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우시

 


하이커우 시(하이난 성)

海口
Haikou

1. 개요


1. 개요


중국 남부 하이난성성도. 섬의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며 인구는 230만명이다. 본토와 충저우(琼州) 해협을 사이에 두고 12km 떨어져 있는데 아직 교량 건설 계획은 없으나 본토와 철도연락선이 연결되어 베이징이나 기타 도시에서 철도를 이용해 기차에 탄채로 하이난섬으로 올 수 있다. 또한 휴양지로 유명한 하이난의 입구로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그 위치에 비해 역사가 깊은데, 고대부터 유배지로 쓰인 것이 이유다. 유배자들 중에는 당나라 대의 이덕유 (李德裕)와 송나라 대의 이강 (李綱), 조정 (趙鼎), 이광 (李光), 호전 (胡銓) 등 5명이 유명하다. 그들은 간신에 맞서 충언을 하다가 유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오공 (五公)으로 추앙받았으며, 그 사당인 오공사가 세워졌다. 청나라 광서제 때에 녹기와를 얹어 증축한 해남제일루 (海南第一樓) 오공사 및 하이커우의 랜드마크이다. 그외에 소동파 역시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동파서원(東坡書院)이 남아 있다.
명나라 가정제 시절, 가정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후 융경제 때 중용되어 일조편법 등의 개혁을 시행한 해서(명나라)가 이 곳 출신이다.
본래 하이커우는 송대에 백사진 (白沙津)으로 불리다가 명대에 해구위 (海口衛)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해남도의 중심지는 본래 내륙으로 15km 정도 더 들어간 충산 (瓊山)이었는데, 1858년의 톈진 조약에 의해 하이커우가 개항장이 되며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현재 충산은 하이커우 시에 소속된 츙산구 (琼山区)이다. 19세기 말엽에 하이커우는 현지 발음인 Hoihow 로 알려졌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졌고 하이커우는 1939년부터 종전인 1945년까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국공내전 시기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주둔하다가 1950년 4월에야 인민해방군에 점령되었다. 본래 하이난은 광둥성에 속했는데 1989년 하이난성이 따로 생기며 하이커우가 그 성도가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서는 경제 특구로 선정되어 시멘트, 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현재도 광저우와의 해상 교류는 활발하며, 시내 동쪽, 나두 강 건너에는 하이커우 메이란 국제공항이 있어 휴양객들로 붐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