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

 


1. 조선 중종의 후궁
1.1. 개요
1.2. 생애
1.3. 자녀
1.4. 드라마
2. 조선 사도세자의 후궁
2.1. 개요
2.2. 생애
2.3. 자녀
2.4. 창작물에서


1. 조선 중종의 후궁


'''조선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 | 敬嬪朴氏
'''
'''빈호'''
경빈(敬嬪)
'''출생'''
미상
'''사망'''
1533년(중종 28년) 5월 23일
'''재위'''
1506년 ~ 1527년
'''본관'''
밀양(密陽)
'''부모'''
부친 박수림
모친 알 수 없음
'''부군'''
조선 중종
'''자녀'''
1남 2녀
(1남) 복성군
(1녀) 혜순옹주
(2녀) 혜정옹주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산 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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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조선 중종의 후궁.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의 생모이자 작서의 변으로 폐출당한 불운한 인물이다.

1.2. 생애


중종실록에 따르면, 상주 지방의 사족 박수림의 딸로 1505년(연산 11) 채홍사 때문에 미색이 알려졌다. 그래서 중종반정이 일어난 다음에 궁중에 들어와서 중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1]
일설에는 그녀가 박원종의 수양딸로 권력 유지를 위해서 후궁으로 들여보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빈 박씨는 본관이 밀양이고, 박원종은 순천이라 같은 집안도 아니었으며, 박원종의 외조카가 윤임장경왕후이기에 굳이 수양딸을 삼을 이유도 없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경빈 박씨가 박원종의 수양딸인 것으로 등장했다.
1509년(중종 4) 박씨는 아들 미(嵋)를 낳는다. 이 아들은 후일 복성군의 군호를 받게 되는데, 중종의 서장자다.[2] 여러 후궁 중에서도 첫 아들을 낳아준 박씨에 대한 총애는 제법 대단했는지 장경왕후의 사후에 중종은 은근히 그녀를 새 왕비로 삼고 싶어했다. 하지만 신하들 중 정광필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보다 앞서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3]

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대신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겠으므로, (중략)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제가(齊家)하는 요체(要諦)와 범조우(范祖禹)가 후비 간택을 논한 일을 진간(進諫)하니,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 7월 22일 병신 12번째기사

정광필의 '미천한 출신'이라는 말부터가 경빈 박씨를 저격하는 표현이다. 더군다나 이때 훗날 인종이 되는 장경왕후 소생의 원자가 있었으므로, 박씨가 왕비가 되면 원자보다 먼저 태어난 복성군과의 서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때문에 조정 내의 분위기는 원자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미 아들을 낳은 후궁을 새 왕비로 책봉해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귀결됐다. 결국 이로 인해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 같은 후궁들은 전부 왕비 후보에서 제외되고 중종의 계비로 문정왕후가 간택된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이러한 야심 탓에 1527년(중종 22) 작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보호받지 못하고, 그해 4월 21일 복성군과 함께 궁궐에서 폐출되어 본가가 있는 상주로 보내진다. 중종은 계속 박씨 모자를 두둔했으나 결국 1533년(중종 28) 5월 23일 사사된다. 이때 중종은 의녀 두 사람을 상주로 보내 사약을 내린다.[4] 26일에는 복성군도 사사되고, 두 옹주도 작첩을 빼앗기고 서인이 되었으며, 박씨의 첫째 딸 혜순옹주의 남편 김인경은 변방으로 유배가고, 둘째 딸 혜정옹주의 남편 홍려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야말로 풍비박산.
이후 작서의 변의 진짜 범인이 밝혀지면서 복성군과 두 옹주는 신원된다.[5]

1.3. 자녀


  •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1512년 - 1583년).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에게 출가. 1527년 작서의 변 당시 남편과 함께 직첩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1541년에야 복위되었다. 친자녀는 없고, 시동생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양자로 들였다.
  •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1514년 - 1580년).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았다. 홍여는 가작인두의 변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고, 혜정옹주와 홍씨 가문도 유배되는 등 화를 당했다가 오랜 세월 후에야 복권되었다. 혜정옹주의 딸은 윤임의 손자 윤호(尹琥)와 결혼했다.

1.4.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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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 풍란》에서 처음 경빈 박씨 역을 맡은 나종미
나종미 하차 이후 경빈 박씨 역을 맡은 박원숙
아래 언급할 《여인천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포스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문정왕후(김혜자 분)와 대립한다. 여담으로 원래는 나종미가 배역을 맡았는데 중간에 박원숙으로 갑자기 배우가 바뀌었다. 이유인 즉, 나종미의 얼굴이 동안이라 노역 분장이 힘들어 김혜자가 맡은 문정왕후와 맞서는 역할로는 약하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나종미씨의 영화 촬영으로 인해 오래 지방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차 시기가 6월 초인데, 경빈 박씨는 그달 말까지 출연할 예정이었기에 하차를 얼마 앞두고 교체를 한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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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경빈 박씨
여기서도 꽤나 앙칼지고 야심있는 후궁으로 묘사되었다. 본래 한미한 가문 출신이란 사실을 컴플렉스로 느끼고 있으며 그 때문에 본인의 친모가 본인을 만나러 궁으로 찾아와도 문전박대하기까지도 한다. 훗날 김성령은 《조광조》의 대본을 집필한 정하연 작가의 후속작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를 연기했는데, 《조광조》에서 중종을 연기했던 이진우와 다시 한번 부부 역할로 호흡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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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경빈 박씨
명실상부 여인천하 최고의 씬스틸러
작중에서는 악역으로 나오며,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면서 문정왕후(전인화 분)와 정난정(강수연 분)의 가장 강력한 맞수로 등장한다. 시종일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난정을 몇 번이고 위협하지만, 작사의 변으로 몰락해 결국 123화에서 사약을 먹고 비참하게 죽는다. 다음화에서는 복성군(안홍진[6] 분)도 사약을 먹고 죽는다.
원래는 이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었는데 도지원의 표독스러운 연기로 인해 미친 존재감급 인물이 된 것. 특히 그녀가 입버릇처럼 내뱉은 "뭬야-!"[7] 아→아↗ ~" 정작 실제 역사에서 악녀로 찍힌 건 이쪽인데...~~ 정확히 따지자면 악역이 아닌 반동인물로 봐야 한다.[8] 실제 역사에서는 윤원형과 복성군이 비슷한 연배인데다가 경빈 본인도 문정왕후보다 8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지만 배우들의 연령때문에 아무리 봐도 동년배로밖에 안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미친 존재감을 뽐낸 도지원은 2001년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2. 조선 사도세자의 후궁


'''조선 장조의 후궁
경빈 박씨 | 景嬪 朴氏
'''
'''빈호'''
경빈(景嬪)[9]
'''출생'''
미상
'''사망'''
1761년(영조 37년)
'''재위'''
1757년 ~ 1761년
'''본명'''
빙애(氷愛 또는 彬愛)
'''부군'''
조선 장조의황제
'''자녀'''
1남 2녀
(1남) 은전군
(1녀) 청근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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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조선 사도세자의 후궁.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아 은전군청근옹주를 낳았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인해 불우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2.2. 생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이름은 빙애(氷愛)로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의붓할머니의 궁녀인 빙애를 좋아하여 1757년(영조 33) 9월에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윗사람의 궁녀를 데려간 것이 되기에, 영조가 심하게 꾸짖고 데려오라고 했다.[10] 하지만 영조의 앞에 진짜 박씨를 데리고 가면 큰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화완옹주의 방에 숨겨두고 다른 궁인을 빙애라고 속여서 데려가기까지 했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이로 인해 양정합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가까이하신 것들은 많되 일시만 그리하시고 대수롭게 하시는 일 없고, 자식 낳은 나인이라도 털끝만큼도 더 봐주는 일이 없었는데, 이것에게는 그리 대수롭게 구시더라.

《한중록》

이후 빙애는 종6품 수칙(守則)이 되었는데 양제나 양원 같은 세자의 후궁으로서의 품계는 아니였지만, 실질적인 취급은 세자의 후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영조한테 단단히 찍혔는지 사도세자의 자식을 낳고도 같은 세자의 후궁인 양제 임씨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아무리 영조가 사도세자의 후궁들은 전원 예외없이 싫어했다고 해도, 궁녀 출신이고 사도세자의 자식까지 낳은 것까지 똑같은 임씨만 정식 후궁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11] 혜경궁 홍씨도 빙애를 좋게 보지 않았는지 사도세자가 꾸며준 빙애의 방을 "아니 갖춘 세간이 없더라" 라고 묘사했고,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도 "그것의 됨됨이가 요악한지라" 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나온 것처럼 사도세자가 '그리 대수롭게' 굴만큼 총애받았던 빙애의 최후는 비극적이였다. 1761년(영조 37) 1월에 빙애는 사도세자의 옷 시중을 들다가 그만 의대증이 도진 사도세자에 의해 맞아 죽고 말았다. 그저 옷 시중을 들어줬을 뿐인데 미쳐버린 남편에게 맞아 죽었으니 그야말로 억울하고 한 맺힌 죽음이였다.
비록 영조는 비천한 궁녀 출신의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빙애의 성품만큼은 좋게 본 모양이다. 후일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영조도 사도세자가 빙애를 살해한 사실을 알고는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하면서 꾸짖었다.[12]
훗날 사도세자의 적자 정조가 즉위한 다음에도 빙애는 취급이 영 좋지 않아서 품계가 오르지 못했다. 아마 그녀의 친아들 은전군이 정조가 즉위한 초반에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박씨는 고종 대에 가서야 제대로 된 품계를 받는다. 1901년(고종 38)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그녀도 경빈(景嬪)으로 추증된다.

2.3. 자녀


소생으로는 아들 은전군과 딸 청근현주(淸瑾縣主)[13]가 있다.
영조는 자신의 손주들인데도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듯하다.[14] 특히 청근현주는 부마 간택을 끝낸 후에도 3년 후에야 길례를 치뤘다고 한다. 이걸 볼 때 영조는 총애하는 며느리이자 정궁인 혜경궁 소생의 적손주들 이외에 궁녀 소생의 서손주들은 크게 좋아하지 않은 듯 하다. 정작 영조 본인과 사도세자도 후궁 소생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2.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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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에 나온 빙애
최진실이 연기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최현미가 연기했으며 최진실은 이 작품에서 평양 기생 장미 역으로 출연했다. 실제와 달리 무수리 출신으로 나오며 상당히 당차고 할 말은 하는 성격으로 나온다. 사도세자(최수종 분)의 총애를 받고 은전군(전현 분)을 낳았는데 이 때 사도세자는 영조(김성원 분)에게 왜 하필 무수리를 능욕하냐며 호되게 혼난다.[15] 이후 사도세자가 술을 먹고 영조에게 혼날 때 세자에게 술을 갖다 준 사람으로 지목되어 출궁 뒤 비구니가 될 뻔했으나 혜경궁 홍씨(최명길 분)의 배려로 다른 무수리가 대신 나가고 몰래 궁에 남았다. 사도세자의 미행을 말리다 분노한 사도세자에게 목 졸려 죽었다. 이미 출궁당한 걸로 되어있으며 사도세자가 또 어떤 일을 당할 지 몰라 왕실 사람들이 함구함에 따라 그의 죽음은 한동안 묻혔으나[16] 나경언(김웅철 분)의 고변으로 영조가 알게 된다.
  • 비밀의 문》에서는 히로인인 서지담이 빙애거사라는 필명을 쓰는 것으로 보아 훗날의 경빈 박씨일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공기화(...). 초반부는 김유정이, 후반부는 윤소희가 연기했다.
  • 붉은 달(드라마)》에선 빙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광증을 일으킨 사도세자(김대명 분)에게 살해당해 시체만 나온다. 역사에서는 대비전 출신이나 여기서는 대전 출신으로 어떠한 이유로 영조(김명곤 분)에 의해 세자궁에 왔으며, 영조가 세자궁에 행차할 때마다 안부를 챙길 정도로 영조의 총애를 받는걸로 각색. 수칙이란 품계가 대중에게 익숙치 않아서인지 품계 없이 이름으로만 불린다.

[1]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 4월 26일 임신 1번째기사. # [2] 복성군은 처음에 서성군(瑞城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가 1517년에 고쳐졌다. [3] 장경왕후를 말한다. 장경왕후는 원래 숙의로 있다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4]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5월 23일 을축 9번째기사. # [5] 중종실록 96권, 중종 36년 11월 9일 신묘 3번째기사. # [6] 본작에서 홍경주 역을 맡은 배우 안대용의 아들이다.[7] 본래 대본은 그냥 평범하게 "뭐야?"였는데 뭔가 심심한듯해서 도지원이 "뭬야?"라고 부른게 입에 착착 붙어서 작가도 그대로 반영하게 됐다고 한다. 이 대사는 2015년에 도지원이 출연한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다시 쓰게 된다.[8] 다만 제작진이 경빈을 악역으로 보이도록 시도한 것은 맞다. 종영 후 제작진이 경빈이 사약을 받는 장면에서 사약을 항아리째로 들이붓는 장면에 대해 "악독한 인물은 험악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작중 돋보이는 표독스런 연기도 실제 기록된 악행이 부족하니 악역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부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9] 1901년(고종 38)에 정1품 빈(嬪)으로 추증되었다. [10] 궁녀가 공식적으로는 왕을 남편으로 삼아 혼례까지 올리는 '''왕의 여자'''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왕보다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다른 전각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눈치가 보이는 행동이다. 다만 사도세자를 굉장히 아꼈던 인원왕후가 살아있었다면 꾸중은 하되 그다지 크게 문제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1] 영조는 사도세자가 후궁에게서 본 서출 소생의 손주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12]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 [13] 왕세자의 적녀를 군주, 서녀를 현주라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이후 옹주로 추증되었다.[14]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자 적손자인 정조(이산)도 처음에는 영조에게 크게 귀여움을 받지 못했다. 하물며 궁녀 소생의 손주들은 오죽했겠는가?[15]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무수리 출신. 극 중에서도 영조가 세자를 혼내면서 자신이 무수리 자식임을 아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때 사도세자는 당당하게 안다고 말했고(...) 이에 영조가 빡쳐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같이 있던 인원왕후(강부자 분)가 말려 겨우 진정한다.[16] 단, 사도세자와 사이가 안 좋은 숙의 문씨(김혜선 분)는 영조에게 고변하려 했으나 어차피 몰래 평양간 것이 들키면 세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나중에 알리자는 오빠 문성국(이계인 분)의 조언에 따라 조용히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