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제귀인 동씨
獻帝貴人 董氏
(? ~ 200년)
후한 말의 인물. 동승의 딸, 헌제의 후궁.
연의의 영향으로 귀비(貴妃)라는 직위로 알려져있지만, 정사에서는 동귀인(董貴人)이라고 적혀있다. 삼국지 시대에 귀비라는 품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1] 귀비는 당대 이후 창설된 후궁 품계이며, 연의에서 이 인물이 귀비로 나오는 것은 나관중 당시의 영향력 및 인지도에 따른 작가의 개작이다. '귀인'이라 하면 후한 때는 '황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이었으나, 나관중 당대에는 '귀비'가 후궁 최고위 품계였고 '귀인'은 한참 급이 낮은 품계였으므로,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동귀인의 아버지 동승은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 조조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200년 정월에 계획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이 처형당했다.[2] 연좌제로 쿠데타 관련자들의 삼족이 멸해지는데 동귀인까지 죽음을 당하게 된다. 후한서 헌제복황후전에 따르면 이때 헌제가 그녀가 임신 중이라고 사정을 봐달라고 빌었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다.
연의에는 귀인이 아닌 귀비로 나온다. 상술하였듯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에는 후궁 품계가 후한 말과 많이 달라져,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는 황후 바로 아래 최고위 후궁이 귀비였다.
나관중본에서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동승의 딸로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모종강본에서는 동승의 누이동생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그래서 동귀비가 동승의 누이동생이라고 잘못 알려졌는데 사서에서는 100% 공통적으로 동승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는 마등도 동승의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서량에 있어서 잡지 못했다고 나오는데 마등이 여기에 참여한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당시 동귀인이 임신 중이라는 언급만 나오지만, 연의에는 임신 5개월이었다고 기간까지 구체적으로 설정됐다.
정사에서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했다는 대사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하는 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창작되었다. 헌제가 동귀비가 임신 중이라 사정하자 후환을 남기면 안된다고 조조가 씹었고, 최소한 출산할 때까지만 목숨을 붙여 달라고 다시 사정하자 지 어미의 복수를 할 아이를 남기면 안된다고 또 씹고 그대로 죽였다.
황제의 후궁인데다 임신까지 한 여성을 죽인 것으로 조조의 잔혹함이 돋보이게 되며, 효헌황후 복씨의 죽음과 비슷하게 조조가 악역 이미지를 쌓는데 공헌(?)을 한다. 이는 조조가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된다.[3][4]
다만 한황실에 대한 충정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소모되나 진지하게 따지자면 반론의 여지가 있다. 조조가 욕을 먹게 될 것이 뻔한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전한, 후한을 막론하고 궁중암투에서 밀려난 왕자가 살아남아 훗날에 등극, 보복하거나 뒷일을 추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한의 명군인 한문제부터가 후궁의 아들이 살아남아 여씨가 세운 소제를 살해하고 등극하였으며, 한무제의 증손자인 선제는 무고의 화로 할아버지부터 부모까지 전부 죽었지만 살아남아 훗날 제위에 오른다. 채륜의 죽음에도 화제시절 후궁 송귀인이 자살형을 받은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을, 훗날 등극한 송귀인의 손자인 안제가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궁중암투에서 이런 일이 잦았기 때문에 조조와 같은 현실정치가는 훗날을 위해서 동씨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씨를 살려줬다간 자신에게 있어서 반발세력인 동씨와 동씨가 낳은 아이가 헌제의 외척을 중심으로 반 조조 세력에 더 보탬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 게다가 저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지 연의가 시작되는 시점인 영제의 건만 보더라도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이 외척과 환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경험적으로 자신과 적대하는 외척의 존재에는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것. 실제로도 조씨 정권은 친인척에게는 중요한 권력을 부여해 정권의 안정성을 도모하였으나, 이와 반대로 외척은 배척하였다.
다만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당시 한실을 되살리려하는 "조조의 충정심"과 관련된 반론일 뿐이지 '''"조조의 행동이 끔찍한 악행"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다'''. 죽은 사람이 황제의 후궁이었다, 그 복중의 아이가 황제의 씨였다 하는 것을 모두 논외로 해도, 임신 중의 여성을 태아와 함께 살해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악행이 분명하다.[5] 사형수가 임신한 여성일 경우 출산 이후로 사형을 미루거나 사형을 감면해 주는 건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형제도가 자리잡은 곳에서는 거의 모든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6][7] 그것도 황제의 자식이다. 이 정도면 당대의 위정자들에게 최소 나쁜놈 최대 역적이라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반대로 보자면 조조가 외척 문제에 대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8] 비상식적으로 끔찍한 행위라 평가받음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이런 인류의 보편적 금기까지 깨뜨리고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조조가 대놓고 비난받을만한 짓을 공적으로 한 건 대표적으로 서주 대학살, 여백사 살해, 그리고 복황후와 동귀인에 대한 숙청인데, 서주대학살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리적, 도덕적으로 최악의 수를 둔 것이라 평가받고 나머지 두가지가 서주 대학살과 같은 "대규모 학살"과 함께 대표적인 악행인 점에서 조조가 이 부분에 얼마나 예민했는지를 추측할 수가 있다.
덤으로 이 사건은 한나라 황실의 권위가 대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허수아비라도 '''당시 재위중인 황제''' 헌제가 동귀인에 대해 살려달라 간청했는데도 '''신하'''인 조조가 기어이 숙청을 감행하는 구도는 헌제의 권위와 힘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기 때문.
(? ~ 200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동승의 딸, 헌제의 후궁.
2. 정사
연의의 영향으로 귀비(貴妃)라는 직위로 알려져있지만, 정사에서는 동귀인(董貴人)이라고 적혀있다. 삼국지 시대에 귀비라는 품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1] 귀비는 당대 이후 창설된 후궁 품계이며, 연의에서 이 인물이 귀비로 나오는 것은 나관중 당시의 영향력 및 인지도에 따른 작가의 개작이다. '귀인'이라 하면 후한 때는 '황후 바로 아래인 최고위 후궁'이었으나, 나관중 당대에는 '귀비'가 후궁 최고위 품계였고 '귀인'은 한참 급이 낮은 품계였으므로,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동귀인의 아버지 동승은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 조조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200년 정월에 계획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들이 처형당했다.[2] 연좌제로 쿠데타 관련자들의 삼족이 멸해지는데 동귀인까지 죽음을 당하게 된다. 후한서 헌제복황후전에 따르면 이때 헌제가 그녀가 임신 중이라고 사정을 봐달라고 빌었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다.
3. 연의
연의에는 귀인이 아닌 귀비로 나온다. 상술하였듯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에는 후궁 품계가 후한 말과 많이 달라져,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에는 황후 바로 아래 최고위 후궁이 귀비였다.
나관중본에서는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동승의 딸로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모종강본에서는 동승의 누이동생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그래서 동귀비가 동승의 누이동생이라고 잘못 알려졌는데 사서에서는 100% 공통적으로 동승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는 마등도 동승의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서량에 있어서 잡지 못했다고 나오는데 마등이 여기에 참여한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당시 동귀인이 임신 중이라는 언급만 나오지만, 연의에는 임신 5개월이었다고 기간까지 구체적으로 설정됐다.
정사에서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했다는 대사는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연의에서는 헌제가 조조에게 사정하는 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창작되었다. 헌제가 동귀비가 임신 중이라 사정하자 후환을 남기면 안된다고 조조가 씹었고, 최소한 출산할 때까지만 목숨을 붙여 달라고 다시 사정하자 지 어미의 복수를 할 아이를 남기면 안된다고 또 씹고 그대로 죽였다.
4. 평가
황제의 후궁인데다 임신까지 한 여성을 죽인 것으로 조조의 잔혹함이 돋보이게 되며, 효헌황후 복씨의 죽음과 비슷하게 조조가 악역 이미지를 쌓는데 공헌(?)을 한다. 이는 조조가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된다.[3][4]
다만 한황실에 대한 충정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소모되나 진지하게 따지자면 반론의 여지가 있다. 조조가 욕을 먹게 될 것이 뻔한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전한, 후한을 막론하고 궁중암투에서 밀려난 왕자가 살아남아 훗날에 등극, 보복하거나 뒷일을 추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한의 명군인 한문제부터가 후궁의 아들이 살아남아 여씨가 세운 소제를 살해하고 등극하였으며, 한무제의 증손자인 선제는 무고의 화로 할아버지부터 부모까지 전부 죽었지만 살아남아 훗날 제위에 오른다. 채륜의 죽음에도 화제시절 후궁 송귀인이 자살형을 받은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을, 훗날 등극한 송귀인의 손자인 안제가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궁중암투에서 이런 일이 잦았기 때문에 조조와 같은 현실정치가는 훗날을 위해서 동씨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씨를 살려줬다간 자신에게 있어서 반발세력인 동씨와 동씨가 낳은 아이가 헌제의 외척을 중심으로 반 조조 세력에 더 보탬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 게다가 저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지 연의가 시작되는 시점인 영제의 건만 보더라도 본격적인 난세의 시작이 외척과 환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경험적으로 자신과 적대하는 외척의 존재에는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것. 실제로도 조씨 정권은 친인척에게는 중요한 권력을 부여해 정권의 안정성을 도모하였으나, 이와 반대로 외척은 배척하였다.
다만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당시 한실을 되살리려하는 "조조의 충정심"과 관련된 반론일 뿐이지 '''"조조의 행동이 끔찍한 악행"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다'''. 죽은 사람이 황제의 후궁이었다, 그 복중의 아이가 황제의 씨였다 하는 것을 모두 논외로 해도, 임신 중의 여성을 태아와 함께 살해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악행이 분명하다.[5] 사형수가 임신한 여성일 경우 출산 이후로 사형을 미루거나 사형을 감면해 주는 건 문화권을 막론하고 사형제도가 자리잡은 곳에서는 거의 모든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6][7] 그것도 황제의 자식이다. 이 정도면 당대의 위정자들에게 최소 나쁜놈 최대 역적이라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반대로 보자면 조조가 외척 문제에 대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8] 비상식적으로 끔찍한 행위라 평가받음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이런 인류의 보편적 금기까지 깨뜨리고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조조가 대놓고 비난받을만한 짓을 공적으로 한 건 대표적으로 서주 대학살, 여백사 살해, 그리고 복황후와 동귀인에 대한 숙청인데, 서주대학살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리적, 도덕적으로 최악의 수를 둔 것이라 평가받고 나머지 두가지가 서주 대학살과 같은 "대규모 학살"과 함께 대표적인 악행인 점에서 조조가 이 부분에 얼마나 예민했는지를 추측할 수가 있다.
덤으로 이 사건은 한나라 황실의 권위가 대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허수아비라도 '''당시 재위중인 황제''' 헌제가 동귀인에 대해 살려달라 간청했는데도 '''신하'''인 조조가 기어이 숙청을 감행하는 구도는 헌제의 권위와 힘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기 때문.
[1] 후한시대의 내명부는 황후-귀인-미인-채녀-궁인의 5등급에 불과, 이전 및 이후 시대에 비해 매우 간소했다. 전한 때는 후궁 품계가 10여 등급으로 많았지만 이때도 귀비라는 품계는 없었다. 중국사의 후궁 제도 참조[2] 유비는 이미 멀리 있어서 잡지도 못했다.[3] 혹은 반 조조 세력에 대한 간접적 경고라든가 아니면 지록위마처럼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4] 혹여 이해가 안된다면 '''후궁이 포태한 자식은 황제의 자식'''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조조는 황제의 후궁을 죽이면서 태어나지도 못한 황제의 자식을 함께 죽인 것이다.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에서 잔인할 수 있어도 조조급의 위정자는 후환을 없애려고 다 그런건데 왜 조조에게만 뭐라고 하냐는 식으로 변호했다. 그렇지만 임산부까지 죽인 사례는 조조급의 위정자들 중에서도 희귀한 케이스다.(당연히 조조 말고도 존재해서 위소왕이나 정극장 등의 사례가 더 있다. 즉 조조만 그런게 아니고 진짜로 더 존재하는 것 하지만 역사상 조조급의 위정자는 이들 사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존재했다.)[5] 더군다나 엄연히 재위 중인 황제가 직접 살려줄 것을 청했는데도 개무시하고 죽여버린 것에서 문제 있는 짓임이 확정이다. 만일 헌제에게 조조를 쳐낼 만큼의 권력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조조가 감히 회임 중인 후궁을 대놓고 시해하는 짓을 저지르지도 못했을 것이며, 기어이 동귀인을 죽였다면 그 대가로 역적이 되어 가문 전체가 멸족됐어도 할 말이 없었다.[6] 한 예시로 조선에서는 사형수라 할지라도 임산부인 경우에는 출산+100일 정도는 기다린 후에 처형했다. 물론 조선은 금형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이런저런 일로 사형이 지체되는 일이 잦았지만 금형일이 아무리 그래도 봄가을에 금지하는 것만 빼면 최대 3일(왕과 왕비 생일 전후로 3일은 처형을 할 수 없다.)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 3달이나 미뤄주는건 예삿일이 아니다.[7] 여성 인권이 매우 열악했던 이슬람교조차 창시자인 예언자 무하마드가 죄를 지은 임산부는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인 후에야 죽이라고 명령했을 정도다.[8] 실제로 조조-조비 시기에는 유달리 외척에 혹독했다. 후한이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망해버렸으니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 쳐도 자신의 아내를 자결케 했을 정도의 조비의 행동을 보면 외척에 유달리 혹독했던건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씨-하후씨 친인척은 적극적으로 권력에 이용한 조조와 다르게 조비 부터는 권력의 안정성 문제로 외척은 물론 조씨 친인척까지 어느정도 배척함에 따라 역으로 황제를 보호해 줄 세력이 약해져 위나라는 사마씨 가문에게 휘둘리다 멸망하였다. 그리고 이걸 지켜보다 위나라를 계승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반대로 외척, 황족의 권력을 크게 높였는데 그걸 원인으로 국가 멸망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