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요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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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가 초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통감직을 한 달간 대리하고, 일본 제국 육군 원수를 거쳐 제2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을 강경 진압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2. 생애
2.1. 초창기의 활동
1850년 조슈 번 이와쿠니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1] . 어려서 초슈번 정의대에 입대하면서 군사경력을 시작했고 1868년 무진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1870년 오사카 병학료에 들어가 1871년 육군대위로 임관했다. 1873년 연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중좌 계급을 받았다. 1877년 세이난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886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보병 12여단장에 임명되어 무려 10년간 재임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으며 뤼순 공격으로 전공을 크게 올린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카조쿠, 귀족)이 되었다. 1896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3사단장으로 보임했고 근위사단장을 거쳐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04년 6월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9월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육군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쵸슈벌의 안배로 조선주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7년 러일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에 조선을 방문할 때 숭례문 철거를 요구하는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터지자 이완용,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하세가와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조선군 주둔 문제로 육군대신 이시모토 신로쿠가 사임해버리는 '2개 사단 증설 문제'가 발생하면서 군부의 위상에 타격을 입고 육군 내부에서 무능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1915년 원수로 승진, 1916년 백작 작위를 받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하자 후임 조선총독에 임명되는 등 관운은 계속 좋았다.
2.2. 제2대 조선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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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에게 경례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제2대 조선 총독으로 재임 당시.) 하세가와가 화족이긴 했지만 영친왕은 화족보다 높은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장면이 연출된 것. 당연히 이런 태도를 통해 "일본이 조선 황족을 존중한다"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속임수이자 허울이었다.[2]
1916년 제2대 조선 총독에 임명된 하세가와는 전임 총독에게서 무단통치를 계승했다. 다만 하세가와는 애초부터 정치에 문외한인 철저한 군인 출신이므로 노련한 데라우치와 달리 자신만의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3.1 운동을 강경진압했지만, 국내 역사책이나 언론에서 전임 총독인 데라우치에 비해 다뤄지는 빈도가 훨씬 적다.
특히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하세가와는 '전임자의 행정적 자취를 답습'한다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으며 데라우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조선 총독부 관료들이 하세가와의 말은 따르는 척 하면서도 수면 아래에선 그의 명령에도 복지부동으로 일관했다. 거기에 하세가와의 금전적 탐욕 때문에 부하 관료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배신자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하세가와의 토색질 때문에 무단 통치의 근간이 되는 헌병대의 사찰을 위한 비용까지 삭감되어서 하세가와 시절엔 일제의 무단 통치가 무단 통치가 아닌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른다. 사실 하세가와는 본인이 싫다는 것을 데라우치가 조선을 조슈 군벌 외에 다른 자들에게 줄수 없다고 억지로 끌어와서 앉힌 판국이었으니 더 안습이다.
이러한 안습한 나날은 말년까지 이어져서 일제에 도움이 된 토지 조사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사망하면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선은 물론 일본과 해외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통치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냐는 비판을 받아 하세가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와 같은 파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시베리아 출병, 쌀 사건으로 인해 퇴임하면서 동시에 몰아닥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게 되는데 이후 일본에서 후임 조선 총독을 누구로 정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하라 타카시, 다나카 기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문관 총독론과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관 총독론이 강하게 대립했는데 이들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법제상으로는 문관 총독 임명도 가능하게 하는 대신에 새 총독으론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조선 총독부 관제 개혁이 이루어짐으로 절대군주와도 같았던 조선 총독의 권한 및 총독부의 구성에 대해 손을 보게 된다.
데라우치와 사이토 사이에 낀데다 3.1 운동의 폭풍으로 묻혀버린 인물인데, 3.1 운동을 강경 진압한 장본인이면서도 이후 문화 통치의 큰 목적을 이미 구상해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총독을 사임하면서 사이토에게 인수 인계와 함께 남긴 조언문이 제도와 통제를 완화하고, 중추원 구성과 양국인의 혼인 장려 등 조선과 일본의 동화 수준을 높여나가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 사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고 일본에선 진작부터 조선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오히려 조선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무단 통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후 니토베 이나조우 교수 등이 주장한 동화 정책이 사이토 총독부에 의해 채택됨으로 우리가 아는 문화 통치가 실시되게 된다.
2.3. 이후
3.1 운동이 발생한 후 조선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어서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고 군부와 정계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 이에 책임을 지고 조선총독직에서 사퇴했고, 후임으로는 사이토 마코토가 들어왔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 후 별 일 없이 지내다가 1924년 1월 27일, 도쿄에 사망했다. 향년 73세.
3. 대중매체에서
-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홍성민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서상익이 연기했다.
- 2018년에 방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데, 배우 윤대열이 연기했다. 일본 조선주차군 사령관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한국통감부에서 이토 히로부미과 함께 하는 장면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