로 전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은 백만 대군과 수천 대의 탱크를 자랑하던 이라크 군대가 100시간 만에 괴멸당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서 미국과의 싸움을 대비해 레이더 탐지기를 교란시키겠답시고 전국에 가짜 포대, 전투기, 전차, 방사포를 배치하고 쓰지도 않는 갱도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또한 걸프전은 북한이 재래식 전력을 포기하고 핵무기 등의 비대칭 전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 되기도 했다.
소녀시대써니가 '''3살 때''' 이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한 것은 물론,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한다. 멤버들이 귀를 막아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쟁 와중에 끔찍한 환경 오염이 발생했다. 이라크군은 다국적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쿠웨이트 점령지 및 이라크 국내의 유전지대에 방화하고 페르시아 만에 대량의 원유를 방류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만의 생태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 유출된 원유의 양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1,000만 배럴 이상으로 추정한다.

닌텐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인 초대 게임보이가 이라크에서 발견됐는데, 폭격을 맞아 플라스틱 외장이 불에 타서 녹아내려 일그러진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작동됐다'''고 한다.
미 해군 구축함모함 아카디아(AD-42)는 걸프전에 참전한 동안 360명의 여성 승무원 중 36명이 임신해 지상으로 재배치되었다. 이 일로 아카디아는 "사랑의 유람선"이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현재 이라크의 배상이 진행 중이며, 이라크에 부과한 전체 배상금 524억 달러(약 61조 8천억원) 가운데 종전 이후 28년간 이라크가 지급한 배상금은 93%인 487억 달러(약 57조4천억 원)이다.#
미 해병대의 LAV-25는 카프지 전투 당시 LAV-AT와의 협동 사격이 있었는데 T-62에 LAV-25가 고폭탄을 갈기면 고폭탄이 터지는걸 보고 LAV-AT가 거기다 쏘는 방식으로 이라크군의 전차대대를 막았다 한다.[33]
걸프전 개전시 미군의 최초 공격은 AH-64에 탑승한 데이브 존스 준위의 헬파이어 미사일 발사였는데, 이 때 전 부대의 무전망에 연결된 것을 모르고 "이건 네놈 몫이다 사담...!"이라는 중2병 넘치는 대사를 남겼다가 걸프전 관련된 거의 모든 책에 적히는 엄청난 흑역사를 만들었다...
M1 에이브람스가 빛을 발했던 전쟁중 하나이다. 당시 M1 에이브람스전차가 이라크군의 T-72 전차와 붙은 적이 있었다. 그때 M1 에이브람스열화우라늄탄 1발로 T-72 전차 3대를 박멸시킨 이야기가 있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하늘의 별만 보다가 구덩이에 빠지는 이야기' 편에 따르면, 프랑스군 개선 당시 프랑스 정부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이래 47년만의 승리자로서 전사자 2명[34]에 전투기 2대 및 탱크 1대 손실이라며 자화자찬했으나, 종전선언 얼마 뒤 모리스 슈미트 원수가 "우리 프랑스군은 핵무기 편중 탓에 실제 전력은 쓰레기였다"고 보고해 충격을 줬다. 실제 파병 당시 투입된 AMX-30 전차는 1967년식에 노후 상태였고, 전투기들은 야간이나 악천후에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전체 다국적군의 2.5%인 52대 중 1%만 제 몫을 했다.
파병 역시 난항을 겪었다. 육군 288,000명 중 12,000명을 차출해야 하는데 당시 육군 60%, 해군 26%, 공군 37%를 각각 차지하는 의무병들은 유럽 외 분쟁에 참여 못하도록 법적으로 명시됐기 때문이다. 일부 군인들과 언론 사이에선 '군 현대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핵에만 목을 맸는데, 냉전 종식의 문턱에 선 1991년 들어서 쓸모없는 무기가 되었다. 오히려 이는 프랑스의 '군사 강국' 타이틀에 먹칠을 한 것이며 미국, 영국 등 핵 보유국도 비슷한 실정이다.

8. 세기말 아마게돈?


걸프 전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걸프 전쟁이 그저 빨리 끝나버린 전쟁 중 하나로만 치부되지만, 정작 걸프 전쟁이 막 벌어졌을 무렵, 한국 사회에는 적지 않은 두려움과 불안이 휩쓸었다. 1990년대가 시작되자 벌어진 전쟁인데다가, 가뜩이나 90년대는 세기말의 분위기 때문에 머지않아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공포심이 한국 사회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35]
또한 걸프 전쟁이 막 벌어졌을 무렵에는 아직 소련이 존속하고 있던 터라 한국 사회에서는 "소련이 결코 미국의 걸프 전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련이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반드시 미국에 맞서려 들 것이다. 그러면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는 불길한 예측이 꽤나 강했다. 한 예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인 국민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던 김성일 장로[36]는 그의 칼럼을 모은 책인 <비느하스여, 일어서라>에서 이렇게 예측했다.

"소련은 중동에서의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리비아 이란 등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리비아와 이란은 그들과 손을 잡는 조건으로 이스라엘 침공을 제안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에스겔 38장에 나오는 종말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이란 리비아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중동의 모든 산유국들은 걸프전쟁 이후 미국편이 되어 있다. 결국 이 산유국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소련은 이들 세나라와 함께 아랍 국가들의 공적으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치는 수밖에 없다. 이미 이 전쟁의 참패가 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소련은 이 자살적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느하스여 일어서라/ 김성일 지음/ 신앙계/ 260~281쪽#

그러나 걸프 전쟁 당시 소련은 국가 사회 전반이 만신창이 상태여서 도저히 걸프 전쟁에 끼어들어 미국과 싸워볼 처지가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1991년 막바지에 그만 15개의 나라들로 분열되어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중동 나라들이 소련과 연합군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든가 하는 일도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걸프 전쟁이 불러온 세기말의 불안감은 걸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한국 사회에 계속 남았고, 그러한 공포심이 불러온 집단 패닉 현상이 바로 1992년의 이른바 휴거 소동이었다.

9. 대중문화 속에서


당시 참전한 미군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 〈염려의 목소리〉(Voices that care)도 눈길을 끌었다.
에릭 B & 라킴이 걸프 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Casualties of war 라는 노래가 있다.
이 걸프 전을 배경으로 여러 게임이 나왔는데, 그 중 舊 두용실업에서 제작한 『걸프 스톰』이라는 게임은 본래 걸프 전과는 상관없이 제작을 시작한 게임이었다가 제작 중 걸프 전이 발발하자 게임 배경이 걸프 전으로 바뀌었다.
1999년 개봉된 조지 클루니 주연 영화 <쓰리 킹즈>는, 걸프전 종전 직후 "사담 후세인의 금괴가 숨겨진 벙커가 쿠웨이트 내에 있다"는 정보를 따라 찾아 미군을 탈영해 떠난 세 병사의 모험담을 다뤘다. 이 영화는 흑역사라고 간주되는 이라크 전쟁 이전에 제작된 영화임에도 일체 미군에 대한 미화는 없다. (당시 걸프 전쟁은 침략자를 격퇴한 정의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었 ) 이라크군이 포로로 잡힌 미군을 고문하면서 "이거 너희에게 배운 기술이야"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장면에서 필요할 때는 사담을 도왔던 미국의 대외정책을 조롱하고 있다.
[image]
2002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 <바그다드에서의 생중계>(원제: Live From Baghdad)가 개전 첫날의 CNN 실황중계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배트맨>으로 유명한 마이클 키튼, 당시에는 국내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헬레나 본햄 카터가 남녀 주연으로 출연. 현재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영어가 된다는 전제하에서.Live From Baghdad 2002
우다이 후세인의 악명을 다룬 영화, <데블스 더블>과 1980년대~2003년까지의 사담 후세인 일가의 전성기와 몰락과정을 다룬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도 중요 사건으로 당연히 등장한다.
갤러리 페이크의 여주인공 사라는 Q국 출신 왕족으로 전쟁을 겪었는데 이 전쟁이 배경소재로 사용된 듯하다.
아기공룡 둘리 8권(애장판 4권)에서도 걸프전이 나왔다. 보물섬 1991년 2월호와 3월호에 실린 에피소드로, 전쟁 때문에 석유를 사러 갔다가 새치기해 퇴짜맞은 고길동은 자원 걱정에 긴축경제를 외치며 밥 줄이고 방 불 다 끄는등 걱정이 태산같지만 둘리 일당은 전쟁무기들이 고가라는 것에 혹해 중동으로 고철주우러 갔다가 고생을 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국가간 전쟁에 휘말려 싸우기 싫음에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간 병사들이나 가족을 잃은 소녀 등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가족을 잃은 소녀가 하필 죽은 이라크 병사 마담의 여동생이었다. 목걸이는 둘리 일행이 챙겼다가 두고 간 걸 소녀가 주운 것.
중국 드라마 온주일가인 제14화에서 대학 교수가 동료 교수의 말을 듣고 텔레비전으로 걸프 전쟁 소식을 접하는 내용이 등장하였다.(20분 50초부터 1분 동안). 16화에서는 주아우가 황지웅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이라크까지 찾아갔다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상황을 겪고 쿠웨이트 진지에서 황지웅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용이 등장하였다.
영화 자헤드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메탈기어 시리즈에 등장하는 솔리드 스네이크리퀴드 스네이크가 걸프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솔리드는 정식 그린 베레 대원으로써, 리퀴드는 SAS에 가담해 스커드 미사일 트럭 파괴공작 등 블랙옵스에 참여했다.[37] 메탈기어 솔리드에서는 걸프전 증후군이 사실은 참전 병사들에게 암암리에 행해진 유전자 치료(사실상 인체실험)를 하고 난 후유증을 고엽제 살포등의 커버 스토리로 은폐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 설명때 걸프전의 실제 영상도 흘러나온다.
피아니스트 진보라의 작품 중 사막의 폭풍은 걸프 전쟁이 모티브다.

10. 출처


  • 이원복 교수의 현대문명진단 2권 - 이원복 글/그림. 조선일보사 출판국. 1993. p136~137
[1] 다만 한국의 지리교과서에서는 이 지역을 페르시아 만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아라비아 만이나 걸프 만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2] 우선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쿠웨이트는 이라크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 그나마 아사드 일가는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일가족들은 여전히 이라크 내에서도 재기는 커녕 배척당하는 처지이다. 다만 뒤로 든든한 빽 하나 없던 이라크의 후세인과 다르게 시리아의 아사드는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의 지지를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4] 쿠웨이트 인구의 과반수가 외국인이다 보니 전쟁이 벌어지자 전부 자국으로 피난을 갔고 자국민으로 열심히 끌어모았던 숫자가 고작 3만에 불과했던 것이다.[5]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의 멸망은 미국 입장에서 중동의 지지 세력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때의 이라크는 철저한 반미 친소련 국가였다.[6] 걸프전은 공화당 대통령이 주도한 20세기의 유일한 전면전이기도 했다.[7] 중동 지역을 담당하는 미군의 통합군 사령부.[8] 특히 전 세계의 친미 국가들이 대부분 참여했다.[9] 그나마도 베트남에선 미군이 단계적으로 병력을 증가해서 54만 명까지 3년이 넘게 걸렸고 시간적 여유(?)로 인해 병참 부담을 약간 덜었지만 걸프전의 미군은 6개월 만에 70만 명이 배치되었다.[10] 이후에도 시리아는 알 카에다 관련 정보들을 미국에게 제공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양국의 입장차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북한의 핵개발 협조 문제로 미국이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에 지정하며 양국간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여러가지 요인으로 미국이 시리아와 단교해 완전히 무산되었다.[11] 다국적군 사령부 직속. 7군단과 북부합동군의 지경선인 알바딘 계곡을 담당. 3일째 7군단 배속[12] 1/3기갑사단은 2기갑기병연대를 후속, 영1기갑사단은 1보병사단을 후속한다.[13] H아워는 1월 17일 오전 3시였으며 아파치의 레이더 기지 기습은 그보다 약 20분 전이었다.[14] 그리고 보기좋게 해당 이라크 전투기들은 대부분 이란 공군 소속으로 전환되었다.[15] 사우디는 이란-이라크 전쟁 때 전비 감당을 못해서 지원금을 끊어서 이라크와의 사이가 틀어졌었다.[16] 참고로 이 잔해들은 적어도 2005년까지는 대부분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인 대강 치워졌지만 아직도 현장 주변에선 간간이 불탄 자동차의 부품이나 불타다 만 시체조각이 나오기도 한다고.[17] 《Made in war》, 맥스 부트, 플래닛미디어 p.672.[18] 콜린 파월 장관의 제안. 100시간은 정치적으로 써먹기에 적절한 상징적 시간(딱 100이니까)이었고 이를 부시 정권이 받아들여서 작전 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19] 비슷한 이유로 북한군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 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20] 전사자 약 2만명[21] '''사고사''' 145명. 전투 희생은 149명(35명 아군 오인사격 희생자 포함.)[22] 뜬금없이 미국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유는 사우디에 주둔하던 세네갈군 병사들이 잠시 메카에 성지순례를 갔다 오던 길에 비행기가 기상악화로 추락했기 때문. 즉 전원 사고사이다.[23] 당연히 이 배상금 지불한다고 국민에게 돈을 뜯어내다 보니 이라크 국민의 삶이 어려워진데다 이라크 내에서 후세인에 대한 증오가 커졌다.[24] 사실 2010년대인 현재도 미군이라고 해서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전력차를 가진 국가에 한해 그렇다는 것이지, 가능성은 없겠지만 러시아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 같은 강대국과의 전면전에서는 소모전의 교리를 따르도록 되어 있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25]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과거 걸프전 이전의 잘 나가던 때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이었다.[26] 영화 쿠히오 대령에서 미국측에서 일본에 전쟁부담금을 요구하는데,평화헌법때문에 파병을 못하니 대신 돈이나 많이 내라며 90억 달러(2차분)에 5억 달러의 환율변동분 까지 받아내는 외교협상 장면이 나온다.[27] 이들은 비록 국토는 완전히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침공당한 원한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겨우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고. 거기에다 왕족이 전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학살되었으니...[28] 본래 쿠웨이트는 카타르 단교 사태 초반기에 사우디와 카타르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중재국으로 나선 협상이 카타르와 사우디간 입장 차이로 실패하면서 카타르를 지원했다.[29] 이쪽은 이후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서 이후 제작되는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30] 실재하는 중동 지역이 아니더라도 가상의 중동 국가라거나 분위기나 환경 면에서 어떻게든 중동 느낌이 나게 해놓고 그 곳에서 뭔가 사건이 발생하는 허구의 작품들이 굉장히 많다. 사실 이러한 이미지에는 걸프전에 앞서 70년대 말부터 10년간 소련 아프간 전쟁이 있었으나 주체가 소련이었던 탓에 대중적으로는 이미지가 약하다.[31] 이는 칸트영구평화론에서 민주주의의 목적으로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렇게 모든 나라가 민주 국가가 되면 모든 나라가 이런 식으로 전쟁을 꺼려 전쟁이란 게 세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주장했고, 그런 이유에서 민주정을 지지하였다.[32] 다만 이 시기부터 중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성장. 군사력 투자가 이전보다 수월해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중소분쟁과 중월전쟁을 통해 군 현대화의 필요성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33] 출처 - 걸프전 전차전사 카와츠 유키하데 저[34] 이들은 지뢰를 밟아 폭사했다.[35] 당시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걸프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 곧 세상을 끝장낼 대전쟁인 아마게돈이 일어난다."라는 공포스러운 여론이 지배적이었다.[36]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기독교 관련 소설들을 여럿 발표했는데, 성서무오설에다가 1990년대에 계속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종말론까지 진지하게 주장했던 이력이 있어서 그의 주장들을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하다(...)[37] 리퀴드는 태생 및 성장과정 특성상 폭스하운드 이전까지 정규군에 들어간 적이 전혀 없다. 오로지 용병 및 스파이 활동이 전부이고 그마저도 모든 전적이 말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