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1970)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야구인 이다.
2. 선수 경력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쳐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 2차 1순위로 입단해 주로 유격수로 뛰었다. 아마추어 시절엔 이종범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했던 선수였으나 프로에선 튼실한 수비 솜씨에 비해 타격이 심히 좋지 못했다.
전년도 주전 유격수였던 지화동을 2루수로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꿰어찼으나 94~95년에는 방위 복무로 출전 기회가 줄었지만 강병철 감독이 이끌던 한화 이글스에서도 1996년과 1997년에는 주전 선수로 뛰었다.
수비는 분명 좋은 편이었으나 타격에선 낮은 타율에 파워조차 없었기에 타석에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물방망이의 대명사. 다른 선수면 몰라도 하필 마해영을 거르고 뽑은 선수인지라... 한번은 파울 홈런을 쳤을 때 해설 위원들이 1년에 홈런 1개 칠까 말까 한 선수라는 드립도 작렬시킨 적이 있다. 이후 한화 이글스에 국가대표 출신 백재호와 황우구가 연이어 입단하여 선수 생활의 큰 위협을 받았으나 백재호의 부상, 황우구의 프로 적응 실패로 꾸준히 1군에서 생존 성공 ㅋ!
2000년대 초반 한화 이글스는 부상으로 시름하던 백재호가 임수민과 함께 2루를 맡았고, 허준, 황우구 등이 유격수 자리를 지켰는데, 포수 포지션마저 전설의 조경택(...)이었던 한화의 센터 라인은 당시 최대 약점으로 꼽혔었다. 무엇보다 허준의 물방망이 질을 더 이상 참아주지 못했던 한화는 2002 시즌 유격수 용병으로 '아모리 가르시아'라는 용병을 야심차게 뽑아오며 은근 틸슨 브리또 급의 활약을 기대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시즌초반에 나가리(...) 허준은 그 시즌에도 103경기를 뛰며 생존 성공ㅋ! 대수비 등으로 부지런히 뛰며 타율도 2할 5푼 5리나 기록하며(커리어하이!) 다음 시즌을 기대케 했다. 그러나 유망주 육성을 중요시하는 유승안 감독이 새로 부임하며 2003 시즌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시즌 도중에 소속 팀 한화 이글스에서 웨이버 공시 되었는데, KIA 타이거즈가 허준의 영입을 요청함에 따라 한화는 웨이버 공시를 철회하고 현금 '''300만 원'''에 트레이드하게 됨으로써 역대 KBO 현금 트레이드 중 최저 금액 트레이드로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화 측이 KBO 규약상 지급하게 되어있는 이사비 50만 원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해 파문이 되었다.[1]
2004시즌 종료 후 은퇴. KIA 팬들의 기억에는 '''그래도 300만 원어치 활약은 해 줬다''' 정도로 남아 있는 선수.
이글스 시절 허준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던 다른 내야수들에 비해 꾸준히 제 자리를 지켜준 고마운 선수였고, 내야의 수호신이었다. 하지만 물방망이 때문에 항상 새로운 경쟁자들의 주전경쟁위협을 받아왔고 확고한 주전 유격수로 자리매김하질 못했다. 허준이 떠난 이후에도 한화의 유격수 갈증은 계속되었고 이범호, 틸슨 브리또를 거쳐 2006시즌 전 FA로 영입된 김민재가 등장하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3. 은퇴 후
부산에서 'THE PARTY'라는 이름의 웨딩뷔페 사업을 시작했고, 이게 잘 되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이후 2013년 이후 현재는 더 리본(주)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신생회사를 상조업계 2년 연속 매출 1위로 만들어 더욱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4. 여담
MBC 드라마 허준이 인기를 누리던 2000시즌에 6개의 뜬금포를 날렸는데, 그럴 때마다 신문에서는 '''만병통치 허준''' 등의 드립을 쳤고 한화 구단에서도 허준 드라마 OST를 등장곡으로 틀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