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슈파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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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전선에서의 에르빈 롬멜의 참모였던 슈파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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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전선 사령부의 해임 전의 사령관이던 클루게와 참모진. 왼쪽 2번째가 한스 슈파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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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슈파이델은 2차세계대전 나치 독일의 육군 중장으로 참모직을 수행하였다. 파시즘에 동조하였지만 인종정책에는 반대하는 성향의 인물로써 반 히틀러 조직에 가담하여 롬멜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암살이 실패하면서 게슈타포에 의해서 수감되었다. 종전 이후 사면되었다가 독일연방군의 창설에 기여하였고 냉전시기 나토 지상군의 중부유럽의 사령부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칭송받는 지휘관이었던 에르빈 롬멜을 군사법원에서 불었다는 점으로 롬멜의 배신자라는 논란이 있다.
이력적인 면을 보면 독일 제국 예하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에서 임관하여 독일연방공화국군에서 전역한 근현대 독일군을 모두 체험한 인물이며 1차 대전부터 냉전 중후반까지 군인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2. 생애
슈파이델은 1897년 메팅겐에서 태어나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하였고 중위로 진급하였다. 솜 전투 등의 중대지휘관이자 부관으로써 참여하였고 전간기에도 계속 군에 남았고 한편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경제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26년에는 박사학위를 수료하였다. 이러한 경력으로 냉전기간 동안 지역사 및 롬멜과 관련된 전사(戰史) 서적을 출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슈파이델 자신의 군사법원에서의 증언으로 인해 롬멜을 배신하고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슈파이델은 1940년 프랑스 침공에 참모장으로써 활약하였고, 1942년에는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어 5군단, 8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다.
1944년에는 에르빈 롬멜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B집단군의 참모장으로 배속되면서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수비를 수행하였다. 당시 슈파이델은 분명 파시즘에 찬동하는 독일인으로써 독일이 세계의 중심에 서고 있다는 점에는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점차 인종차별주의적인 양상으로 흘러가는 히틀러의 정책에는 반대하였다. 때문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결성된 반 히틀러 조직에 가담하여 에르빈 롬멜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롬멜이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사령관자리를 내려놓을 시점에 롬멜의 참모장이 교체되는 일이 생기면서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1] 에르빈 롬멜이 잠시 휴식을 보내게 되면서 B집단군은 서부전선 총사령관이었던 귄터 폰 클루게가 겸임하게되었다.
1944년 8월에는 귄터 폰 클루게 마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2] 해임되면서 새롭게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는 서부전선의 총사령관[3] 으로 발터 모델 지명되면서 B집단군을 이끌게 된다. 그해 말에는 국방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알프레트 요들로부터 히틀러가 파리에 대해서 V1 · V2로 폭격할 것을 지시하였음을 전달하였으나 슈파이델은 자신이 이 명령을 상관인 모델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944년 10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여파로 게슈타포는 군 지휘부의 장군들마저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7일에 슈파이델도 체포된다. 하지만 롬멜이 히틀러에게 자신의 부관이었던 슈파이델을 구명하고자 서신을 보냈으나 효과는 없었다. 슈파이델은 군사법원으로 회부되었고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심문관으로써 조사한 진술서에 따르면 슈파이델은 애매하게 롬멜이 가담하였음을 언급하였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슈파이델의 증언 이전에 이미 지휘부 및 사법부에서는 롬멜이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묵인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국방군 총사령부 수뇌부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이텔, 장군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은 한스 슈파이델을 군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게슈타포에 의해서 투옥되었다. 이후 1945년에 연합군이 진격해오는 틈을 타서 슈파이델은 탈옥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종전이 되면서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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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호이징어와 함께 독일 연방군의 첫번째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1950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에 협조하였더라도 목적의식이 없었던 자는 재기용하는 노선을 택했던 터라 독일 연방군의 창설을 연합국에 승인받는 데에 군사 고문관으로 슈파이델을 초빙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 연방군을 창설하고 지휘부로 재기용되어 이후 아돌프 호이징어 대장과 함께 최초의 독일연방군 대장에 오른다. 그리고 아돌프 호이징어 대장과 마찬가지로 종전 이후 불법적인 준군사조직인 슈네츠 부대에 관여한 것에 대해서 논란에 오른다. 또 동독에서 자신을 롬멜의 배신자로 묘사한 영화에 대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승소한 일도 있었다.
정작 롬멜의 아내는 '뷔르템부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하지 않는다'며 롬멜의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를 부인했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다.[4]
이후 1984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