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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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허형(許炯)
이명
허일영(許一英)
생몰
1894년 2월 20일 ~ 1963년 10월 16일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건인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2. 생애


허형은 1894년 2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건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재학중이던 1910년 3월 대상학교가 폐교되자 몇년간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고, 뒤이어 한국태(韓國泰)·함병승(咸秉昇)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주로 학생층을 상대하는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원산에서 최자남(崔子男)을 만나 최자남으로부터 강우규를 소개받고, 강우규와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폭살시키려는 강우규의 계획에 자신도 참여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강우규는 서울 남대문역(南大門驛)에서, 그는 서울 용산역(龍山驛)에서 대기하여 재등실 총독이 하차하면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그는 그후 한흥근에게 폭탄 입수를 부탁하였으나 연락이 서로 맞지 않아서 결국은 폭탄을 입수치 못하고 강우규의 거사 성공만을 고대했다.
1919년 9월 2일 재등실 총독을 향해 힘껏 폭탄을 던지고 다음날 찾아온 강우규를 만나 재거사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9월 17일 강우규가 서울 사직동 박승화(朴承華)의 집에서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도 최자남(崔子南)과 함께 연루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한흥근의 폭탄은닉혐의로 일주일도 못되어 다시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 예심 6개월 후 면소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2년 5월 동아일보 안주지국(安州支局) 기자로 활동하면서, 안주청년회(安州靑年會)를 조직하여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야학교(夜學校)를 설립하여 부녀자들의 계몽에 힘썼다.
또한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 등의 안주지국장과 평양지국(平壤支局) 특파원을 역임하면서 언론계를 통한 민중계몽운동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1926년 10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허위로 꾸민 강중건(姜重建. 강우규의 장남) 사건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평북 정주 경찰서에 붙잡혀 의주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의 안주지회 부회장 겸 정치부장(政治部長)을 맡아 활동하였다. 신간회 해산 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63년 10월 16일에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추서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67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