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
1. 개요
1993년 KBO 신인 드래프트 (공식 명칭: '''199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는 1차 지명과 2차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2. 1차 지명
1차 지명은 1992년 11월 5일까지 각 팀에서 팀 별 연고지 내 고교 출신 선수 중 1명을 뽑았다.
3. 2차 지명
1992년 11월 25일 서울특별시 KBO 사무실에서 개최되었다.
대학교 졸업 예정자, 실업팀 소속 선수들, 고교 졸업 후 1년이 지난 선수들까지 모두 258명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2]
3.1. 지명방식
지명방식은 매 라운드마다 1992 시즌 성적 역순대로 지명하는 방식이다. 라운드에 제한은 없지만, 지명을 원치 않는 팀의 경우 해당 라운드에서 패스할 수 있다. 꼴찌팀은 1라운드에서 3명을 지명한다.
3.2. 지명 결과
※표시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은 선수.
4. 드래프트 평가
- 태평양 돌핀스 : 김홍집이 에이스로 잠시 활약해 줬지만 태평양은 강팀이 아니었고, 빛을 보지 못했다. 팀이 현대 유니콘스로 바뀌며 강해지고 나서는 혹사 여파로 본인의 성적이 좋지 못했다.(...) 2차 1라운드로 뽑은 손차훈은 대학 시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면서 백업 수준에 머무른 후 SK에서 은퇴했다. 다만 프런트로서는 꽤나 성공하면서 훗날 단장까지 오르게 된다. 공의식은 엄청난 덩치와 파워를 갖췄지만 이름처럼 타석에서 공만 의식하다(...) 프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갑중은 1994년에 외야수로 중용됐으나 그 해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 OB 베어스 : 폭망... 1, 2차 지명을 가릴 거 없이 뽑은 신인들 모두 폭망해 버렸다. 특히나 이 해는 향후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대형 신인들이 무더기로 배출되었고, 다른 구단들도 한 두 명씩 대형 자원을 픽한 것과는 달리 OB의 픽은 유독 좋지 못했기에 더욱 뼈아팠다. 가히 통한에 남을 드래프트이자 OB 신인 드래프트 역사상 희대의 흑역사. 1차로 지명된 추성건은 아마 야구에서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프로 입단 후로는 부상과 외국인 선수의 등장 등으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SK로 이적한 후 은퇴했다.
- 해태 타이거즈 : 종범 신을 얻었다. 고졸 우선지명에서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를 얻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롯데 자이언츠 : 2차 1순위로 마포를 얻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마해영은 상무에서 복무를 마치고 1995년 롯데에 입단했다.
5. 이모저모
- LG의 1차 지명자인 이상훈은 당시 역대 최고 계약금인 1억 8천 8백만원을 받았다.
- 태평양에 5라운드 지명된 우태원은 지명권 양도로 빙그레에 입단했다.
- 삼성의 2차 4순위 지명을 받은 투수 유정민은 어깨 부상으로 1시즌 만에 은퇴했으며, 현재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이다.
- 해태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은 투수 박철웅은 1997년 말 송구홍과 맞트레이드되어 LG로 이적했으나 1998년 초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아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해태는 이에 따른 보상으로 1998 시즌이 한창이던 5월 내야수 안상준을 LG로 현금 트레이드했고 그 때 받은 트레이드머니로 전설이 된 외국인 타자를 영입했다.
[1] 영화 글러브에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맡은 김상남의 롤모델이다.[2] 주의해야 할 것은 대학 졸업 예정자들은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다.[3] 김현욱은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된 후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친정 팀으로 복귀한 후로도 쏠쏠히 중간계투요원으로 뛰어 주었으니 아예 손해는 아니다. 김성근 감독이 잘 키워 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