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종

 



<colcolor=#ece5b6> '''당나라의 대신
고양공공(高陽恭公)
許敬宗 | 허경종
'''

'''작호'''
고양군공(高陽郡公)
'''시호'''
공(恭)
''''''
허(許)
'''이름'''
경종(敬宗)
''''''
연족(延族)
'''부친'''
허선심(許善心)
'''출생'''
592년 ~ 672년
'''출신'''
항주(杭州) 신성현(新城縣)
'''국적'''
수(隋) → 당(唐)
1. 개요
2. 생애
3. 기타

[clearfix]

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인물로, 이의부와 함께 당고종 시기의 양대 간신으로 언급된다. 자는 연족(延族).

2. 생애


허경종은 592년에 항주 신성현에서 급사중 허선심의 아들로 태어났다. 허경종은 초기 수재로 천거되어, 회양군 사법서좌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허경종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대업 연간의 수나라양제의 잇따른 실책으로 인해 점차 망국의 길로 빠지던 상황이었다. 수나라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강도로 피난해있던 양제는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된다. 허경종의 아버지인 허선심은 이때 우문화급에게 굴복하지 않아 결국 살해된다.
허선심이 살해된 뒤, 허경종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이밀에게 의탁한다. 이밀은 허경종을 원수부 기실로 삼았으며, 허경종은 위징과 함께 기록을 관장한다. 618년 이밀이 몰락한 뒤, 허경종은 당나라에 귀순하여, 연주(漣州) 별가가 되었는데, 진왕 이세민이 허경종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벽소하여 진왕부 학사로 삼았다.
진왕 이세민이 당태종으로 즉위한 뒤, 허경종은 저작랑으로 제수되었고 수국사를 겸임하였으며, 중서사인으로 승진한다. 636년 태종의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씨가 세상을 떠날 때, 조정대신들이 문덕황후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이때 장례식에 참석했던 허경종은 구양순의 용모를 보고 그를 비웃다가 탄핵을 받아 홍주(洪州) 도독부 사마로 좌천되었다. 그뒤 허경종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급사중, 수국사를 맡는다. 허경종은 태종의 지시로 무덕실록과 정관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고양현남으로 책봉된다. 태종이 고려를 정벌할 때, 허경종은 장안에 남아 태자의 대리청정을 보좌한다. 잠문본이 죽자, 허경종은 잠문본을 대신하여 검교중서시랑이 되었다.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태종의 태자인 이치가 당고종으로 즉위한다. 이때 허경종은 우지녕을 대신하여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 이때 허경종은 풍앙의 재산을 목적으로 자신의 딸을 풍앙에게 시집보내고, 탄핵을 받아 정주(鄭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허경종은 652년에 다시 입조하여 위위경, 홍문관 학사가 되고 수국사를 다시 겸임하였다. 허경종은 고종이 황후 왕씨를 폐위하고 소의 무씨를 세우는 것을 논의할 때 여기에 찬동하였고, 장손무기, 저수량, 한원 등을 무고하여 좌천시켰다.
허경종은 태자빈객, 시중으로 임명되고 우상, 광록대부, 태자소사, 동동서대삼품[1]을 역임하였다. 이후 672년에 세상을 떠났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양주(揚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

3. 기타


  • 허경종은 허선심의 행적과 반대되는 행보를 걸은 것 때문에, 당대의 인물들로부터 ‘허선심이 죽고 허경종이 춤을 추어 살길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허경종은 전술하였듯, 재산을 노리고 풍앙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전구농(錢九隴)이라는 인물의 재산을 노리고 딸을 전구농에게 시집 보내려고도 하였다. 허경종은 전구농의 재산을 노리고자 그의 공적을 곡해하였으며, 역사를 편찬할 때도 자신의 아첨을 넣었다.
  • 방효태가 고구려 원정에 참여할 때, 고구려군이 방효태가 유약함을 알고 그를 습격하여 물리쳤다. 방효태는 허경종에게 뇌물을 주었고, 허경종은 방효태의 뇌물을 대가로 방효태의 전공을 부풀렸다. 허경종은 그러면서, 날래고 용맹한 이는 소정방과 방효태이며, 조계숙(曹繼叔)과 유백영(劉伯英)은 모두 그보다 아래라고 평가를 하였다.
  • 허경종의 아들이 울지경덕의 증손녀와 결혼할 때, 뇌물을 받고 울지경덕 집안의 과오를 모두 숨겨주었다. 게다가 당태종이 장손무기에게 내렸다는 위봉부(威鳳賦)를 울지경덕에게 내렸다고 바꿔치기하기도 하였다.
  • 허경종은 여색을 탐하여 절도가 없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부인인 배씨가 죽고, 배씨의 시녀를 총애하여 우씨(虞氏) 성을 주었다. 하지만 우씨가 허경종의 아들인 허앙(許昻)과 사통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우씨를 쫓아내고 허앙을 불효죄로 유배보낸다. 허앙은 사면을 통해 다시 건화현령을 지냈지만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난다.
  • 허경종 사후 시호를 정할 때, 시호를 무(繆)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허경종의 손자인 허언백이 시호에 대해 항의하여, 결국 시호는 공(恭)이 되었다.

[1] 동중서문하평장사와 같은 의미이다. 당시 당고종 시기에 대대적인 관명 변경이 이루어져, 중서성을 서대로 부르고, 문하성을 동대라고 불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