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케이저르
1. 소개
AFC 아약스의 원클럽맨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 1970년대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크루이프가 최고였다. 그러나 케이저르가 더 나았다."'''
니코 쉬프마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61년에 AFC 아약스에 데뷔한 케이저르는 1965년 리누스 미헬스가 감독으로 부임한 후 요한 크루이프의 등장으로 에레디비지에를 제페하게된다. 케이저르는 크루이프와 함께 공격진에서 '로얄 페어'를 형성하며 막강한 화력을 보여준다.
1965-66 시즌 처음으로 에레디비지에를 제패한 후, 1966-67 시즌에는 리그 122골을 득점하는 등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었고, 그런 아약스는 유럽마저 집어삼킬 기세였으나 1968-69 시즌 지아니 리베라와 피에리노 프라티가 이끄는 AC 밀란에게 4:1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치고만다. 네덜란드 클럽 최초로 유로피언컵 우승 타이틀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게 빼앗겼으나 1970-71 시즌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끄는 파나티나이코스 FC를 2:0으로 격파하고 마침내 빅 이어를 차지한다. 미헬스가 떠난 후 슈테판 코바치가 부임했으나, 아약스는 1971-72 시즌에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1972-73 시즌에 유벤투스 FC를 꺾고 빅 이어를 차지하며 이탈리아 카테나치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1973년 아약스의 주장이었던 스야크 스바르트가 은퇴한 후 케이저르는 아약스의 주장을 맡았으나 기량이 하락하면서 결국 1974년 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케이저르는 1962년 네덜란드령 안틸러스 제도[1] 를 상대로 데뷔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 참여했으나 로프 렌센브링크에 밀려 몇경기 나서지 못했다.
12년이나 국가대표 생활을 했으나 출장이 34경기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케이저르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다기보다는 클럽을 우선시한 네덜란드의 경향도 있다. 요한 크루이프도 마찬가지. AFC 아약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이 유럽 무대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였으나 정작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네덜란드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케이저르의 성격과 페예노르트의 전설적인 윙어인 코엔 물라인의 존재도 있었다. 케이저르의 성격은 상당히 괴랄했고 실수로 주심의 얼굴을 가격해 1년 출장정지 당한다던가 하는 일도 있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당대 최고의 레프트 윙어로, 드리블 돌파 능력, 크로스 능력이 대단했다. 아약스의 돌격대장 격의 선수로 수비진을 뒤흔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4. 여담
- AFC 아약스의 최전성기의 일원이지만 리누스 미헬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헬스가 케이저르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케이저르만한 선수가 없어서였다. 미헬스와 케이저르의 사이가 얼마나 안좋았나면 둘 사이에 2년 동안이나 대화가 없었다는 말이 이를 방증한다.
- 1971년 리누스 미헬스가 AFC 아약스를 떠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을때 케이저르는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췄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들의 신뢰를 받았는데, 1973년에는 동료들의 투표로 주장에 뽑히기도 했다.
- 은퇴할때 공식석상에서 "다시는 축구를 안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흘러 유소년팀 경기를 관전하는 도중 공이 카이저에게 굴러오자 다시 보내주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는 흠좀무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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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은퇴 이후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1] 현재는 퀴라소, 아루바 등의 국가로 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