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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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의 제10대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효선황제(孝宣皇帝). 휘는 순(詢). 자는 차경(次卿).
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소제 유불릉은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된다. 원래 이름은 병이(病已), 즉 병이 그치라는 뜻(病已 :여기서 已는 그칠이. 보통은 이미已로 쓰이지만), 유아 시기에 병이 잦아서 지어준 이름이다. 피휘를 위해 즉위 후에는 순(詢)으로 개명했다. 할아버지는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3] ,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태손(史太孫) 유진(劉進)[4] 으로 어머니는 왕씨(王氏)[5] 이다. 소제 사망 후 그 뒤를 이었지만 결국 폐제가 된 창읍왕 유하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다.
2. 무고의 화
기원전 91년, 강충(江充)이 일으킨 무고의 화에 말려 유거는 강충을 죽였지만 이를 모반으로 여긴 무제가 체포를 명하자 거병했다. 무제의 반격에 밀려 결국 유거의 어머니 위황후는 폐후가 되어 자살했고 유거, 선제의 조모 양제(良娣) 사씨(史氏)[6] , 아버지 유진, 어머니 왕씨 역시 자살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때 선제는 가까스로 증조할머니의 집안인 위씨 일족에 의해 구출되어 목숨을 이어갔다.
3. 즉위와 통치
대장군 곽광이 폐제 유하를 폐하고 위씨 집안에서 성장하던 그를 찾아내어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 때 이미 결혼한 상태였으므로 부인을 황후로 책립하였으나, 즉위 3년째인 기원전 71년 공애황후가 사망하면서 곽광의 딸 곽성군을 새로운 황후로 맞았다.
즉위 초에는 곽광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기원전 68년 곽광이 사망한 후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 특히 군사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였고, 이에 반발한 곽씨 일족의 반란을 적발한 것을 계기로 곽씨 일족을 완전히 숙청하면서 본격적인 친정을 개시하였다. 그 자세한 과정은 항목 참조. 곽 황후는 이 때 폐위되었다.[7]
선제는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상평창을 설치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들은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아는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8]
외교 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흉노를 분열시켜 약체화하고,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를 항복시키는 등 한 왕조의 국력을 중흥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한 황태자(후의 원제)와 맞지 않아 황태자 폐위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황태자에게서 손자가 태어났고 선제 본인이 친족이 모두 죽어 자신만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기에, 그러한 패륜은 한 번이면 족하므로 조상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고 공언했다.[9] 사망 후 두릉(杜陵)에 안장되었다.
4. 일화
곽광이 살아 있었을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한나라 선제가 일찍이 대장군 곽광에게 검은 비단 덮개 수레 한 대를 하사했는데, 그 수레는 모두 황금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밤이 되면 수레 굴대 위에 있는 황금 봉황이 날아가버리곤 했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으며 새벽이 되면 돌아왔다. 수레를 지키는 사람도 이것을 보았다. 남군(南郡)의 황군중이 북산에서 그물로 새를 잡다가 작은 봉황을 잡았는데, 손을 대자마자 자금으로 변했다. 깃털과 날개가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길이는 1척 남짓이었다. 수레를 지키는 사람이 말하기를
"수레 굴대 위의 봉황이 밤만 되면 날아갔다가 새벽이 되면 돌아옵니다. 지금은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잡힌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니, 곽광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이를 상주하였다. 며칠 후에 황군중이 예궐하여 황금 봉황을 진상하였다. 선제가 이를 듣고 의심하며 승로반(承露盤)에 봉황을 두었더니 갑자기 봉황이 날아갔다. 선제가 사람을 시켜 이를 찾게했더니 봉황은 곽광의 집으로 들어가 수레 굴대 위에 있었기에 선제는 그 사실을 믿게 되었다. 선제는 그 수레를 가져다 매번 유람할 때마다 타고 다녔다. 혜강의 《유선시遊仙詩》에서 이르길 "훨훨 날던 굴대의 봉황, 이 새 그물에 걸렸구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제가 죽고 봉황이 날아갔다는 것은 그의 붕어 이후 나라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일 수도 있다.한나라 선제가 검은 비단 덮개가 달리 수레 한 대를 대장군 곽광에게 하사하였는데 모두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밤이 되면 수레 위의 황금 봉황이 문득 도망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새벽이 되면 곧 돌아왔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수레를 지키는 사람 또한 이를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남군의 황군중이 북산에서 그물로 새를 잡다가 봉황을 잡았는데 손을 대자마자 곧 자금으로 변했다. 깃털과 벼슬과 날개를 완연히 갖추었고 길이는 1척 남짓 정도 되었다. 수레를 지키는 사람이 말하길
"이 달 12일 밤에 수레 굴레 위의 봉황이 날아갔으니 새벽이 되면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 돌아오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잡힌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하니, 곽광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는 이를 상주하였다. 며칠 뒤에 황군중이 예궐하여 봉황을 진상하며 말하길 "이 달 12일 밤에 북산에서 그물로 새를 잡다가 이것을 잡았습니다." 하였는데 선제가 이를 듣고 의심하여 승로반 위에 봉황을 놓았더니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선제가 사람을 시켜 찾게하였는데 봉황이 곧장 곽광의 집으로 들어가 수레 굴대 위에 머무르자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 선제는 그 수레를 가져다 매번 유람할 때마다 탔다. 선제가 붕어하자 봉황은 날아가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속재해기
5. 대중매체에서
2015년 방영된 운중가에서 소제와 선제를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