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조약

 

1. 1858년에 맺은 조약
1.1. 배경
1.2. 내용
2. 1885년에 맺은 조약
2.1. 배경
2.2. 내용
2.3. 의의

'''天津條約'''

1. 1858년에 맺은 조약


청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 미국과 맺은 조약.

1.1. 배경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은 패한다. 하지만 청은 이 조약이 불평등하다 느껴, 거절한다. 영-프 연합군은 베이징을 공격하고 러시아의 중재로 1860년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2. 내용


1.전쟁 비용을 배상할 것.
2.외교관을 베이징에 주재시킬 것.
3.외국인의 중국 여행과 무역을 자유롭게 보장할 것.
4.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를 할 것.
5.뉴장, 덩저우, 한커우, 주장, 전장, 타이난, 단수이, 차오저우, 치웅저우, 장닝 등 10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2. 1885년에 맺은 조약



4월 갑신정변 이후 맺어진 청과 일본 제국의 조약.

2.1. 배경


1882년 6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중이었고 특히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1]을 강화하고 있었다.
1884년 청프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일부가 철수하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여긴 김옥균, 박영효등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본 공사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재정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우정총국[2]의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세력은 당시 친청세력인 민씨 정권 요인(민영목,민태호 등)을 살해하고, 왕과 왕비를 볼모로 삼아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렇게 갑신정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모략으로[3] 청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의 소극적인 대처로 결국 청군이 진압하게 된다.
이후 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들은 죽거나 해외로 망명[4]하게 되고 개화당 정부 수립 3일만에 갑신정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청과 일본이 1885년 4월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톈진 조약이다.

2.2. 내용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조약으로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반도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5]


2.3. 의의


어떻게 보면 별 내용없는 조약이지만 조선의 종주권에 대한 규정이 딱히 없어 청의 종주권이 인정되는 셈이었으며 위안스카이 등 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해 조선은 한러밀약 같은 타개책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파병 시 상호통보 조항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다.[6]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 농민군이 차례로 조정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되니, 조정이 청군에게 진압요청을 하게 되어 청군이 조선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일본군 역시 제물포 조약을 근거로 즉각 발효 직후 중에 도중 파기하며 조선에 상륙하게 된다.
사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만에 상륙하였지만 일본군은 아산만이 아닌 인천에 상륙 후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인천에 상륙한 5월 6일로부터 이틀뒤인 5월 8일.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하였으니 외국군은 철수하라' 는 명분을 위해 농민군과의 전주 화약을 체결했지만 때는 늦어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 양국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청은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더이상 조선에 간섭할 수 없게 된다.[7]
참고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할 줄 알았던 일본은 삼국간섭에 의해 한발 물러서게 되는데[8], 후일 앙심을 품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1] 묄렌도르프 (외교), 위안스카이 (군사), 마젠창 (재정)[2] 조선 말기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한 오늘날의 우체국.[3] 찻잔 밑에 청군을 요청한다는 밀서를 몰래 써 전달 하였다고 한다.[4] 홍영식은 진압 당시 피살되었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홍종우에게 상해에서 피살,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5]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장래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行文知照)한다, 파병이 불가피할 경우에도 속히 철수시켜 주둔하지 않는다'''이지. '''해당 조약국 중 1곳이 파병을 하면 다른 곳도 파병한다'''라는 내용이 아니다.[6] 물론 일본군의 파병근거로 활용된 것은 제물포 조약이다.[7] 청은 일본에게 배상금, 요동반도를 넘기게 되고 다시는 조선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골자.[8] 러시아를 필두로 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서양 3세력이 일본에게 가한 외교압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