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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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갈량의 지략과 조조의 리더십을 겸비했다고 하여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공립농업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해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6개월 교육을 받고 중국 하얼빈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후## 육군 하사관으로 임관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4] 1949년 남조선로동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5][6] 1951년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부대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이 되어[7]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8] 1961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여 제2공화국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 기관인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을 미국 대사관에 밀고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 경력 덕분에 곧 석방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으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서는 제갈공명은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동원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주요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9]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와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1970년 1월 지병으로 사망한 엄민영의 후임으로 주 일본 대사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주일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부근에 '이즈미'라는 유명한 초밥집이 있었는데 이후락은 이 집의 맛있는 초밥[10] 을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 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외교행낭을 실어 보내는 비행기 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몇 차례나 시켰다고 한다.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박정희는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 '남산의 부장들' 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초밥 심부름을 하던 주일대사관 사무관은 외무부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 한다.[11] 이는 황병태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 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 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막후에서 관리하며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12][13][14]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당시 내무부 장관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시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여 고문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을 10.2 항명 파동이라고 한다.[15]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 사업'.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 때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바로 김기춘.[16]
중앙정보부장 재임 중 대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으로는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불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 한다.[17]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을 함께 하며 1.21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 발언도 나왔다. 이 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를 선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라고 대답했고 김일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입니까?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 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등과 함께 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 가도를 달리게 되지만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 1973년 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또 다시 탄압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었다.[19]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 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주일대사인 김석규가 김대중을 납치하기 전에 박정희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 전 신민당 국회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갑자기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전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처럼 해외 망명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영국을 거쳐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평양에 다녀온 뒤 얻은 심장 질환 때문에 요양하며 겸사겸사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을 통해 "나는 박정희 정권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입을 다물겠다."는 식으로 정치적 보복을 피하려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과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인 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0] 이후락은 당연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원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던데다가 여러 불법적인 정치 공작에 관여한 것도 있어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 측에서 공천을 안 주었다. 하지만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각하께서 체면 때문에 공천을 안 주신거고 국회의원 당선 후 다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남북 대화를 맡는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선거 운동을 했고 이것이 먹혔다. 당시 울산의 지방공무원과 경찰 등도 모조리 이후락 편을 드는 바람에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았던 서영수는 명색이 여당 후보임에도 야당 취급을 받고 결국 선거에서 떨어졌다.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 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 합리화해 대중들을 벙찌게 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이후락의 재산은 약 194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21]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거니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를 따질 때 흔히 나오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의 한보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1980년대 초반 당시 2천만원대로 지금은 20억원대 매매가를 자랑한다. 그것으로 계산하면 현재 화폐 가치로 대략 9,700억원으로 은마아파트가 비정상인 것이기는 하다.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22] 2003년에는 생리 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009년 10월 31일에 향년 86세(만 85세)로 사망했다.[23] 그렇지만 박정희 밑에서 일하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린 셈. 김재규는 10.26 사건으로 인하여 1980년 처형되었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박종규는 간암으로 인해 제5공화국 정권이 끝나기도 전인 1985년에 죽었다.[24]
3. 선거 이력
4. 기타
- 슬하에 6남 1녀를 뒀는데 차남 이동훈(1948년생)은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의 고명딸 김영혜와 결혼한 뒤 장인에게 제일화재를 물려받았으나 경영난으로 2008년에 본가였던 한화그룹으로 도로 넘기고 2009년에 한익스프레스를 사들였다. 막내아들 이동욱(1962년생)은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의 막내딸 최예정과 결혼했다. 1980년 기준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194억 원의 재산이 누구를 삥뜯어서 나온 건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친손자는 이석환 한익스프레스 대표이사다. 이석환 대표는 과거 흑역사가 있는데 미국 유학생 시절이던 1994년 한국에 들어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신동학과[26] 함께 승용차를 몰고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를 달리던 중 다른 차의 운전자와 시비가 붙어[27] 운전자를 집단 폭행했다. 그리고 2020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이 발생하자 이석환 대표의 이름이 또 다시 등장했다.
- 자식들이 국내외에 막대한 양의 부동산을 상속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가치가 폭등한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막대한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알려진 부동산 외에도 박정희의 거액 스위스 차명 계좌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고향인 울산에는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가 많다. 현재 신정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우석고등학교는 이후락의 호를 딴 학교였고 학성고등학교는 이후락의 본관인 울산의 옛 별호를 딴 학교다.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도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28]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진 중 1명이었다.
- 제 9대 국회의원 김원규는 그의 6촌 처남이었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유태인 차관 중개인 메나도[29] 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간혹 상공부에서 그런 돈은 쓸 수 없다."고 하면 이후락이 다그쳐서 차관을 들여오게 했고 이렇게 유입된 차관 자금의 5~6%는 이후락 측, 정치 자금으로 다시 일정 %를 메나도 측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메나도는 이렇게 차관 브로커 노릇을 하며 모은 돈으로[30] 프랑스 해군 함정을 사들여[31] 고철로 분해해 두었다가 6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조립하여 이스라엘 해군에 제공해 이집트 해군을 격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메나도는 "한국 관료들은 10만불만 쥐어주면 국가에 1000만불 손해가 나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 울산광역시(울주군 포함), 경주시, 포항시(영일 포함) 등을 합쳐 경상동도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이슈가 되었을 때도 비슷하게 경포울 통합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경상도가 다른 도들보다 면적이 너무 넓기도 하고 인구면에서도 3개 도시만 합치더라도 수도권 제외한 전국 평균급은 찍으며 울산 같은 경우 창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중심부와는 생활권이 다르고 오히려 인접한 경주시 및 포항시와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 작별, 흰 구름 먹 구름, 난 못난이, 또 만나요 등의 히트곡을 남긴 1970년대 포크그룹 딕패밀리의 멤버 김후락의 본명은 홍수진인데 그룹 결성 초반에 우연히 MBC 방송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만나 예명을 김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락이 홍수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예명을 쓰라고 했는데 성씨까지 쓰지는 말고 김이박최에서 돌 던지면 맞는 성으로 써라고 해서 예명이 김후락이 되었다고 한다.링크
- 자신이 납치했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5. 대중매체에서
-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오지명,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임채무, SBS 코리아게이트와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정욱,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홍성선[32] , MBC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광남이 이후락을 연기하였다.[33]
-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김재욱 부장이 이후락과 유사한 행보를 보인다. 사실 이름만 보면 김재규+김형욱인데 극 중 행보를 보면 제5공화국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이후락과 가장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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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성 이씨 집성촌이다.[2] 17세손 락(洛)자 항렬.[3]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김정렬의 증언-[4] 두산백과에서는 소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는데 위키백과[3] 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대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군이 일본군에서의 계급을 고려해서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5]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6]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7] 당시 이후락 실장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부대' 혹은 '79호실'이라고 불렸다.[8] 라오스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9] 다만 이들은 관료에 가깝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장량 계열이라기보다는 소하 계열 브레인이다.[10] 이즈미의 주인이 회고하기를 이후락은 이즈미의 초밥을 아주 좋아해서 대사관이나 외부 연회 시에 이즈미의 초밥을 별도로 시켜서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락이 식당에서 초밥을 먹고 나서 같이 온 사람들과 종종 화투를 치고는 했는데 사람이 모자라면 이즈미 주인도 끼어서 같이 화투를 칠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로는 일본에 올 일이 있어도 이즈미에는 1번도 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11]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12] 1960~19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 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 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13]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 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겨우 이기는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4]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며칠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전임 중앙정보부장들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15] 이들 중에는 박정희의 처남이자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끌려갔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은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 사망했다.[16]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17]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청산가리 알약을 주머니 속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자 손을 주머니에 빼려 했는데 청산가리 알약이 땀에 붙어서 잘 안 떨어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두고 '이후락이의 기를 선제압하기 위한 수령님의 신묘한 술수'라고 자화자찬하는데 사람을 한밤중에 갑자기 불러내는 것이 공산권 국가에서는 상대를 당황하게 하여 허점을 포착하려는 고전적인 수법이기는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소련의 스탈린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밤중에 불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협상에서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오쩌둥의 힘을 한껏 뺀 것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찾아가서 먹고 자고 싸기만 하고 왔다고 할 정도.[18] 당시 김일성은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방북한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불렀고, 이후락은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참고로 일본의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총리 퇴임 이후, 마찬가지로 정계은퇴한 이후락을 "각하"라고 불렀다고 한다.[19] 여기서 진짜 재밌는 점은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 바로 전에는 주일대사였는데 하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완전 나라 망신을 제대로 저지른 셈.[20]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고 이후락과 악연이 있던 최형우 신민당 후보도 동반 당선되었다.[21] 2018년 현재 화폐 가치로 약 1,200억원 정도[22] 그러나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을 위로했다.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23] 이후락이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시키고 2년 뒤인 1973년 8월에 무리하게 납치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서거했다.[24] 여기에 언급된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 중에서는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김종필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살았으며 김종필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25] 울산시, 울주군[26] 신준호 푸르밀 회장(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의 장남.[27] 이들은 당시 상류층들이 주로 몰던 각그랜저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형 프라이드 승용차가 그랜저 앞으로 끼어들었고 이에 격분해 프라이드 운전자를 벽돌과 화분으로(...) 두들겨 팼다. 이들이 격분한 이유는 "건방지게 싸구려 프라이드 따위가 어딜 감히 그랜저를 쳐다보냐"(...)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얼마 안 가서 모두 풀려났고 피해자와도 합의를 치르고 사실을 숨겼다는 점이다.[28] 이들 학교들은 모두 남구에 있는 공업탑 로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세 학교 모두 공립화되었고 울산의 일반계 고등학교 입시도 평준화되었지만 담벼락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신정고등학교와 학성고등학교 간의 라이벌 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29] 형수가 한국인인 인연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금융 브로커. 메나도가 아닌 메리도라고도 불렸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86년, 삼성출판사),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도 등장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인터뷰에서 그를 일컬어 "대단한 수완과 정보력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경제 차관도 많이 주선했지만 반면에 (빚을) 크게 씌우기도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30] F-4 팬텀 25대 분량의 자금을 동북아시아 차관 중개로 확보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31] 당시 메나도가 소유한 노르웨이 아카 조선소 이름으로 사들였다고 한다.[32] 개명 전 이름, 개명 후 홍훈으로 활동 중이며 허준, 상도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33] 임채무와 박광남은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최불암 분)의 사위들로 고정 출연했었다. 최불암은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역을 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