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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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과 함께 있는 슈타우펜베르크.
클라우스 필리프 마리아 유스티니안 솅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1]
Claus Philipp Maria Justinian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1907년 11월 15일 ~ 1944년 7월 21일
1. 개요
3. 후일담
4. 관련 미디어
5. 기타


1. 개요


'''지금은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이다. 물론 무엇을 감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배신자로 역사에 기록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배신자가 될 것이다.'''

거사를 앞두고.

풀네임에 붙어 있는 '그라프(Graf)'에서도 알 수 있듯 남부 독일의 유서 깊은 슈타우펜베르크 백작[2]의 네 아들 중 셋째이자, 실질적으로는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형 베르톨트와 알렉산더 2명은 쌍둥이였고, 그는 태어난 후 얼마 가지 않아 죽은 막내동생 콘라트와 쌍둥이였다는 것이다. 연속으로 쌍둥이만 낳은 셈인데, 쌍둥이를 연속으로 낳을 확률은 굉장히 드물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종 계급은 독일 국방군 육군 대령. 견습사관 시절 기병대에서 복무를 시작한 후 초급장교 시기를 줄곧 기병병과 장교로 보냈다. 그러나 2차 대전 발발 이후 기갑병과로 전과했다. 또한 육군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 장래가 보장되는 인재였다.
폴란드 침공 당시 그의 부대(1경사단)는 폴란드군을 상대로 활약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폴란드 침공과 점령, 폴란드인들의 노예화와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유는 그가 전형적인 독일 귀족이었기 때문인데, 당대의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를 튜튼 기사단폴란드 분할 등을 거치면서 과거 자신들이 정복하고 점령했던 지역으로 간주하면서 폴란드계 거주민들을 자신들의 농노로 생각했다. 독일 귀족들은 폴란드 침공을 자신들의 '광대한 동방 영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고, 슈타우펜베르크도 이에 동참했으며,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야만적으로 다루는 독일의 행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아예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에 대한 체계적 식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나는 이것이 실행되리라 확신한다."[3]
본래는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반유대주의 및 러시아인에 대한 국방군 및 SS의 만행을 목도하고 반나치 이념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 1월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제10기갑사단 참모장교로 전출되었다가 2월에 공습에 휘말려 왼쪽 눈, 오른손 전체, 그리고 왼손 손가락 2개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4] 이후 중상에도 불구하고 퇴역하지 않고 후방 행정직 근무로 군무를 계속, 베를린의 육군 보충군(Ersatzheer)사령부[5]의 동원참모로 활동했다.
1944년에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고 1944년 7월 21일 새벽에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명령에 따라 육군사령부 앞뜰에서 총살되었다.

2.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의 행적


최후의 히틀러 암살 계획이었던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사실상의 주동자로서, 전반적인 쿠데타 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전쟁영웅/상이군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접근, 폭탄으로 암살하는 임무를 자청해서 맡았다. 상이군인에 대한 경의와 장애인에 대한 방심을 이용하여 시한폭탄을 사용한 폭탄 테러를 가한다는 기획을 처음 낸 것이 바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본인이었다.
이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예측은 보기 좋게 성공, 히틀러에 대한 암살음모 중 유일하게 실제로 히틀러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끼쳤다. 그러나 히틀러를 즉사시키는 것은 실패하였고, 통신두절[6]로 인해 히틀러 암살 여부가 확실시되지 않아 쿠데타 결행이 지연되었다.
결국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전성공을 확언한 뒤에야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암살의 실패 가능성을 우려하는 동료들을 질타,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7]
쿠데타 실패 이후 사령부 현장에서 부상을 입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직후 사건과 연루될 가능성을 우려한 육군 보충군 사령관인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8]의 독단적인 약식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육군총사령부 건물 앞뜰에서 총살형에 처해지는데, 형 집행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우리 성스러운 독일이여 영원하라!)

유언을 끝내자마자 슈타우펜베르크는 바로 총살되었다. 총살된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형 집행 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 즉결처분된 인원들은 프롬 장군의 명령에 의해 그 자리에 급히 매장되었지만 그의 시신이 훗날에 이용될 것을 우려한 SS가 시체를 다시 꺼내 화장해 버렸다. 따라서 그의 무덤은 없으며 그 매장 자리에 오늘날 추모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원래는 당시 총살 대상자들 중 계급 및 임관일 순서로 세 번째 총살 대상이 되었으나, 마지막 총살 대상이었던 그의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 보병중위(1908년 10월 9일생)가 발포 순간 총살대 앞에 뛰어드는 바람에 거의 동시에 죽었다.[9] 그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단 이유로 형 베르톨트와 외삼촌 니콜라우스 윅스퀼, 사촌인 크릭스마리네 법무군무원 베르트홀트 솅크 폰슈타우펜베르크(Berthol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백작 등 여러 인물들이 이후 처형당했다. 그나마 다행히 아내와 자녀들은 전쟁 말기의 혼란 때문에 무사히 도피,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후일담


현재 독일에서는 독일 국내 반나치 저항조직의 상징이자 참된 독일 군인정신의 정수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안네 프랑크도 이 사건을 은신처에서 듣고 일기로 썼는데(1944년 7월 24일자)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암살범들은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유태인들을 미워하던 자들이라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지 자못 냉소적으로 씹고 있다.
상술한 1944년 7월 24일자 안네의 일기에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10]

"큰 뉴스! 히틀러 암살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유대인 공산주의자도, 영국의 자본가도 아닌 훌륭한 독일의 장군[11]

으로, 그것도 아주 젊은 백작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와 화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히틀러와 함께 있던 수 명의 장군과 장교가 죽거나 다치고 주범은 사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 히틀러를 없애려는 장군이나 장교가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면 '''군인 출신 독재자를 옹립하고, 연합군과 강화를 맺은 다음 재군비를 해서 20년 쯤 지나면 다시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겠죠.'''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로 히틀러의 죽음이 늦춰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적의 독일군들끼리 서로를 죽여준다면 연합군측은 훨씬 유리하고 편하겠죠. 그렇게 하면 소련군과 영국군이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겪는 고생이 가벼워질 테고, 그만큼 빨리 파괴된 자기 나라의 도시 부흥에 착수할 수 있을텐데요."

이스라엘에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에 대하여 꽤 긍정적으로 본다. 그가 히틀러만 싫어한 게 아니라 그의 일기 및 기록으로 유태인 및 다른 인종 학살을 성토하며 나치를 지지하던 걸 후회하는 게 보이고 행동으로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스라엘 군사학자 마르틴 판크레펠트는 자신의 저서 <전쟁 본능>에서, 귀족이자 군국주의자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현 독일 연방군에서 자신이 민주주의자이자 본받아야 할 사람이라 묘사되는 것을 보면 태어난 걸 후회할 거라고 평했다. 사실 백작가 출신 귀족이니 '''당연히''' 프로이센식 군국주의자이지 민주주의자일 리가 없다.
장남 베르트홀트 마리아 솅크 그라프 폰슈타우펜베르크(Berthold Maria Schenk Graf von Stauffenberg)도 부친의 뒤를 이어 군문을 밟아 서독 육군 장군까지 진급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 종전 후 서독 연방군(Bundeswehr. 현재의 독일 연방군)이 재건된 직후 1956년 육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임관, 남부방면사령부 총사령관을 지낸 뒤 94년에 최종계급 소장(Genaralmajor)으로 38년간의 군생활을 마쳤다. 퇴역 당시 전 독일군에서 최고령자(34년생. 당시 60세)였다고 한다. 훗날 그가 회고하기를, "내가 임관했을 때 모두들 나와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이 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2004년에 그의 70세 생일이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6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았는데 그 장소가 무려 '''늑대 소굴(Wolfschanze)''', 그의 아버지가 폭탄을 터뜨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막내이자 유복자인 콘스탄체는 작가가 되어 그의 아내이자 남매의 어머니 니나에 관한 서적을 썼고 그녀의 아들 중 하나는 배우가 되어 작전명 발키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4. 관련 미디어


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로 알려진 것은 두 편이다. 독일 배우인 제바스티안 코흐가 주연한 슈타우펜베르크, 그리고 톰 크루즈가 주연한 작전명 발키리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극적인 전개보다는 암살 시도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천천히 그려 가는 모습이 돋보이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의 조력자인 육군소장 헤닝 폰트레슈코프 장군[12], 에리히 펠기벨 장군 등이 반 나치로 기울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7월 20일 당시 히틀러의 지휘소에서 일어난 사건 경과도 생략이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을 들었다. 다만 그 때문인지 일반 관객들에게는 좀 지루할 수도 있다. 국내판 자막이 심히 엉망인데, 대령장군에게 말을 까며 장군은 대령에게 존댓말도 쓴다. 게다가 그 장군의 아라베스크 목깃 장식은 아예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
하지만 작전명 발키리의 경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유족들은 톰 크루즈의 외양과 연기에 대해 대단히 불만을 품었다는 얘기가 있다. 종교적인 문제로 독일 입국 자체가 안 되는 톰 크루즈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한 소리 했다. 키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극중에서 톰 크루즈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연기한 모습이 너무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게 그려지는 데에 가장 큰 불만을 가졌다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결단력이 대단했고 성미가 불 같았다고 하는데, 톰 크루즈의 연기는 단호하긴 하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짙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빌 나이가 연기한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작중내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나왔다. 또한 그의 장남 베르트홀트는 톰 크루즈사이언톨로지 신자라는 걸 지적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주요 가담자인 사촌인 해군 법무군무원 베르트홀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 등 여러 인물이 생략되었다. 그리고 원래 이름이 슈타우펜베르크 인데 영화자막에서는 슈타펜버그로 나온다.

5. 기타


  • 슈타우펜베르크가 등장하는 2004년작 슈타우펜베르크뿐만이 아니라 작전명 발키리 역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막이 굉장히 엉망인데, 슈타우펜베르크를 스테펜버그 또는 슈타펜버그로 표기하지 않나,[13] 헤프텐 중위가 면접 전에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Heil Hitler, General!"이라고 말한 대사를 "히틀러 장군님 만세"라는 모 집단이 연상되는 대사로 번역해버렸다.[14]그리고 처음 자막 파일이 풀렸을 때 괴벨스는 고블스로 번역되는 일도 있었다.
  • 한국수학강사 삽자루삽자루/밝히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슈타우펜베르크의 복장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해서 출연한 적 있다.
[1]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폰슈타우펜베르크'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정확하게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슈바벤 지방의 영주 가문이다. 초기에는 남작 가문이었으나 1791년에 백작가가 되었다.[3] It is essential that we begin a systemic colonization in Poland. But I have no fear that this will not occur". Housden, Martyn (1997). Resistance and Conformity in the Third Reich. New York: Routledge. ISBN 0-415-12134-5.[4] 슈타우펜베르크의 피규어가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 [image] [5] 당시 독일 육군의 보충군은 신규 입영자원을 포함한 육군 보충병력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독일 전국을 13개 군관구로 나누고, 각 군관구에서 신병 및 동원예비군의 소집/동원과 이의 훈련을 책임지는 것이 보충군 사령부의 임무였고, 이렇게 훈련된 병력을 각 군관구에 연고가 있는 사단에 보충하는 것이 당시 독일 육군의 병력동원체계였다.[6] 암살 성공 혹은 실패 여부를 총통 지휘소에 있던 육군통신대장 펠기벨 장군이 베를린의 협력자들에게 전화로 알리기로 했는데, 총통이 생환하자 이를 직언할 경우 도청에 의해 적발될 것을 겁냈고, 이를 애매하게 알리고는 통신을 끊었다. 통신을 끊어서 총통 지휘소를 외부와 고립시키는 것이 계획상 존재하긴 했으나, 히틀러의 생사 여부를 제대로 알리지 않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까지 작전 선임자인 올브리히트 장군이 결정을 미뤘고, 쿠데타의 실패를 야기했다.[7] 사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총통 암살미수범으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입장에선 쿠데타 결행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8]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은 실제로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볼 수 없으나, 쿠데타를 묵인할 듯한 행동을 수 차례 보였기 때문에 쿠데타파 역시 그를 자신들의 동지로 생각했다. 프롬 장군은 쿠데타 실행자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 자신 역시 그 문제로 법정에 서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오토 슈코르체니 SS중령이 쿠데타 주역들을 체포하면서 현실화되고 만다. 프롬 장군은 1945년 3월 15일 불고지죄로 총살형에 처해졌다.[9] 2009년작 작전명 발키리에선 헤프텐 중위가 그의 앞을 막아서 먼저 죽은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대령을 몸으로 막으려다 거의 같이 죽었다.[10] 청묵사판에서 발췌.[11] 안네의 착오이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장군이 아닌 영관급 장교였다. 다만 안네가 군 관련 지식이 많을 리 없으니 그냥 장군으로 착각할 만 하다. 장군참모('''General'''stab)라는 직책도 그렇고.[12]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가 수류탄으로 자살하는 모습이다.[13] 예를들면 홍길동을 홍동이라고 부르는것과 같다.[14] 당연히 저 대사에서 장군은 히틀러가 아니라 올브리히트를 가리킨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 총통이지, 장군이라고 불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