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 이씨
1. 개요
학성 이씨는 조선 시대초의 문신(文臣)이자 최초의 조선 통신사(通信使)이며 대일 외교 전문 외교관이었던 충숙공 이예가 시조로써 학성은 오늘날의 울산의 옛 지명이다.
2. 역사
시조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의 선대는 고려조 명문 귀족으로 고려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울산으로 낙향하였고 그의 가문 전체가 조선건국에 반하였음으로 가문 구성원들이 아전의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이예 역시 이를 면하지 못하였다.[1]
그는 1396년(태조 5) 왜적에게 잡혀간 지울산군사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고 중앙 사대부의 반열에 들어섰고 그를 비롯 가문 구성원들은 양반으로 복권되었다. 1401년(태종 1)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 포로 50명을 데려온 공으로 좌군부사직에 제수되었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왕래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찾아오고, 정 4품 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416년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1419년(세종 1)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1422·1424·1428년·1432년에 회례부사(回禮副使)·통신부사·회례정사(回禮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한 뒤 대마도경차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에는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후, 세종 30년에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그의 아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종실(李宗實)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울산의 사족士族이 되었고, 이예(李藝)의 또다른 아들이었던 이종근(李宗根)의 후손들 역시 사족士族으로 전환 하게 된다. 또한 임진왜란때는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군공을 세운 무관들도 많이 배출해내었으며 가문일원들이 전시 조정에도 사대부로써 대거 진출하였고 임진왜란중 충의 6의사를 배출하여 충의의 가문이라 불리며 가문 인물들중 선무공신이 나오는등 가문의 위상을 떨쳤다. 임진왜란 이후에 학성이씨는 사족士族으로써 울산에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를 다시금 확립하고 재건하는 중심역활을 하였고, 현종 시기에 가문일원들이 다시 중앙 정계에 대거 등용 되었다. 또한 현종때 남인의 핵심 인물을 배출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숙종때는 울산의 대표적 남인계열 사족士族가문으로써 1694년 숙종으로 부터 구강(鷗江)이라는 사액을 받아내고 구강서원의 건립을 주도하여 울산 제일의 사족士族이 되었고, 1737년 영조때에는 시조 이예李藝의 위패를 모신 석계서원이 울산에 건립되었을 정도로 조선 후기에 학성이씨는 울산에서 가장 많은 고위직 사대부들을 배출한 제일의 명문 사족이자 덕망있는 남인계 유림들의 가문으로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2.1. 여담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를 1명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다수의 무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임진왜란때 가문의 일원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남 지역의 의병장을 여럿 배출했다.
임진왜란때 선무공신을 배출하였고 충의 6의사를 배출하여 충의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 후기(현종,숙종과 영,정조 시기)에 영남의 남인계 유림으로 주목 받아 조정에 대거 등용되었다.
3. 집성촌
집성촌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과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동, 양산시 주남동(과거 웅촌면)의 주남 마을이며 현재도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 마을에 살아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의 학성 이씨는 16000명정도이며 그들 중 대다수가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양산시 주남동에 거주하고 있다.
4. 분파
현령공파
월진공파
부정공파
봉사공파
농소파(석정공파)
곡강파
5. 유명 인물
학성 이씨 집안 중 가장 유명 인물로는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등을 역임한 이후락이고, 노무현 정권 당시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한호, 이명박 정권 당시 고용노동부장관을 역임한 이채필 연예인 이예은 추구선수 이근호 등이 있다.
[1] 1668년에 학성이씨 족보와 기록들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예의 선대가 고려조 명문가였던것은 확실한것으로 밝혀졌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예 이전 선대의 기록들이 다수 소실되어 현재로써는 이예의 선대에 대해 자세히 알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