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순옹주

 



'''조선 중종의 왕녀
혜순옹주 | 惠順翁主
'''
'''이름'''
철환(鐵環)[1]
'''출생'''
1512년(중종 7년)
'''사망'''
1583년(선조 16년)
(향년 72세)
'''부왕'''
중종
'''생모'''
경빈 박씨
'''부군'''
광천위 김인경[2]
'''자녀'''
친자 없음
(양자) 김호수[3]
'''묘소'''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 303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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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종의 서1녀. 어머니 경빈 박씨의 장녀로, 작서의 변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비운의 인물이다.

2. 생애


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어머니 경빈 박씨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중종의 여자들 중 가장 먼저 아들을 안겨준 데다가 후궁 중 가장 빨리 품계가 올라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1521년(중종 16) 옹주가 10세 되던 해에 3세 연하의 호조 참의 김헌윤의 아들 김인경을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혼인 6년 만인 1527년(중종 22) 궁중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경빈 박씨가 한 일로 의심 받았는데, 당시 왕대비였던 정현왕후가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까닭이었다. 이때 혜순옹주의 여종들도 추국했는데 제대로 자복하는 이는 없었다.

혜순 옹주(惠順翁主)를 모시는 계집종 모이강(毛伊姜)·자귀(者歸)·귀인(貴仁), 경빈(敬嬪)의 방자(房子)와 비자(婢子)인 사비(四非)·춘월(春月)·덕복(德福) 등에게 인형(人形)을 만들어 참형을 시행한 일과 쥐를 지진 일에 대해 추문하면서 한 차례 형신(刑訊)을 가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 4월 15일

그로부터 6년 뒤인 1533년(중종 28)에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옹주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지난날 목숨만은 건졌는데, 이번에는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4] 가 있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사약을 받았고, 옹주 자신은 남편 김인경과 함께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중종은 관에서 생활비를 대어주고 생활이 어렵지 않도록 도와주라고 하였다.[5]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6]과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때 혜순옹주가 상언을 올렸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중종의 배려와는 달리 실제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계사년 5월에 폐해져서 서인(庶人)이 되고 그 해 8월에 밖으로 쫓겨났다가 정유년 10월 홍여(洪礪)의 일에 연좌되어 속적(屬籍)에서 삭제되었으니, 이는 법률 밖의 일로서 여러 간흉들이 혹독한 법으로 얽어맨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분통해 합니다. 근년 이래로 국가에 경사가 있어 여러 번 사면의 은혜를 내렸는데, 애매하게 폐서인이 된 이 딸만은 천은(天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흉년이 들어 살아가기가 어려우니 애절하기 한이 없습니다. 선원(璿源)의 후예로 평민들과 같이 지낸 지가 이제 9년입니다. 특별히 은명(恩命)을 내리어 원통함을 풀어 주소서."

《조선왕조실록》 중종 36년 11월 9일

중종은 옹주의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고,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와 오빠를 잃은 뒤였다. 1583년(선조 16) 12월 4일 혜순옹주는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 선원록에 기재되어 있다. [2] 본관은 광주, 자는 경유(景裕)이다. [3] 남편 김인경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서 시동생인 김원경의 아들 김호수를 양자로 삼았다. [4] 경빈 박씨의 아버지 박수림이 상주 지방의 사족이었으므로 고향으로 내려가게 한 것이다. [5]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 7월 20일 신유 6번째기사. # [6] 복성군이 군부인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나중에 유학 최예수와 혼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