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아데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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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트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당시는 서독)의 초대 총리로,[3]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한 인물이다.'''Es ist Schicksalsfrage Deutschlands.'''
이것은 독일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Wir stehen vor der Wahl zwischen Sklaverei und Freiheit.'''
우리는 예속과 자유 사이의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Wir wählen die Freiheit!'''
우리는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미국-영국-프랑스와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독일이 전범국가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는데 이바지하였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종종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사실상 현대 독일의 시작을 이끈 정치지도자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4] 체제를 당시 서독에 뿌리내렸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1876년 1월 5일에 쾰른에서 요한 콘라트 아데나워와 헬레네 샤르펜베르크 부부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은 개신교 신자로 아들에게 프로이센적인 규율을 가르쳤으나 아데나워는 독실한 가톨릭 가문이었던 외가와 어머니 헬레네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가 청년 시절일 무렵은 한창 비스마르크가 라인란트 지방을 주축으로 하는 가톨릭 세력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 '문화투쟁(Kulturkampf)'에 전념하고 있는 시기였고, 이는 그가 평생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근원이 된다. 1894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00년에 쾰른 법원에 변호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 무렵 독일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폐가 좋지 않았던 아데나워는 병역의무를 면제받는다.
2.2. 쾰른 시장 재임기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1906년 쾰른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아데나워는, 이후 1917년부터 나치스가 집권하는 1933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쾰른 시장을 역임한다.[5] 그가 처음 쾰른 시장을 맡았던 시기는 1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와중이므로, 아데나워는 후방 군수기지로서 쾰른의 기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한창 영국에 의해 해상봉쇄가 실시되면서 물자부족의 심화[6] 로 인해 가중되던 시민들의 고통을 줄여주고자 각종 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아데나워 본인에게도 이 시기는 비극이었던 것이 첫 부인을 전쟁 말기에 병으로 잃고 만다.
전쟁이 끝난 이후 쾰른을 비롯한 라인 강 좌안에서는 영국군의 군정이 실시된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라인란트 귀속권 문제가 제기되자 아데나워는 [7] '기존의 프로이센을 해체하고 라인란트 지방에게 자치권을 주어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재편해야 한다'라고 정부에 제안하지만 당연히 정부의 반응은 '''"거부한다."'''
1921년 전후 배상 문제로 당시 내각이 위기에 처하자 중앙당으로부터 총리직 제안을 받았으나 아데나워는 정당에 독립적인 내각을 조건으로 내세워 무산됐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 대량으로 찍어낸 화폐는 파피어마르크이다. 자세한 것은 렌텐마르크 문서 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총리였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새로운 화폐인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데, 문제는 슈트레제만이 '다른 지역을 먼저 살리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는 렌텐 마르크를 공급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해 버린 것. 이같은 중앙 정부의 움직임은 안 그래도 반 프로이센 감정이 팽배한 라인란트 지역의 분리주의자[8] 들을 폭발시켰고, 아데나워는 급기야 슈트레제만에게 '정부가 정 그렇게 나오면 우리도 먹고 살기 위해서 프랑스 군을 라인란트에 주둔시키겠음!'이라고 선포한다.[9]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군과 '라인란트 자치 정부' 문제에 관한 협상도 진행시킨다.
이후 1926년 대연정에 참가한 중앙당은 아데나워에게 총리가 될 의향이 있냐고 다시 제안을 했다. 아데나워는 연립정권의 안정과 총리의 인사권 보장을 수락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연립상대였던 독일인민당은 슈트레제만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해야 아데나워를 총리로 밀어주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위의 사건들을 거치며 슈트레제만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던[10] 아데나워는 쿨하게 총리직을 포기한다. 게다가 과도기의 총리는 매력적인 자리도 아니었다. 이 때 아데나워가 총리를 차지했더라면 바이마르 공화국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을지, 아니면 다른 당시의 우파 정치인들처럼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뒤 팽 당했을지는 상당히 궁금한 대목.
한편 아데나워는 1929년 쾰른 시장에 재선되어, 대공황 극복을 위한 공공사업으로 쾰른과 본 사이에 최초의 아우토반을 건설한다.
2.3. 나치 독일 시기
독일 전역에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혼란에 힘입어, 양 극단 정치세력인 나치즘과 공산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은 보수 가톨릭 세력이 강한 라인란트 지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 나치는 서서히 지방 의회에서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하지만 아데나워 역시 다른 우파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경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쏟았고, 나치즘에 대해서는 경제가 안정되면 사그러들 것이라고 간과하였다.[11] 그리고 아데나워가 나치즘의 위험성과 불관용, 배타성을 깨달았을때는 이미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한 뒤였고 망했어요.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아데나워와 나치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33년 의회 및 지방선거였다. 선거 과정에서 나치는 쾰른 시청에 하켄크로이츠 게양을 요구했지만 아데나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틀러가 쾰른을 방문했을 때도 영접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 해 선거에서 "아데나워 물러가라"는 구호를 내세운 나치는 쾰른의 1당이 됐고, 아데나워는 선거 다음 날 쾰른을 탈출해 베를린에서 몸을 숨긴다.
이후 쾰른 시 의회와 프로이센 주 정부는 나치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 역시 쾰른 시장직에서 파면됐다. 나치의 집요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치는 주택 몰수, 계좌 동결, 정치활동 금지 등을 통해 그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데나워는 신변의 안전조차 안심할 수 없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약 1년간 은신생활을 한다.
히틀러의 개인 건축가이자, 나중에 군수장관까지 맡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데나워가 깔끔하게 개발한 쾰른 시가지의 모습에 히틀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정치 성향상 그를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장검의 밤 직후 그를 쾰른 시장 재직 시절 각종 직권 남용의 혐의로 투옥시킨다. 다행히도 곧 풀려난 아데나워는 이후 2차 대전 시기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은둔 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진 이후 나치가 더더욱 광기를 부리면서 그 역시도 다시 강제노동수용소에 투옥된다. 이때 아내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하지만 나치가 딸의 신변을 위협하자 겁을 먹은 아내의 실토로 다시 수감된다. 다행히 아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종전까지 은둔한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이미 첫 아내를 잃는 비극을 겪었던 아데나워의 아픔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반복된다. 그와 함께 수감된 두번째 아내 아우구스테 친서(Auguste Zinsser)는 수감 중에 겪은 고문 및 남편의 은신처를 실토했다는 정신적인 죄책감 등의 후유증으로 1948년 사망한다. 냉철한 편인 아데나워였지만, 두번째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처였고, 이로 인해 생긴 우울증은 이후 평생 그를 괴롭힌다.[12]
2.4. 연합군 군정 시기
쾰른을 점령한 미군은, 행정직 경험이 있으면서 나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을 관직에 앉혀 행정력의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 아데나워는 그에 딱 맞는 적임자였다. 미군정에 의해 그는 쾰른 시장에 다시금 임명된다. 그 직후 쾰른은 미군 관할에서 영국군 관할로 넘어가게 되는데, 아데나워는 경제 정책 및 전쟁 중 쾰른 폭격 문제 등을 놓고 영국군과 사사건건 대립선을 세우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국 군정청 몰래 프랑스 군정청과 추후 점령구역에 세워질 새로운 국가 체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주고 받은 것이 발단이 되어[13] 결국 1945년 10월에 쾰른 시장직에서 해임되고 만다.[14] 하지만 이 해임은 오히려 아데나워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던 것이 '필요하다면 점령군과도 맞설 수 있는 강단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임 이후 시간이 남으면서 아이러니컬하지만 신당 창당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민당의 주요 창당 인사 중 하나가 된 그는 1949년 5월 서독 제헌위원회장의 자리까지도 오른다.[15]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기민당 인사들은 73세라는 고령[16] ,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등을 고려하여 그가 킹 메이커의 위치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1949년 8월 초대 독일 연방하원의 선거가 끝난 직후 아데나워의 자택에서 열린 기민당 인사들의 식사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밝힌다. 쿠르트 키징어를 필두로 일각에서는 총리 대신 명예직인 대통령을 맡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아데나워는 자신의 오랜 정치경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17]
선거에서 아데나워와 기독교민주연합은 자유 시장경제와 반공주의, 친서방 외교를 주장했고, 쿠르트 슈마허와 사회민주당은 부분적인 계획경제 쉽게 말해 사민주의 노선에[18] 미-소 사이의 중립국을 지향하며 분단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선거 결과 원내 1당은 사민당이 차지하나, 기사련과 연합한 기민련이 자민당, 독일당까지 끌어들여 연정을 성사시키면서 집권여당이 된다.'''Mit Adenauer,'''
아데나워와 함께
'''für den Frieden, die Freiheit,'''
독일의 평화, 자유,
'''und die Einheit Deutschlands,'''
그리고 통일을 위해
'''darum CDU'''
그러므로 기민당
2.5. 제1차 아데나워 내각(1949~1953)
1949년 9월 15일 아데나워는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 출신의 테오도어 호이스 연방대통령에 의하여 서독을 이끌어나갈 초대 총리로 임명된다.[19]
총리로서 아데나워는 우선 구 나치 전범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일부 사면했다. 그는 연방하원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연합군이 군정기간 동안 실시한 탈나치화 과정에서의 맹목성을 비판하면서, 전범들을 양분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무분별한 나치 경력자들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극단적 민족주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뿐으로, 고위공직자를 비롯한 주요 전범들은 물론 정치적으로 거세되고 처벌받아야 되겠지만, 특별한 목적의식없이 사회의 흐름에 따라 나치에 동조한 자들(Mitläufer)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가 다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0]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연합군이 이 시기 단순 동조자들에게 내린 유죄 판결에 대해서도 사면조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실제로 그가 이끄는 기민당은 과거 나치 동조자들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조건 하에 이들의 입당을 허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당원 출신으로 후일 그의 뒤를 이어 3대 총리로 재직하게 되는 쿠르트 키징어이다.
외교적으로는, 이미 1920~30년대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21] 였던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고, 패전국의 지위였던 독일이 다시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분단의 고착화를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서유럽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서독이 가입하는 두 조직이 바로 나토와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였다.
이 행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 기존의 독일 보수 진영에서는 특별한 길(Sonderweg/존더베크)[22] 이라고 불리는 독일 고유의 발전상을 이데아로 내세우면서 서유럽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특별한 길이 가장 극단적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나치즘이었다. 허나 아데나워의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보수 세력을 완전히 혁신시키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독일 보수 세력이 적응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게다가 나토에까지 가입했으니 이제 전쟁이 나면 서유럽 진영과 함께 전쟁을 치루어야 했던 것은 덤이다.
이는 다른 서유럽 진영, 특히 프랑스의 입장도 계산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는 유럽 자체의 주도권을 회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국력이 한 풀 꺾인 프랑스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고 파트너가 필요했다. 하지만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유럽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였고, 프랑스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이 때 아데나워가 이끄는 독일이 드디어 서유럽 진영과 공식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프랑스는 독일이 내민 손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이 서유럽과 함께 걷게 됐음을 보여주는 신뢰의 징표로 아데나워는 연합군이 루르 공업 지대를 해체하는 것을 용인해 준다. 여기에 프랑스의 자를란트 분리 독립 추진까지 묵인했다. 프랑스는 독일에서 자를란트를 떼어내 자치권을 부여하고 나아가 분리시켜 프랑스 경제권에 편입할 계획이었다.[23] 허나 대놓고 권리를 포기한다는 아데나워의 외교는 당연히 독일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적 슈마허는 아데나워를 '연합군의 총리(Kanzler der Alliierten)'라고 까지 비난한다. 이런 비난에 아데나워는 "연합국은 나에게 독일이 그들의 안전보장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에야 공업지대 해체를 멈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민당은 최악의 결과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라고 대꾸하며 뚝심있게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하여튼 서유럽에 대한 아데나워의 저자세 덕분인지 이후 페터스베르크 조약이 맺어져 선박건조 제한이 철회되었으며 공장 해체가 예정됐던 18개 기업도 구제됐다.
한편, 아데나워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모습을 꾸준히 내비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동프로이센을 둘러싼 전쟁 직후 스탈린에 의해 국경선이 일방적으로 설정되었음을 주장하며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일이다.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한 점은 단순히 외교뿐만이 아니라 국내정치적인 계산도 충분히 깔려있었다. 구 동방 영토와 주데텐란트, 트란실바니아 등 동유럽 일대 등에서 추방되어 서독으로 넘어온 1000만 명의 독일계 추방민(Vertrieben)들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력[24] 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친 과격한 행동은 연합국들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방민 연합회의 로비나 활동을 어느 정도는 제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아데나워의 행보에 과연 그가 정말로 2차대전 이후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인 계산에 입각한 쇼에 불과했는지는 전문 연구자들마저도 그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1952년 스탈린은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4개국 간의 평화조약과 독일의 중립화를 제안하는 '스탈린노트'를 발표했다. 사민당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당시 독일 여론은 스탈린이 제시한 중립화 통일에 호의적이었지만 아데나워는 이를 거부했다. 독일의 중립화가 주독 미군 철수의 명분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대파는 가톨릭 신자인 아데나워가 개신교 신자가 다수인 옛 프로이센, 즉 동독에 무관심한 분리주의자 아니냐며 비판했다.
한편, 연합군 군정 시기부터 독일이 정말로 주체적인 지위를 국제 사회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재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아데나워는 1950년 무렵에 재무장을 시도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기억이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연합국, 그 중에서도 특히 호되게 당했던 프랑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여 일단은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발발한 6.25 전쟁이 아데나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의 정예군들은 죄다 남한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고, 프랑스 군 역시 베트남에서 호치민 치하의 공산군과의 전투로 인해 주력이 빠져나가자 서유럽 전역에서 소련의 침공에 대한 공포가 급부상하면서 연합국 측에서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독일에 대해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독일 자체의 군에 대해서 다시 반대하며, 유럽 방위 공동체의 일원으로 독일을 재무장할 것을 골자로 하는 플러베 계획(Pleven Plan)을 제시한다. 독자적인 군대를 원했던 아데나워에게 이런 프랑스의 주장은 내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프랑스의 태도는 강경했고 아데나워는 이 안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아데나워 외교 정책에서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바로 유대인들의 국가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배상액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참모와 내각은 아직 독일 내부의 경제가 피폐하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막대한 배상액은 독일 재정에 크나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아데나워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고수했다.
2.6. 제2차 아데나워 내각(1953~1957)
1953년 동베를린 지역에서 생필품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일으킨 이른바 동독 사태에 대한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아데나워에게 손쉽게 재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1950년에는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하여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아데나워의 재무장의 꿈이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1954년쯤 되자 연합국 지도자와 일반인들에게 거부감이 이전보단 많이 희석되었고, 냉전이 세계 곳곳에서 격화되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소련을 억제할 세력을 키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여론은 여전히 플러베 계획에 대해서조차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후일 아데나워보다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정치인이 독일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을 때, 독일의 재무장이 어떤 부메랑으로 그들에게 돌아올지에 대한 확신을 도무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악용된 사례가 있으니 더 그렇다.[25] 게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참패로 프랑스 내부의 여론은 더욱 강경해진다. 자신들이 과거 식민지로 통치하던 지역에서조차 패하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군사적인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리면서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재차 키웠고,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스 군의 주력이 유럽 본토로 복귀함에 따라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가 거세진 것이다.
같은해 민족전선과 공산당마저 손을 합쳐, 프랑스 의회는 독일의 재무장안을 부결시킨다. 이에 아데나워는 연합국 측과 재무장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아데나워에게 유리했다. 미국 외교가는 과거의 악몽은 떨쳐버리고 현재의 안보 상황에 좀 더 집중하자는 식이었고, 영국은 소련의 도발을 방지하는 한 편으로, 유사시 독일의 군국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라인란트 지방에 자국군 4개 사단을 배치시키겠다면서[26] 프랑스를 설득하고 있었다. 아데나워 역시 대량 살상 무기의 포기 및 군함 건조량 제한 등의 군비 축소를 약속하고, 프랑스 의회의 독일 재무장 안 부결이 독일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며 '이는 네오나치의 부활을 이끌 수도 있다'는 식의 은근한 협박도 내세우면서 프랑스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아데나워는 연합국에게 연방군(Bundeswehr)의 설립을 허가받는다.
또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함께 기존의 공업 기술과 능력있는 기업가, 노동자, 관료를 둔 이 무렵 독일 경제는 전쟁 발발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 데 이어 더 성장하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라인 강의 기적(독일어로는 Wirtschaftwunder[27] )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시기 아데나워는 소련과도 외교적 담판을 벌이는데,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은 아직도 소련의 시베리아 및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아데나워는 흐루쇼프 서기장, 불가닌 총리와 회담을 갖는다.[28] 2차대전의 앙금도 앙금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만남이었던 만큼 회담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데나워의 전쟁 포로 귀환 요구에 대하여 흐루쇼프는 그들은 침략자일 뿐만 아니라, 각종 학살 및 강간 등 범죄를 저지른 전범이라고 응대했고, 아데나워 역시 전쟁 후반기 독일 땅으로 진격한 소련군의 행태 역시 별다를 바 없었다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1953~1955년에 걸쳐 전쟁 후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들은 귀환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55년 9월 13일 서독과 소련은 국교를 정상화한다.
2.7. 제3차 아데나워 내각(1957~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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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국정 운영과 귀환 포로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제3차 아데나워 내각을 구성한 당시 그를 지배한 가장 큰 화두는 베를린 문제였다.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면서 동독 영토의 한 가운데에 턱 박혀있는 서베를린으로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동독 시민들, 특히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인 층의 탈출 행렬이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이는 동독 정권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서베를린의 존재는 서방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세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방 진영이라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동구권의 무수한 위협을 감내해야 했던 것.[29][30] 그리고 이런 점들을 노려 동독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독과 동독이 나눠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로 통합된 자유시로 지정하자고 제안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련은 서독에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 문제를 다루는 권한들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흐루쇼프의 제안은 서방을 딜레마로 몰아넣었다. 베를린을 자유시로 지정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철수시킨다면 동독과 소련이 서베를린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자면 앞으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과 베를린의 유지에 관한 여러 요소들을 동독과 직접 교섭을 해야 했다. 이는 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제1 원칙인 할슈타인 원칙[31] 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자유시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동독을 독자적인 협상 주체가 아니라 소련의 '대리인'으로 정의하고 동독과 협상을 하겠다고 아데나워 정부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베를린에 대해 매우 부정적 시각을 견지하던 아데나워는 미국의 제안도 단 칼에 거절했다. 동독과 교섭하는 그 순간, 미국과 단교하겠다는 것이 아데나워의 단호한 결의였다. 한편, 영국이 부랴부랴 자유시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접촉을 진행하면서 시간 끌기에 성공, 1년 후 파리에서 이 문제를 전승국끼리 논의하자고 합의했다.
베를린 문제에 관한 그의 완고한 태도에서 보이듯이, 이 무렵의 아데나워는 자신의 신념과 국익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점점 자신이 한 평생 구사해온 예민하고 탁월한 정치적 조율 능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베를린 문제에 관련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서 미국과 영국 외교관계자들은 짜증을 느꼈다.[32] 한편 이 시기 아데나워의 행보는 독일 내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다음 선거에서 연방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 아데나워가 이런 판단을 내린 것에는, 그의 후임자로 거론되며 당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자신의 후임 총리로 임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었다.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긴 아데나워의 나이 상, '총리직 그만 하시고 슬슬 물러나실 때도 된 거 같은데...'라는 게 독일 내의 주된 여론이었으며,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문제로는 '에르하르트의 총리직 수행 방해'라는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헌법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통령에 큰 권한을 줬다가 나치를 대두시키는 바람에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은 대통령의 힘을 대폭 약화시켜놓았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어 호이스도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 철저히 비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거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그토록 집요하게 싫어하고 앞길을 막으려 했던 에르하르트는[33] 라인 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부 장관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정치인이었다. 결국 대통령 선거 출마 시도는 독일 내에서 '이 늙은이가 진짜로 노망이 들었구나...' 정도의 반응만 얻은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2.8. 제4차 아데나워 내각(1961~1963)
앞서 언급한 이런 실책들로 인해서 아데나워의 위신은 다소 추락했지만 관록에 힘입어[34] 4선에 성공한다. 다만, 3선 때와는 달리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해서 다시 자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지기 시작한 아데나워의 정치감각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다. 1961년, 자유시 문제가 흐지부지 장기화되고 동독 주민들의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소련과 동독 당국은 결국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는 베를린 위기라 불리는 대치로 이어졌다. 이 베를린 위기로 말미암아 베를린에서는 영국군과 미군이 서쪽에 서서, 소련군과 동독 경찰이 동쪽에 서서 중무장하고 전차까지 불러와 대치하는 살벌한 풍경이 벌어졌다.
아데나워는, 그 자신이 혐오해 마지 않던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유산이자 수도였던 베를린을 위해, 또한 그가 마찬가지로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동독인/소련인들과 마주앉아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한 것인지, 슈피겔 지에 따르면 당시 아데나워는 비밀리에 미국과 접촉하며 한 가지 충격적 제안을 내놨다고 한다. 바로 서베를린과 기존에 영국군/미군 점령지였다가 소련 점령지로 넘어간 동독 지역들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따르면, 소련과 동독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클 서베를린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대신, 과거 영국군/미군 점령 하에 있던 튀링겐 주 전체와 슈베린을 포함한 메클렌부르크의 일부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포함하는 작센의 일부 지역이 서독으로 편입될 지역으로 지정됐다.[35][36] 미국 쪽에서도 이 안건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소련 측에서도 서베를린 인구의 서독 이주를 포함한 이 안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으나, 결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거부하며 이 안건은 무산됐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존 F. 케네디를 불러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하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는 동안 아데나워는 정말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것도 모자라 저런 제안까지 내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사생아라는 빌리 브란트의 배경까지 들먹이면서 당시 브란트의 행동을 비판했다.[37] 당연히 이로 인해 아데나워는 큰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무렵 터진 슈피겔 사건[38] 은 아데나워의 권력 누수 현상을 강화시켰고, 결국 4선 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후임자에게 총리직을 넘기겠다는 선언을 해야만 했다.
한편,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당내 2인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의 관계마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유럽 경제공동체(EEC)[39] 를 소수 회원국간 깊은 관계의 모임으로 만들고자 한 아데나워의 생각과 달리, 에르하르트는 영국 등 더 많은 회원국을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 총리 기간 재임 내내 프랑스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영국-미국과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아데나워와 달리, 에르하르트는 대표적인 친미파 인사였던 것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갈등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963년 드 골이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면서였다. 다수의 그의 내각 장관들은 에르하르트와 그의 친미-친영 외교노선을 지지했고, 아데나워는 결국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에르하르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면서 14년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40] 의 총리 임기를 끝마친다.[41] 다만 기민당 총수 자리는 1966년까지 유지했다.
2.9. 사망
총리직 사임 후 병을 얻고 투병생활을 하다 1967년 4월 19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딸에 의하면 아데나워 총리의 유언은 쾰른 사투리로 "'''울 필요 없다!'''"였다고...
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 정상들이 참가한 가운데[42] 쾰른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뤄졌다. 이후 바트 혼네프 지역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아데나워 이전에 독일에 자유민주주의가 시행되었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 이뤄진 1920년대의 10여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는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 하에서 이뤄진 사실상 국왕/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 국가였고, 바이마르 공화국도 20년대 패전의 여파를 겨우 딛고 일어설 무렵 30년대 대공황이 터지면서 위기를 틈타 나치가 등장, 히틀러 독재 체제가 들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독일의 중심은 토지 귀족이자 군 장교들인 융커들이었고, 독일이라는 사회 자체가 귀족과 군부 중심의 병영 국가, 경제도 국가자본주의 비슷한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상당수 독일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은 잠시간 시행된 적은 있었지만,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황폐화된 상태였던 독일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이후 독일은 이전의 국가들과는 다른, 건강한 시민 사회와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다시금 서유럽과 국제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전후 복구 기간, 보수 세력의 불만을 억누르면서까지[43] 일명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창하여, 친시장을 표방하면서도 사회 복지주의에 입각한 복지국가론 역시 추구하며 성장과 분배의 초석을 닦았다.[44][45]
물론 상기되어있듯 후기 내각으로 갈수록 삽질 빈도가 점점 늘어난 측면은 있지만, 대원칙이 파괴되거나 하는 선을 넘는 정도는 아니라 공을 인정받아 2003년 한 설문조사에선 위대한 독일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에르하르트 총리, 빌리 브란트 총리 등과 더불어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덕분에 독일 각지엔 콘라드 아데나워 가(街)/광장도 심심찮게 있는 편인데, 독일 기민당의 현 당사명은 콘라트-아데나워 하우스(Konrad-Adenauer Haus)이고, 독일 총리 전용기(A340-313X VIP)의 이름도 콘라트 아데나워 호이다.
4. 흑역사
개인적으로는 금전적인 추문이 잦은 편이었다. 쾰른 시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투자를 잘못했다가 대공황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는데, 이 파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장의 봉급을 자꾸 올렸고,[46] 이는 나치와 공산당에게 좋은 공격거리가 되었다.
또한 하이네 티센 보르네미자 백작이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아데나워가 하이네 티센의 어머니인 백작부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방문했는데 보르네미자 가문의 미술품 컬렉션을 보던중 어떤 한 그림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 그림은 중세 후기 플랑드르의 대화가인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의 "로자리오의 성모"였는데 아데나워가 좋아하는 눈치를 보고 백작부인이 그 그림을 선뜻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이네 티센이 몇달 후 미술상에게 좋은 작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가서 보니 아데나워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로자리오의 성모였다. 하이네 티센은 아무 말 없이 그 그림을 다시 사들여서 예전 집에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걸어둔 후 갖은 빌미로 다시 집으로 초대해서 예의 그 그림을 다시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한참 동안 감탄하면서 보다가 돌아갈때쯤 되어서 하이네 티센에게 '''그림값으로 얼마나 주었는지''' 은밀히 물어보았다고 한다. 하이네 티센이 그림값을 말해주자 아데나워는 자신이 '''미술상에게 넘긴 금액'''과 맞는지 따져보는 눈치였다고. 일국의 총리가 선물받은 그림으로 장사를 했다는 점에서 추문에 해당하지만 묘하게도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웃기게도 선물받은 그림을 밀매했던 아데나워는 중세 성당의 벽화를 복원했다는 위조꾼들에게 굴욕을 당한 일도 있다. 뤼벡 성모 마리아 성당 벽화 위조 사건 참조.
상술했듯이, 그의 후임자인 에르하르트 총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47] 여러가지 음해성 정치 방해 공작을 벌여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2월에는 뜬금없이 만년의 약물 중독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아들 파울이 1961~66년 동안 쓴 일기장이 공개된 뒤 학자들이 거기서 '아버지는 능력 향상을 위해 가끔 페르피틴(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는 언급을 찾아내 초대 서독 총리가 사실은 약쟁이(...) 아니었냐는 개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5. 어록
내 나이가 몇이냐고? 사실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독일인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매우 사랑했다. 그리고 교활함이 필요하다면 갖추어야 한다.
라인란트 출신의 사람을 사귀어본 이들은 그들이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내가 라인란트 출신이다.
물론 나는 법을 존중한다. 그러나 법을 지나치게 존중할 필요는 없다.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름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당을 선택하고 정당은 개인보다 오래 지속된다.
서독이 세워지기 전 헌법 기초를 닦고 있던 상황에서 교회 소유의 학교를 철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대해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이 비판하자 반박하면서 한 말. 참고로 서유럽의 정치사에서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배제' 는 '근대국가의 형성-> 민주주의, 공화주의 체제의 확립' 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1962년~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중세로까지 이어지는 보수주의 정치집단의 가장 강력한 보루이자 산실로써 신도들에게 '가톨릭 정당, 또는 가톨릭이 후원하는 보수우익정당에 투표할 것'을 교회법과 훈령을 통해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으며, 가톨릭의 지지를 받는 정당의 상당수는 군주정이나 귀족제(신분제)를 지지하는 정당이거나 군사독재 정당이었다. 즉, 60년대 이전의 유럽에서 가톨릭 신자가 사회당계나 공산당계 정당은 커녕 심하면 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하고 표를 던지는 것조차 최대 파문까지 당할 수 있는 '''종교적 죄악'''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된 헌법이 교회 소유의 학교를 철폐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교회가 어린아이들에게 '국왕 폐하께 충성하고 자신의 신분에 따라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지, 민주주의 같은거 하자고 하면 너희 지옥간다' 고 가르치는 것을 국가가 더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는 의미이다. 독일 내에서 가톨릭 교회가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면 그마나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 중 하나가 골수 가톨릭 신자로써 가톨릭 중앙당-기독교민주연합 소속이었던 아데나워였지만[49] 그런 아데나워조차도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에서 당대 유럽의 정치적 변화상과 아데나워 자신의 정치색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일화라 할 수 있다.프링스 추기경,[48]
당신들은 교회 일을 잘하고 우리는 정치를 잘하겠소. 우리가 정치하듯이 당신들이 교회 일을 잘하면 우리 모두 만족할 것입니다.
6. 동시대인의 평가
전쟁의 폐허 더미에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과 독일 민주주의를 다시 복원한 것, 그리고 독일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총리의 이니셔티브로 가능했다. 이후로도 독일은 계속해서 그의 결단력있고 용기 있으며 이상적인 성품에 힘입고 있다.
유럽통합에 기여함으로써 그는 민주 독일의 진정한 정신을 표현했다.
주세페 사라가트[50]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중요한 독일인이다.
처음에는 그의 너무나 단순한 원론적인 설명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나이에 비해 얼마나 젊은 인물인가? 얼마나 젊어!
위대한 독일인이자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20년간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해주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굳건한 옹호자로서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로리스 노스태드, 북대서양조약기구 총사령관
그는 여전히 정치 인생의 종착역에 있지 않다. 뭐 엔리코 단돌로[52]
는 90살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으니..
7. 매체에서
호이4에서 민주주의 독일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역사적 전개로는 절대 나올 일이 없고 대개 연합국에게 패배한 민주화된 독일/얄타 회담으로 나뉜 서독에서나 볼 수 있다. DLC Waiking the Tiger를 보유한 상태라면 플레이어가 직접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이 분을 집권시킬 수 있다. 이 때의 독일은 우리가 아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고 의원내각제에 의해 총리를 뽑는 현재의 연방 공화국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는 대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을 위시한 근왕파의 요구로 입헌군주정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8. 같이 보기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리 브란트
- 기독교민주연합(C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