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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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서손(庶孫)이자 11대 임금 중종의 서장자(庶長子)이다.
2. 생애
1509년(중종 4년) 중종과 그의 후궁인 숙의 박씨[5]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학수(鶴壽)였다가 미(嵋)로 개명하고 본래 '서성군(瑞城君)'[A] 에 봉해졌다가 복성군[6] 으로 봉해졌다. 문정왕후(성렬대비)가 1517년 입궁하자, 다음해인 1518년 중종의 사저로 출궁했다.[7] 중종은 이때 집을 중축시켜주어 사간원이 논핵했으나 중종은 듣지 않았다.
중종의 계비이자 윤임의 여동생 그리고 12대 임금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인종의 출생 직후 사망하였고, 후임자인 문정왕후도 오랫동안 왕자를 낳지 못하자, 어머니인 경빈 박씨는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경빈 박씨가 중종 22년(1527)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세자를 저주하였다는 혐의를 쓰자 그도 작호를 빼앗기고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갔다. 그런데 중종 28년(1533)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마침내 중종의 어명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본인도 사사되었다.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아들을 직접 죽인 것은 가작인두의 변과 임오화변 둘뿐이다.
하지만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은 사실 범인이라는 자백조차 나오지 않았는데도 무리하고 심증만으로 처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종 36년(1541)에 세자(미래의 인종)이 중종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탄원하여 '복성군'이라는 군호를 되돌려받았다. 경빈박씨-복성군 모자가 사사되는 계기가 된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일으킨 진범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생 이종익(李宗翼)이 중종 27년(1532) 상소를 올려 '작서의 변은김안로의 아들이자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김희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라고 주장한 이래로, 김안로 세력이 사주했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드러난 적은 없었고, 중종이 김희나 김안로를 그 혐의로 조사를 명하지도 않았다.
복성군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8] 민간에서는 동정론이 제법 있던 모양인지 야샤에 따르면 이항복이 벼슬을 하기 전 복성군의 혼령이 이항복에게 나타나 자신이 신원된건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이에 이항복이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안타까워한다고 하자 그 말에 매우 기뻐하며 그대는 장차 귀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3. 가족과 후손
동생으로 혜순옹주와 혜정옹주가 있다. 부인은 현감 윤인범의 딸인 파평 윤씨이며 슬하에 딸 이운환 한 명을 두었다. 두 동생과 딸들은 복성군 처형 후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세자(훗날 인종)가 눈물로 간곡히 용서를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생들은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이 되었다가 인종 재위 때 복성군과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 윤씨 부인은 작서의 변이 터지기 전인 1530년에 해산 도중 사망했다. 딸인 이운환은 장예원 사평인 최예수와 결혼했다.
아들없이 죽어서 명종은 덕흥군[9] 의 3남 하성군을 사후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1567년 하성군이 명종의 아들로 입적한 뒤 선조로 즉위하면서, 복성군의 대는 다시 끊겼다. 선조는 복성군의 새 양자로 중종의 서자 해안군의 아들인 오강군을 입적시켰다.
하지만 오강군도 적자가 없어서[10] , 선조는 자신의 3남인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입적시켰고 의안군이 요절한 후에는 4남 신성군을 후사[11] 로 삼게 했다. 그런데 이게 '복성군의 양손자로 들인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오강군의 양자로 삼는다'는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어쨌든 신성군이 복성군의 양손자가 되었는데, 그 역시 아들없이 죽어서[12] 정원군의 3남 능창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능창군이 역모에 말려 광해군 때 사사당하자[13] 다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3남인 평운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평운군의 적손(嫡孫)이 없어서 양원군[14] 의 5대손인 이유석의 3남을 입양했는데, 그가 바로 함릉군 이직(咸陵君 李稷)이다. 그런데 함릉군 가문의 원래 뿌리는 경명군파[15] 로, 양원군파로 입계한 것이라서[16] 현재 남은 복성군 후손들은 실제로는 경명군 후손들이다.
4. 매체에서
여인천하에서 오승윤##[17] 이 연기했다. 오승윤은 이때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인터뷰 했다. 오승윤이 어린시절을 연기하기는 했지만, 작서의 변으로 사사당할 때 이미 성인이라서 이때는 안홍진[18] 이 연기했다.
여인천하의 복성군은 서자이긴 하지만 중종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서 세자에게 나이 부심을 가진 캐릭터이다.
그래서인지 '''세자가 촐싹거린다고 뺨을 후려치면서''' 왕실의 예법을 갖추라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19] 이후 원자에게 손찌검을 한 죄로 문정왕후에게 불려왔을때도 '''왕실의 위엄을 위해 형으로서 훈계한겁니다.'''하고 마주치며 대들었다.
왕의 자식들은 생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무품이긴 했지만, 원칙상 생모대신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중전에게도 저랬다는건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짓이었다. 이후 친모인 경빈이 소식을 듣자마자 들어와서 다짜고짜 복성군의 뺨을 후려치고 무조껀 잘못했다며 싹싹빌어서 겨우 빠져나오게 된다.
드라마에서 중종도 나름 복성군을 총애해서 세자 후보 중 한 명으로 고려하였고, 63~65화에서 원자를 포함한 왕자들을 모아 면접을 보았지만 낙점받지는 못했다.
생모인 경빈 박씨가 워낙에 다혈질이라 휘둘리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또한 세자가 된 원자를 후원하는 문정왕후와도 사이가 나쁘다.[20]
실제 궁중 예법상 후궁 소생의 왕자군과 옹주는 무품이라, 정 1품~정 5품에 불과한 후궁은 아무리 생모라도 존대 해야 한다. 이러한 궁중 예법은 대부분 무시되지만, 드라마 붉은 달에서는 영빈 이씨가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나온다. 여인천하에서도 평상시에는 경빈이 복성군을 절대 하대하지는 않는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아무리 넉넉히 봐줘도 어린이인 복성군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일은 있어도 하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이리 오시오", "그만 물러가시오" 정도의 하오체를 보통 쓴다. 물론 말실수를 했을 경우 그런거 없이 친모에게 불꽃 싸닥션을 맞기도 한다. 이 때문에 복성군 역을 맡았던 오승윤이 아역시절에 꽤 험하게 굴렀다(...)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유배당했고, 중종이 서장자인 복성군을 상당히 아꼈기 때문에 스스로 복권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나 사사된다.[21]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복성군은, 이덕화가 분한 '''윤원형과 동갑'''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는 윤원형의 생년이 잘못알려진데에서 나온 오류이다. 윤원형은 1503년 생으로 1509년 생인 복성군과 6살 차이난다. 그래도 이덕화와 오승윤의 얼굴이 전혀 6살 차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1] 후술하겠지만 선조는 즉위 전 하성군 시절에 복성군의 양자였었다. 즉위하면서 명종에게 입적되어 자동으로 파양.[2] 복성군의 이복동생 해안군의 아들로, 후술하겠지만 하성군이 선조 임금이 되면서 새로 입양되었다.[A] A B 군호는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유래했다. 여담으로 광평대군의 증손자인 서성군이 있었는데, 원래 서성부정(瑞城副正)이었다가 1874년에 군(君)으로 추증되었다.[3] 군호는 전남 화순군의 옛지명인 동복(同福)에서 유래했다.[4]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5] 후에 경빈으로 승격되었다.[6] 군호는 전남 화순군의 옛지명인 동복(同福)에서 유래했다.[7] 문정왕후는 1501년생으로 불과 8살 차이였다. 만약 중종이 죽은 해까지 살아있었다면 35살. 광해군과 인목왕후(소성대비)에 못잖은 장성한 아들과 계비의 대립구도다.[8] 그것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의 아들인데 말이다! 선왕의 아들인 경우에는 역모에 휘말리는 등의 이유로 죽는 사례가 제법 있었지만 재위 중인 왕의 경우에는 중종, 영조만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 게다가 중종은 자기 뜻도 아니었으니 실질적으로는 영조만이 유일하다.[9] 명종과 덕흥군 둘 다 복성군의 이복동생이다.[10] 후에 이복동생인 서천군 이금(西川君 李錦)의 서차남인 화원군 이효성(花原君 李孝誠)을 양자로 들였다.[11] 가계도를 따지면 복성군 다음에 신성군을 양자로 삼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즉 가계 상으로 조손(祖孫) 관계로, 봉사손(奉祀孫) 내지는 시양손(侍養孫)으로 봐야 마땅하다. 왕족에 대해 봉사손을 세운 경우는 광평대군이 그 예로, 그는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다.[12] 딸 외에 후사가 없다.[13] 능창군이 역모로 죽지 않았다해도 이 집안 역시 서출인 외동딸 이외엔 후사가 없어 어찌되었든 양자를 다시 들여야 했었다.[14] 성종의 16남(서14남).[15] 성종의 11남(서7남).[16] 함릉군의 고조부인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은 경명군의 친손자이다.[17] 더 어린 쪽이 원자, 큰 쪽(오승윤)이 복성군이다. 매직키드 마수리의 주인공 마수리 역을 맡았던 그 배우다.[18] 아역이라도 고등학생 정도라면 분장 등으로 넘어갈 수도 있 겠지만, 오승윤은 초등학생이라서 안홍진이 연기했다.[19] 사실 문정왕후의 적자인 세자가 동궁 시절부터 눈엣가시로 여겼고, 본인도 경빈의 피가 어디간건 아니어서 화풀이대상으로 어린 이복동생을 때린것이다.[20] 다만 실제 역사에서 복성군은 문정왕후와 고작 8살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의 비주얼 탓인지 복성군이 성인이 될 때 문정왕후는 제법 나이가 든 모습으로 변한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의 나이 고증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지라 실제 역사에서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조차 문정왕후보다 한참 연배가 많은 오빠로 나온다(...)[21] 실제 역사에서도 중종은 신하들의 복성군 사사 요구를 무려 19번이나 거절하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사사를 허락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