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모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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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맹활약한 독일 국방군 지휘관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장성 중 방어전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오랜 시간 참모 장교로 근무하다가 야전 지휘관으로의 활약은 독소전쟁에서부터였기에 프랑스 침공에서부터 그 명성을 떨친 하인츠 구데리안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처럼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종전 후 시간이 흘러 기밀 문서가 해제되고 르제프와 오렐 돌출부에서의 전투가 알려지면서 군사 전문가들에게 재평가되고 있으며 '''현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방어 전법의 지휘관'''으로 불리우고 있다.다음 항목에서 모델 원수를 간략하게 기술하기에 앞서, 서문으로 괴테의 문장을 인용하여 모델이 선사했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한다.(Den lieb ich, der Unmögliches begehrt.)"'''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 Field Marshal Model
오늘날의 독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ummodeln이란 단어는 영어로 remodel과 비슷한 의미로,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터 모델의 무훈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신조어이다. 영어로 model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Modell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표현인데 여기에 모델의 이름처럼 l자를 제외시켰던 유행어가 정착된 것이다.[2]
2. 생애
2.1. 초기 이력
작센 주 겐틴에서 독실한 루터회 신자인 음악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었고, 이때만 해도 라틴어와 그리스 문학 동호회에서 역사와 시에 관심을 갖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모델 일가가 새로 이사한 나움부르크가 포병과 보병 대대 주둔지였고, 군 장교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과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모델을 데리고 육군 기지 내 훈련을 구경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절친이 당시 프로이센 육군 대령의 아들이었던 또 한 명의 '''우주방어 명장 한스-발렌틴 후베(Hans-Valentin Hube)''' 상급대장이다.
모델은 성적이 우수했기에 대입 자격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스-발렌틴 후베를 비롯한 친구 6명과 함께 군에 보병으로 입대한다.[3] 사관후보생으로 추천서를 받아 입대했지만,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학교를 자주 결석했으며 체육 시간에도 혼자 그늘에서 쉬고 있었던 모델이 기초 군사 훈련을 견뎌낼 리가 없었다. 참다 못한 교관은 '군인에게 필요한 끈기와 강인함이 부족하다'며 모델에게 군대를 그만둘 것을 진지하게 권유했고, 당사자인 모델도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군인의 길을 단념하고 의대에 진학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델은 군대에 남았고, 교관은 이에 보답하여 병약한 사관후보생이 모든 훈련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단련시켜 준다. 소위로 임관한 모델은 사냥과 승마, 테니스를 즐기며 타 부대와 대항 시합까지 주최할 정도로 외형적으로 달라진 모습이었고, 자신을 단련시켜준 고참 부사관의 거친 언행과 닮아가고 있었다.[4]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병 장교로 마른 전투, 베르됭 전투, 솜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용맹을 떨쳐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이때 여단장이었던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5] 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포격에 여단이 큰 피해를 입는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델 중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 이수를 직접 주선하였다. 무공을 많이 세운 만큼 부상도 많았는데, 특히 1915년의 어깨 부상과 1916년의 다리 부상은 동맥을 다쳐서 긴 시간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퇴원 후 전선에 복귀한 모델을 오스카 왕자가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기간 동안 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를 한스 폰 젝트가 오스만 제국 파견 근무시 연락장교로 동행토록 하였으며 귀국 후 최고육군지휘부(OHL)의 병참 장교로 배치하였다. 1918년 2월, 오스카 왕자와 한스 폰 젝트의 추천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다. 랭스 공세에도 참전하여 대위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발터 모델은 중요 전장과 참모 장교를 모두 경험하였고 세 번의 부상에서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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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간기
장군참모 과정을 마친 엘리트 장교임에도 모델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에 실망하여 이대로 군에 남을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병력 10만 명과 장교 4000명, 무기 개발과 보유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가 선발한 4000명의 정예 장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해 1월의 대규모 기동 훈련에서 폰 란차우 장군은 모델에 대하여 "상급 지휘관에 걸맞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남겼다.
1920년, 루르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대장으로 치안 부대에 배속되었고 당시 신세를 졌던 주인집 딸 헤르타 후이센과 인연을 맺게 되어 1년 후 결혼한다. 모델은 헬라, 한스게오르크, 크리스타 세 자녀 모두 루터회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그의 결혼식을 집례했던 절친한 친우이자 지난 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이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이를 담당하였다.[6]
결혼 직후부터 4년 간 뮌스터에서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ssberg) 보병대장의 참모로 근무하는데 로스베르크의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로스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최전선의 패잔병들을 체계적인 부대로 재편성하고 종심방어 전술로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적절한 시기에 공세로 전환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무훈을 세웠는데, 특히 종래의 방어 전법에 반대하며 후방 진지 구축과 예비대의 운용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훗날 '동부전선의 소방수(Feuerwehr der Ostfront)' 발터 모델이 펼쳐낸 방어 전법은 '서부전선의 소방수(The Fireman of the Western Front)' 로스베르크 장군의 수제자임을 입증한 것. 모델과 소위 시절부터 친구였고 뮌스터에서도 함께 참모로 근무했던 에르빈 비오프 보병대장에 따르면 로스베르크 장군과의 인연과 여러 공통점들 덕분에 모델은 '''마법사의 제자'''(Zauberlehrling; 괴테의 발라드의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이 소련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한 교환장교 훈련에 병무국 교육과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수행, 6주 간 소련에 머무르며 기갑 부대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접하고 소련군의 무장 수준에 대한 심도 있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1928년, 모델은 장군참모 기본과정에서 전술 및 군사학을 강의하는 교관[7] 으로 근무하며 아돌프 호이징어, 페르디난트 요들, 지크프리트 라스프, 아우구스트 빈터 등에게 해당 학기의 가장 뛰어난 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령으로 진급한 1929년, 모델은 자신이 존경하는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 원수를 연구한 논문 《Gneisenau》를 발표[8] 하여 널리 주목을 받게 된다. 그나이제나우 원수의 좌우명이었던 "Fortiter, fideliter, feliciter(용감하게, 충실하게, 성공적으로)."는 모델 자신에게도 좌우명이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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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으로 개편된 후에도 병무국에서 신병기 개발, 테스트를 관할하던 8과(8. Abteilung - Technik)에 근무하던 모델은 루트비히 베크의 추천으로 1938년까지 베를린 참모본부에 재직하며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해외와 독일의 기갑 부대 발전 사항을 연구하며 기울인 엄청난 노력과 열정 덕분에 당시의 별명이 '차량화 부대 광신자(Armee Modernisimus)'.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군사 업무에만 열심이었다고 하나, 그의 오랜 상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뜻을 같이 하였다. 브라우히치는 나치당에 열광하는 젊은 장교들을 혐오했지만 나치의 재군비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모델 또한 독일의 국가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치에 의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군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귀족 출신 장교들과 그리 원만하게 지내진 못했던 모델에겐 나치에 의한 참모본부 숙청에 따른 브라우히치의 육군 총사령관 취임은 그의 이력에 전환기가 되어주었다.[10] 모델의 친나치 성향 여부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다만 모델이 나치 인사들과 친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사실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친했다는 말이 영국 전사학자들에 의해 정설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괴벨스의 일기에서 모델은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주목받기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과 친하다는 것은 프란츠 할더의 전쟁 일지에서 1939년 10월 19일, 모델과 괴링이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나 라이치는 자서전에서 독일 글라이더 연구소의 신형기 테스트에 모델이 에른스트 우데트,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알베르트 케셀링, 에르하르트 밀히 등 공군 장성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관했다고 기록했다. 병무국 8과는 공군 재군비에도 깊이 관여했기 때문.
1937년 가을의 대규모 기동 훈련 직후 모델은 스페인에 체류하면서 OKH를 대표하여 스페인 국민군 장성들과 세부 사항을 논의했는데, 이때 콘도르 군단의 공군 장교들이 모델 대령과 따로 만나서 전투 보고를 하고 국민군의 훈련 상황과 문제점을 개진하는 등 모델은 원래부터 공군 장교들과 친분이 깊었고,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후일 군 사령관으로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리터 폰 그라임 장군과 긴밀한 공조 하에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다. [11]
2.4.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및 서부 전역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4군단의 참모장이었던 모델은 폴란드 남부 침공 계획을 입안하였고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여 16군 참모장으로 영전하였다.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스당 돌파와 마지노선 우회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영국 상륙 계획을 입안하여 16군의 훈련에 몰두하나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보직을 변경,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모델은 여기서 병과에 상관없는 종합 훈련을 창안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참모들은 처음엔[12] 가중된 업무로 인하여 모델을 싫어했지만, 이는 매우 선진적이었고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2.5. 독소전쟁 초기 - Guderian’s Spearhead
[image]귀관의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지금 낭비하는 1분 1초가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진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기술적 측면을 서둘러 해결하라. 이미 시간을 많이 잃었다.
발터 모델 중장. 1941년 7월 3일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전차 198대 중 128대가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등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자는 부하 장교의 건의에 대하여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모델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휘하로 배속된다. 전차 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으나,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군단을 해체시켜 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Gruppe Model)'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스몰렌스크에서 31만 명, 키예프에서 66만 5천 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며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하였고 그 무훈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한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킨다. 이때 16기갑사단장이 학창 시절 급우였던 한스 후베 소장이었다.
사단장으로서 모델은 언제나 선봉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소련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교량을 확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하여 진격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선봉 부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 진지에 반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게 우회하여 중요 거점을 우선 점거하며 전술적 우위를 장악했고 연료 부족과 열악한 도로에 의한 전차의 비전투 손실, 악천후에 후속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자 모델은 정예 부대원들을 선발하여 전투단을 재편성, 이들 선발대를 거듭 진격시키는 전법으로 3기갑사단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13] 하는 압도적인 전과를 달성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독일군 기갑 부대 지휘관 중에서도 모델의 숙련된 부대 운용과 공격적인 지휘는 가장 돋보였고, 이는 작전 개시 4개월 만에 기갑대장으로 진급, 연이어 4개월 후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는 성과로 이어진다.[14]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3기갑군 산하의 41기갑군단장으로 참전하여 모스크바 20km 앞까지 도달하였으나, 강추위 및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델은 최후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며 3기갑군의 후퇴를 엄호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너져 버린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한계 지점의 전선까지 오고가며 지휘를 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15]
가장 선두에 진격해 있었기에 전군 퇴각 시 최후미를 맡게 된 모델은 역시 모스크바 13km 앞까지 진격했던 제6기갑사단장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와 처음으로 작전을 함께하는데, 동부전선의 특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전법을 창안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는 두 장성이 각별한 전우애[16] 를 이어가며 수많은 전투를 함께했던 나날의 시작이기도 했다.
2.6. 독소전쟁 중기 - Germany’s biggest and most powerful army
[image]대부분의 장비를 잃어버리고 인적 손실도 보충받지 못한 채 철도망마저 차단되어 3면이 포위된 9군의 암담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발터 모델 기갑대장, 저돌적인 야전 지휘관이자 냉철하고 치밀한 장군참모이기도 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곳의 간격을 닫는 것이다."
모델의 손이 작전 지도 상에 르제프 서부와 니콜스코예, 솔로미노 방면의 소련군 화살표를 가리켰다. "소련군 사단들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돌파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모델은 9군 사령부가 위치한 시쵸프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우리는 소련군의 측면에 역습을 가하여 궤멸시킨다."
제1기갑사단장 크뤼거 소장과 작전참모 발터 벵크 중령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의견에 감탄하고 말았다. 9군 작전참모 블라우로크 중령이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의 의문을 대표하여 방금 전에 도착한 신임 9군 사령관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장군님, 이 반격작전을 위한 '''증원군'''이 왔습니까?"
모델은 가만히 자신의 작전참모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Mich)!"'''
갑작스레 찾아온 거대한 안도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에 동참했다.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유쾌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려오게 되는 시쵸프카 9군 사령부의 첫 번째 날이었다. 새로운 정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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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arrell 《Hitler Moves East 1941-1943》
종전 후 오랜 시간 동안 스탈린그라드 주위를 둘러싼 남부가 주요 전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뒤늦게 르제프 공방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특히 소련의 붕괴 후 공개된 사료에 의하면 1년 여의 시간 동안 적어도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중부 르제프 전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레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여('''"하느님 맙소사, 우린 완전히 섬 안에 갇혀 있는 셈이로군."''' 첫 전선 시찰 후 모델의 소감.)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 버린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Abwehrlöwen)'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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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전상장 금장과 자이들리츠 작전
1942년 5월 23일, 2기갑사단이 위치한 벨리 전선을 시찰한 모델이 9군 사령부로 귀환하기 위해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여 50m 가량 이륙했을 때, 숲에서 소련군 파르티잔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파일럿인 빌헬름 하이스트 상사는 '마치 거대한 창에 꿰뚫린 것 같았다.'고 진술하였는데 탄환이 모델의 상반신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여 어깨로 빠져나가면서 특히 좌측 폐의 손상이 가장 심각했다.[20]
치사량의 출혈로 혼수상태였던 모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스트 상사가 피탄당한 슈토르히를 필사적으로 독일군 야전 병원 근처에 착륙시키면서 신속한 응급 조치와 수혈이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며칠 후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스몰렌스크의 병원으로 이송된 모델은 슐츠 교수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태였고, 에르푸르트 중령은 계속된 실혈로 인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9군 사령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고비를 넘기면서 회복이 무척이나 순조로웠고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했던 만큼 6월 16일,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으로 보내졌다. 이때 5번의 전상을 인정받아 전상장 금장이 수여되었는데 장군참모 출신 장성이 전상장 금장을 받은 경우는 매우 극소수라고 한다.
그의 부재 중에도 9군은 7월 2일의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으로 소련군 39군을 포위-양단-섬멸하며 점령지를 더욱 넓히는데 성공하였고 르제프 돌출부의 남부 간격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어진 소련군의 하계 공세마저도 9군의 방어 앞에 돈좌되었던 8월 7일, 발터 모델은 9군 사령관에 복귀하였고 격전을 거듭한 부하들을 추스르며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자이들리츠 작전의 성과가 없었으면 11월, 주코프의 화성 작전은 압도적인 대병력에 의한 완벽한 포위망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6군처럼 9군을 가둬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2.6.2. 화성 작전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3주 동안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르제프 동계 전투의 승리는 특히 독일군 지휘관 모델 장군의 역량 덕분이었다.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내어 최적의 순간에 승부처가 되는 전장(그는 모든 전역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었다.)에 투입하는 탁월한 재능은 그의 방어전 승리에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주었다.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로크 중령은 감청과 항공 시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무한궤도 군용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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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화성 작전; Operation Mars)을 완성하려 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라이플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하였다.
칼리닌 전선군은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은 북부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하였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은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며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21] ,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한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하였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만 명을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33만 5천 명의 사상자와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2.6.3. 들소 작전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18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의 르제프 돌출부를 장악하고 있던 중부집단군은 남부 방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소련군과 북부집단군의 보급 거점인 벨리키예 루키를 탈환한 소련군에 전면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결국 히틀러는 9군 전체와 4군의 절반을 르제프 돌출부에서 빼내어 전선을 축소시키는 중부집단군의 퇴각 작전을 승인한다. 사실 모델은 자신의 부재 중 9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 직후인 1942년 9월, 기갑사단의 주둔 없이는 방어가 어려운 돌출부를 포기하고 이들 정예 병력을 전략적 예비대로 활용할 것을 히틀러에게 촉구했지만 거부당했었다.[22]전시의 모든 군사 작전 중에서도 등 뒤에 적군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철수 작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다. 1943년 3월, 비야즈마-르제프 전역에서 실시된 작전명 '들소'(Operation Büffel)는 질서정연하고 능률적으로 진행된 후퇴 작전의 모범적인 예시로 남았다. 이는 상세하게 기술할 가치가 있으며 난해한 철수 작전의 기법을 배우기 원하는 참모 장교를 위한 교재로 다루어질 만하다. 현대전에서 군 부대만의 철수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떤 계획에서도 민간인들의 철수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 《Panzer Battles》
모델에게는 9군 예하의 25개 사단 - 장교 8691명, 군무원 2325명, 부사관 57083명, 병사 256825명 - 과 독일군에 협조했다는 죄책으로 보복당할 것이 확실시되는 소련 주민 6만 명[23] 을 3주 동안에 탈출시켜야 하는 중책이 주어졌다. 2월 4일, 모델은 들소 작전을 총괄하기 위한 특별 참모진을 구성하고 무선 통신을 엄금하며 오직 유선 전화로만 연락할 것을 명령했다.[24] 특별 참모진의 첫 번째 임무는 벨리시와 키로프 사이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00km의 주 철수로의 신설과 함께 소그룹으로 이동할 피난민을 위한 600km의 예비 철로 및 도로가 부설되었고 군수품 및 야전 식량 배급소, 의무 및 수의 구호소가 설치됐다. 200개 이상의 열차가 10만 톤의 물자를 수용했고 1만 톤 이상의 수송 차량이 집결했다. 변덕이 심한 3월의 날씨에 대비해 다양한 교통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공병 부대는 작전 막바지에 1,000km의 철로와 1,300km 가량의 전화선과 전선을 철거, 파괴한다.
민간인과 병원의 환자들이 가장 먼저 오렐 방면으로 이송되면서 3월 1일, 철수 작전이 개시됐다.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 매설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금 도로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썰매에 신속하게 옮겨 실으면서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진행됐다.
독일군은 오직 밤에만 움직였고 주간 이동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소련 공군에 발각되지 않도록 차량 운행을 통제하여 분산해서 이동했으며, 르제프에 잔류한 후위 부대의 철저한 기만전술로 인해 소련군은 독일군의 퇴각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뒤늦게 르제프 돌출부에서 독일군이 사라진 것을 파악했을 때엔 주코프가 춘계 공세를 준비하며 5군을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돌린 상태여서 더욱 추격이 늦어졌다. 독일군 후위 부대는 기민한 대응으로 소련군 추격 부대를 차단했고, 매설된 지뢰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은 소련군의 추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안전하게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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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29000명의 공병이 7주 동안 요새화시킨 폭 100km의 방어 진지에 병력, 장비를 무사히 온존시킨 9군과 4군이 도착하면서 들소작전은 성공리에 완수됐다.[25] 중부집단군은 530km의 광대한 전선을 200km로 축소하면서 15개의 보병사단, 3개의 기갑사단, 2개의 차량화사단, SS 기병사단을 예비 부대로 확보했고 4월 2일, 모델에게 곡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됐다. 들소 작전은 지금도 독일 연방군 사관학교에서 강의되고 있다.
2.6.4. 쿠투조프 작전 VS 헤릅스트라이제 작전
1943년 7월 5일, 모델의 9군은 쿠르스크 전투의 북방 공세를 맡아서 오룔에서부터 남하하여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이를 양단 직전까지 가며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작전 목표인 쿠르스크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전투 개시 일주일 만인 7월 12일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의하여 오렐의 사령부에 주둔 중이었던 2기갑군이 공격당하면서 급히 회군하였다.“모델은 성채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성채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발레리 자물린 교수[26]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27]
쿠투조프 작전은 오렐 탈환과 소련군 입장에서 철천지간 원수인 9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나 모델은 9군뿐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오렐에서 후퇴하는 헤릅스트라이제(Operation Herbstreise;가을여행) 작전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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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 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만 804명[28] ,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참모 1명만 동행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오렐에 남아서 작전을 지휘하던 모델은 최후까지 아군을 엄호하던 12기갑사단과 함께 하겐 라인(모델이 히틀러의 '후방 방어선 구축 금지' 지령을 무시하고 휘하 공병들에게 명령하여 독단적으로 구축해 놓은 브랸스크 방면의 방어 진지)에 도착한다. 특히 소련군 포로 1만 1,732명까지 데리고 와서 퇴각 작전에서 오히려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9군은 소련군 전략 예비대의 거대 부분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사령관 이하 9군 장병 전원은 7주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특히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끊임없이 최전선을 오가며 시간 단위로 직접 공군 폭격 지시를 내리고 예비대 투입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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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9군 주력 공격 부대인 하르페 전투단을 지휘하여 하루 평균 200대가 넘는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요제프 하르페 기갑대장, 9군이 양단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했던 돌출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며 전선의 지휘 체계를 굳건히 유지한 로타르 렌둘릭(Lothar Rendulic) 보병대장, 혼성 부대를 지휘하여 기갑전에서도 맹위를 떨친 요하네스 프리스너(Johannes Frießner) 보병대장의 무훈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들 세 명의 장성은 이듬해 상급대장으로 진급, 집단군사령관에 임명된다.
2.7. 독소전쟁 말기 - More Hole Than Front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병들이 자신감을 되찾았다
1944년 6월 28일, 9군 사령부 전쟁 일지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했고, 특히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는다.나의 최고의 야전원수 (mein bester Feldmarschall). 귀관이 아니었다면, 귀관의 영웅적인 노력과 탁월한 통솔력이 없었다면 소련군은 이미 동프로이센에 도달하였거나 심지어 베를린의 관문 앞에 와 있었을 것이다. 독일 국민은 조국을 위한 귀관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다.
1944년 8월, 아돌프 히틀러. 동부전선을 재건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무훈을 거듭 치하하며
특이한 것은 그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델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부임 첫 번째 명령은 16군 예하 사단의 공병 부대들을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 진지로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번에도 OKH의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과 히틀러에게 '''들키지 않고''' 진행해야 했다.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 판터 라인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로 진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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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자로서 모델이 임명되며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다.
6월 28일,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동부전선을 책임지다시피 했다.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부대의 전체 인원이 1명뿐인 경우나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More Hole Than Front)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쉴새없이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그렇게 무너지던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 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집스키(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адзиевский)의 제2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안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고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공군 지원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의 전력비가 5: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한꺼번에 해임되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인해 독일 군부의 근간마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발터 모델의 수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이토록 어려운 동부전선 중앙의 상황에서 모델 원수는 전선 재건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으며 오직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를 해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그의 서부전선 전임 이후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 방어 전략의 요충지로서 활용하게 된다.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동부전선을 재구축한 발터 모델에 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자(Miracle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델 하트는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 내어 전선을 재건하는 경이로운 재능'이라 기록하였다.
2.8. 서부전선 말기 - Miracle in the West
1944년 8월, 에르빈 롬멜의 부상과 귄터 폰 클루게의 해임으로 서부 전선의 지휘 체제가 진공 상태에 빠지자 '귀관이 서부전선에서도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명령을 받은 모델은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 팔레즈 포위망에 갇혀 있던 독일군의 4할을 탈출시키는데 특히 군단장 4명과 사단장 25명을 생환시켜서 서부 방어선을 재편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서부전선 총사령관직은 다시금 현역에 복귀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를 임명하여 모델로 하여금 B집단군 사령관에 집중하도록 조치한다.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모델 원수가, 지금의 정세를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그가 해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만일 그럴 수 없게 된다면, 그리고 귀하가 기대하던 신무기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총통께서 전쟁을 끝내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귄터 폰 클루게 원수가 1944년 8월 19일 자결 직전, 히틀러에게 보낸 친필 편지 중에서
2.8.1. 서부전선 재건
노르망디 상륙 이후 독일군의 퇴각을 무질서한 패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점령지를 축소하면서 주둔 병력을 서부 방벽으로 이동시켜 다시금 전선을 구축한 독일군 방어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이며 당시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조차도 1944년 9월 29일자 서한에서 '독일군이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전선을 완성시켰다.'고 결론을 내렸다.우리는 룬트슈테트 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공로자는 프로이센 인- 지난 여름 비스툴라 강에서 소련군을 저지한 뒤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 재건을 위해 부임한 발터 모델 원수였다'''. 적장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지략가였던 모델이 국방군의 참패를 막아냈다.
그는 패닉을 진정시키고 사기가 꺾인 독일군을 효율적인 전투 집단으로 재편성했다. 앤트워프에서 남쪽으로 260마일 떨어진 에피날까지, 모델은 기적적으로 독일군에 새로운 척추를 이식했다.
Joachim Ludewig의 저서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에 따르면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전의 서부전선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워왔으나, 룬트슈테트와 달리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조차 장병들의 사기를 고조시켰으며 특히 G군집단[30] 사령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Johannes Blaskowitz) 상급대장에게 최대한의 지휘 권한을 부여, 총통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하인리히 힘러의 개입[31] 을 배제하며 B집단군과의 연계 지점에 증원 부대를 투입하여 결과적으로 G군집단 18만 5천 명이 무사히 퇴각한 것은 노르망디 상륙 당시 거듭 혼선을 빚었던 서부전선 지휘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델은 OB West 부임 이후 블라스코비츠와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조차 거의 두절된 상황에서 대규모 연계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38년 베르너 폰 프리치, 루트비히 베크가 물러나면서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좌천된 모델이 드레스덴의 4군단으로 전임되었을 때 상위 제대인 3집단군 사령관이 블라스코비츠였고, 같은 루터교회 신자였던 그가 모델을 많이 챙겨주면서[32] 두 사람의 가족들도 친하게 지내왔던 오랜 인연 등으로 인해 서로 매우 잘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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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에는 영미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재편성 중이던 빌헬름 비트리히의 제 2 SS기갑군단을 즉시 투입하고 3시간 만에 방어선을 구축, 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분쇄하는 데 공훈을 세웠다. 제 9 SS기갑사단 사단장 대리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 정예 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고 한다.[34]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명장 오마 브래들리와 코트니 하지스가 지휘하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서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연합군 측의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에게 승리를 거둔 장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35]
전사에서도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 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재조정한 후 밀착 방어선을 형성한 당시의 독일군의 전과를 '서부 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 Miracle At The West Wall)'이라 기록하고 있다.
2.8.2. 아르덴 대공세
10월 말에 '라인 강 수비 계획'을 처음 전해들은 모델은 히틀러가 설정한 작전 목표가 불가능함을 잘 알고 제5기갑군 사령관 핫소 폰 만토이펠, 자신의 오랜 참모장인 한스 크렙스와 2개월에 걸쳐 의논하며 대안 작전(작은 해결책, 작전명 가을안개; Operation Herbstnebel)을 제안, 어떻게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2월 2일,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이 동부전선에서 효율적으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부대를 아르덴 대공세로 투입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시작된 회의에서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펜을 목표로 하는 것은 확률이 낮은 도박임을 강조하며 '작은 해결책'을 다시금 제안하였다. 모델은 침착하고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긴 시간 동안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며 발언했고, 히틀러마저도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고 말없이 경청하였다. 결국 총통이 모델에게 양보한 것이 있다면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나 진행 과정에서 안트베르펜 점령 확률이 낮아질 경우에는 작은 해결책으로 작전 목표를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아르덴 대공세의 초반에는 히틀러와 요들의 작전안에 명시된 공격 시간(11:00)을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 칠흑 같은 안개 속 적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전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낸 다음,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만토이펠과 모델의 새로운 작전안으로 기습에 성공을 거둔다. 공세 초기 독일군의 성과 덕분에 독일 국민의 사기가 진작되고 국방군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다."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에 있어 모델 원수와 나를 지원하는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의에 참석했던 80명의 고위 장교들 중 어느 누구도 애매한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발언하거나 질문하려 하지 않았다."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
그러나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 측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맑게 개인 12월 23일에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고, 이날 모델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크렙스에게 작전이 실패하였음을 명시적으로 알리고 히틀러에게 공격 중단을 건의하였다. 12월 28일에야 히틀러는 모델의 지속적인 건의를 받아들여 '작은 해결책'으로 전환하였지만 제공권을 장악하려던 보덴플라테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는 등 너무 늦은 후였다.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고 서부 전선의 기적을 통해 간신히 지켜낸 B집단군의 정예 병력과 장비, 연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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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모델 원수는 부관인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자신의 차량에 동승할 것을 명령하였다. "슈프링어." 잠시 후 모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침울했고, 시선은 여전히 그들이 가야 할 눈 덮인 언덕을 향한 채였다.
"지휘관은 휘하의 장병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겨야만 하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그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군.”
1945년 1월, 아르덴 대공세 중[36]
2.8.3. 드레스덴 폭격의 여파
1945년 2월 13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 당시 발터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던 아내와 딸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2월 16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의 작전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모델은 가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가를 구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한다. 모델은 부관인 테오도르 필링(Theodor Pilling)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보냈고, 필링 대령은 모델의 아내와 딸을 구출하여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37] 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2.9. 최후의 명령
1945년 3월, B집단군은 루르 공업 지대 사수를 명령받았으나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미군은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 루르 포켓 작전을 성공시키며 완벽한 제공권을 활용하여 루르 일대를 폭격한다. 모델은 포위망의 완성 전에 보유하고 있던 전차로 역습을 가하여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는 등[38] 탈출구를 확보, 휘하 전 병력을 마르부르크 방면으로 탈출[39] 시키려 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후퇴 불가 현지 사수(Ruhrfestung) 명령만이 반복되면서 결국 루르에 전군이 고립된다. 모델은 텔레타이프와 항공편을 통해 서부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과 히틀러에게 몇 차례나 후퇴 의사를 타전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4월엔 휘하 참모인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40] 과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 대령을 포위망에서 탈출시켜 베를린의 총통사령부에 출석, 직접 히틀러에게 B집단군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허가를 구하였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한스 크렙스(Hans Krebs)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image]"포위망 안에서 최고의 전우는 포위망 밖에서도 전우가 되어준다. (Der beste K.I.K wird K.A.K)"
자신을 12군 참모장으로 임명한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모델의 곁에 남으려 했던 라이히헬름 대령과 마지막으로 저녁을 함께하며, 장교 식당 방명록에 모델이 적어 준 문장[41]
네로 명령, 즉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루르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부 장관 슈페어와 처음부터 협력하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여 독일 산업 지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던 루르를 지켜낸다. 그런 그에게 미군의 매튜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하였다. 모델은 서한을 손에 든 채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에게 질문하였다.
"우리는 역사의 빛 앞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일을 모두 한 걸까?" 바게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모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패배한 사령관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난처한 침묵이 이어졌고 모델은 스스로 답했다. "고대의 패장들은 독을 마셨다."[42]
같은 날인 4월 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 하에 훈련도 받지 못하고 총을 손에 든 유소년들과 노년층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43] 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4월 17일 아침을 기점으로 B집단군의 해산은 명령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됐다. 장병들에게는 3개의 선택지 - 1. 항복 2. 집이 가까운 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사복 차림으로 귀가 3. 포위망을 탈출하여 중부 독일 방면의 아군과 합류 – 가 주어졌고 장교나 노련한 부사관들이 병사들과 동행하여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44] 이 날, 루르 전역의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만 명(국민돌격대 25만 명, 일반 장병 6만 8천 명)에 가까웠다.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시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 달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하였다.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2.9.1. 1945년 4월 20일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 이후에도 동행한 참모들과 함께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괴벨스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침묵을 깼다."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
발터 모델 원수, 1944년 서부전선[45]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다.'''"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2.9.2. 1945년 4월 21일, 종전 이후
다음날 아침, 모델은 빈리히 베어 소령을 긴히 불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친필 편지와 결혼반지, 소지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다. 귀관의 실력과 경험이면 해 낼 수 있을 테니 이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에, 모델의 그러한 최후를 원치 않은 베어는 함께 살아남을 것을 간청하였고 몇 분의 침묵 끝에 모델은 이렇게 말하였다."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어."
발터 모델 상급대장, 1943년 3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오랜 친구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내린 마지막 결단에 대하여 아들인 한스게오르크가 의견을 구하자 위와 같이 답하였다
다시금 베어는 포위망에서 탈출할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설득하였고, 모델은 신중하게 최악의 결말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오솔길 밖으로 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뒤 베어는 식량을 구하고 탈출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고 모델은 이를 허락하였다.'''"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정오 무렵 귀환한 빈리히 베어에게 필링 대령과 미하일 중령이 모델 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려주었다.[46][47][48]
아들인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은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사관후보생으로 동부 전선에서 전투 중 지휘관인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아버지의 최후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전 당시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후일 독일 연방군 육군에 입대, 그가 집필한 교범이 오늘날에도 미합중국 공군의 훈련 교리로 사용될 만큼 탁월한 전문성을 인정 받았으며 육군 준장으로 7기계화여단장, 연방군 정보본부장을 역임하였다. 한스게오르크 모델 장군은 독일 국방군 원수의 자제 중 연방군 장성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49] 로,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군, 독일 국방군, 서독 연방군에 이르기까지의 장군참모 역사와 인명록을 집대성[50] 하여 연방군의 기틀을 다졌다. 이는 독일 연방군 시대에 이른 현재에도 꾸준히 갱신되어 출간되고 있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모델 장군에게 십자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55년 7월, 한스게오르크는 빈리히 베어의 도움을 받아 사망 장소에 가매장되었던 아버지 모델 원수의 유해를 휘르트겐 숲 인근 독일 군인 묘지에 이장한다. 아른헴 전투, 휘르트겐 숲 전투, 아르덴 대공세에서 자신의 지휘를 받았던 부하들과 사후 1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3. 평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규모 방어전의 마스터. 언제나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에 임했고 때로는 휘하 장병들에게 냉혹하고 무자비한 임무를 요구했지만,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냈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의 부하들을 두려움 속에 남겨둔 적이 없었다."
게르트 니폴트 독일 연방군 육군 중장[51]
《Battle for White Russia: The Destruction of Army Group Centre, June 1944》
- 방어전에 너무도 뛰어나서 공세 지휘관으로서는 그보다 한 수 아래라는 말을 듣기도 하나, 그가 공세를 맡았던 때(쿠르스크 전투, 아르덴 대공세)는 이미 소련군이나 영미연합군 전력이 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을 시기라서 그의 실력을 평가하는 데에 그리 적합하진 않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기민하고 과감한 전술로 교량을 장악하고 가교를 부설하여 후퇴하는 소련군을 따라잡을 만큼 쾌속 진격을 해냈으며 프랑스 전역에서도 16군의 참모장으로 룩셈부르크, 남부 벨기에를 거쳐 스당을 돌파하고 마지노선 북부를 차단하며 스위스 국경까지 도달하는 급속 진격을 성공시켰다.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대의 공격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기민하게 대응하면서도 최상의 순간에는 공세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포위 섬멸전을 이끌어가는 것이 큰 특징.
- 뢰어리히트 장군의 1956년 3월 1일자 기록에 따르면, 1945년 4월 말 자신이 포로가 된 직후 조지 S 패튼과 대면하게 되었는데, 패튼은 모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특출나는 역할을 도맡았던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패튼은 미군 내에서도 여러 모로 예외적인 지휘관이었는데, 오히려 적군인 모델에게서 공통점을 찾고 일종의 롤 모델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뢰어리히트는 받았다.
- 독일군이 선호하던 임무형 지휘체계 대신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한 이질 분자였다. 부대를 세밀하게 통제하는 방어 전법을 추구하였고 무선 감청과 정찰을 중시하여 최대한의 정보 수집을 기반으로 작전을 수립, 승리를 거두었지만 임무형 지휘체계에 익숙했던 참모들은 자신들의 작전안에 일일이 간섭한다며 싫어했다. 특히 모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상 공세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를 직접 경험했었기에, 휘하 장교가 제출한 전작서의 작전 과정에 구체적인 전술 계획 없이 Wellenförmige Angriff(파상공세)로 대신하려 들면 읽다 말고 작성자 면상에 집어 던졌다고 한다.
-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모델은 부하들을 엄정하게 질책했던 것은 그들이 멍청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뿐이며, 참모장교 한 사람의 잘못은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참모장교들에게 유독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고 이를 받아들였다.[53] 또한 “사단장과 군단장들은 모델을 정면으로 마주할 땐 그를 두려워했고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못하면 가차 없이 질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델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모델의 지휘 방식을 이해한 참모들과 부대 지휘관들, 일선 장병들은 보고를 받을 때 전선에서의 고충뿐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나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전부 들어 주는 발터 모델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여기고 존경했다.
- 대신 보고가 정확하고 대답이 충실하면, 혹한의 날씨에 대전차포병들이 자리를 이탈하여 대형 모닥불 앞에서 온기를 쬐고 있어도 관대하게 봐주었다. 빙긋 웃으며 "모닥불로 돌아가서 몸을 더 데우도록 하게."라고 말한 뒤 재빨리 사라져 주는 '작은 키에 모노클을 착용한 장군'이 9군 사령관 모델임을 Bernhard Averback는 뒤늦게 깨달았는데 어느새 모닥불 앞에 다시 모인 이탈자 동료들이 박수 갈채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56]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는 장병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장성은 발터 모델이었으며 당시 동부 전선에서 유행하던 말이 "모델이 있는 곳에선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Wo Model ist, geht's nicht schief).", "모델 한 사람의 가치는 수 개의 기갑사단에 버금간다."였다고 한다.
-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군사적 책임이 중첩된 적은 없었다.'는 평가에 걸맞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만 모델이 가지고 있던 별명과 유행어가 도합 10개가 넘었다. 특히 독일군 장병들은 "이번에도 모델(Model)이 리모델(model)해 냈다. -Das hat Model wieder hingemodelt-"라는 말을 즐겨했는데 여기서의 동사 modeln은 그의 이름에서 착안하여 '적군의 총공격을 막아내고, 전선을 만들어냈다'를 의미하였다. 동부전선에서도 서부전선에서도 이등병부터 원수에 이르는 모든 계급의 독일 군인이 모델의 실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57]
- 실로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로 휘하 30개 사단 대대장들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었고 이들과 나눈 대화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며 부하들의 서훈도 잊지 않고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한 번도 자신에 대한 특별 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으며, 관례적으로 고위급 장성에게 인정되던 혜택조차 맹렬하게 비판하며 거부했다. 그래서 1945년 1월 24일, 모델의 54번째 생일 선물로 만토이펠 기갑대장과 필링 대령이 비밀리에 합작하여 아들인 한스게오르크를 B집단군 사령부로 데려오면서도 아버지 모델이 '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인 사단의 사관후보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군율 위반'이라며 화내지 않을까 우려했다. 다행히도 모델 부자의 재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발터 모델은 저녁 식사 시간에 깜짝 등장한 아들의 모습에 무척 기뻐하였고 한스게오르크는 최전선을 시찰하는 아버지와 동행하고 장군참모들과 눈싸움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생애 마지막 만남이 된다.[58][59]
- 아르덴 대공세가 한창이던 1944년 12월 23일 이른 아침, 모델은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최전선의 부대원들과 함께 보낼 예정이니 그들에게 가져다 줄 작은 선물을 준비할 것을 당부하며 말을 이었다.
슈프링어는 회고록에서 이를 '언제나 장병들을 먼저 생각했던 위대한 군인의, 나에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60]
- 파울 카렐은 모델과 장병들의 관계를 충전기와 건전지에 비유하였는데 모델은 피젤러 슈토르히와 퀴벨바겐에 탑승하여 상시 전선을 시찰하였고 악천후에 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면 러시아 썰매, 스키를 타거나 기마(모델은 상당히 뛰어난 승마술의 소유자로 모델 특수기병여단- Special Cavalry Brigade "Model"- 을 직접 편성하여 훈련시켰고 춘계, 하계의 진창 속 전투에서 우수한 기동력을 발휘하게 된다), 두 발로 걸어서라도 매일 전선의 병사들과 만났으며 이러한 사령관의 모습은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의 서부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지옥 속에서 갈고 닦았다는 발터 모델의 직설 화법은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총통과의 설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도 조종사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히틀러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모델은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하였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결정한다.[63]
- 일련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사령관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에 대해 불평했다. "1941년에 보여줬던 투쟁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 거요? 그렇게 용맹했던 사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히틀러는 원수와 상급대장, 대장급의 고위 장성들에게 현금, 수표, 귀중품, 부동산 등의 거액 뇌물을 지급해왔고, 나치와 거리가 먼 군인이었다고 평판을 얻은 장성들조차 히틀러에게 수십만 마르크에 달하는 '충성의 대가'를 수령하였다.
- 구데리안은 모델을 '대담하고 지칠 줄 모르는 군인'이라고 평가하였고 동료 장성들은 물론 연합군과 전사학자들도 '강철 같은 체력과 의지의 소유자'임을 인정하였다. 새벽 1시나 2시까지 일했으며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지도를 분석하고 아침 6시에 사령부를 출발하여 10시간 동안 최전선을 시찰'했고 전날 과음을 해도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났다. 모델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져 있던 최후의 전장 루르에서도 기상 시간을 지키며 전선의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대규모 작전 중일 때에는 아예 밤을 지새워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군 지휘관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권리가 없다." 모델의 지휘 철학이었다.
- 항상 모노클을 착용하고 각 잡힌 군복 차림과 경례 자세 등 외양에서부터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온 모델은 비정치적인 성향, 용전을 펼친 적에 대한 기사도 정신 등 사상적으로도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포위망에 갇힌 채 항공 탈출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부하들의 곁에 남았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한 제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Mikhail Grigoryevich Yefremov) 중장에 대하여 독일군 장교들은 포로가 된 소련군 장교들과 함께 2열로 마주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였고 종전 후 소련 국립 묘지에 이장할 때 예프레모프의 유해에는 금장 손목시계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2009년에 방영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를 '상대편의 야전 병원에도 포격이 가해지던 시기에 무척이나 이례적인 경우'라고 표현하였다.
-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이 다른 추축국 진영 군대에 대하여 대전 중에도 종전 후의 회고록에도 평가 절하했던 것에 비하면, 모델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시절 헝가리군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헝가리 1군 사령관 러커토슈 게자(Lakatos Géza) 상급대장에게 상당한 지휘 권한을 부여하였다. 특히 헝가리군 전차 부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1944년 5월 4일, 헝가리 왕립 제2전차사단에 4호 전차 H형 12대, 3호 돌격포 10대, 6호 전차 티거 10대가 모델의 명령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이는 최근 국내의 게임 뉴스 게시판#에 소개될 만큼 매우 예외적인 조치이다.
4. 행보관 원수의 동분서주 일화
모델은 독일군 역사에 유일무이하게 동부전선의 남부/중부/북부 3개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겸임하였고, 서부전선에서도 집단군 사령관과 총사령관을 겸임하였으며, 이때에도 변함없이 매일 최전선을 직접 시찰하는 지휘로 거의 모든 전선[69] 에 걸쳐 수많은 장병들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다.‘먼저 신임 9군 사령관 모델 장군에 대해 소개하자면, 작은 키에 강단 있고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고 몸놀림이 날렵하고 기민했다. 짙고 검은 머리칼에 항상 도수가 높은 모노클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렌즈 너머의 푸른색 눈동자는 자유분방하고 밝게 빛나고 있어서[68]
그가 무척 좋은 심성의 소유자임을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그래서인지 당대의 동료 군인들도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전통적인 프로이센 장군참모 사고방식을, 매우 비정통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모델의 지휘/업무 스타일과 평소의 언행을 고참 하사관에 많이 비유하였다.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 일기 기록관인 퍼시 에른스트 슈람(Percy Ernst Schramm) 교수는 “모델은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을 지켜냈고 이러한 그의 성과는 서부전선 독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작은 일에도 신경 쓰는 모델의 지휘 방식은 모델 특유의 뛰어난 두뇌, 날카로운 논리와 결합하여 최악의 전황에서조차 해결책을 찾아냈으며 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장점'''.”이라고 평가했다.[70]
이렇듯 공인된 행보관답게 부하들의 기념일 선물도 자상하게 챙겨주었는데 호화로운 저녁 만찬, 와인 두 박스, 특별 휴가, 윤전기[71] , 티거 전차[72]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은 ‘모델 원수가 매우 풍자적이고 재밌는 유머 감각의 소유자임을 뒤늦게 알았다’며 아쉬워했는데 다름 아닌 루르, 독일군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이자 모델 자신이 정신적/육체적으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시기에 모델의 유머감각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였고,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모델의 강건한 외양 안에는 선량하고 유머러스한 내면이 간직되어 있다고 묘사했다.[73]
그렇게 모델은 독일 역사의 유명 일화나 독일 고전 문학 작품을 인용하여[74] 현재 자신들의 상황을 비유하는 농담을 즐겨 하며, 항상 최전선에서 언제나 낙천적인 모습으로 엄청난 무훈을 세웠다. 모델의 독창적인 지휘 스타일과 그의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일화들과 독보적인 무훈은 한데 어우러진 것으로, 이를 분리해서 기술하는 건 불가능하다.
4.1.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모델의 부하들은 ‘모델 사령관은 자신의 롤 모델인 프리드리히 대왕과 생일이 같다’는 식으로 상관의 이름을 롤 모델, 리모델로 즐겨 활용했는데 당사자인 모델 스스로도 이러한 유행어나 농담에 재밌어 하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야심차게 사용하기도 했다.[75]
기회가 될 때마다 모델은 아내와 통화했고, 세 자녀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전간기에 모델은 가족들과 정치, 군사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76] ,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도 모델의 편지엔 전투에 대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 그 대신 평상시였다면 아빠[77] 가 직접 10대 자녀들을 마주보며 대화했을 내용 -성경 구절, 루터의 격언, 쉽게 풀어놓는 루터 교 교리- 을 편지로 쓰는 모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1941년 10월 27일자 편지에서 모델은 아들에게 50번째 엽서를 받은 기념일이라 자축하며, 전날 폰 보크 원수와 라인하르트 장군과의 반가웠던 만남을 언급한 뒤 우편번호가 새롭게 30957로 바뀌었다고 밑줄까지 그어가며 강조했다. 이는 모델이 기갑대장으로 진급, 사단장에서 41기갑군단장으로 영전하며 소속 사령부가 바뀌었으니 주소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폰 보크와 라인하르트를 만난 것도 같은 이유. 그런데 편지 어디에도 진급과 영전에 대한 내용이 없다.[78]
1941년 11월 20일자 편지에선 “우린 여기서 오랫동안 동계 스포츠를 즐기게 될 것 같구나.”라고 유쾌하게 적었는데, 같은 중부집단군 소속 장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동계 전투의 고충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나마 사실적으로 털어놓았던 내용과 매우 대조적이다.
당시에 이미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한스게오르크는 편지 덕분에 평소의 아버지가 최전선과 사령부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알 수 있었지만, 군 지휘관으로서 모델의 전투에 대해선 알 수 없었는데 그게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고 한다.[79]
4.2. 동부전선에서
- 르제프의 고요한 새벽
그래서 제6보병사단은 9군 사령관을 위해 사냥용 마차와, 길 안내를 맡은 현지 러시아인 학생과, 경호와 수행을 맡은 아렌스 중위를 준비했다. 별이 총총 떠오르는 고요한 밤을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평소의 긴장이 완전히 풀린 모델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겐틴에서의 추억과, 드레스덴에 있는 아내와 세 자녀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며 친근한 어조로 아렌스의 가족 안부를 물어보았다.
마침내 다다른 목적지엔 신비로운 안개가 자욱했다. 검은 뇌조 세 마리가 사냥꾼들의 눈에 띄었지만 사정거리 밖이었고, 모델은 사냥총을 들고 뇌조에게 접근하는 대신 잠든 만물이 깨어나는 새벽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그가 르제프 전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총성과 포화가 사라진 고요한 밤이었다.
그렇게 두 명의 독일인과 한 명의 러시아인, 뇌조 세 마리가 함께 잊을 수 없는 새벽을 목도했다. 아침 햇살과 함께 안개가 걷히고 방아쇠 한 번 당기지 않은 사냥이 끝났다. 6보병사단 사령부에 돌아온 모델은 사단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또 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시쵸프카로 복귀했다.
1년 반이 지나서 1943년 7월의 쿠르스크 전역. 아렌스 중위는 모델과 재회했는데 모델이 먼저 아렌스를 알아보았고, 상급대장은 그날 밤 중위와 나눴던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애독자의 선물
- 사우나에서 편안한 휴식을
"뭘, 벌거벗으면 장군인지 모를 수도 있지."
- 명령은 명령이지!
"지금 제 정신들이냐, 좀 물러서!!"
그때 무질서한 관객들 속에서 뜻밖의 단합된 외침이 들려왔다.
"안 돼, 모델이 '우리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잖아!!"
대답과 함께 더 많은 장병들이 전차와 같은 기세로 몰려 들어갔다.
그로스만 장군은 매우 흡족한 어조로 자신의 저서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그래, 명령은 (언제 어디서나) 명령이지!”[80]
- 중환자의 계급이 병원장보다 높을 때 발생하는 일
불과 며칠 전에도 분명히 위태로운 상태였던 중환자가, 환자복 대신 예의 칼 같은 군복 차림으로, 병상에서 9군 사령부로 직접 명령할 수 있도록 모두를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이미 9군 사령관 대리가 임명되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병원장,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를 위시한 병원의 모두가 활력이 너무도 넘치는 나머지 당장 박차고 나갈 기세의 중환자(상급대장)를 만류하면서도 떨고 있을 때 마침 OKH 소속 장성이 도착한 것. 중환자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행동력, 경이로운 회복력에도 요양은 불가피했다.
블루멘트리트는 모델을 드레스덴의 자택으로 보내어 수년 만에 온 가족의 재회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중환자는 평화로운 긴 잠에 빠져들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드레스덴의 4군단 사령부도 물심양면으로 모델의 요양을 도왔다. 그렇게 지치지 않던 열정도 끝없던 걱정도 멈추었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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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부전선에서
- 약식 지휘봉을 약식 지휘봉이라 부르지도 않고
제작비도 많이 들고 제작 기간이 워낙 오래 걸리기에 임명 2개월 후인 1944년 5월 31일에 수여된 원수 지휘봉(Marschallstab)의 경우, 1944년 1월 복귀 이후 서훈과 진급에 관련된 휴가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하룻밤도 묵지 못한 채 오로지 전선에서의 지휘에만 매진했던 모델은 원수로서 예식 행사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사진이 촬영될 기회조차 없었다.
반면 '국방군 원수들이 수면 시간 외에는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는' 약식 지휘봉(Interimsstab)을 들고 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이유는, 한스게오르크가 아버지에게 약식 지휘봉의 행방을 질문하자 모델은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고 한다.
>"아, 그거? 방해만 돼서 두고 왔어."[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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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장성의 전사 사례가 급증하면서, 히틀러는 장군참모 출신 장성들이 적군의 눈에 잘 띄는 표적이 되지 않도록 '군복 바지의 붉은 세로줄 부착 금지'를 명령한다.
그러한 시기에 원수의 상징인 그 어떤 지휘봉도 들고 다니지 않고, 자신보다 연하의 상급대장이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동료 원수들에 비해 어린 나이였고, 사관후보생으로 입대 이래 평생 동안 옆머리를 바짝 깎은 프로이센 헤어컷을 유지할 만큼 짙은 머리색과 숱의 모델과 대면한 일선의 병사들은 '원수 각하(Herr Feldmarschall)'도 아니고, '사령관님(Herr Oberbefehlshaber)'도 아닌 '대령님(Herr Oberst)' 혹은 그 비슷한 직위로 부르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84]
모델보다 23살 어린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은 모델이 진심으로 웃을 때 '상냥한 소년처럼 웃는다'는 인상을 받은 것을 보면 신병들의 착각도 무리가 아니었는지, 모델 원수 혹은 모델 사령관을 못 알아본 일화들은 많은데 그러한 착각을 정정해주었다는 내용은 없다.
- 아르덴 대공세 초반 독일군의 압도적인 전과로 1500명이 넘는 포로들이 동시에 밀려들고 여기 저기 널브러진 미군 차량, 전차 등의 잔해로 인해 병목현상이 발생하자, 초조해진 5기갑군 사령관 만토이펠은 66군단장 발터 루흐트에게 "반드시 차량들을 끌어내도록, 포병대 없이는 생비트를 점령할 수 없다."고 다그쳤다. 마침 이를 본 모델은 약식 지휘봉을 들고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 기사 철십자 훈장은 원수와 소령을 행복하게 만든다.
원수와 부관은 차를 타고 아른헴 대교에 도착했으나, 완전히 노출된 탁 트인 대로에서의 차량 이동은 불가능했다. 모델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공호로 뛰어내렸고, 슈프링어도 모델의 뒤를 따라서 수백m를 엄폐 이동했다.
벙커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는 갑자기 눈앞에 원수가 나타나자 얼어붙었고, 뒤이어 나온 슈프링어가 ‘원수 각하의 도착을 자네의 상관에게 알리도록.’이라고 명령하자 순식간에 안쪽으로 사라졌다. 바로 크나우스트 소령이 나와서 모델에게 보고를 올렸다. 전후 반세기가 흐른 후에도 슈프링어는 이날 모델과 크나우스트 중 누가 더 행복해 보였는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고 한다.[86]
- 스페셜 에피소드
'아른헴에서의 전투가 종결된 후, 평소처럼 전선을 시찰하던 모델 원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금세 잠이 들곤 했다. 곤히 잠든 그는 공중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깨지 않았다. 실력파 운전병인 슈미트 상사와 한센 상사, 나를 비롯한 수행 장교들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루는 아이펠 방면의 탁 트인 산악도로를 통해 사령부로 귀환 중이던 우리는 라이트닝 두 대의 공격을 받았다. 차에서 뛰쳐나왔을 때, MG기관총 탄환이 바로 옆에 쏟아지는 걸 느끼며 우리들은 길가의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깊게 패인 도랑이 우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었다!
그때 우리의 용감한 운전병이 마구 고함을 지르며 도랑 위로 몸을 날리더니, 라이트닝이 선회하여 다시금 기관총을 퍼붓는 데도 개의치 않고 도로를 가로질러 재빨리 차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운전병은 그대로 차를 도랑까지 몰고 내려왔다. 이렇듯 장병들 모두가 모델 원수를 좋아했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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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 두 박스와 1948년의 크리스마스 선물
1945년 2월 4일은 슈프링어가 원치 않았던 SS로의 복귀일이었다. 모델 원수는 참모장 한스 크렙스와 함께 참모 장교들이 출석한 송별 파티를 주최했고, 모두가 와인 잔을 들고 따스한 환송 분위기를 만들어서 슈프링어는 쉽게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슈프링어에게 모델은 자신과 크렙스의 서명이 담긴 기념사진을 선물하였다.
작별 인사는 한 잔의 와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송별 파티를 마치고 B집단군 사령부를 출발하기 위해 슈프링어가 차에 탑승하려는데, 도저히 그가 비집고 앉을 공간이 없었다. "기념품을 뭐 이리 많이 실었나?" 슈프링어의 웃음 섞인 질문에 운전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뭘 한 건 없고요, 원수 각하께서 직접 와인 두 박스를 넣어두고 가셨습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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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포로수용소에 입소하는 과정에서 슈프링어는 군복과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에도 국방군 장교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은 SS 장교답게 슈프링어는 수용소를 관리하는 영국군들과도 친해졌는데 1948년 크리스마스, 부소장은 성탄절 깜짝 선물로 슈프링어에게 보관 중이던 그의 압수품 상자를 보여주었다.
상자 속에서 위의 사진을 찾아낸 슈프링어는 '이젠 세상에 없는 전우들의 사진을 가족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부탁했고 부소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모델과 크렙스의 기념사진은 수용소 예배를 담당하는 목사와 인근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슈프링어의 고향인 킬까지 무사히 전달되었다. 슈프링어에겐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89]
- 생전엔 짧았으나 사후에도 이어진 우정
그러나 아르덴 대공세를 앞두고 3년만의 재회에서, 모델이 너무 쉽게 지난 악연을 청산하고 만토이펠 또한 화해를 받아들이면서, 가난한 음악교사 집안 출신 원수와 명망 높은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 기갑대장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모델은 6살 연하의 만토이펠을 인간으로서, 군인으로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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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토이펠이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후 동부전선으로 재배치되면서 생전에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이들의 우정은 짧은 시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만토이펠은 모델의 54번째 생일에, 자신이 사단장이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소속된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를 B집단군 사령부로 보내주는 등 우정을 이어나갔다. 휴가를 받을 수 없는 사관후보생이 B집단군 사령부에 갔다가 육군 원수(이자 아버지)에게 군법 위반으로 친히 박살나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B집단군 사령관 특별 보좌 임무로 파견하도록 조치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사관후보생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침체되어 있던 모델과 B집단군 사령부 장교들이 한스게오르크 덕분에 활력을 되찾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모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3기갑군 사령관 만토이펠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서 전투 중이던 한스게오르크를 호출하여 아버지 모델 원수의 운명을 알려준 뒤, 18세 소년을 전투 임무에서 배제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독일의 패배는 정해졌고, 모델 가족은 하나 남은 아들을 더 이상 잃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스게오르크는 전임 명령을 거부했고, 동료 부대원들과 함께 최전선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만토이펠은 한스게오르크가 모델 가족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임을 재차 강조하며 충고했다.
"사령관으로서 내겐 귀관을 전임시킬 수 있는 정당한 권한과, 귀관을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네."[91]
만토이펠의 명령과 배려로 한스게오르크 모델은 살아서 종전을 맞이하였고, 전후 서독에 군대가 사라지자 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92] 하고 저널리스트를 지망하였으나 서독 연방군의 부활과 함께 군에 재입대한다.
5. 주요 보직 내역
- 1938.11.10 ~ 1939.10.25 : 4군단 참모장
- 1939.10.25 ~ 1940.11.13 : 16군 참모장
- 1940.11.13 ~ 1941.10.01 : 3기갑사단장
- 1941.10.01 ~ 1942.01.14 : 41기갑군단장
- 1942.01.15 ~ 1943.11.01 : 9군 사령관
- 1943.07.12 ~ 1943.08.14 : 9군 사령관 겸 2기갑군 사령관
- 1944.01.28 ~ 1944.03.31 : 북부집단군 사령관
- 1944.04.04 ~ 1944.06.27 :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 1944.06.27 ~ 1944.08.17 : 중부집단군 사령관 겸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 1944.08.17 ~ 1944.09.04 : 서부 전선 총사령관 겸 B집단군 사령관
- 1944.08.17 ~ 1945.04.17 : B집단군 사령관
6. 진급 내역
- 1910.08.22 : 소위(Leutnant)
- 1915.02.25 : 중위(Oberleutnant)
- 1918.03 : 대위(Hauptmann)
- 1929 : 소령(Major)
- 1932 : 중령(Oberstleutnant)
- 1934.10.01 : 대령(Oberst)
- 1938.03.01 : 소장(Generalmajor)
- 1940.04.01 : 중장(Generalleutnant)
- 1941.10.01 :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2.02.28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4.03.31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
- 1914.09.20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03.29 : 바이에른 전공 훈장 4급
- 1915.10.19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7.02.26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17.11.22 : 튀르크 전역 참전 기념장 철 초승달장
- 1917.11.22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전공 훈장 2급
- 1917.11.22 : 오스트리아-헝가리 전공 훈장 3급
- 1918.08.27 : 전상장 은장
- 1935.01.26 : 최전선 전투 명예장
- 1939.05.31 : 스페인 전역 참전 기념장 검 동장
- 1939.09.22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02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07.09 : 기사 철십자 훈장(344번째 서훈)
- 1941.08.29 : 기갑전 휘장 은장
- 1942.02.17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74번째 서훈)
- 1942.05.25 : 1939년 제정 전상장 금장
- 1942.07.15 : 1941/1942 동부전선 동계 전역 기념장
- 1943.04.02 :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28번째 서훈)
- 1944.08.17 :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17번째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