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대학살
1. 개요
후한 말기의 군벌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여 자행한 잔혹한 학살 사건을 한국, 일본, 중국의 삼국지 팬덤에서 일컫는 말이다.[1]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다.
2. 상세
도겸의 침공을 막아낸 뒤, 193년 아들이 있는 연주를 향해 도겸의 영지를 지나가던 조조의 아버지 조숭, 동생 조덕 그리고 나머지 일족들이 도겸이 보낸 장개와 수하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본래 조숭은 초나라 땅에 살고 있었지만, 군벌들이 합심하여 동탁을 토벌할때 그곳은 전쟁터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서 난을 피했는데, 조조가 이를 평정하고 연주를 근거지로 세력이 안정되자, 아들의 초청을 받은 조숭은 연주로 향했던 것이다. 당시 조숭은 낭야로 가서 난을 피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서주는 전란으로부터 안전한 곳처럼 여겨졌는데, 서주목 도겸이 자신의 아들인 조조와 충돌하니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전 재산을 싸들고 도망치다가 조조와 도겸이 전쟁을 하여 혼란 속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거나 이를 빌미로 조조는 도겸의 관할지인 서주에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고, 퇴각하며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했다.
서주대학살은 무엇보다 이 정도의 학살은 유례가 없었고, 우두머리였던 조조의 용인이나 주도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사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대학살은 '''살육'''이란 단어로 묘사한다.[2][3] 193년 이때가 1차 학살이다.
이후 194년에도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세워 다시 서주에 쳐들어가는데, 이때 또 다시 2차로 백성들을 대규모 학살했다. '''백성의 시체로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고 진수 역시 백성을 '''잔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륙된 사람들은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조는 이때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몇 차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죄책감이나 후회가 전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위서에서 조조가 임종을 맞이할 때 완성에서 자기 삽질로 조앙을 잃고 첫 번째 정실 정씨와 이혼하게 된 것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지만 그 외에는 후회스러운 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조조는 여러 기록으로 추정컨대 당대 군웅답게 도덕성 따위는 날려먹은 굉장한 성격파탄자였다.
이때 조조는 아버지 뿐만아니라 친동생과 기타 일족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조씨 일가를 핵심 군부로 기용했던 그에게 일족의 몰살은 커다란 인적손실이었고 그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다. 삼국지 정사에서 민간인 약탈, 학살, 포로 학살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군벌은 거의 적은 편이며 그 드문 예 중 하나가 바로 유우, 유비, 오두미도의 장로의 세력이다.
유비는 가는 곳마다 객장으로나마 대우받았던 것 또한 그가 거느린 세력이나 유비 본인이 황제의 밀명을 받은 명분 덩어리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푼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유비도 본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난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성깔과 냉혹함을 갖게 되었으며, 유비의 냉혹함이 드러난 사건은 진수가 망할만 해서 망했다고 평한 유장을 배신한 일과 자신의 수염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유씨의 정통성을 건드린 신하를 죽인 일도 있었다.[4]
인격자 중의 인격자였던 유우는 이민족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잔혹했던 후한 말 군웅할거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어떤 사안의 원인을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에만 치우쳐 판단하기 때문에 불거지는 면도 있다. 유우가 허무하게 죽었던 건 하필이면 유우의 생명줄이라고 볼 수 있는 인의가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어서 함부로 대하면 민심이 위험해지는데, 유우를 죽인 공손찬은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에는 역경루에서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오두미도의 장로는 관리를 두지 않고 오두미도 제자와 신도에게 행정과 사법권을 맡았으며 병자에게 자기 과실을 나누거나 의사(義舍)를 설치해 쌀과 고기를 공짜로 의사 안에 두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 했다. 장로는 조조가 한중을 공격했을 때 파중으로 도주했는데 측근들은 창고와 재화들은 불태울 것을 간언했으나 장로는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해서 창고에 봉해놓고 떠나 조조는 장로가 창고를 불태우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해 열후에 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백성들을 억압적으로 다뤘으며 현대 기준은 물론 당대 기준으로도 윤리적인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다.[5] 유비는 반평생 유랑하며 수없이 곤궁한 처지에 놓였음에도 단 한 건의 약탈과 학살 기록도 사서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상관도 없는 백성들을 위해 가족의 안위까지 포기하는데, 조조는 이런 서주대학살 같은 짓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벌였다. 무지렁이 백성도 눈과 귀가 있는데 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을까?
반대로 황족 유비가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고, 환관 가문의 조조가 이를 말리려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유비의 평가도 박했을 것이다.[6] 그런 즉, 조조는 황족이 아니라서 냉대를 받은 게 아니라 욕먹을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냉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3. 진행
3.1. 군웅할거
동탁의 전횡에 반발해 제후들이 동맹을 맺었다. 원술의 부하 손견이 분전해 낙양까지 진군하나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했다. 목표를 잃은 제후들은 친원소파(유우, 조조, 유표)와 친원술파(공손찬, 도겸, 손견)로 갈려 서로 싸운다. 두 군벌 세력은 다른 군벌들과 제휴를 맺어가며 서로서로를 견제했는데, 이것이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의 죽음으로 터진다.[7] 192년 공손찬은 대군을 이끌고 계교에서 싸우나 국의의 전술에 휘말려 크게 패한다.
3.2. 도겸의 1차 침공
이 당시만 해도 조조는 원소의 수하였다.우독(于毒), 백요(白繞), 수고(眭固)[8]
등의 흑산적(黑山賊) 10여만 명이 위군, 동군을 공략하였으나, 왕굉이 막을 수 없어, 태조가 병사를 이끌고 동군에 들어가 복양(濮陽)에서 백요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원소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 태수로 삼고, 동무양(東武陽)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조조는 192년 여름에 황건적을 크게 격파해 이기고 연주목에 오르며 청주병을 얻는다. 이때 원소와 원술-공손찬은 크게 대립하고 있었고, 마침내 계교 전투가 벌어진다. 이후 계교 전투에서 패한 공손찬은 원소의 장수 최거업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평원까지 세력을 확대한다. 192년 겨울, 공손찬은 휘하의 연주자사 선경, 별부사마 유비와 동맹인 서주목 도겸의 군대로 원소-조조를 치나, 원소와 조조는 이를 격파한다. 선경은 평원군 평원현, 유비는 평원군 고당현에 주둔한데 비해 도겸은 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했다. 즉 도겸은 조조의 세력권인 연주 깊숙히 침공해 있었던 것이다.원술과 원소와 사이가 벌어지자, 원술이 공손찬(公孫瓚)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공손찬이 유비를 보내 고당(高唐)에 주둔하고, 선경(單經)은 평원(平原)에 도겸(陶謙)은 발간(發干)에 주둔하면서 원소를 압박하게 하였다. 태조가 원소와 합쳐 공격하여 그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3.3. 도겸의 2차 침공
193년 초 헌제는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와 태복(太僕) 조기(趙岐)를 시켜 공손찬과 원소, 둘의 분쟁을 화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원담이 유비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나선다. 하지만 원술-도겸과 조조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3년 도겸은 궐선과 함께 다시 군대를 일으켜 연주 태산군의 두 현을 취하고 임성국을 공격했다. 궐선은 이후 도겸에게 죽는다.4년(193) 봄, 견성(鄄城)에 주둔하였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군량보급로를 끊으니, 원술이 군대를 이끌고 진류로 들어가 봉구(封丘)에 주둔하였으며, 흑산의 나머지 적들과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이 장수 유상(劉詳)을 시켜 광정(匡亭)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광정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원술이 퇴각하여 봉구를 보전하니,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고, 합쳐지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으로 패주하니,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도착하여 도랑의 물을 터뜨려 성을 수공(水攻)하였다. 영릉(寧陵)으로 패주하니, 또 추격하여 구강(九江)으로 패주시켰다.
여름, 태조가 돌아와 정도(定陶)에 주둔하였다.
하비(下邳)사람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천자라 자칭하였다. 서주목 도겸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와 비(費)현을 취하고, 임성을 공략하였다.
삼국지 『무제기』 2
그런데 이 화현과 비현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된다.
흥평(興平) 원년(194) 봄, 태조가 서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태조의 부친 조숭(曹嵩)이 관직을 버린 후에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 때에서 난을 피해 낭야(瑯邪)에 가 있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래서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복수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주 :『세어』에 이르길 「조숭은 태산군 화현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군 태수 응소(應劭)에게 영을 내려 자기 가족을 연주로 모시게 했는데, 응소의 병력이 채 이르기 전에, 도겸이 비밀리에 보낸 수천기에 붙잡혔다. 조숭의 가족들은 응소의 영접인 줄 알고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의 병사가 이르자, 태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가운데서 죽였다. 조숭이 두려워 하자, 먼저 그 첩은ㄷ 나가게 했는데, 첩이 뚱뚱하여 문을 나갈 수 없었다. 조숭이 측간으로 달아나다 첩과 함께 해를 입고, 온 집안이 모두 죽었다. 응소가 두려워서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후에 태조가 기주(冀州)를 평정하니, 응소는 이때 이미 죽었다.」고 한다. 위요(韋曜)의 『오서(吳書)』에 이르길 「태조가 조숭을 맞이하며 보낸 물자수레가 2백대였다. 도겸은 도위(都尉) 장개(張闓)를 보내 기병 2백명을 거느리고 호위하며 전송하게 했다. 장개가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사이에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이로 인해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그 허물을 도겸에게 돌리고 그래서 정벌한 것이다」라 한다.
삼국지 『무제기』 3
3.4. 조숭일가의 몰살기록
조숭이 살해당한 정확한 년도와 날짜는 불명확하지만 대략적으로 초평 4년 (193년)으로 추정된다.[9] 삼국지 무제기, 후한서, 삼국지 도겸열전에는 모두 초평 4년(19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무제기에 193년 가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분명 존재하고 이때 명분이 조숭 때문이다. 후한서, 정사 삼국지 도겸전을 봐도 어찌되었든 사건의 발생은 1차 대학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따르면 193년에 조조가 1차 침공의 명분을 일가의 학살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다만 조숭 일가를 몰살한 주체가 사서마다 다른데, 두 가지의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정사 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세어[10] 의 기록으로 도겸이 수천기를 보내 조숭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후한서 응소전의 기록도 이와 같다. 다른 기록은 역시 정사 삼국지 무제기 주석 오서의 기록으로 조조가 보낸 짐수레만 백여 대였고 도겸이 도위 장개를 보내 조숭을 허창까지 호송해주려 하였는데, 본래 도적 출신이었던 장개가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고 회남으로 도주했으며 조조는 이를 도겸의 허물로 돌리고 이 때문에 그를 정벌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 도겸전에도 오서의 기록만 주석으로 인용하여 같은 서술이 되어 있다. 후한서 도겸열전도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졸들이 조숭의 재보에 눈이 뒤집혀 그를 습격하여 죽여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에는 '전임 태위 조숭이 난을 피하여 낭야에 있었는데, 아들 조조가 태산 태수 응소에게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조숭의 치중은 100여 대였다. 도겸의 별장이 음평을 지켰는데 병사들이 조숭의 재보를 탐내 화현과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엄습하여 죽이고 아울러 어린 아들 조덕추도 죽였다.'라고 후한서 삼국지 도겸열전, 오서의 기록을 사용한것으로 보인다. 이후 주석들도 오서쪽 내용에 손을 들어 주고 있는데 오서의 내용인 '조조는 격문을 띄워 도겸에게 허물을 씌우고 서주를 정벌하려고 했다'는 기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5. 조조의 1차 침공
이에 조조는 도겸을 친다.
오서 왈 – 조공의 부친이 태산에서 피살되자 도겸에게 그 허물을 돌리고 도겸을 정벌하고자 했는데 그가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주군에 일시 파병(罷兵-군대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조서에서, "…(생략)…"라 했다. 도겸은 조서를 받고 이내 상서하여, "…(생략)…"라 했다. 조공은 도겸의 상주문을 받아보고 그가 파병하지 않으려 함을 알고 이에 진격하여 팽성을 공격해 많은 백성(인민)들을 죽였다(多殺人民). 도겸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고, 청주자사 전해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구원하니 공은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왔다.[11]
신 송지가 보건대,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니,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가 도겸(陶謙)을 정벌할 때, 자기 집안에 일러두길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지하라"고 했다. 후에 돌아와 맹탁을 만나고서는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친근함이 이와 같았다.
삼국지 『장막전』 1
서주를 정벌하는데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독려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대군과 팽성(彭城)에서 합류하여 도겸 군을 대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하여 10여 성을 항복시켰지만, 도겸을 성을 수비하며 감히 나오지 않았다.
삼국지 『무제기』 2
초평 4년(193)에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팽성에서 도겸과 크게 싸웠다. 도겸의 군대는 패한 후 도주하였는데, 죽은 자의 수가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사수는 시체로 막혀 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겸은 물러나 담성을 지켰다. 조조는 양식이 부족하였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지 『도겸전』
태조(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팽성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 수릉, 하구의 여러 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삼국지 『조만전』
초평 4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여 팽성의 부양을 격파하였다. 도겸이 퇴각하여 담에서 농성하자 조조는 이곳을 공격하여도 함락치 못하여 퇴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취려, 저릉, 하구를 함락하여 모두 도륙했다. 죽은자가 수십만에 달하였고, 닭이나 개도 남기지 않았으며 사수는 이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이 후 다섯 개 현의 성곽에는 (사람이) 다니는 자취가 다시는 없게 되었다.[12]
본래 삼보는 이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도망와 도겸에게 몸을 의탁하여 머문 곳인데, 모두 멸하여졌다.
후한서 『도겸열전』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고 배송지가 지적하지만) 조조가 일단 도겸의 세력이 강한 것을 봐서 외교전을 시도했다는 일화까지 나올 정도로 조조는 도겸을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친족을 진류 태수 장막에게 부탁한다.(초평 4년) 가을,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해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는데, 도겸군이 패하자 달아나 담현을 보전했다. 당초, 경(京), 락(雒)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백성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서주 땅(徐土)에 의탁한 자가 많았는데, 조조가 당도하여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조조는 담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이내 떠나서 취려(取慮), 수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해 차지하고 이들을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자치통감
출진한 조조는 조인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삼아 도겸군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함락시킨다. 그 후 조인의 별동대와 합류한 뒤 팽성으로 진격하여 많은 백성(인민)들을 죽였고(多殺人民)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온 도겸과 전투를 치른다. 도겸은 대패해 정사에 따르면 수만이라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기가 죽은 도겸은 함부로 나오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원정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양식이 부족해져서 군사를 물렸다. 마침 청주에서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으로 내려 오고 있었기도 했고, 조조군은 이때 퇴각하면서 취려, 휴릉, 하구 등 다섯 고을을 쓸어 수십만 명의 백성을 학살했다. 특히 후한서 도겸열전에 따르면 이 지역은 유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지역인데 모두 멸하여졌다는 표현이 나온걸로 봐선 이들 대부분이 무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되는 건, 조만전에는 팽성국 원무현으로 후퇴했다는 부분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담현으로 후퇴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지명 오기 같은 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고, 자치통감에서는 해당 내용을 선해하여 기록했다. 자치통감은 조선에서 중국사의 교재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신뢰성이 높으니 그 쪽을 받아들이는게 맞다.
3.6. 조조의 2차 침공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5성을 함락시켰으며, 마침내 공략한 땅이 동해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와 담(郯)현을 지나는데, 도겸이 조표(曹豹)와 유비를 보내 담현 동쪽에 주둔하면서 태조를 요격하게 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곳마다 잔륙(残戮, 학살)한 곳이 많았다.
주: 손성이 이르길 「무릇 죄악을 정벌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부터의 아름다운 궤범(軌範)이다. 죄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륙시킨 것은 잘못이다.」고 한다.
삼국지 『무제기』 3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삼국지 『조인전』
흥평 원년(194)에 조조는 재차 동쪽 정벌에 나서서 낭야와 동해의 몇 개 현을 평정시켰다. 도겸은 두려워하며 단양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장막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맞아들였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돌려 여포를 공격했다. 이 해, 도겸은 병으로 죽었다.
삼국지 『도겸전』
194년 여름(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조조는 자치통감에 따르면 서주에 불과 2개월만에 돌아와 다시 학살극을 펼친다. 양분은 동해군 양분현을 말하고, 담현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다. 이때 역시 분명히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진수, 손성, 배송지, 사마광 등이 일제히 잔륙, 잔멸이라는 용어를 써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표현했다.조조가 사마 순욱, 수장령 정욱을 시켜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가서 도겸을 공격했다. 땅을 공략하며 마침내 낭야, 동해에까지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시켰다.
자치통감
〈무제기〉의 표현은 여포가 연주를 차지해 돌아가 담현을 지나는데 조표와 유비가 동쪽에서 요격했다고 한다. 조조는 이를 격파하고 담현을 지나쳐 담현 서쪽의 양분현을 함락시켰다. <조인전>에서는 조인이 비, 화, 즉묵, 개양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고 한다. 여기서 '별장'에 해당되는 건 무제기의 기록을 볼 때, 조표와 유비로 판단된다.
4. 학살의 결과
서주를 지배하고 연주, 예주, 양주(楊州)의 일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던 도겸의 힘은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크게 쇠퇴한다. 태산군과 임성국을 잃고 팽성국은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해졌으며, 낭야국과 동해군(어쩌면 하비국을 포함하는)에서는 조조군의 병사들이 학살까지 저질렀다. 광릉군도 설례와 착융의 약탈을 겪고 서주백을 자칭한 원술의 침입을 받는다. 원술은 오경을 광릉태수로 명하고 노숙에게는 동성현장을 권유하였다. 장소와 장굉 등 서주 명사들의 강동 이주 시기도 이때로 여겨진다.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은 양주로 도망치고, 그 와중에 광릉태수 조욱도 사망한다. 기도위 장패는 독립해 소규모 군벌이 된다.
결국 유비는 하비로 처소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의외로 하비의 피해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하비는 유비, 여포, 원술, 조조의 각축장으로 변해 노숙에게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는 말까지 듣는다.
당장 조조에게 털린 후에 진등이 유비한테 호구수가 백만이라고 풍요롭다고 거짓부렁을 치는데 서주가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호구가 270만 찍고 도겸 통치 당시엔 정말로 풍요로워서 각지의 유민까지 몰려 인구가 매우 불어난 상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숫자에서 백만만 남은 것이니 오히려 수백만의 인구가 조조에게 엄청나게 털린 것이다. 이 점은 청나라의 역사학자 심가본도 지적했다.
이런 인구 감소는 단순히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유민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조는 닭이나 개 같은 주요 가축까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서주에서 철저한 파괴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에 서주 주민들이 잠시 학살을 피해 피신했더라도 경제 기반이 파괴되어 그 상태에서 바로 유민이 되었을 확률도 높다. 또 조조의 서주 침공은 2년에 걸친 장기간의 원정이었으며 그 학살 범위도 광범위했으므로 이 기간 동안 학살을 피해 많은 인구가 서주를 탈출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원래 부유했던 서주에 의탁한 유민 인구가 학살당했으며 나머지도 도망쳐 빠져나갔을 확률이 높은 것을 말할 것도 없다. 한 마디로 조조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것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집도 절도 없는 유민들 역시 대량으로 양산했던 셈이다.
그렇게까지 털었는데도 조조와 여포가 싸우는 연주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아니면 하비 일대는 멀쩡했는지 거듭된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궁해진 조조가 서주를 다시 치려 하자,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二'''에 조만전이 주석으로 들어간다.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二'''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사 순욱전[13]
순욱의 조언은 서주가 연주보다 방어가 탄탄하다기보다는 일단 본거지인 연주를 먼저 찾는게 중하지 가뜩이나 조조가 인심을 잃은 서주땅을 얻어봐야 소용없다는 뜻이다. 이는 조조군 최고의 모사이면서 당대의 명사였던 순욱이 전략적 행보를 조언할 때 민심의 향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또한 조조가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내부에서 증언하고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이 학살에 관련이 있는게 모사인 순욱이나 실제 선봉에 섰던 조인이나 원소의 장수로서 학살에 참여했다가 조조에게 반해 귀순한 주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군량 담당관이었던 하후연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정욱이나 곽가 같은 인물들도 알았을 것이다. 다만 나중에 비슷한 행동을 했던 하후연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순욱, 조인, 주령만큼 특수성이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 외에도 제갈량의 일가가 형주로 이주한 시기가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시기와 비슷해서 제갈량의 집안이 서주 대학살로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입은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실제로 자치통감에 나오는 조조의 학살 피해지역에는 제갈량의 고향인 서주 냥야도 포함되어 있으며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이 고향친구였던 은모를 변호하면서 한 말 중에 자신과 은모가 고향의 엄청난 재난 때문에 그곳의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다 잃어 고향을 버리고 피난했다는 증언을 한 기록[14] 이 남아 있어 당시 제갈량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학살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공명전 등에서는 이 설을 채용해, 제갈량이 어린 시절 서주 일대에 살다가 조조가 학살을 저지르자 형주로 피난갔다는 식의 내용이 들어가고, 삼국지전기에서는 미처 피난가지 못해 위험했던 상황에서 유비가 구원을 와 목숨을 건지고 이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이후 유비군에 출사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김경한 삼국지에서도 서주 대학살에서 제갈량이 처음 등장하는데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자 어린 제갈량은 형주로 피난을 가면서 충격과 공포와 분노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며 조조를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삼국지톡에서도 역시 어린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의 참혹한 광경과 자기 식구를 죽이려던 조조군에 의해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 나온다.
5. 학살의 영향
5.1. 연주(兗州)의 반기
진궁이 여포전 주석 전략에 조조에게 반심을 품은 이유가 "스스로 의심을 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장막이 도박에 응한 것을 바탕으로, 연주 호족들의 조조에 대한 불만, 공포와 연주 주민들의 기본부터 있던 조조에 대한 공포심이 2차에 이은 서주 대학살로 극대화되어 반란까지 이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15] 또, 연주를 빼앗기게 된 계기가 된 서주침공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조는 1차 침공 당시 8개월이나 서주에 머물면서 학살에 집중했고 식량 문제와 전해, 유비의 구원으로 인해 연주로 돌아간지 불과 두달만에 다시 서주로 가 학살극을 펼쳤는데 이렇게 서주에서 너무 오래 머문 나머지 연주를 직접 관리하지 못해 반란세력이 결집할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식간에 거의 모든 연주 지역이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조조가 서주에 머물면서 학살을 벌이는 동안 여포는 당시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를 공격했고, 순욱이 지킨 3개의 성을 제외한 전 연주 지방이 함락되었다. 연주가 공격당했을 때 연주 호족들과 주민들이 조조에게 반발해서 모반을 꾀했고 장막, 진궁은 여포와 손잡고 세력을 키웠다. 당시 여포는 원소의 객장이었다 쫓겨나 장양에게 의탁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진궁과 장막은 당시 조조 진영 내에서 별로 힘있는 세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연주를 빠르게 점령하고 조조를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조조에게 등을 돌린 연주 호족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사 삼국지 무제기와 장막전에서 여포군이 무력만으로 점령한 게 아니라 연주 지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단 이를 단순히 서주 대학살만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연주 호족들의 이탈은 애시당초 조조가 조정에서 임명된 정식 연주자사도 내쫒은, 원소의 수하로서 연주를 얻은것에 불과하다는 태생적인 단점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조조가 변양 등 연주 호족들을 함부로 잔혹하게 죽여 호족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 또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소의 격문에서도 지적하는 사안이다. 또한 장막이 조조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신변 때문으로 조조가 장막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조조가 원소의 명에 따라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원소와 조조는 갑을관계였기 때문이다.
장막은 원소-조조 라인에서 밀려났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은 있었고, 당시 여포는 인성에 문제가 많을지언정 군사적, 정치적으로 이름이 있었다. 남부에는 아직 원술이 건재했고 북부에는 공손찬이 조조 스폰서인 원소와 적대하고 있었다. 진궁이 굳이 잘 나가는 조조의 세력을 박차고 나간 건 세력 내부에서 나가리가 되었지만 명성과 실력이 있는 자들끼리 힘을 합쳐서 독자적인 세력이 되는 선택지도 한 번 해 볼 만한 도박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반란 자체는 어떻게든 일어날 이유가 있을지언정 이로 인해 순식간에 단 2개 현만 남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전 영토를 빼앗긴 것은 분명히 서주 대학살의 지분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만큼 조조가 무리할 정도로 서주 전선에 병력을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조조가 194년 다시 도겸을 공격하자 장막의 동생 장초와 진궁 등이 접근해 여포를 불러 그를 연주목으로 세우며 조조와 싸울 것을 권한다. 장막의 높은 명성은 조조에 대한 민심이탈로 연주 전역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서주와 연주에서 악명을 쌓고 오랜기간 연주를 관리하지 않아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던 조조는 일생 최악의 수세에 몰렸다."작금에 천하가 갈라지고 무너져서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대는 천리나 되는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맡고도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둘러보고만 있으니, (다른 제후들과 같이) 충분히 호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연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정벌을 간 탓에 (연주가) 비어있습니다. 여포는 장사이므로 그와 싸워서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를 임시로 맞이하여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있다가, 천하의 형세를 보아 때에 따라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려 응대한다면 이 역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을 것입니다."
5.2.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등장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애먼 사람들에게 화풀이한 조조는 정말로 위험해지자 복수를 포기하고 회군해서 복수도, 서주를 손에 넣는 것도 실패한다.
여기저기 객장으로 온 세상을 떠돌면서 유협집단이나 이끄는 처지였던 유비는 원소의 공격을 받던 공손찬을 떠나 본격적인 군벌로 자리잡고 싶었는데, 마땅히 손에 넣을 만한 땅과 기회가 보이지 않던 중 서주 사건을 알고 도박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비의 부하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반대했지만 유비는 나름대로 도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서주로 향했다.
처음엔 부하들의 우려대로 서주로 와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나, 조조가 저지른 만행의 나비효과로 본거지 연주가 배신하여 조조가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서주행은 성공했다. 그렇게 서주는 뜬금없이 유비에게 넘어가고 유비는 본격적인 군벌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유비가 서주를 장악했을 때 막 협천자를 하던 조조는 민심의 안정을 위해서 유비에게 진동장군 의성정후라는 관직을 내려서 서주 지배를 묵인해야 했다.
이 때 원소는 한때 공손찬의 객장이었고 국경지대에서 싸운 적도 있는 유비가 서주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현덕은 홍아(고아)하고 신의가 있소. 지금 서주가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라고 받아들였다. 한때 공손찬의 객장으로 원소군과 싸운 적이 있는 유비가 하남(河南) 군벌이 되었음에도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수긍한 것이다. 원소는 하북(河北)에서 자신과 공손찬이 싸우는 동안 상관도 없을 터인 하남(河南)으로 내려간 시점에서 유비의 본질을 파악하고 하북의 공손찬을 돕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17]
유비는 이 사건으로 학살자에 맞서는 영웅의 명성과 당위성을 얻었으며, 실제로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전쟁 난민들을 거두어 보호하는 등 실질적인 행동을 취해서 어느 지역을 가든 호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유비가 서주를 잃고 난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도 말년에 황제까지 오를 수 있던 기반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여포의 부활과 유비의 성장은 두고두고 조조의 발목을 잡았다.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고 하북 전역을 장악하면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조조는 유비, 여포와 7년 넘게 싸워야 했고 관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보다 압도적인 열세에 놓였다. 관도대전에서 간신히 승리했지만 원소가 급사하기 전까지 원소는 여전히 조조보다 우위였기 때문. 하지만 원소의 급사와 원씨의 내란을 틈타 하북을 차지하는 데 결국 성공한다.
하지만 하북의 민심이 따라주지 않아 강제 이주, 착취, 원소군 학살 등으로 하북의 힘을 꺾어야 할 만큼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조조의 조치는 위진남북조시대 때 하북이 오호의 침공으로 전란에 휩싸이는 동안 제 역할을 못하고 갈려나가며 최종적으로는 원래 중국의 중심지였던 황허강 일대가 당시는 밀림이었던 양쯔강 일대보다 약소화되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게다가 여포는 도중에 꺾었으니 그렇다 쳐도 유비는 호족들과 백성들에게 얻은 인망을 기반으로 최후의 적으로 끝끝내 살아남아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했다.
5.3. 서주(徐州) 출신 촉한과 동오의 명사
수많은 서주(徐州) 호족들은 학살을 피해 타 지역으로 도주했는데, 강동(江東) 호족들의 본거지 양주(揚州)와 유표의 형주(荊州)였다. 동오에서 본거지 양주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서주 대학살을 피해 양주로 이주한 서주 사람들이다. 동오의 명신인 장소, 제갈근, 보즐, 노숙, 여대가 모두 서주 출신. 이 사건으로 가장 득본 건 아무것도 안 하고 땡잡은 손씨였던 셈.
삼국지 갤러리의 한 능력자가 학살이 시작된 193년부터 유비가 서주에서 쫓겨나는 200년까지 삼국지 인물들의 열전을 찾아서 제시한 적이 있었다. 이하 서주에서 살다 이주한 사람들. 다만 미축은 예외적으로 대학살 때 끝까지 서주에 남고 유비를 모시면서 서주를 떠났다.
촉한
동오
- 장소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제갈근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보즐 -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노숙 - 서주(徐州) 임회군 동성현(東城縣) →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서성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 여대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해릉현(海陵縣)
명사는 아니지만 손권의 아내 보연사도 보즐의 일족으로 서주 대학살을 피해서 여강으로 피신했다가 강남으로 이주한 뒤 손권의 아내가 되었다.
적벽대전 당시 주전파로 조조를 반드시 무찔러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강동 호족들이 안 도와주자 형주에서 도망친 유비까지 끌어들이며 싸운 노숙이 다름아닌 서주 출신이라는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손권의 신변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권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주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조조에 대한 확고한 불신을 심어준 것이다. 서주 팽성 출신의 장소가 주화파의 필두이기는 했지만, 이는 장소가 강동 호족들처럼 자기 안위를 위해서 항복하자고 한 게 아니라 저런 일을 겪은 만큼 진심으로 손권과 강동 사람들의 신변을 생각해서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유독 동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 오지나 오에서 지어진 조만전이 조조의 잔인함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서주에서 동오로 내려온 내려온 유랑민들의 기억이 그만큼 생생히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조조가 제갈량에게 자신의 부하가 되라고 권고하는 서신을 보내자 깔끔하게 무시한 것도, 미축이 군소 군벌이었던 유비에게 전 재산과 자기 인생을 올인했던 것도 대학살이라는 참상을 일으킨 조조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명사는 아니지만, 서주 출신 유비군은 수차례 여기저기 도주해야 했던 유비를 자발적으로 찾아가며 부대를 수습하는 등 다른 군벌 부대와 비교해서도 충성심이 대단했는데 이 또한 조조에 대한 원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서주대학살과 다르지만 관도대전에서 전우들을 유린, 포로학살한 것에 대한 원한을 가진 하북 원소군 출신 유비군도 마찬가지였을 듯.
이걸 '그깟 은원관계'라고 치부하는 이들이 있는데, 인간에게 있어 가족과 혈연만큼 강한 결속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존재는 없다. 왜 조조가 조씨-하후씨 일족을 우대했겠는가? 서서가 조조군으로 전향한 이유가 무엇인가? 손권이 왜 유비에게 동생을 내어주고 또 관우와 혼사를 트려 했는가? 미축이 분사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마초의 유언이 무엇이였던가? 삼국지 안에서만 봐도 혈연이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데 특히나 후한말 군웅할거시대는 기존 향촌 공동체의 붕괴로 더더욱 친족집단의 결속력이 중요해졌던 시기다. 친족의 죽음으로 인한 은원관계를 '그깟'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배신의 아이콘으로 명성(?)이 드높은 여포 정도일 것이다. 그 여포도 자기 친족을 배신한 적은 없다. 오히려 우대하면 안될 인간을 친족이라 우대해서 망했지...
그리고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벌인 이유도 은원관계 떄문이다.
결국 당시 순욱이 서주대학살의 영향을 돌려말하며 "격파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다"고 평한 건 헛말이 아니었다. 조조로서는 천하 통일에 있어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 최악의 수였다.
5.4. 형주(荊州) 백성들의 도주와 천하통일 실패
조조가 형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은 유비를 따라 도주했다. 서주에서 형주로 도망친 난민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때 도주한 형주 사람들 중에는 서주에서 도망쳤다 재도주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비는 부하들이 진언했듯이 서둘러 강릉으로 가서 조조와 맞서야했지만 결국 백성들과 형주의 사족들이 귀부하자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며 가려했고 형주 사람들은 오로지 '조조가 두려웠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죽음의 위기를 불사하면서까지 도망친다. 그리고 서주 대학살 때 유비가 서주 난민들을 거둔 것처럼 자신들도 버리지 않고 도망칠 때 지켜줄 거라는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유비는 언론플레이나 병사 문제 등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조조군이 공격할 때까지 지켜줬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조조에게 위협적인 상대는 유비이며 강동의 주전파가 유비와 손잡고 적벽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대저 세상사람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면, 반드시 고향을 기꺼이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선주가 달아난 이후에, 그를 따르면 필시 살 수 없었고, 유종이 이미 항복해, 떠나지 않았으면 필시 죽지 않았으리라! 내가 형주의 백성을 헤아리니,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며, 닭과 개도 남겨두지 않았기에, 선주를 따라 달아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청나라 말기의 역사가 전진굉(錢振鍠)의 평
유표가 죽은 뒤 유종과 채씨의 판단 착오로 조조는 형주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지만 완전한 장악에 실패하고, 서둘러 강동에 쳐들어갔다 적벽대전에서 역관광당해 유비에게 형주라는 발판을 내주게 된다. 형주 이북은 차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형남은 유비-관우-손권 식으로 넘어갈 뿐 동오가 멸망할 때까지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를 멸망시켜 나머지도 차지해긴 했으나, 그때는 조씨의 위나라가 아니라 사마씨의 진나라였다."이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실행한 위엄과 형벌로 인해 그 자제들이 아비와 형제들이 겪은 치욕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를 지키며 항복할 마음이 없을 것이니, 가서 격파할 수 있다고는 해도 우리가 소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5.5. 조씨 학살의 나비효과
조숭은 측간으로 달아났으나 첩과 함께 해를 입었고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19]
조숭이 죽으면서 조조의 동생 조덕 등의 조씨 일족들은 몰살 당했다. 즉 조씨에게만 군권을 나눠주는 위나라의 관행에서 잠재적인 정권 핵심 엘리트 층이 모조리 날아간 것과 동급의 충격이었다. 군부 엘리트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 조조가 받은 가장 큰 피해일수도 있다. 이때의 혼란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휴는 아빠따라 오군에 갔다가 조씨 집안에 들어오면서 천리마 소리를 듣고 조진은 조씨가 아닌 양자이면서 조씨 가문으로 충원되기도 한다.
5.6. 1800년을 이은 증오와 오명
제갈근이 자신과 동향 사람인 은모를 변호하며 한 말인데, 그 속에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엿볼 수 있다.
서주대학살의 생존자인 제갈근의 증언에서 나타났듯이, 당시 서주 백성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훗날 유비가 조조에게 패퇴하면서 서주는 조위의 차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서주 사람들이 조조를 좋아했을까?저와 은모의 고향은 난을 만나 뒤집어져, 생명들이 거의 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상의 묘를 버리고, 노인과 아이를 업으며, 풀을 헤치며 나가다가 성화에 귀의하게 되어....(후략)
瑾與殷模等遭本州傾覆,生類殄盡。棄墳墓,攜老弱,披草萊,歸聖化....
이는 서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대학살 당시 연주 사람들이 호족들과 함께 여포를 편들고 조조에게 반기를 든 것, 옆동네인 수만 명의 형주 사람들이 조조에 대한 공포로 고향을 버리고 도주한 것, 원소 사후 기주, 유주 사람들이 원상을 따라 대규모로 이주한 것(대상이 다를 뿐 유비 따라 형주 사람들이 도주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다.)[20] , 조조가 하북을 차지한 이후에 원상 사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공융을 숙청하고 이전, 장패 등 조조파 호족들이 자신들의 빈객 수천가구를 자발적으로 업으로 이주시킨 사건(당연히 조조가 업을 근거지로 삼아 콜로니화 하는 상황에서 조조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다.)이 있고, 주령전에 의하면 원주민인 기존의 하북 백성들이 병호, 민둔 등으로 편입되어 강제로 이주당한 정황도 있는데 이런 학정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기주 점령 직후 하북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이들은 평생동안 노예에 준하는 신분으로 격하된 것이며 이게 자식에게도 세습된다.
조조는 둔전제를 강제로 실행해 조조 치하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으며 조조 휘하 청주병들이 갖은 행패를 부려 우금이 진압하는 등 악명이 많았으며, 조조 밑에서 병호와 민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형주 백성들도 좋게 봤을 리는 없다. 어디를 가든 조조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혐오의 대상이었다.
설령 사는 동네가 다르다 하더라도 똑같은 백성의 입장에서 아버지 죽음에 하등 상관도 없는 동네 사람들을 수십만이고 죽여대는 미친 놈의 어디가 좋게 느껴질까. 자신들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백성들의 참상을 잘 신경쓰지 않는 호족들조차 조조의 잔혹함에 전율할 정도였는데 말이다. 백성에겐 잔혹해도 호족들에게 잘 대해줬냐면 그것도 아닌 게, 아래에 나오는 토사구팽당한 사람들이 죄다 호족 출신이고 허도에서 도살당한 대신들도 따지고 보면 다 호족 출신이다.
그리고 조조의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포군을 공격할 때 팽성을 함락해 학살하거나 했으며[21] 후한서 기록에는 원소를 대파한 이후 원소에게 합류하지 못한 포로들을 다 파묻었고,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관도대전 때 항복한 원소군 포로를 모두 다 파묻어 버렸는데[22] 전후로 원소군을 죽인것이 7만이었고, 순우경 휘하의 천여 명을 죽여 그들의 코를 잘랐다. 관도대전의 정리 과정에서 포로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또한 원소의 후계자 원상이 망명간 오환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또 수많은 학살을 벌였고 살아남은 오환인들 상당수를 하북으로 이주시켜 노예화했다.
이외에도 조조는 화북, 회수 일대, 사천, 한중의 대규모 강제 주로 인한 대규모 유랑민 발생, 헌제를 허창으로 강제로 끌고 와서 검리상전, 동귀비와 동승 일족 학살, 복황후와 일족 학살, 허도에서 난이 일어났을 때 오랜 부하가 죽었다는 이유로 허도에 있던 한나라 대신들에게 말도 안 되는 OX 퀴즈를 내고 도살극, 오랫동안 조조에게 충성한 호족인 양수(삼국지), 최염, 여백사, 순욱, 공융의 토사구팽 등 온갖 이름 높은 악행들을 저질러 상하층을 막론하고 조조 이름 두 자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장 조조 사후 펼쳐진 오호십육국 시대와 남북조시대에서도 조조에 대한 부정적 인심은 변하지 않았다. 생전 조조가 저지른 악행과 폭거와 학정이 계급과 지역과 민족을 가리지 않았듯, 한족과 이민족 가릴 것 없이 조조는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었고,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 왕족과 문벌귀족들 또한 조조에 대해 나쁜 놈, 반역자, 위선자라고 확실히 규정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청나라 시대까지의 중국과 조선에서 '조조=천하의 개쌍놈, 천인공노할 역적' 취급한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조조 본인도 이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증오한다는 걸 모를 리 없겠지만 죽기 전 유언을 남길 때 "내가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조앙을 죽게 만들어서 전처인 정씨와 이혼하게 된 거다."가 그가 유일하게 후회한 일이었음을 발언하며 서주 대학살은 전혀 후회 안 했음을 시인했다. 후회를 안 한 건 그렇다 쳐도 저렇게까지 원한 살 일들만 꾸준히 하면서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참 대단하다. 좋게 말하면 멘탈갑이고, 험하게 말하면 뻔뻔하다고 봐도 무방. 친구인 원소 인성도 그렇고 사실 이 인간들이 친했던 이유가 인성 수준이 비슷해서였을지도.
6. 학살의 이유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성격이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친구인 원소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비인간적인 만행들을 눈에 안 띄게 자행했다면 조조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해서 잔악함과 광기를 대놓고 표출했다. 말년에 갈수록 조조의 그런 성향은 심대해졌고 만행의 수위와 횟수도 심각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해서 도겸을 없애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분풀이로 서주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것이 후대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조조의 속좁은 복수심이 (연주 소실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도겸을 향한 복수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화를 미쳤다. 조조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더욱 번져가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도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에만 눈이 멀어서 자신의 기반을 닦는 것과 동시에 민심을 달래고 또 얻어야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큰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의 사학자 장야신
7. 당시의 여론
인권 그런 거 없고 인신공양으로 유명한 상나라 이래 잔혹한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진 고대 중국에서도 학살자에 대한 시선은 좋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전국시대의 백기와 초한쟁패의 항우가 저지른 학살은 자신들이 파멸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위 정통론을 내세우고 심지어 위 찬양을 위해 만들어진 정사서인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서 주인공이자 창업군주인 조조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저자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배송지도 '(단지 전란을 피해 서주로 온 것 뿐인 무고한)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坑殺, 구덩이에 넣고 파묻어 죽임)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죄 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이라는 다른 사서의 어휘들까지 주석으로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이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후대의 역사서인 《후한서》의 범엽(남북조시대) 역시 이 사건에 대해 '(1차 학살에서만) 죽은자가 수십만에 달하였다'라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당시 진림을 비롯한 당대 귀족들은 높으신 분들 아니랄까 봐 백성 학살은 알 바 아니고 명사를 죽이는 것을 더 나쁘고 중요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건 높으신 분들의 마인드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고한 자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나쁜 건 없다.
연주 호족들 중 조조에게 등을 돌리지 않은 호족은 극소수였는데, 조조의 편을 들었던 순욱도 서주보다 여포가 우선이라면서 조조의 행동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격주군문'에는 왜 빠져있는가인데, 사실관계만 놓고 본다면 원소는 조조의 도겸 공격을 도왔으나 그 내용은 빠져있고 오히려 조조가 도겸에게 패했다고 써져 있다. 자신과 서주학살은 연관이 없으며 서주학살 자체를 빼놓고 도겸에게도 지고 여포에게도 져서 변방을 전전했다고 쓴 것이다. 또 격주군문이라고 조조의 악행이 싸그리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조조가 협천자한 후 누구를 죽였네 하는 내용도 나오고 동승도 조조에게 주살당했는데 격주군문에는 언급이 없다. 유비가 자신에게 의탁한 것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옳았을 텐데 그 내용도 없다. 결국 '격주군문'이라는 것은 언론플레이이고 언급이 안 되었다고 하여 없는 사건 혹은 심하지 않은 사건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게다가 서실 격주군문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조조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조조의 정복행위로 인한 잔학함을 명백히 고발하고 있다.
'난세에는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주장이 있다. 유우나 유장 같이 심성이 착하거나 유비나 오두미도의 장로처럼 백성들을 진정히 아낀 군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군벌들은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한 기록은 발견되며, 이들도 다른 자들을 비난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약탈과 군단위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극은 엄연히 다르고 당연히 더욱 끔찍한 범죄다. 게다가 조조는 신체 건강한 남성은 기본으로 힘 없는 여성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심지어 가축까지 수십만이나 도륙하여 거대한 강이 시체로 가득차 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학살은 그 당시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사 전체를 살펴도 비슷한 사례가 널렸지만, 그렇다고 조조가 벌인 학살이 절대로 정당화가 될 수 없다.진림: '스스로 삼공(三公)의 관직을 차지하였으나 그 행위가 걸왕(桀王)과 도적의 모습이며, 나라를 더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으며 사람과 귀신에게까지 그 독이 풀어졌다. 더욱이 그 천박한 정치는 가혹하고 참혹하였으며, 금령이 잇따라 갖추어져, 주살처럼 좁은 길을 채웠고 함정 구덩이가 길을 막아, 손을 들어 그물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나 발을 딛는 곳마다 덫과 함정을 밟게 되어, 이에 연주와 예주에 걸려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도성 또한 탄식하는 원망이 있었다.'
유비: '(조조는) 천하를 찢고 어지럽히며 백성과 만물을 잔인하게 훼손했습니다'(한중왕표)
손권: '조조의 행위는 살육과 정벌이 지나쳐'
- 공손찬은 이민족에게만 강경했던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가혹해 민심을 잃었다.
- 원소는 '십상시 탄핵을 위해 관군을 흑산적으로 위장해 멀쩡한 마을을 불태우고 계엄령을 내린다. 십상시들을 죽인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해 진상을 숨긴다'라는 계책을 하진에게 제의했고 하진은 실행했다.
- 동탁은 집권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으며 낙양을 황폐화시킨 건 이미 유명하고, 그 사후 장안을 차지한 이각과 곽사에 의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자세한 건 삼보의 난을 참조.
- 손견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어줄 유력자인 원술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 남양 태수 장자를 죽이고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손책은 원술 휘하에서 그의 명령으로 육강을 공격했고 양주 군벌로 자리잡았다. 손책 사후 손권이 호족들 때문에 애먹기는 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 중 요동의 남성 7천 명을 죽이고 그 인골로 전승 기념비를 만들었다.
이 사건이 축소된 이유는 위진 정통론에 입각하여 나온 정사 삼국지에서 위의 시초, 위의 정통을 이었음을 자처하는 서진이 조조를 띄워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여양 전투 등 조조가 패한 몇몇 전투를 애매하게 기술하고 넘어가거나 진나라 시조 사마의의 대패인 노성 전투를 생략하는 등[23] 후대의 역사가들도 진수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다른 자료를 각주를 다는 등 진수의 정사삼국지는 상당히 편향적으로 쓰고 있다.[24] 당장 같은 학살을 두고도 동탁이 영천의 백성들을 학살해 남자는 도적이라고 죽이고 여자는 비첩으로 만들었을 때 동탁은 흉역하기 그지없었다고 정사 삼국지는 기록한다. 그런데 조조가 동탁보다 더한 학살을 백성들 상대로 저지를 때 진수는 같은 삼국지에서 단지 잔멸했다는 단어만 사용했을 뿐, 조조를 흉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어째서였겠는가? 조조가 위진의 시조이고, 진수가 진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인 마오쩌둥이 학살한 사람들의 숫자만 수천만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중국에 존경받는 걸 생각해보자.
중국 본토에서도 조조를 재평가한다며 조조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오쩌둥이 립서비스를 낯뜨겁게 해줬는데, 그 역시도 위정자로서 통치력을 제외하면 개인적인 능력은 확실히 출중한 인물이지만 수많은 인명을 죽인 학살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식자들이 마오쩌둥을 두고 괜히 현대판 조조라고 하는 게 아니다.[25]
8. 학살에 대한 해석
현대에 서주 대학살이란 명칭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 의해서 부각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주 대학살이라는 명칭과 이미지는 한국 팬덤이 만든것이 아니라 2000년에 한국에 발간된 한 일본의 삼국지 인물평가 서적에서부터 처음으로 등장했다.[26] 그 뿐이 아니라 1980년대 중국에서 발간된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27] 이 이미 제갈량의 인생여정을 서주대학살에서부터 시작하며, 1996년에 발매된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제갈량의 어린시절 회상으로 서주대학살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2000년대까지도 그 문제 많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대세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사 삼국지는 접근할 생각도 못하고 '''대체 제갈량이 뭐때문에 조조 제끼고 유비한테 간거지???'''라며 어리둥절해하던 한국 삼국지 팬덤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족히 20~30년은 늦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삼국지 혹은 연의를 바탕으로 실사영상물, 게임, 만화 등 대중매체를 부단히 생산하면서 인물과 사건에 대해 정사까지 참고하는 해석과 재해석이 활발했던 반면, 한국의 삼국지 팬덤은 이런 매체 생산이 더뎠다. 물론 고우영 삼국지 같은 만화 작품들 은 적잖이 나왔지만 그 이전에 연의의 정역·완역 자체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모종강본 완역본 나온 게 2000년대 후반의 일이니 말 다했다. 이문열은 제갈량이 조조에게 안 간 건 인재들이 넘쳐나니 자기가 가봤자 별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랬다는 주장을 정설처럼 내놓았다. 정작 배송지는 제갈량이 최주평에게 '님이 조조 쪽에 붙어봤자 조조는 수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눈에 띄지도 못할 거임'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제갈량 정도라면 아무리 조조 휘하에 선비가 많다 한들 출세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서주의 학살은 당시부터 조조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고 쌓아나가는 데 일조한 일이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인권 사상이 없던 고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분의 귀족 유명인사를 한 두 명 죽이는 것이 더 크게 악행의 이미지를 불러왔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28] 이를 볼 때 당대 지식인들의 눈으로 볼 때 서주에서의 학살은 명사 살해보다는 다소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명사 살해보다 중요도가 낮을 뿐이지 6번 항목에서 서술했듯 그 당시의 관점으로도 대규모 학살은 비판받을 일이 맞다.
이 사건이 당시에 중요도가 낮았던 사건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악행을 상당히 부각시킨 《삼국지연의》에서는 언급되지만 관련된 전설이나 경극 같은 것이 찾아보기 어렵다다는 걸 근거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서주 대학살이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 민중들에게도 별거 아닌 사건이었다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 당시와 얼마 시간차가 없는 남북조 시대의 세설신어 같은 문헌에도 조조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 걸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게 조조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퍼졌다는 추론이 합당하고,[29] 삼국지 정사 기록을 보면 대표적으로 형주침공 등 조조를 피해 백성이 도망친 기록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 한다. 게다가 다시 말하자면 삼국지연의에서도 '''조조가 서주에서 가는 곳마다 백성을 살육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언급된다.
결정적으로 애초에 중국 역사상 어느 학살 사건도 전설이나 경극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다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주 대학살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엄연한 비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극이나 소설 등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이런 작품들에서 백성만 대거 죽어난 사건이었을 뿐 딱히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서주 대학살을 다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다루어진다면 재미와 대중성 둘다 해치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를 비롯해서 대다수 경극에서 서주 전투 자체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경극이나 연의는 일기토 중심으로 전투가 진행되니 당대 전투는 일기토 위주였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겠는가?
6번 항목과 7번 항목을 종합하면, 서주 대학살은 당대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행동은 맞으나 명사들 몇명 살해한 사건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현대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이 사건을 명사들을 죽인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었으며, 최소한으로 봐도 백성들에게 조조에 대한 상당히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강력하게 이바지한 사건이다.
한편 일부의 주장으로는 서주대학살은 상대의 전투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초토화작전이라는 식의 평가를 하는 곳도 존재한다. 링크 중세 몽골의 학살이나 조선시대 여진 촌락에 대한 예방전쟁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는 듯 하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학살인가, 아버지를 잃고 눈에 뒤집혀서 벌인 만행인가, 둘 다인가는 알 수 없으나 임용한은 첫째가 주된 이유라고 보는 듯. 여기서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이런 일(집단살해)은 자주 있었다는 것이며 임용한도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으나 당시 전쟁은 그랬다라고 넘어가는 듯하다.
다만 영상에서 '전술의 일원으로 학살을 했다'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일단 당시 시대에 약탈과 민간인 살해가 특별한 일까진 아니었다는 해도 이런식으로 대규모 학살극은 결코 흔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중국 역사서를 통틀어도 이러한 민간인에 대한 살해에 학살(갱살)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사건이 '''이사건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이러한 수준의 학살은 당시에도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애초에 시체로 강이 막힐정도로 학살했다고 정사에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서술의 스케일이 다른데다가 서주라는 한주자체에 대한 대규모 학살극인 이 사건을 이를 약탈등 소규모 사건에 빗대어 축소하는것은 '''피장파장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오류는 매우 위험한 오류로서 이 오류를 다른 사건에도 적용하자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나 일제치하의 '''마루타 실험'''들도 '''전혀 문제 없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만약 조조가 전술적인 판단 하에 행했다면 홀로코스트나 마루타 실험보다는 르메이와 미군이 2차대전 때 일본의 민간인들도 생산 활동으로 전쟁을 간접적으로 돕는다며 일본 주요 도시들에 있는 '''민가들'''을 폭격했던 거에 더 가깝다. 상대를 열등한 존재로 봐서 학살 행위를 자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살과 전술적 행동은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며 전술적인 행동으로써 조조가 학살을 취했어도 이는 학살이다. 거기에 조조 입장에서는 단순한 전술적 행위였을 뿐이라고 해도 결국 실패한 전술이었다. 사실 마루타니 홀로코스트를 갈 필요도 없다. 독소전에서 독일군이 한 슬라브계 학살은 아군이 될 수 있는 슬라브계를 등돌리게 했으며 결국 '''파르티잔'''의 봉기로 인해 독일을 독소전 내내 괴롭혔다. 특히 이런 수준의 대학살은 "수많은 인명을 제거하고 뿔뿔이 흩어놓아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들겠다"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과 민주주의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악행은 별거 아닌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에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삼국시대의 여러 사건들에 대해 그동안 인과관계가 썩 맞아떨어지지 않던 부분들이 이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면서 서주대학살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9. 연의에서의 서술
2차 삼국지 매체의 원조인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10회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10회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삼국연의 본문, 정사마냥 시체로 강이 막혔다거나 하진 않지만 살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여러차례 기술하고 있다. 사실 저 구절이 없다고 정사에 비해서 축소 기재되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 정사도 전문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도겸전을 제외하고는 시체로 강이 막혔다하는 기술은 없기 때문이다. 도겸의 저 통곡도 조조가 자신 대신 백성들을 살육하는 것에 대한 통곡이다.
아니 오히려 연의의 묘사를 보면 나관중은 조조군이 '''처음부터 다 죽이려고 서주에 왔다'''고 하며 조조의 명으로 만일 성을 함락시키면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다 도륙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하자 진궁이 와서 말려도 조조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진궁의 조언을 내치는데, 이 과정에서 진궁의 입을 빌어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조조와 원수진 것도 없는 무고한 서주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서주에서 일어나는 조조의 학살에 대해선 진수가 썼던 '杀戮(살육)'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하게 기술함으로서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가 했던 표현과 동일한 강도로 '조조는 가는 곳 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했다'고 확실히 서술하고, 도겸의 말을 빌어 '이것은 서주 백성들이 받고 있는 큰 재난'이라고 묘사한다.
따라서 전근대시대 사람인 원말명초의 나관중 입장에서도 조조가 한황실을 핍박하고 명사들을 죽이는 것 만을 악행으로 묘사하는게 아니라 '''서주 대학살 역시 엄연히 '조조의 사악한 악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연의의 주인공이자 '의로운 자'인 유비가 중과부적인 상황임을 알고도 서주를 구원하는 것'''을 대조되는 구도를 짜는 것으로서 확실히 재확인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이 일절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유비나 원소나 손권 등이 이후 조조를 비난할 때도 서주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동승 일파나 복황후 등을 죽인 사건은 꾸준히 언급되는 것하고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 때문에 연의만 읽은 사람들은 책을 읽음에 따라 다른 사건에 비하여 서주 대학살에 대한 주목도가 낮아지게 되는 편이다.
10. 창작물에서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서서히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의 일반적인 학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재평가되면서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었으며, 재조명됨에 따라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이자 치부로써 부각되었으며, 이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기류를 막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백사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조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조조에 대한 해석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31] 조조를 냉혈한이 아닌, 기존의 연의를 중심으로 해석된 '냉정하고 포부가 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호걸'이라고 해석되는 매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 사건을 은근슬쩍 축소시키거나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심한 경우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32]
제대로 묘사하는 작품들은 제갈량을 슬쩍 등장시켜 이때가 트라우마가 되어 조조를 증오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넣는 경우가 제법 있다.
10.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직접적인 학살의 묘사는 없다. 오히려 이후 원술이 서주를 침공했을 때 서주 지역이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살해당하는 등 서주가 파괴되는 모습이 더 상세하게 나온다. 이 때문에 이후에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박망파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도망가라고 써놓은 방문에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고 써붙여 놓는데, 이 만화를 통해서만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좋고 조조가 싫다한들 살던 집도 버리고 따라갈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 뒤늦게 이 사건을 알고 신야 백성들의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10.2. 소노다 삼국지
조순의 부음 소식을 들은 조조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데, 이 만화 최고의 명장면 충 하나이다. 서주대학살 자체는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학살로 인해 서주를 떠나는 어린 제갈량을 등장시켜 복선을 깔아놓는다.
10.3. 고우영 삼국지
분량 면에서 아주 간략하게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묘사상으로는 조조의 학살이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나 베트남전의 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참고로 원작이 연재될 시기는 '''1970년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렇다치고 베트남전의 학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명쾌하게 서주 대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셈이다.
10.4. 이문열 평역 삼국지
저자는 온갖 부분에 확인도 안 된 정사 드립을 하며 작가의 사평을 집어넣지만, 유독 이 조조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평을 내리지 않는다. 장면 묘사에서도 조조의 직접적인 학살 묘사는 빼고,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조조 사망 장면에서 꽤 긴 분량을 들어서 조조의 인생을 평가하면서, "조조가 시대를 넘어 역사의 악역이 될 이유는 모자란다."고 말하는데, 시대의 악역이 될 차고 넘치는 이유인 이 서주대학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이 작품이 작가가 조금이라도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정사 타령하면서 조조빠 티를 다분히 드러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의도적으로 서주 대학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배제하면서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는데 왜 조조만 뭐라고 하냐며 물타기를 한다.
10.5. 화봉요원
조조와 곽가가 그 어느 매체에서보다 더욱 사악하고 잔인하고 악랄하게 나와서 서주 대학살을 벌이는 이유부터 기가막힌데 조숭은 그냥 서주 지나가다 병으로 죽었고 조조의 가족 중 그 누구도 도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으나(하후돈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곽가의 암흑병법에 매료된(...) 조조는 조숭의 죽음을 도겸군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여 도겸군이 조숭을 죽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조숭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를 공격해 서주 군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악명을 천하에 떨치는 황당한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여 웃으면서 받아들여 시작된다...아무런 죄도 없이 학살당하는 서주 군인, 백성들 안습...
서주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1만 명 가량 도륙한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새로 얻은 군사인 곽가의 암흑병법으로 '''30만을 학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설명된다.''' 서주 군민들에게 조조군의 잔혹성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할 의지 자체를 상실시켜 버리자는 어마어마한 뻥카.[33] 곽가 자신이 '대의를 위한 희생'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암흑병법을 구사하는 책사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편 제갈량[34] 은 1만 명에 달하는 학살의 희생자들을 보고는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조차 다 말라버렸다'고 독백하면서 심리적으로 조조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직후 제갈량이 요원화를 끌어들이고 조조군을 방해하면서 수경팔기간의 대립이 시작된다. 얼핏 보면 서주대학살의 진상을 '''그거 사실 뻥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로 일축해 버리는 황당무계한 전개지만,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은근슬쩍 말이 된다는 것이 함정(...). 무엇보다 이러한 설명이 '''조조의 악행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이''' 곽가의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위한 묘사에 가깝기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적었던 점도 있다. 오히려 이 학살로 인해 화봉요원의 조조와 곽가는 그 어떤 매체에서보다 더욱 잔인하고 사악하고 악랄하게 나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10.6.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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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국에선 위와 같이 조조가 자신의 군은 '서주를 점령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삼국이 주요인물의 행동에 대해 재해석을 상당히 많이 한 작품인만큼 조조가 수십만을 다 죽인다는 이유도 새로 달아놓았는데, 다름아닌 군량 부족이었다. 조조군은 관도대전 승리 후 하북을 제패하기 전까지 계속 군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럴듯한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명령을 내린 직후 여포가 연주를 공격했다는 정보가 도달하였고 결국 조조군이 철수해버린지라 조조의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7. 삼국지 공명전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 때 조조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서주를 구하러 온 유관장 삼형제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을 통해 훗날 제갈량이 삼고초려를 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10.8. 삼국지 조조전
"서주 보복전"이라는 미션이 있으며 인터미션에서 순욱이 서주에 학살을 일으키면 후세에 주군을 악인으로 볼 것이라며 우려와 걱정을 했다. 유비가 등장하는 턴에서 유비의 대사 중에 조조군이 서주 백성들을 학살한다는 대사가 있다. 그러면서 조조가 이기면서 하는 소리가 '서주 백성들을 어떻게 할 생각 없으니 안심해라'로 일축하는데, 이거는 조조가 주인공이니까 좋게 봐주느라 대충 처리한 것이라 할 수 밖에 없겠다.
반면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만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유비전, 도겸전 등 다른 주인공 입장에서는 그 묘사가 잘 드러나 있으며, 대학살 후 장소, 노숙, 제갈 일가 등이 조조를 피해 피신을 가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출사하고 타도 조조의 기치를 세운 근본적인 이유가 서주 대학살의 복수로 그려질 정도.
10.9. 창천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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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에서는 서주 대학살이 확실미묘하게 그려진다. 일단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쌓인 모습'''이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묘사되고, 관우가 이를 보고 충격을 받고는 격노하며 '''이런 게 무슨 왕의 패업이냐'''고 일갈하는 장면을 넣는 등 대학살의 광경 자체는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된다.[35] 하지만 정작 조조의 의도 자체는 '아버지가 죽었다니 씁 어쩔 수 없지 도겸은 어차피 천하로 향하는 길의 방해물이니 조져버리겠다'(순욱의 독백) 정도로 묘사되고, 대학살의 원인은 약탈과 살육밖에 모르는 청주병을 무장시켜 주력으로 삼아 진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이미 출발 전부터 하후돈이 '청주병은 아직 도적떼 그 자체고 니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병이 조조 맹덕에게서 중황태을의 꿈을 보았다면 조조는 청주병들의 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 대학살에 대해 유비는 '놈들에게 있어 전쟁은 땅따먹기고 일단 땅을 잔뜩 차지한 다음 거기에 원하는 천하를 그려넣으려는 것이다'라고 짧게 평하고, 곽가는 '원래 패업은 힘으로 하는 거고, 조조 당신은 적이었던 청주병을 흡수하고 그 힘만을 중시해서 대 살육조차 단순히 병력의 힘이 드러난 것으로 치부했다'면서 ''''여기까진 좋았다''''라는 맛이 간 평가를 내렸다(...).[36] 즉 굳이 요약하자면 서주 대학살에 대해 사적인 복수심이니 광기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청주병이라는 무자비한 병력을 풀어놓으면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렇게 됐다'''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을 덧붙인 셈이다. 우스운 것은 조조의 캐릭터가 비정하고 잔인하기보다 '''선악을 초월하고 오명조차 신경쓰지 않기에 가장 합리적인 길을 택하는''' 침착한 초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37]
서주 대학살도 '''인의도덕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천하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조조'''[38] 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는 것이다.
10.10. 삼국전투기
학살 묘사자체가 아예 안 나오며 그저 침공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넘겼다. 비판을 받자 나중에 사마의 사후를 묘사할 즈음에 지나가는 투로 살짝 언급된다...지만 사실 <북해 전투5>에서 폭발한 조조가 서주에 사는 쥐새끼 한마리, 풀 한포기 안남기겠단 발언을 하긴 했다. 직접 표현은 안 됐지만. 근데 여담으로 이부분 자체가 조조를 띄우기 위해 도겸을 찌질이로 만든 경향이 있다.[39] 정사기록을 따르면 애초에 도겸이 조조를 친건 찌질해서가 아니라 공손찬과의 동맹 때문이었다. 또한 작가의 착각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10여성을 뺏긴것도 또한 가을이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조숭이 죽은 후이다. 애초에 1차 학살자체가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였으나, 도겸의 수비가 굳어 어쩌지 못하자 후퇴하면서 화풀이 겸 학살을 한것이다. 그러므로 도겸이 겁을 먹어 조숭가지고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건 어폐가 있다. 애초에 위진세어와 오서가 충돌했는데 오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위진세어의 기록을 따랐는데 위진세어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역사서가 아니다.[40] 이는 제갈량의 북벌논란에서도 제기 되었듯이 작가가 사서간 내용이 충돌하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도 지 입맛에 따라 고른다는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진궁이 조조를 비판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자 결국 실망하고 배신하는 전개를 넣어 조조에게 비판적인 내용을 넣기는 했다.
10.1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PK의 '서주변천' 시나리오에 경우엔 아예 대놓고 조조가 서주에 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학살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순욱은 조조를 말리나 듣지않자 "후대에 학살로 평가받을거다."며 탄식하는 대사를 한다.
10.12. 진삼국무쌍 시리즈
단 한번도 서주 대학살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미 조조를 야심차고 고독한 패왕으로 묘사하다보니까 그의 이런 캐릭터에 해가 될 수 있는 서주 대학살 묘사를 의도적으로 안 넣는 걸로 보인다. 그나마 서주에서 싸우는 것도 조조가 세력을 확장할 때 도겸이 괜히 걸려든 걸로 묘사된다. 단 6편 서주전투 촉편에선 진지 대화에서 서주 병사들이 조조군을 가차없는 자들, 귀신같은 존재라 칭하며 공포에 떠는 것으로 조조군의 잔학함을 간접적으로 묘사했다. 요코야마 삼국지 수준의 묘사라고 보면 된다. 진삼국무쌍 6편 드라마시디에서도 언급된다. 6편처럼 한줄기 스토리로만 진행되는 8편에서는 의외로 좀 더 직접적 묘사를 해준다. 시즌패스 3 노숙 IF 시나리오에서는 오나라가 서주를 손에 넣는 스토리가 나오는데, 서성이 서주 출신이라는 떡밥을 써먹어서 예전에 조조가 서주를 유린한 적이 있어서 자신도 서주 사람들이 위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직접 설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서주가 오나라에 붙게 하는 식으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0.13. 토탈 워: 삼국
조조세력의 첫 딜레마로 언급된다. 역사처럼 서주 침공을 감행할 수 있지만, 사방이 위험 천지인 세력의 위치를 고려해서 도겸에 대한 복수보단 세력을 성장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서주 대학살의 발발 여부는 플레이어의 판단에 넘겨지는 것. 한편 유비세력 또한 역사처럼 도겸을 도울지, 아니면 돕지 않고 힘을 기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첫 딜레마이다.
세 번째 DLC인 배신당한 천하 트레일러에서는 조조가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하여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서는[41] 이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쳐들어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때 분노로 굳어있으면서도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는 표정을 볼 수 있다.
10.14. 삼국지톡
삼국지톡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서주를 침공한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냥은 못 간다고 저지른 일로 나온다. 그리고 서주에 붉은 비가 내리는 연출과 함께 창천항로의 묘사처럼 시체로 강을 메운 연출을 보여주었다. 조조의 인기가 높은 작품이지만, 여백사 살해 사건과 이 서주 대학살은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그려냈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군웅들이 아닌 서주의 평범한 백성들의 시각에서 대학살의 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잔혹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낭야중학교 학생들이 "어떤 미친 놈이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겠어?"[42] 하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화를 당하며, 위의 사진에 나온 '시체가 강을 메운 광경'은 학살 당시 13살의 어린 소년이었던 제갈량이 목격한다. 창천항로에서 이 광경을 유관장 삼형제가 목격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제갈량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이후의 연출을 보면 이 사건을 계기로 조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그를 평생토록 증오하게 된 듯. 제갈근이 말하길, 제갈량은 너무나 영특하여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43][44]
조조군의 병사들도 이 미친 짓을 하느라 심신이 피폐해진 것 같은 연출이 있으며, 조조 본인조차도 아서스 메네실을 연상시키는 피폐한 모습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학살을 결심하더니 이후로는 광기에 빠져 완전히 망가진 몰골로 등장하고 있다.[45] 여러 모로 '학살의 참혹함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파트를 기점으로 조조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이 추락했다.[46]
한편 이미 서주에서 귀환한 조조가 '''아직 도겸을 끝장내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서주를 치겠다'''고 선언하여, 서주 대학살이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음을 몰랐던 독자들은 '''이 미친 짓을 한 번으로 끝낸 게 아니란 말이냐'''고, 알고 있던 독자들도 '''1,2차를 합쳐서 묘사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고 함께 경악했다. 이 일로 순욱과 진궁도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는데, 그나마 순욱은 자신이 조조를 다시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진궁은 이미 여백사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조조의 본색을 봤던 터라 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서 조조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한다.
다만 2차 학살은 1차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조조가 서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간략하게 넘어간 뒤 다른 인물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47]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으니, 이미 1차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만큼 2차는 묘사를 다소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실책이라는 것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 일로 진궁과 장막은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연주 전체가 반기를 들어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지며, 최대 동맹인 원소 또한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고 조조와 연을 끊는다. 이로써 조조는 근거지도 동맹도 잃어 한때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순욱과도 이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연의에서 서주 대학살이 이후로는 언급이 안 되는 것과 달리 꾸준히 조조의 최대 악행으로 재차 언급이 된다. 여러모로 '''역대 삼국지 관련 창작물 중 서주 대학살을 사서의 기록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즌 6 관도대전 3화에서 진궁이 유비에게 조조와 싸우게 부추기려고 '''"조조는 시체들로 서주 강물을 막은 괴물이면서 황제를 구한 영웅으로 이미지 포장 및 세탁을 한다."'''고 욕하며 같이 싸우자고 하나, 그 의도를 알아차린 유비가 단호하게 나오자 한발 물러난다.
관도대전 24화에서 조조의 부인인 정영옥은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겠다는 조앙을 말리면서 '''"뼈빠지게 키워놨더니 되고 싶은 게 사람 백정이냐?"'''고 다그치는데,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은 가족마저 손사래를 치는 악행임이 꾸준히 묘사되고 있다. 가후 역시 조조를 '''시체로 강을 메우는 색골'''이라고 비판하며 그런 아비에게서 태어난 조앙을 안타까워했다.
관도대전 30화에서는, 여포의 뒤치기로 서주를 잃은 유비를 따라 조조에게 망명한 미축에게 조조가 높은 관직을 주면서 서주의 민심 좀 잘 달래주라고 요구하는 한편 서주 대학살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조 曰 "근데 말입니다? 우리가 큰 그림을 봐야지! '''쬐그만 원한'''은 잊고! 함께 나라를 바로잡아야지 않겠소?" 애초에 죽는 날까지 서주대학살에 대해 반성이나 후회가 없던 양반이니 당연한 거지만...
관도대전 37화에서는 하후돈이 유비를 구하러왔다가 왼눈에 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직접 눈알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이전을 비롯한 조조군 장졸들이 환호하자 유비는 경악하면서 서주 대학살은 실수도 아닌 조조 개인이 원하여 '''조조군 전체가 기꺼이 그 명령을 따르고 실천한 짓'''임을 깨닫는다.
서주를 빼앗아 점거하던 여포 세력을 토벌한 후 조조가 유비와 함께 서주 백성들을 만나러 나오자 백성들이 환호하여 조조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인 이몸에게 니들이 별 수 있냐.'며 비웃었지만 정작 서주 백성들은 유비에게만 환호하고 조조는 안중에도 없어서 조조는 어이를 상실한다. 관도대전 60화에서는 아예 말에 앉아있는 조조를 밀치며 낙마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병사들이 칼을 빼들며 조조를 낙마시킨 백성들을 베려고 하자 황급히 말린다. 이 장면들을 통해 '''서주 백성들은 절대 서주 대학살을 잊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그때처럼 조조가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서주 백성들을 죽여버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48]
이 와중에 유비는 조조의 심리를 눈치채고 황급히 자기는 한 거 없고 조조가 여포로부터 서주를 구했다고 립서비스를 해주나 얕잡아보던 유비의 무서움을 깨달은 조조가 하비로 가려는 유비를 수도인 허창의 자기 옆집에 잡아놓게 된다.
제갈량이 19세로 성장해 재등장한 76~78화 에피소드에서는 제갈량의 PTSD가 됐으며, 고향일 작살내놓고 벌은 안 받고 오히려 잘 나가는 조조의 행보에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도대전 83화에서는 80~82회에 나온 논영회 에피소드 때 조조가 자신과 유비를 영웅이라고 칭하자 집에 돌아가면서 서주 대학살은 무슨 밥상에서 물 엎은 것처럼 여기고 있냐며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영웅이냐고 속으로 독설을 퍼붓는다.
다른 삼국지 매체들에서는 대부분 잊혀지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잊을만하면 언급이 되면서 조조의 흑역사이자 치부임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묘사에 대해 너무 자주 나온다며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다. 특히 83화에서 서주 대학살 얘기가 나오자 댓글창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허나 유비가 조조에게 실망하고 적대시한 계기가 된 사건이며 후일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제갈량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사건이며 오나라에도 당시의 피해자가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못해도 적벽대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10.15. 여자 제갈량
초반 프롤로그로 다뤄지며 피난 가는 제갈량과 제갈근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품고 남매가 함께 조조의 군대를 불살라버리겠다고 맹세한다.
10.16. 박봉성 삼국지
국산 삼국지 만화의 숨겨진 명작 취급받는 박봉성 삼국지는 2000년대 초 작품답지 않게 참신하고 정교한 해석을 시도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서주대학살이다.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충실하게 제시하고 직접적으로 '서주학살 사건'이라고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서주 민심을 묘사하는 한편 이 때문에 조조가 유비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파악한다. 작중 조조는 순욱과 곽가의 경계도 마다하고 유비를 살려두는데, 서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유비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통치를 안정시키려는 한편 유비를 조조의 앞잡이 정도로 부각시켜 이미지를 추락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조조군이 여포를 쫓아내고 서주에 입성하자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서주 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야유 소리가 들리는 와중, 개선 행진을 벌이는 조조의 말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돌을 던진 것은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한 노파로, 노파는 '''"네놈 손에 죽은 수만의 원귀들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거늘… 그 더러운 발로 감히 이 서주 땅을 밟으려 하느냐!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내라. 이 살인마!"''' 하고 일갈하다가 조조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유비는 노파를 구해 주며, 조조에게 노파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요청한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주 백성들이 조조를 적대시하지 않게 달래달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유비는 제안을 받아 백성들을 위무하며, 서주성에 온 군대는 조조의 군대가 아니라 천자의 군대라는 명분을 드는 한편 '이 군대는 나 유비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민심을 흡수해 버린다. 이는 조조의 계산과는 어긋난 결과로, 조조는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다는 유비를 적당히 민심 수습용으로 써먹으려던 것이었으나 유비는 이를 역이용해 서주가 자신의 땅임을 못박아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조조는 결국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에 분을 삭인다. 유비라는 인물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서주성에서 유비 삼형제와 재회한 미축은 서주 백성들의 엄청난 환호에 조조가 내심 놀란 눈치라고 평하며, 여포와의 싸움이 끝나면 조조도 서주를 유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학살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서주 주민들이 조조에게 갖는 감정, 그에 얽힌 조조의 노련한 정략과 유비의 맞대응을 대조시켜 라이벌적인 면모까지 부각시킨데다가 유비에 대한 조조의 경계심 역시 설명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은 만화적 완성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00년대 초에 이러한 해석이 등장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10.17. 기타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겪은 서주대학살을 설명한다.
작가 권오석의 소설 조조라는 소설에서도 서주대학살이 언급되었다.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도겸이 백성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복수를 갈망하던 조조가 도겸의 목을 따러 가는데 방해가 되자 백성까지 죽이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학살이 발생했고, 도겸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백성들을 뒤에 숨겨 보호했기 때문에 손건, 미축이 근거지까지 버리고 유비를 따라나선 계기가 된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조조와 유비만 돋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영웅관 위주의 해석이고, 현실적으로는 말장난에 가까우니 주의하자. 도겸이 어떻게 백성들의 뒤에 숨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백성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리도 없기 때문이다.
침착맨은 개인 방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서주 대효도라는 드립을 날렸다.(...) 정확히는 침착맨 팬카페의 한 유저가 '아버지가 죽었다고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며 끝장을 보려 한 것은 대단한 효심이다'라며 '서주 대학살이 아닌 서주 대효도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소개한 것. 침착맨 본인은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다가, 이후에는 조조가 저지른 학살을 전부 '효도'라고 돌려서 조조를 까는 식으로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