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영어: Falklands War, Falklands Conflict, Falklands Crisis, South Atlantic War
스페인어: La Guerra de las Malvinas, Conflicto del Atlántico Sur
1. 개요
[1]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발생한 지 3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미사일 시대로 대표되는 현대 해전, 공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2. 배경
아르헨티나에 1976년 쿠데타로 세워진 군사정권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했다.[2] 하지만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은 극심해졌다. 이에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외채는 더더욱 불어났고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심각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걸로도 불만을 잠재울 수 없어 군부에서 내부적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 단결을 꾀하자는 안이 대두되었고, 그 대상은 인근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이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소수[3] 여서 한꺼번에 기습하면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인 오데이셔스급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진 점 등이 개전 이유로서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전 개시 전 포클랜도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도 없었고,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4]
3. 전개
3.1. 전운이 감돌다
1982년 3월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들이 단순한 고철 수집을 명분으로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들이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타고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채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했다.[5]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 상륙으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항의하고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6]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고철상들에게 항의하러 간 기지 대원들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받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왔는데 섬이라는 특성상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감히 우리 땅에 깃발을 꽂아?'라고 빡친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건물벽에다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수십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한 것이 최초의 충돌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 중장 호르헤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시점을 8~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했다. 8~9월로 준비하던 이유는 아르헨티나는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는데 비해 영국은 퇴역시킬 예정이던 군함들이 실제로 폐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이라서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 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에서 겨울 바람으로 거칠어진 남대서양을 넘어오는 데 애로사항이 있어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전략적인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영어 주의)
3.2. 아르헨티나의 선제 공격, 그리고 침공
4월 2일에 아르헨티나 해병대 및 특수부대 소속인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영국 해병대 코만도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차이가 워낙 커서 이내 항복했다.[7] 이때 포로로 잡힌 해병들의 매우 굴욕적인 사진이[8] 영국인들의 여론에 불을 질렀다. 포클랜드의 총독 렉스 헌트 경은 예복을 차려입고 영국군에게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는 영국 땅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대는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했다. 헌트 경은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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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무력으로 강경하게 실효점유를 시작하면 영국이 그 살림살이에 엄청난 재정적 소모를 감수하고 지구 반대편의 포클랜드를 수복하러 오기보다는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의 생각도 비슷해서 영국이 외교적인 항의 정도만 하고 말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3.3. 영국의 반응
그러나 철의 여인이라 불릴 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했다.''' 거기다 쇠퇴하는 영국이라도 더 이상 해외 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 여론까지 끓어오르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영국의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영토 손실까지 더해지면 국민 정서와 국가 안정성은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 뻔했다. 특히 외교적으로 지중해의 해군 요충지인 지브롤터같이 아직 많은 영국령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비슷한 무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 명백했으므로[9]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무조건 강경대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다 포클랜드 섬의 가치 또한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남극의 전진 기지인 동시에,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칠레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했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했다. 여기에 1970년대 제기된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은 덤. 독도처럼 섬 자체는 별 볼 일 없지만 상징성과 해역에서 가지는 위치가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영국 측에서 협상을 청하여 자신에게 설설 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마가렛 대처의 선택지는 '''캐삭빵'''이었다. 대처는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포클랜드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3.4. 제국의 역습
대처 총리는 즉시 아르헨티나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의회는 여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했고, 4월 5일 해군작전사령관(Commander-in-Chief Fleet) 존 필드하우스(John Fieldhouse) 대장을 "코퍼레이트 작전(Operation Corporate)"으로 명명된 포클랜드 탈환작전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해군 기동부대인 Task Force 317.8의 지휘관 소장 존 포스터 "샌디" 우드워드(John Forster "Sandy" Woodward) 제독과 지상군 지휘관인 해병 소장 제레미 무어(Jeremy Moore) 장군에게 출동을 명했다.
사실 다른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영국 군에서도 원정 거리 등을 이유로 전쟁에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쇠락할대로 쇠락한 나머지 운용 가능 전투기가 없고 공군 차원에서 여객수송이나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1982년 당시 미라주 III 전투기 20대, 대거 전폭기 30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60대를 주축으로 200여대 가까운 전력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공군은 남미 최강의 공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해군 역시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전력을 갖추진 못했으나 해군항공대 소속 스카이호크 공격기 10대를 탑재하는 한 척의 영국제 항공모함[10] 과 2척의 영국제 42형 구축함, 209급 잠수함 두 척이 영국 기동부대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일 포클랜드에서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르는 엑조세 대함미사일과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5대 역시 해군 소속이었다.
반면 영국 해군이 1982년 시점에서 영국이 함대 상공에 띄울 수 있는 전투기는 경항공모함 두 척에서 발진하는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 20여대 뿐이었다. 수상함과 잠수함 전력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음에도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에서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지킬 수 있을지는 결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F-4 팬텀 II만 1개 대대에 블랙번 버캐니어 공격기, 가넷 조기경보기[11] 까지 운용하던 중형 항모 아크 로열만 있었어도 아르헨티나 공군의 위협 따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1979년 아크 로열 퇴역과 함께 함재기 대다수가 일선에서 물러나[12]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니 쓸모 없는 가정이었다. 이때 영국 정부가 느낀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대처 총리는 개전을 결정하면서 수 척의 호위함정은 물론 경항모 한 척의 손실까지도 각오했다. 이처럼 결과를 모두 아는 현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개전 당시 영국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고, 아르헨티나도 나름의 승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남반구의 4월은 이미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헨리 리치 제독(제1해군경이자 해군 대장)[13] 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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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무어 장군(왼쪽)과 샌디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일대가 요새화돼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기동함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 달 정도 소요되는 항해 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경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14] , 유럽 국가들의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 사이의 통화에서 레이건은 본건을 UN에 맡기자고 했지만 대처는 패기롭게도 "알래스카가 침공당하면 그대로 같은 말을 돌려주겠다."고 반응했다[15] 는 일화도 있다.
반면 아르헨티나 측도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었으나 거부당했다.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자신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자신들이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지지를 이끌어내려했고 미국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 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했던 터라 남미 정권은 미국과 꽤나 돈독했다.[16] '''포클랜드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
당초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고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가며 중재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불만을 돌리려는 침공으로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면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했다. 또한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로서 아르헨티나 귀속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결국 4월 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 사회, 특히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행동이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에게도 구린 구석이 있었다면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심심한 게 탈인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섬을 대뜸 무단으로 점령하니 영국이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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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선박과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RMS 퀸 엘리자베스 2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가렛 대처와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각자의 정치생명을 건 캐삭빵을 시작했다.'''
3.5. 양국의 전략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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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왕립해군의 기동함대 기함 HMS 허미즈가 포클랜드로 출격할 당시를 그린 그림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승리하면 진짜로 섬을 수복한 것이 되어 국가영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패배하더라도 언론을 통제하여 국민들을 교묘히 속여서 계속 집권할 생각이었다.
반면 영국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직접 당시 칠레의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찾아가서 영국의 상황과 이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했다. 그리고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의 항공기를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대처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을 돌며 영국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기습 침공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하고 다녔다. 그 결과 주요 국가들은 영국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고, 최소한 아르헨티나 편을 들지는 않게 되었다.
3.6. 패러켓 작전
4월 말에 접어들자 영국군이 드디어 반격을 개시한다. "패러켓 작전(Operation Paraquet)"으로 명명된 첫번째 작전의 목표는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이었다. 군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결정된 임무였다. 본격적인 작전 개시 전 SAS를 파견해 섬에 주둔한 아르헨티나군 규모를 정찰하는 계획이 입안됐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해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투나 빙하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해군 조종사들은 이 작전에 대해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 게 더 빠를걸요''' 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주변에서 죄다 말리는데도 고집을 부린 SAS 대원들은 4월 21일 기어코 빙하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 없었고, 결국 22일 임무를 포기하고 귀환을 요청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 3기의 귀환 헬리콥터 중 2기가 악천후로 눈밭에서 굴러 손실되는 사고가 터진다. 다행히 전사자는 없었으나 SAS 대원들과 승무원들을 어떻게 데려갈지가 문제였다. 내버려두면 밤새 얼어죽을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이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웨식스 대잠헬기 조종사 이언 스탠리 소령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날이 저물기 직전 간신히 눈보라를 뚫고 포투나에 착륙한 뒤, 세 대에 분승해야 할 대원들을 모두 태워 제한 중량을 1,000kg이나 초과한 채로 귀환에 성공한 것이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까딱하면 빙하에서 전부 동사할뻔한 SAS 대원들과 헬기 승무원들을 구해낸 스탠리 소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DSO)을 받는다. 이 에피소드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에어 파이터 - 헬리콥터 워, 영국 특수부대 침투작전>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한편 이 망신스런 소식을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보고한 영국 합동참모의장 테렌스 르윈(Terence Lewin) 제독은 "전쟁에서는 일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덧붙였고, 대처 총리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잘못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요"라고 시니컬하게 답하며 한편의 만담을 찍었다는 후문.
하루 뒤 SAS와 SBS는 보트를 타고 다시 사우스조지아섬에 침투했는데, 이번에는 일이 잘 풀려 아르헨티나군이 주둔중이던 리스 인근에 관측소를 설치했다. 관측된 아르헨티나 수비대도 소규모라 탈환작전에 문제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이때 영국군에 아르헨티나 해군의 구형 발라오급(GUPPY II 개수) 잠수함 산타페가 사우스조지아로 향한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뒤이어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부대인 317.9 기동전단도 사우스조지아 섬 인근에서 산타페가 발신하는 전파를 탐지했다. 낡았어도 어쨌든 상당한 위협인 잠수함이 근처에 있다는 게 명백해지자 영국 해군은 작전을 연기한 뒤 산타페의 동향을 추적하기로 결정한다.
모든 정보를 취합한 끝에 산타페가 아르헨티나군이 주둔중인 그리트비켄이나 리스 둘 중 하나로 입항할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 해군은 리스는 SAS 관측소에 맡기고 24일부터 그리트비켄을 헬기로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25일 아침, 마침내 웨식스 헬기의 레이더로 부상한 잠수함을 포착한 이언 스탠리 소령은 육안으로 산타페를 확인하자마자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밸러스트 탱크가 모두 파괴된 산타페는 잠항능력을 상실했다. 곧이어 벌떼처럼 몰려든 영국군 헬기들이 기관총탄과 대전차미사일을 날려대는 통에 침몰 위기에 몰린 산타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리트비켄 항구로 돌진해 해안에 좌초해버린다.
증원병력 수송 임무를 맡고 있던 산타페에서는 탑승 병력과 승조원 전원이 탈출했지만, 잠수함도 사라졌겠다 마음놓고 섬을 점령할 수 있게 된 영국 해병대와 특수부대가 함포사격을 등에 업고 그리트비켄으로 쫓아오자 이내 그리트비켄 수비대원들과 함께 항복하고야 만다. 항복을 접수한 317.9 전단 지휘관 브라이언 영 대령은 "사우스 조지아의 그리트비켄에 영국 국기와 해군기가 펄럭이고 있음을 여왕폐하께 아룁니다. 신이시여 여왕을 지켜주소서."라는 고전적인 전문을 본국에 보내 낭보를 알렸다. 다음날에는 리스의 아르헨티나군이 교전 없이 항복하면서 아르헨티나군의 짧았던 사우스조지아 지배는 영국군의 무혈점령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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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 프리깃 HMS 플리머스(Plymouth)의 사관실에서 함장 데이비드 펜트리스(David Pentreath) 대령과 부하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우스 조지아 섬 리스 항 주둔 아르헨티나 해군 지휘관 알프레도 아스티스(Alfredo Astiz) 정보 소령. 아스티스 소령은 전후 중령까지 진급했으나, 1995년에 군부 독재 시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해군 기관부사관학교(Escuela Superior de Mecánica de la Armada, ESMA)에서 반정부 시위대 5,000여명을 학살한 혐의로 불명예 전역하고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중 65세로 숨졌다.
3.7. 블랙 벅 작전
본격적인 전쟁은 5월 1일 시작됐다. 이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Operation Black Buck)"을 시행했다. 1단계로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로 함포사격이 대미를 장식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단계에서 대서양 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 차례나 공중 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이다.[17] 이 기록은 걸프 전쟁에서 미군 B-52가 미국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 기록이었다.[18]
구체적인 목표는 활주로를 일시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활주로 중앙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아예 폭격 코스를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잡았으며 교차점에서 21발 중 적어도 1발은 확실하게 명중하도록 계획하였다.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졌지만 1발이 명중했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지만, 대신 블랙벅 작전은 영국군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아르헨티나군의 심리를 강타했다. 벌컨 폭격기의 장거리 폭격에 놀란 아르헨티나군이 벌컨의 다음 목표는 본토의 전략목표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20대뿐인 미라주 III 전투기들을 본토 방공 임무로 전환시킨 것이다. 물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 본토를 노리지 않았고, 아르헨티나 공군 전폭기들은 전투기의 엄호 없이 영국 함대를 공습해야 하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측 자료가 충분히 반영되기 전인 1980-90년대의 시각이 블랙벅 작전으로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이 포트 스탠리 비행장 대신 본토에서 출격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 그나마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는 것이[19] 통설이었다. 그러나 5월 1일의 블랙벅 작전 이후 미라주 IIIEA 전투기들은 한 달 넘게 포클랜드 공역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벌이지 않았으며, 전투기의 상공엄호 없이 영국 기동부대 상공으로 뛰어든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은 모두 설계가 공대공 전투에 적합하지도 않고 기관포 외의 공대공 무장을 갖추지도 않은 대거와 스카이호크, 푸카라 전폭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능력자들이다. FAA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5월 1일에는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 비행단도 상당한 규모의 전폭기를 발진시켜 영국 함정을 폭격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SP-2H 넵튠이 날아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중고도[20] 에서 실시한 이 날 공격은 영국 함대의 방공망에 걸려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로 아르헨티나 공군은 저공 침투[21] 전술을 기본으로 삼는데, 이 때문에 신관 안전장치가 풀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여 불발탄이 대량발생, 명중탄 숫자에 비해 적은 피해밖에 주지 못했다. 스네이크 아이 같은 저고도 투하용 고항력 킷이 있었다면 불발탄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겠지만, 아르헨티나 공군은 스네이크 아이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스네이크 아이를 보유중이던 아르헨티나 해군항공대는 작전 가능한 스카이호크가 고작 8대로 너무 숫자가 적었고. 그래도 안 터진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보통 500~1000파운드(227~454kg) 짜리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의 속도로 날아드는 게 바로 이 불발탄들이다. 폭발만큼은 아니라도 명중했다 하면 상당한 피해를 주며 호위함 같은 경우는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날에는 아르헨티나 전폭기들을 엄호하는 미라주 IIIEA 전투기와 영국 해군 시해리어 전투기 사이의 공중전 또한 벌어졌다. 첫번째로 도착한 양측 전투기 분대 사이에서는 미라주 IIIEA 전투기가 고고도에서, 시해리어 전투기가 저고도에서 머무르며 대치하는 상황이 양측 분대가 연료 사정상 교대할 때까지 이어졌다. 두 번째 분대 간에는 보다 적극적인 교전이 이루어져 미라주 분대가 강하하며 붐앤줌 공격을 시도했다. 시해리어 분대는 급기동으로 회피했지만 이탈하는 미라주에 대해 공격위치를 잡는 데에는 실패했고, 미라주 역시 재공격을 실시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났다. 세 번째 교전에서는 승패가 분명히 갈렸는데, 마찬가지로 붐앤줌 공격 시도 후 잠시 시저스 기동을 벌이며 선회하다 포기하고 이탈하는 미라주의 후미로 시해리어가 따라붙으며 AIM-9L 미사일을 발사했고 두 발이 모두 명중했다. 그 결과 미라주 IIIEA 한 대는 그대로 해면에 추락, 한 대는 대파당해 포트 스탠리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다 영국군의 공습과 함포사격에 잔뜩 신경이 곤두선 아르헨티나군 대공포 사수들에게 적기로 오인당해 격추당한다.
5월 1일 하루 동안 아르헨티나 공군은 56소티를 동원해 영국 기동부대에 공습을 감행했으나, 지근탄 몇 발과 기관포탄을 명중시킨 것을 제외하면 전과는 미미했다. 영국 호위함들이 함포사격을 위해 해안선에 너무 접근했다가 아르헨티나 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위축되어 주간 함포사격을 꺼리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미라주 III 전투기 2대, 대거 전폭기 1대, 캔버라 폭격기 1대, 푸카라 경공격기 1대가 피격, 도합 5대를 잃었다. 본격적인 항공전 첫 날의 결과는 영국의 판정승이었다.
3.8.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5월 2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해상 교전상황이 발생하였다. 영국 해군의 처칠급 공격원잠 HMS 컨커러(Conqueror)가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Mk 8 어뢰로 격침시킨 것이다.
영국 해군의 HMS 컨커러는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의 3번함으로 1969년 진수되고 1971년 취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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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해군의 처칠급 공격원잠 컨커러(HMS Conqueror)
아르헨티나 해군의 헤네랄 벨그라노는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5번함인 USS 피닉스(CL-46)였는데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과 남미 국가간의 '상호 방어 지원 프로그램'(Mutual Defense Assistance Program)에 따라 넘겨진 군함들 중 하나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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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
컨커러는 1982년 4월 30일 포클랜드 섬 남서쪽 바다를 초계하던 중 헤네랄 벨그라노를 발견하고 조용히 따라붙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유일의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Veinticinco de Mayo)가 포클랜드 섬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영국 함대는 남북으로 협공당할 것을 우려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가 기상 문제로 공격을 하지 않고 철수했다. 경항모인 베인티싱코 데 마요는 캐터펄트 출력이 약했기 때문에 영국 기동부대를 공격하기에 충분한 연료와 무장을 탑재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이륙시키려면 일정 풍속의 바람을 받으며 전속력으로 질주해야 했으나, 공격 예정시각인 5월 2일 새벽에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스카이호크를 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헤네랄 벨그라노도 공격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함수를 돌려 영국이 선포한 완전봉쇄구역(Total Exclusion Zone)을 벗어났다. 이 시점에서 영국은 TEZ 바깥의 적함 격침을 금지하는 교전수칙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컨커러는 벨그라노를 추적하면서도 공격을 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국 기동부대 사령관 우드워드 제독은 여전히 벨그라노 전단의 존재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1년 전 훈련에서 본인이 자신의 기함이었던 카운티급 구축함 HMS 글래모건을 가지고 미 해군 항공모함 USS 코럴 시를 상대로 해냈던 것처럼 벨그라노 전단이 언제든 방향을 바꿔 기동부대의 감시망을 뚫고 항모 지근거리에서 출현,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GMT 5월 2일 0710시경 우드워드 제독은 영국 본토의 잠수함대 사령부가 직접 포클랜드 해역의 공격원잠을 통제하는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기함 허미즈에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통신위성에 업로드한다.
통신위성에 올라온 명령문을 확인한 해군 본부는 명백한 월권행위에 깜짝 놀라 즉각 전문을 삭제했지만, 우드워드 제독이 벨그라노 격침을 시급히 원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에 해군작전사령관 필드하우스 제독과 합참의장 테렌스 르윈 제독은 대처 총리에게 승낙을 얻어 GMT 1230시부로 TEZ 바깥의 아르헨티나 함정에 대한 공격을 허가한다는 변경된 교전수칙을 통신위성에 전송한다."발신 317.8 기동부대 사령관, 수신 <컨커러>, 긴급 – <벨그라노> 전단을 공격하라(From CTG 317.8, to ''Conqueror'', text priority flash – attack ''Belgrano'' group)."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에서 헤네랄 벨그라노에 대한 공격을 허가할 때를 묘사한 영상. 앞서 언급한 봉쇄구역 이탈 문제 때문에 허가 여부를 두고 고민한다.
종일 벨그라노를 추적하다 기동부대와 영국 본토 사이의 소동이 일단락된 후인 GMT 1700시에야 잠망경 심도로 부상, 변경된 교전수칙을 수신한 컨커러는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 5월 2일 오후 6시경 헤네랄 벨그라노를 향해 총 3발의 Mk 8 어뢰를 발사했고 2발이 명중하여 폭발했다. 함체 피해가 컸기 때문에 헤네랄 벨그라노는 불과 20분만에 함수가 꺾이고 대량의 해수가 들어차 침몰했다. 문제는 어뢰가 폭발하면서 함선의 전기계통이 모두 고장나는 바람에 통신으로 구조요청을 할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침몰 현장은 기상이 안 좋아 가시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태였다. 때문에 당시 헤네랄 벨그라노에는 호위 구축함 2척 ARA 이폴리토 보우차르드(Hipolito Bouchard) 및 ARA 피에드라 부에나(Piedra Buena)가[23] 붙어 있었으나 열악한 기상에 구조 신호도 받지 못한 호위 구축함들이 어이없게도 순양함이 침몰한 사실을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다. 결과적으로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했으며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전사자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춥고 거친 해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장 엑토르 본소(Héctor Bonzo) 대령을 포함한 나머지 700여명의 승조원은 다행히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해군의 디젤잠수함 ARA 산 루이스(San Luis)를 제외한 모든 아르헨티나 해군 함정들은 아르헨티나 본토에 위치한 항구로 철수했으며 이후 포클랜드 전쟁 동안 다시 해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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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커러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前 미국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피닉스(CL-46)). 1982년 5월 2일
침몰한 헤네랄 벨그라노는 진주만 공습 때도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을 종횡무진 누비며 큰 활약을 한 네임드 순양함이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맥아더 장군의 기함으로도 뛰었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종군성장 11개를 수상할 정도로 유명했음은 물론 큰 손실없이 종전을 맞이했으나, 수십년 뒤 뜻밖의 장소에서 다른 이름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크다.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 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 포클랜드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와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로 포클랜드 해역의 영국 항모기동부대를 협공하려던 시도가 취소된 후 철수하던 벨그라노가 격침당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더이상 바다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제해권과 제공권은 영국이 가져갔다.[24]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방해 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25] 아르헨티나군은 전투기들 항속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교전수칙을 변경하여 TEZ 바깥의 아르헨티나 함정을 격침시킨 영국 정부의 결정은 영국에서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5년부터 1999년까지 영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반대한 골수 반전파인 탬 디엘(Tam Dalyell) 노동당 하원의원은 영국 정부가 페루가 제시한 평화협정안을 무력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태를 확전시키고자 공격을 지시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했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83년 총선에서도 대처의 반대파는 벨그라노 격침이 총선 승리를 위해 대처가 고의로 사태를 확전시킨 증거라고 주장했다. 1983년 5월 공영방송 BBC 1의 시사 프로그램 네이션와이드(Nationwide)의 생방송에 출연한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다이애나 굴드(Diana Gould)란 평범한 시민이 이 문제를 따지고 든 게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굴드는 대처 총리에게 왜 벨그라노가 TEZ 바깥에서 서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공격하도록 명령했냐며 힐난조로 질문했고, 처음에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벨그라노가 영국 기동부대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공격을 명령했다고 대답하던 대처도 굴드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단단히 화가 나서 "우리 해군 애들을 지키기 위해서 함대에 위협이 되는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총리가 비난을 받는 나라는 영국뿐일 것 같다.(I think it could only be in Britain that a Prime Minister was accused of sinking an enemy ship that was a danger to our Navy, when my main motive was to protect the boys in our Navy.)"고 쏘아붙이고 전화통화를 끝냈다.
결과적으로 이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벨그라노 격침은 현장지휘관의 강력한 의사표명과 이에 동감한 총리의 최고 군사조언가 두 사람의 조언을 대처가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정부 역시 1994년 헤네랄 벨그라노의 격침은 적법한 전시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했고, 2003년에 벨그라노의 함장이었던 본소 대령도 "헤네랄 벨그라노는 발견하는 모든 영국 군함을 격침시킬 것"을 명령받았던 전투 항행 중이었으므로 HMS 컨커러의 공격은 정당한 교전행위였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논란은 종식되었다. 본소 대령은 1983년에 대령으로 예편했고, 2009년에 76세로 사망했다.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2020년 현재까지도 교전 상황에서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로 군함을 격침시킨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3.9.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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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
'''셰필드 쇼크'''로 알려진 5월 4일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은 해전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알렸다. 아르헨티나군 해군 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를 격침시킨 것이다.
이날 아침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출격한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헤네랄 벨그라노의 생존자를 수색하는 척 하면서 영국 함대의 위치를 레이더로 탐지했다. 만약 시해리어가 덤벼든다면 죽을 게 확실한 임무였지만 넵튠 승무원들의 기만이 먹혀들어 영국 해군은 장장 세 시간 가까운 정찰비행 내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리오 그란데 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두 기가 초계기의 유도에 따라 영국 함대의 남서쪽에서 저공으로 침투했다. 수평선 아래 숨어 표적에서 28해리 거리까지 접근한 쉬페르 에탕다르는 잠시 상승하여 레이더로 영국 함정의 위치를 파악한 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엑조세 두 발을 발사했다. 엑조세는 영국 기동부대 18~30마일 전방에 돌출돼 있던 세 척의 42형 구축함을 향해 고속으로 돌진했다. 이 중 쉬페르 에탕다르의 접근을 눈치챈 글래스고와 코벤트리는 채프를 살포하여 회피할 수 있었지만, 셰필드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견시가 미사일 접근을 확인한 직후 엑조세 한 발이 셰필드의 전투정보실에 정확히 명중했고, 화재로 주요 기능을 상실한 셰필드는 네 시간 동안 불길과 사투를 벌인 끝에 버려지고 만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우연히도 함장과 대공전장교를 포함한 주요 승조원들이 CIC(전투정보실, 그러니까 지휘소)에 없었다.
- 위성 통신 장비인 SCOT의 신호가 쉬페르 에탕다르에 탑재된 레이더와 유사한 탓에 위성 통신을 할 때마다 이를 레이더 시그널로 인식한 ESM 장비 UAA-1이 전투기 접근을 경고하는 오보가 끊이질 않았다. 5월 4일 하루에만 이런 가짜 경보가 3, 4번이나 울렸고 마침내 쉬페르 에탕다르가 실제로 접근했을 때에는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 글래스고의 경고를 통신 장치 사용에 따른 오보로 판정했다.
- 하필 엑조세 공격이 가해진 순간 셰필드는 SCOT 위성통신장비를 가동중이라 UAA-1을 끄고 있었다.
- 저공 비행하는 엑조세 2기를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이 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불발탄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0년대 영국에서 최신 분석기법을 활용한 결과 탄두가 기폭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탄두 기폭으로 셰필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된 이후 로켓 모터에 남은 연료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셰필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전투정보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셰필드의 데미지 컨트롤이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바람에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셰필드는 후에 영국으로 예인 중에 피탄된 곳이 침수되어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르헨티나는 셰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쓰지도 못하는 꼴이 나 버렸고[26] ,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이라는 식으로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해서 피탄 결과를 정확히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전쟁 전체에 걸쳐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였던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가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도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뿐이었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턱없이 적었다. 물론 영국군이 상륙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다.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에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전을 벌여보았으나 50%정도만 생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상전을 벌였으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의 스틱스나 중국의 실크웜을 능가하는 대함 공격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42형 구축함과 같은 기존의 방공함들은 스틱스처럼 수백미터 고도를 아음속으로 날아오는 함대함 미사일이나 AS-4 키친처럼 고고도를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대형 공대함 미사일에 대한 대응에 집중하여 저고도 방공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었는데, 이 약점을 초저고도로 돌진하는 엑조세가 정확히 찌른 것이다. 이 사건은 시스키밍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셰필드 쇼크' 혹은 '엑조세 쇼크'라 불리며 이후 군함 건조에서 저고도 방공 능력과 CIWS를 위시한 최후 점방어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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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페르 에탕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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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격당한 셰필드
참고로 침몰할 때 승조원들이 몬티 파이톤과 브라이언의 삶에서 나온 곡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를 불렀다고 하는데 가사의 뜻을 보면 참 묘하다.
3.10. 폭풍전야
헤네랄 벨그라노와 셰필드 격침으로 크게 한 방씩을 주고 받은 양측은 기상 상황이 악화된 5월 8일까지 휴지기를 가진 뒤, 조만간 예상되는 영국의 포클랜드 공격 과정에서 벌어질 결전에 대비해 5월 9일부터 다시 탐색전을 시작한다. 이날 트롤어선으로 위장해 영국 함대를 정찰하던 아르헨티나 해군 정보수집함 나르왈이 시해리어에 포착당해 격침당했고, 아르헨티나 공군기의 예상 침투 경로 전방을 초계하며 미사일 트랩을 전개한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27] 는 접근하는 스카이호크와 퓨마 헬기에게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 공격을 가해 퓨마 헬기에게 직격탄을 명중시켰다. 스카이호크 두 기 역시 회피 도중 해면에 충돌했다.
5월 10일 밤, 상륙작전의 사전 준비로 포클랜드 해안을 면밀히 정찰할 필요가 있었던 영국 기동부대는 21형 호위함 HMS 얼래크리티에게 동포클랜드와 서포클랜드를 가르는 포클랜드 해협을 항진하면서 기뢰가 부설돼 있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함에게 기뢰탐지소나가 있을 리 만무하니, 이는 사실 '''몸으로 확인하라'''는 수준의 위험천만한 임무였다. 지휘관 우드워드 제독이라고 누가 죽는 걸 보고 싶어서 이런 명령을 내린 건 아니고, 소해함은 없는데 상륙작전은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28] . 다행히 얼래크리티는 기뢰 대신 항공유와 차량을 실은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를 발견, 포격을 가해 가라앉혔다.
얼래크리티는 살떨리는 임무를 마치고 마중나온 자매함 HMS 애로우와 해협 출구에서 합류하여 기동부대 본대를 향해 30노트로 줄행랑을 쳤는데, 마침 이 해역에서는 아르헨티나의 209급 잠수함 산 루이스가 매복중이었다. 절호의 공격 기회를 포착한 산 루이스는 11일 오전 1시 40분과 42분 SST-4 대수상함용 중어뢰 두 발을 발사했지만 작전기간 내내 승조원들을 괴롭히던 고장 문제가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한 발은 발사 자체가 되질 않았고 다른 한 발은 발사 직후 유도 와이어가 끊어져 수동유도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어뢰는 닉시 예인기만기에 속아 호위함 대신 기만기를 날려버리는 데 그쳤다. 전속력으로 튀어오느라 소나가 먹통이던 얼래크리티와 애로우는 본대로 돌아와서야 닉시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래크리티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호러쇼가 따로 없는 날이었다.
5월 12일 새벽에는 글래스고-브릴리언트의 42/22 콤보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사이의 혈투가 벌어졌다. 저공침투하는 스카이호크 첫 제파 세 대는 근접방어 역할을 맡은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가 시울프 대공미사일로 모두 격추 혹은 추락시켰지만, 두 번째 제파의 공격에는 글래스고의 시다트가 기계고장으로 사격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 브릴리언트의 시울프도 발사에 실패해 두 함정은 스카이호크 네 대에게 그대로 폭탄을 두들겨 맞는다. 천만다행으로 명중탄은 글래스고를 관통한 불발탄 한 발뿐이라 글래스고-브릴리언트 콤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글래스고를 공격한 뒤 귀환하던 스카이호크 한 대를 대공포의 오인사격으로 추가 상실했다.
한편 아르헨티나 공군은 4월 말부터 서포클랜드 북쪽의 페블 섬에서 우편기용 잔디 활주로를 이용한 야전비행장을 개설해 소수의 푸카라 경공격기와 스카이밴 수송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페블 섬이 상륙예정지점 산카를로스 코앞이었다는 점이다. 영국 기동부대는 눈엣가시 같던 이 비행장을 당장 파괴하고 싶었지만, 민간인 주택들이 활주로와 딱 붙어 있어 공습은 위험부담이 컸다. 이에 SAS가 나서서 페블 섬 비행장을 처리하기로 한다. 11일-12일 사이 8명으로 구성된 정찰조가 침투해 주요 목표를 파악했고, 이 정보를 토대로 14일 밤-15일 새벽 SH-3 시킹 헬리콥터 두 대에 분승한 48명의 SAS 대원들이 비행장을 급습, 푸카라 경공격기 6대와 스카이밴 수송기 1대, T-34C 훈련기 4대를 모두 폭파하는 데 성공했다. 폭파 직후 대원들은 박격포와 HMS 글래모건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바로 퇴출했다. SAS의 손실은 전무했다. 4월 말 이상한 고집으로 포투나 빙하에서 망신을 샀던 SAS가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순간이었다.
5월 18일에는 어센션섬에서 출발한 상륙전단이 드디어 포클랜드 해역에서 기동부대와 합류했다. 여기에는 해리어와 헬기를 실은 항공기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가 포함돼 있었는데, 작전손실로 가용 시해리어 숫자가 17대까지 줄어들어 임무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던 항모들에게 아틀란틱 컨베이어의 합류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음날부터 산 카를로스를 포함한 포클랜드 섬의 주요 관측지점으로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투입되어 관측소를 마련했고,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마쳤다. 이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포클랜드 상륙작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3.11. 영국의 상륙전
영국 지상군 상황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만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포클랜드 제도 최대 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동쪽 끝의 항구 도시 포트 스탠리를 목표로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29] 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30] 이 투입되었다. 영국 기동부대는 엑조세를 피하기 위해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인 산 카를로스를 상륙해안으로 낙점했지만, 바로 그 자연 방벽 때문에 저공 비행하는 FAA 전투기들을 빨리 발견하지 못해 해협 안으로 진입한 전투함 일곱척 중 네 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21형 호위함 HMS 아덴트는 침몰했다. 그러나 큰 그림을 보았을 때 영국 해군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엑조세의 위협을 회피했음은 물론 해안 지형 때문에 공격 목표를 차분히 살필 시간 여유가 없던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이 상륙함 대신 호위함정에 공격을 집중한 것이다. 그 결과 상륙부대가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는 상륙돌격은 큰 피해 없이 끝났고 영국 지상군은 동포클랜드 서북쪽에 해안 교두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 기동부대의 상륙 시도가 포착되자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본토에서 63소티, 포클랜드에서 12소티를 발진시켜 개전 이래 최대 출격인 75소티로 대응했으나, 21일 하루에만 대거 5대와 스카이호크 5대, 푸카라 경공격기 2대를 잃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다시는 이 날의 출격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덤으로 게릴라 때려잡는 데나 유용하고 현대전에서는 무력한 푸카라나 에르마치는 블로우파이프같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에 제압당했다.
나쁜 기상상태로 인해 22일 하루 동안 소강상태를 보인 포클랜드 항공전은 날이 갠 23일부터 다시 달아올랐다. 이날 아르헨티나 공군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대거와 스카이호크 한 대씩을 잃었고, 영국 해군에서는 불발탄에 맞은 HMS 안텔로프가 폭탄 해체 시도 도중 신관이 작동하는 바람에 격침당했다. 시해리어 한 대 역시 토스 폭격 임무 도중 해면에 격돌해 추락했다. 24일에도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이 이어졌지만 영국 해군의 손실은 전무한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시해리어에게 대거 세 대를, 대공포화에 스카이호크 한 대를 추가로 손실했다.
5월 25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영국군이 제대로 탐지하고 즉시 대응에 나서 본대는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1발이 항공기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31] 에 명중했다. 결국 5월 30일 아틀란틱 컨베이어가 적재되어 있던 6대의 웨스트랜드 에섹스 헬기 및 3대의 치누크 헬기, 1대의 링스 헬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포클랜드의 아르헨티나군은 훨씬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같은 날, 아르헨티나 해군은 A-4 편대를 출격시켜 영국 함대와 산 카를로스에 파상공격을 가해왔다. 오전의 공습은 별 전과 없이 코벤트리의 시다트 대공미사일에 스카이호크 두 대, 육군 대공포에 한 대를 잃으면서 끝났지만, 오후의 첫 번째 공격은 영국 기동부대 본대 전방에 전개하여 엄호부대 겸 미사일 트랩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를 정확히 덮쳤다. 당시 아르헨티나군 스카이호크는 2대씩 짝을 지어 공격했는데, 브로드소드의 대공 레이더는 딱 붙어 나는 두 전투기를 1대로 인식했다. 그러다 스카이호크가 회피기동을 위해 대형을 분리하자 표적이 갑자기 둘로 나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브로드소드의 전투체계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해버린다. 브로드소드 승조원들이 오류를 해결하려고 시스템을 리셋하는 사이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브로드소드의 헬기갑판에 폭탄을 명중시켰지만, 브로드소드에는 행운이 따랐다. 폭탄이 불발한 채 관통하여 함체에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갑판에 주기되어 있던 링스 헬리콥터가 폭탄에 맞아 파괴된 것이 전부였다.
겨우 1분 뒤 두 번째 공격제파가 다시 두 함정을 노렸을 때는 시해리어가 스카이호크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코벤트리가 시다트 미사일을 쏘기 위해 시해리어를 치웠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저공목표 추적능력에 문제가 있던 42형 구축함 초기형의 레이더는 스카이호크 추적에 실패했고, 호위하던 22형 호위함 브로드소드도 시울프 미사일로 스카이호크를 조준하고 사격하려는 찰나에 회피 기동하던 코벤트리가 '''브로드소드의 화력통제 레이더 앞을 가리는 바람에''' 쏘지 못했다. 결국 코벤트리는 1000파운드 폭탄 세 발을 맞고 침몰했다. 이 과정에서 19명이 사망하였으며 170명은 브로드소드가 성공적으로 구조했다. 이것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마지막 대형함 손실이었다.
5월 28일 상륙해안에서 뛰쳐나온 제3코만도여단 주력이 포트 스탠리 서북쪽의 틸 인렛으로 기동하는 사이 제2공수대대는 동포클랜드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 피해는 제2공수대대장 허버트 존스 중령을 포함해 전사 18명, 부상 64명인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45명, 부상자 121명에 961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은 SAS에 구르카까지 준비했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그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투항했다고 한다. 사실 구스 그린의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이 복무를 시작한지 수 개월째인 신병들로 전투력과 사기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고, 실제로 구스 그린 인근 고지군이 피탈되거나 비행장이 포위당하는 등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여력이 남았음에도 쉽게 항복해버리고 만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았다.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 지원이 없는 아르헨티나군은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군은 높게 쳐야 3,000명 인구의 포클랜드에 대부분 보병인 지상군만 10,000명 가량 투입했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빈약한 해상 수송 능력으로 전차나 야포 같은 중장비와 공병 전문가 등은 거의 없었으며, 개인 화기조차 탄약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선공으로 시작했으며 겨울에 치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32]
그러나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영국군이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을 장악했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제공권이 없어 한밤중에 악천후를 뚫고 호위기도 없이 수행한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3.12.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상륙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지상전도 불리하게 전개되자 아르헨티나군은 어떻게든 전세를 되돌려보고자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 1발을 이용해 항모를 격침시키려 시도한다. 하지만 엑조세 단 한 발로 항공모함을 가라앉히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고, 이에 해군항공대 스카이호크가 동행하여 엑조세의 발사 궤적을 따라 공격, 항공모함에 추가적인 타격을 가해 격침시킨다는 작전이 수립됐다. 5월 30일 리오 그란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2기는 공중급유를 받은 뒤 포클랜드 제도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영국 항모의 예상 위치로 접근, 레이더상에 나타난 세 척 중 가장 크게 보이는 표적을 향해 엑조세 한 발을 발사한다. 스카이호크 4기 편대도 이 엑조세의 로켓모터 연기를 따라 영국 함대로 돌진했다.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었던 영국 해군 함정들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HMS 엑세터, HMS 안드로메다, HMS 어벤저로 이루어진 호위전대였다. 여전히 기동부대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항공전력을 가진 아르헨티나군이 커다란 손실을 각오하고 단호하게 공격해온다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우드워드 제독이 아르헨티나군의 예상과 달리 항모 두 척을 완전봉쇄구역 한참 외곽에 배치한 것이다. 이전까지 영국 기동부대를 정찰하던 아르헨티나군의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심한 노후화로 비행중 공중분해될 우려가 있다는 판정을 받고 5월 하순부로 비행 임무에서 해제된 상태였기에 아르헨티나군으로서는 이를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영국 해군 호위전대는 레이더 탐지를 위해 잠시 상승한 쉬페르 에탕다르를 포착하자 즉시 채프를 살포하며 기만 및 회피에 들어갔고, 엑조세는 채프에 속아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먼 수평선을 향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엑조세 공격에 뒤이어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기동부대를 공습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날아들었지만, HMS 엑세터에게 두 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두 기가 투하한 폭탄도 모두 빗나갔다. 42형 구축함 배치 2의 1번함인 엑세터는 기존 42형 구축함의 965형 대공레이더에 비해 저공목표 탐지능력이 향상된 1022형 대공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 능력이 빛을 발해 다른 42형 구축함과 달리 저공에서 돌진해오는 스카이호크를 시다트 미사일로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항모를 격침시키려는 아르헨티나군의 절박한 시도는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제 공격 결과와 무관하게 아르헨티나군은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라고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했으나, 작전보안상 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서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첫 엑조세 공격의 성공을 보도했던 영국 언론은 이번엔 침묵했다.
마지막 공격 당시에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엑조세 기만용 채프 살포 임무를 받고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공격에 성공했다면 앤드루 왕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3.13. 영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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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제도에 다시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영국군
5월 31일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내려다보는 요지 켄트 산을 탈취, 아르헨티나 지상군 주력을 포위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지역을 방어하던 12보병연대 병력 대부분이 구스 그린으로 이동한 이후 켄트 산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SAS 정찰대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영국 해병 42코만도 K중대가 헬기로 강습하여 아르헨티나군의 허를 찌른 것이다. UN은 아르헨티나군에게 포클랜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동안 자신들을 남미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로 생각했던 아르헨티나는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전세가 기울자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칠레는 아예 영국에 영공을 통과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데 실패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선 페루만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으나 이미 전세는 뒤집을 수 없었다.
6월 8일 영국 육군 웨일스 근위연대 1대대가 항공 호위가 부실한 상태로 포트 스탠리 남서쪽 피츠로이 일대에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중 한 척인 3천톤급 RFA 서 갤러해드(Sir Galahad)는 탄약 유폭으로 전소되어 18일 후 침몰했다. 당시 방공 미사일 레이피어가 5여단 본부대 호위로 빠져있던 데다가 작전 중인 해리어들도 오랜만에 포클랜드 공역으로 출격한 아르헨티나 공군 미라주 III의 산발적인 일격이탈로 유인당해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 거기에 상륙함 자체가 현대적인 LSD나 LPD 같은 게 아니라 LST에 가까웠다. 이후 영국측의 상륙 전술이 초수평선 상륙 작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아르헨티나군은 급히 차출한 민항기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로 해리어들을 농락하기도 했다. 민항기를 영국제 B-108 캔버라 폭격기로 오인하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피로도를 쌓는 효과가 꽤 있어서 저공 침투하는 A-4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후속 편대를 발진시켜 추가 공격을 실시했으나 2차 공격대의 A-4는 경계태세를 높이고 있던 영국군 해리어들에게 AIM-9L 미사일을 맞고 격추당했다.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개방된 칠레 영공을[33]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아르헨티나군은 포트 스탠리의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Longdon) 산에서 의외로 분투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롱돈 방어선이 뚫린 뒤 14일 포트 스탠리에서 아르헨티나군이 백기를 들었다. 한편 패배의 와중에도 엑조세는 마지막까지 맹위를 떨쳐서, 해병 코만도의 두 자매 능선(Two Sisters Ridge) 공격을 함포사격으로 지원하던 카운티급 방공구축함 HMS 글래모건은 함대함 엑조세를 트레일러에 탑재해 급조한 지대함 엑조세에 피격당해 대파당했다. 이 외에도 아르헨티나의 방어선이자 포트 스탠리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포트 스탠리와 가장 가까운 텀블다운 산 전투도 있었다. 여기에는 5보병여단, 3코만도여단이 투입되었고, 5보병여단 산하 스코츠 가드가 주도했으며, 아르헨티나군은 텀블다운이 함락된 그 날 항복했다.
4. 외전
4.1. 알헤시라스 작전
참고기사
그동안 1급 기밀로 분류되어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었으나 2003년경 공개된 작전으로 아르헨티나 특수부대가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 함대를 공작으로 폭파시키려 했다가 실패한 작전이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해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지브롤터에 정박해있는 영국 군함을 특수작전으로 폭파시켜 포클랜드 해협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호르헤 아나야 제독의 지휘아래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위조여권을 사용해 신분을 숨기고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잠입하여 거점을 세웠다. 그들은 이탈리아산 림펫 지뢰를 구매해 다이버들에게 잠수를 통해 지브롤터까지 헤엄처 간 뒤 군함에 폭탄을 설치하고 빠저나오는 작전을 세웠다.
처음엔 공작조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가는 유조선을 폭파시킬려고도 했지만 기름 누출에 따른 해협 오염과 스페인의 반발을 살거라고 예상했던 아나야 제독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후 지브롤터를 오가는 함대를 보고 하면서 기회를 엿봤지만 협상 중이라는 본국의 지령에 따라 꾸물거리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또 알헤시라스에서 렌터카와 호텔을 자주 바꾸면서 거액의 현금을 쓰는등[34] 부주의하게 행동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샀고 통신량이 증가하던 마드리드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을 도청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에 그 작전이 노출되어 이는 즉각 스페인 정부에 통보되었다.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잔여세력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고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 민주주의 정착과 경제발전을 위해 영국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공작조가 지브롤터의 영국 전함을 폭파시키면 스페인이 외교적 분쟁에 휘말려 들 것을 우려했다. 더해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외교 분쟁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브롤터를 두고 영국과 갈등하고 있었던 스페인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스페인계 식민 후손인 아르헨티나를 버리고 영국편을 들 수는 없었고 결국 사태를 스페인 정보부의 개입 없이 경찰들만 동원해서 조용히 처리하기로 결심한다.
그간에 알려진 사실로는 아르헨티나 은행강도(혹은 마약밀매 마피아)들을 수사하다가 부주의한 행동을 남발하는 공작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고가 들어와 우연히 체포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03년 나온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신고와는 별개로, 도청으로 아르헨티나를 감시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와 스페인간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체포된 아르헨티나 페르난데스 대위가 자신은 아르헨티나 공작조이며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했으나 그걸 믿지 않았던 스페인 경찰은 '당신이 아르헨티나 해군이면 난 교황의 조카요~' 라고 이죽거렸다. 이후 내무부의 지령이 떨어지자 화들짝 놀란 스페인 경찰은 '당신들이 아르헨티나 공작조인 걸 알았다면 잡지 않았을텐데.. 지브롤터는 영국놈들한테 뺏긴 땅이요' 라면서 우호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체포된 공작조에 대한 대우는 좋았고 내무부는 경찰들에게 이 사건을 절대 노출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고 하였다. 사건을 묻어버리고 싶었던 스페인 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들은 어떠한 재판이나 심문도 없이 조용히 아르헨티나로 추방되었다. 관련 기록은 모두 파기되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는 기밀로 남았다가 훗날에 공개되었다.
4.2. 키홀 작전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 조지아 제도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분쟁지역이었기에 1955년 툴레섬에 기상관측소를 건설하였으나 같은 해 옆 같은 툴레 제도의 쿡 섬의 화산 폭발로 철수하였었다. 그래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 남부 영국령 사우스툴레 제도를 다시 점령하여 툴레 섬에 '코르베타 우루과이'라는 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 군기지는 지역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라디오 기지, 기상관측소, 핼리패드와 아르헨티나 국기 게양대 등의 시설들과 상주 주둔군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아르헨티나의 패전 후 영국은 툴레 제도를 포함한 섬들의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해 키홀작전을 개시하였다. 키홀 작전의 주 골자는 툴레 제도의 재탈환 및 해군 정찰을 통한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소거였는데, 당시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이 코르베타 우르과이 기지의 주둔군은 철수하지 않았기에 이 키홀 작전 도중 영국 해병대 제42코만도가 헬리콥터로 툴레 섬에 상륙, 주둔하던 군인 9명과 민간인 한명을 무장해제시켜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이동 후 아르헨티나 본토로 추방시켰다. '''작전 끝!''' 인줄 알았으나...
제 42코만도가 툴레 섬의 주둔군을 추방시킬때 툴레 섬의 코르베타 우루과이 기지는 그대로 두고 기지의 국기게양대에 게양된 국기만 아르헨티나 국기에서 유니언 잭으로 바꾸고 기지는 버려졌었다. 하지만 6달 후 그해 12월 HMS 헤카테가 지역을 정찰하던 도중 코르베타 우르과이 기지의 국기 게양대에 유니언 잭 대신 아르헨티나 국기가 다시 게양되어 있던 것이 알려졌다. 이 기지의 국기를 누가 교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르헨티나가 이를 자국의 영유권 주장에 다시 사용할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HMS 아리아드네를 파견하여 기지를 철거하였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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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21일 영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와 함께 영국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
3개월간의 단기전이었지만 이는 영국의 건재함을 알린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포클랜드 전쟁의 전사자는 영국 측에서 258명, 아르헨티나 측에서 649명이 발생했다. 이후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의 수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말도 있지만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이다. 그 외에도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당한 민간인 선원 16명이 사망하였다.
불만 여론을 무마하려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 후에도 승전했다고 거짓말까지 했지만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게 들통났다. 이에 전국민적인 분노가 솟아오르자 갈티에리는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이듬해인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했다. 이로써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인륜적인 전횡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는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더불어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은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의 군사 강국 지위를 상실했고 연이은 경제난과 영국의 외교적 방해[35] 로 인해 지금까지도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포클랜드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비유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불성설. 포클랜드 전쟁은 겨우 3개월간 벌어진 단기전이며, 영국군 전사자가 255명, 부상자도 775명에 불과해 미군 전사자만 5만명 단위로 나온 베트남전과 피해 규모 자체를 비교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민주당 행정부를 끝장낸 베트남전의 수렁과 달리 포클랜드의 명백한 승리는 보수당 정권을 연장시켰다. 무엇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손해만 본 베트남 전쟁과 달리 포클랜드 전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이 반드시 군사적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며 승전한 전쟁이다.
전쟁 이전 70년대 영국의 경제는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영국병으로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이 악화되어 연간 2.8%의 저성장을 기록하며 1인당 GDP가 세계 18위까지 떨어졌었다. 반면 1980~1990년대 이후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즉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며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어도, 영국의 경제 규모는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6년보다는 포클랜드 전쟁 이후에 훨씬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말 그대로 파탄났던 영국의 농업은 1980년대 이후로는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만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를 생산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마가렛 대처가 승전에 힘입어 재집권한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82년 영국의 실업률은 10%에 실업자 수는 300만명에 달했으며, 특히 영국 북부에선 5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비록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의 실정이 누적된 결과였지만 경제파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모조리 현직 총리인 대처에게 쏠렸다. 집권 3년차 타임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처는 '''체임벌린과[36]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고 평가되었으며 보수당 내각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무는 등 당시 영국 정권은 매우 위태로웠다. 바로 그 때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한 대처는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처 내각의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들은 영국 경제의 회복에 공헌했다. 비슷하게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나라들이 대처의 경제 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전보다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대침체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양립한다.
6.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줬다!
프랑스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하자 즉각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서 동맹국과 고객 양쪽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 중이었으므로 정보를 더 얻을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논할 가치가 없는 까내리기만을 위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단 5발의 대함 미사일만으로 급하게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이 이상한 것이다.
안티들 중에는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즈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했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반박당해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 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줬다.
안티들 중에는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즈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했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반박당해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 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줬다.
- 프랑스가 공군 합동 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 성능과 기타 정보를 넘겨줬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정기적으로 합동 훈련을 했으며, 이 때 프랑스 공군은 당연히 미라지로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그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에는 가지도 않았다. 다만 뉴질랜드 공군이 미국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며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모델인 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배치된 지 30년이 지났고 수출까지 하는 기종의 정보가 넘어갔다고 전쟁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비정상이다.
아르헨티나는 자력으로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기술 장벽으로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다만 당시 프랑스의 방산업체 관계자가 발언한 포클랜드 전쟁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우리 프랑스의 미사일에 희생되는 것이 영국군의 함정이든 아르헨티나군의 함정이든 그것은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프랑스의 관심은 단지 이 11만 파운드짜리 값비싼 미사일이 가급적 많은 함정을 격침시킨다면 프랑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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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군사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하지만 원래 방산업체라는 곳이 그렇게 전쟁으로 무기 파는 곳인데 이를 비판하면 모든 방산업체와 군대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2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거의 모든 인프라가 박살나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던 유럽 내에서도 특히 풍족했던 'La Grande Nation'[37] 은 이미 개발살나 역사책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경제를 단기간에 부양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다 방산업체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즉 저 발언은 방위산업의 본질과 당시 프랑스인들의 솔직한 마음을 대변해준 것이기도 하며 실제로도 이후 엑조세 미사일을 비롯한 프랑스제 무기들이 대박을 쳐서 경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도 미라주 III 등이 중동전을 포함한 여러 국제 분쟁에서 좋은 전과를 올려 잘 판매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다시 조명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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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군사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7. 대중매체에서
설정상 주인공 히라가 다이치 키튼은 포클랜드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키튼은 그 당시의 기억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 2005년 개봉한 아르헨티나 영화 '포탄의 섬광'
- 마가렛 대처의 전기를 다룬 2011년 개봉작 '철의 여인'
- 탑기어 - H982 FKL 사건
- TV Pública에서 방영한 TV 영화 Combatientes
-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의 시즌 4 에피소드 4 가장사랑하는 것은('Favourites'), 에피소드 5 실직자('Fagan')
8. 기타
- 과거에는 예비군 정신교육의 단골 소재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자 언론에서 자체적으로 통제한 것을 다루는 정훈 교육 자료도 있다. 즉 전시에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이다. 당시 BBC는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불렀으며, 알 권리만을 지나치게 추구하여 군사 작전을 실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군은 종전 후 BBC를 고소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던 에이스인 피에르 클로스테르망은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었다.
- 마가렛 대처는 영국군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일과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의 휴가도 반납해 가며 희생자 각자의 개인사와 전사자의 죽기 전 상황을 상세히 적은 정성들인 편지였다.
- 탑기어 시즌 21 에피소드 8~9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무대로 펼쳐졌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우수아이아라는 곳에서 나가라고 강요받았다. 제러미 클락슨이 탄 포르쉐의 번호판이 포클랜드 전쟁을 기반으로 놀리려고 일부러 만들어진 가짜 번호판이라 우기는데 칠레 국경으로 떠날 때 아르헨티나 우익들이 위협 운전을 한 것은 물론 계란부터 시작해서 돌까지 던져대 차 유리가 깨지는 등 여러 일화가 있었다.
- 아르헨티나 군부에서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는데 이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에 여러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으며, 뉴질랜드의 경우 아르헨티나군의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아예 군함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해 전력 공백이 생기자 이를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메워줬다. 동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수교를 끊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도 병행했다. 이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영연방과의 충돌로 해석하기도 한다.
- SA80 소총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새로운 돌격소총을 개발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IMF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대처 내각이 예산을 삭감한 데 더해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르자 영국 국방부는 말 그대로 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된다. 거기에 없는 돈을 마련한다고 국립 조병창을 민영화하여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대량 해고로 대규모 축소될 상황이었다. SA80의 개발회사인 로열 오도넌스(구 엔필드 조병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개발진들은 SA80의 아버지뻘인 XL64E5를 5.56mm NATO 탄을 쓸 수 있도록 한 XL70E3을 내놨지만 조악한 재료로 안전성이나 신뢰성이 극악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HK에서 개수한 L85A2로 개조되면서 나아졌다.
-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제트전투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면서 컴퓨터로 작동하는 사격통제장치가 있다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대공포로 사용하던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 전투함에서 여전히 주력으로 운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을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부포 자리에 어뢰와 대함미사일을 배치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또한 주로 방공함에 장비되던 다양한 미사일 방어 체계들이 함의 체급에 상관없이 기본 사양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주인공의 아버지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사했다.
-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일들을 묶어서 펴낸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 소설>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에서 아르헨티나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들한테 거리로 나와서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자 길거리로 나와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후에라 포클랜드(떠나라 포클랜드), 볼베레 말비나스(오라 말비나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부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바 있다. 이 장면이 아르헨티나 방송국 TV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바람에 주한 영국대사가 한국 외무부 장관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저렇게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공개적으로 벌이고 있으니, 혹시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무기를 지원해 준 것이 아니냐?"라고 항의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또한 실제로 포클랜드 섬에 아르헨티나 군대가 상륙하기 얼마 전, 아르헨티나 무역 회사가 한국에 와서 닭털이 들어간 야전잠바 3천 장을 제작해 갔다고 한다(...)
9.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
중국의 경우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기반을 완성한 요즘에는 이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
[1] 다만 섬네일에 오류가 있는데, 포클랜드 전쟁 당시 양측 모두 FAL(정확히 아르헨티나는 복제품, 영국은 자체 라이선스 생산품)을 사용하였다. 이때문에 웃지못할 일도 일어났는데, 영국측 FAL은 아르헨티나 측 탄종과 탄창 둘다 호환되는 반면, 아르헨티나 측 FAL은 영국군 탄창을 삽탄할 경우 총이 불발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2] 사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시행한 것을 그대로 도입한 '''신자유주의의 원조격 정책이다.''' 차이점이라면 칠레는 무분별한 외채와 외자 도입에 이자율 상승이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날 뻔했지만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일단 한숨 돌렸고 군부가 물러는 났어도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구조조정에 실패한 와중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면서 철저하게 패망했다는 점이다.[3] 주민 1500명과 60만 마리의 양떼가 사는 곳에 영국 해병대 50명이 주둔하고있었다.[4] 당시 영국은 무상 의료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펼친 임금 삭감 정책 덕택에 아르헨티나의 의료비용이 외국인들 기준으로는 획기적으로 낮아져 본국 운수비용을 감안하면 큰 차이가 없었다.[5] 현재는 별개의 속령으로 분류되어 있다.[6] 위키피디아의 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7] 어떤 부대는 총독의 항복 명령에도 불응하고 다른 곳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다가 제압당했다고도 한다.[8] 보통 한 곳에 서 있게 하거나 앉혀두는데 범죄자(흔히 테러리스트들이 진압 되었을때)처럼 엎드리게 해놨다.[9] 특히 홍콩과 같이 경제적으로 발전한 곳이면서 사방이 적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10] 비록 사출기가 1대뿐인 20000톤급 항모에 전쟁 당시 30년이 넘은 중고함정이라고는 하나 썩어도 준치라고 전쟁 직전의 영국 해군이 보유한 해리어와 헬기만 운영 가능한 경항모들보다는 여러모로 나은 편이였는데 실제로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측이 순양함 격침 후에도 계속 해상에 항모전단을 배치했다면 포클랜드를 수복하려고 하던 영국측에 더 큰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11] 해당 조기경보기는 대잠작전용 프롭기 하부에 조기경보레이더를 단 초창기 함상 조기경보기의 일종.[12] 블랙번 공격기는 그나마 살아남아서 걸프전까지도 운용되나 함상 F-4의 경우에는 아크로열 제적과 동시에 사실상 퇴역해버린 상태였다.[13] 말레이 해전에서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s-2 함장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존 리치 대령의 아들이다.[14] 미국, 영국, 프랑스가 찬성했고 중국과 소련은 기권했다. 당시 비상임이사국인 파나마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15]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자국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일 수밖에 없다. 아르헨티나의 친미적 성향도 레이건의 이런 반응을 이끌었지만 미국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리 이빨이 빠진 사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영국이다.[16] 이 당시 아르헨티나군 사진을 보면 미국 장비가 많다.[17] 급유계획서 [image][18] 미군은 전선에 가까운 해외 기지를 이용할 수 있어서 초장거리 비행이 필요없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19] 연료가 부족하여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이착륙하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1대가 연료 부족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했으나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던 대공포 사수들이 오사로 격추시켰다. 그래도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 중 영국군의 해리어 4대를 격추했다.[20] 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21] 고도 약 100피트[22]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총 7척 중 피닉스를 포함하여 무려 5척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에 공여 또는 매각했다.[23] 이 두 척 또한 미국에서 공여받은 구축함이다. ARA 이폴리토 보우차르드는 미국의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Borie(DD-704)였으며 1972년 아르헨티나 해군으로 재취역했다. ARA 피에드라 부에나도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Collett(DD-730)였으며 1977년 재취역했다. 두 척 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장이었다.[24] 항공모함조차 항구에 짱박혀버리자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25]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망가져 영국 해군 함정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26] 사실 이 기종들도 노후화되어 정확도에 문제가 좀 있었다.[27] 장거리 함대공미사일 시다트를 탑재한 42형 구축함이 광역방공 및 조기경보를 맡고, 시울프 대공미사일과 신형 펄스 도플러 레이더, 엑조세, 고성능 소나로 무장한 22형 호위함이 저공/해안 인접 항공기에 대한 근접방어 및 혹시 모를 대함/대잠전에 대비하는 작전방식.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이 미사일 트랩 겸 레이더 피켓으로 매우 자주 써먹었다.[28] 이 시기 영국 해군 지휘부는 합참의장, 제1해군경, 기동부대 지휘관 모두 초급장교 시절 2차대전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나면 배가 가라앉고 사람이 죽는다"는 걸 본인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29] 제40, 42, 45 해병 코만도, 육군 낙하산 연대 제2, 3대대 증원, 해병대 SBS 제2, 3, 6분대 증원, 육군 SAS D, G중대 증원[30] Scots Guards 연대 2대대, Welsh Guards 연대 1대대, 제7에든버러 공작의 구르카 연대 1대대[31] 수직이착륙을 위해 컨테이너선 전방을 방염처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워낙 놀랍다보니 아틀란틱 컨베이어를 항공모함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리콥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 임무인 항공기 수송선이다.[32] 포클랜드 제도는 남극에 가깝고 섬이라 바람도 많이 불어서 꽤 추운편이다.[33] 흔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동서로 나뉘어있다고 인식하므로 의아해 할 수 있으나, 칠레 남단을 보면 푸에고 섬 근해에서 대서양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안선이 확보되어 있다. 때문에 영국군 전폭기들이 이쪽을 돌아다니려면 칠레의 허가가 필요했다.[34] 그것도 항상 미국 달러로만 결제해 더더욱 의심을 샀다.[35] 전쟁 이전만해도 아르헨티나는 다양한 서방권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했고 여기엔 영국도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은 자국산 무기에 대해 대 아르헨티나 판매를 금지했으며, 타국제 무기도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경우라면 완제품이건 부품이건 상관없이 영국의 정보망에 걸리는 족족 영국 정부의 항의가 뒤따랐다. 대부분의 거래처가 영국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서방권 국가들이었던 탓에 거래 규모가 축소 또는 연기되거나 아예 무산되곤했다. 수십년이 지난 2020년 10월엔 대한민국제 FA-50에 사용된 영국제 부품의 대 아르헨티나 판매를 불허함으로서, 아르헨티나군의 FA-50 도입 시도를 무산시켰다.[36] 히틀러를 막는 데 실패하여 2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37] 라 그랑드 나시옹, '위대한 조국'은 프랑스인들이 자국을 부르는 별명으로 유럽이 세계를 주도하던 당시 특히 앞서나가던 자부심을 드러낸다. 프랑스가 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자국 내외의 문제로 휘청이는 현대에도 꾸준히 쓰이며 프랑스인들의 애국심과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