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감부

 


'''통감기'''(統監旗)[1]
1. 개요
2. 역대 통감
3. 청사
4. 기타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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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韓國統監府
Resident-General of Korea
1906년 2월 1일[2] ~ 1910년 9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대한제국보호국으로 삼으면서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정사(政事) 및 행정 등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하도록 일제에 의해 설치된 기관이다. 줄여서 통감부로 부르기도 한다. 을사조약 직후인 1905년 11월 22일에 설치가 발표되었고 12월 21일 일본 현지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에 임명됐다. 이를 통해 한국의 정치와 외교는 물론, 경제권까지 침탈하여 이득을 탈취하고 침략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일제강점기1905년부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3]
1906년 2월 1일부터 업무를 개시했으나 이토는 한 달 뒤인 3월 2일에야 서울로 부임했고, 그 사이 기간에는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통감 업무를 대리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선총독부 설치 이후에도 약 한 달 존속하다가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관제(칙령 제354호)가 공포되고 다음 날 10월 1일 시행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애초에 외교 및 국방 위주로 맡는다는 조항을 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대한제국의 행정 및 내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향후에 대한제국의 모든 국책이나 국사 등은 반드시 통감부의 감독 및 허가를 받도록 조항을 개정하게 됨에 따라 사실상 대한제국의 모든 분야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감시 기관으로 바뀌었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으며 마침내 대한제국 군대도 강제 해산을 발령함에 따라 국방, 병무 체계도 모두 일본군 위주로 편성, 변경하였다. 을사오적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을 내각 총리에 앉히고 신(新) 한일 협약 체결을 이끌어냈으며 차관직을 신설하여 일본인이 차관을 맡도록 하는 차관 정치를 실행하였다.
1909년에는 사법권 및 질서 유지권도 박탈하여(기유각서) 일본 경찰과 법정이 직책을 맡게 하였고 감옥소에서도 모든 간수를 일본인으로 교체하여 항일 및 반일 독립 운동가 및 애국자들을 수감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동년 6월 소네 아라스케의 취임 이후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저격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1910년 5월 30일에는 3대 통감이자 육군 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취임하였다. 일제는 처음 통감부를 조선도독부로 재편하려 했으나, 대규모로 개편하여 한일병합 당일인 8월 29일 메이지 덴노의 칙령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다만 기존의 통감부가 곧바로 폐지된 것은 아니고, 구체적인 총독부 관제가 마련될 때까지 총독 직무도 당분간 데라우치 통감이 대리하는 형태로 운영됐다. 한편 기존 대한제국 정부에 속해 있던 관청은 일단 소속은 총독부에 두되, 이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는 대한제국 정부에 근무 중인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도록 하여 과도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후 10월 1일 데라우치가 정식으로 초대 조선 총독 자리에 오름과 함께 통감부는 총독부로 완전히 개편되었다.

2. 역대 통감



'''순서'''
'''이름'''
'''재임 기간'''
'''설명'''
임시
[image]
하세가와 요시미치
1906.02.01
~ 1906.03.01
직무 대리. 이후 제2대 조선 총독으로 취임.[4]
1대
[image]
이토 히로부미
1905.12.21[5]
~ 1909.06.13
-
2대
[image]
소네 아라스케
1909.06.14
~ 1910.05.29
-
3대
[image]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05.30
~ 1910.09.30
이후 초대 조선 총독으로 취임.

3. 청사


남산에 있었던 통감부 청사
통감부 청사 건물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조선총독부로 사용했다. 1926년 경복궁 내에 완공된 신청사로 총독부가 이전한 뒤에는 1927년 5월 10일부터 국립중앙과학관의 전신인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으로 사용했다. 당시 다이쇼 덴노가 준 은사금 17만엔을 사용해서 과학관을 세웠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당시 일본의 과학기술과 공업성취를 선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에는 국립과학관이었으나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소재 중이다.

4. 기타




5. 관련 문서



[1] 대한민국 해군기가 통감기와 유사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위키니트들이 제기했으나, 좌측에 국기를 배치한 도안은 영국이 원조이며 영국 함선들은 좌측 상단에 유니언 잭을, 나머지 부분은 파란색 혹은 붉은색을 배치했다.(참고로 파란색은 민간, 붉은색은 정부 소유의 함선을 뜻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관습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그 외 여러 식민지들)의 국기에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적으로 해군은 복식이나 관습 면에서 영국 해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는데, 대한민국 해군기도 그 중 하나다. 사실 홍콩이 영국령이었을 당시 총독부 깃발 배치도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그렇게 말한다면 홍콩 총독부는 영국이 아닌 일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해군 창설자 손원일 제독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2] 업무 시작 날짜 기준. 설치 발표는 그보다 약 10주 전인 1905년 11월 22일이었다.[3] 이럴 경우 35년이 아니라 40년이 된다.[4]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뒤를 이어 제2대 총독으로 취임했으나, 이후 3.1운동을 지나치게 탄압한 나머지 총독 취임 3년 만에 사이토 마코토에게 총독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5] 서울 부임은 1906년 3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