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옹주

 



'''조선 중종의 왕녀
혜정옹주 | 惠靜翁主
'''
'''이름'''
석환(石環)[1]
'''출생'''
1514년(중종 9년)
'''사망'''
1580년(선조 13년)
(향년 67세)
'''부왕'''
중종
'''생모'''
경빈 박씨
'''부군'''
당성위 홍여[2]
'''자녀'''
1녀
(장녀) 윤호의 처[3]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307-1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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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종의 서2녀. 어머니 경빈 박씨의 차녀로, 오빠 복성군혜순옹주동복 남매 지간이 된다.

2. 생애


1525년(중종 20) 판결사 홍서주[4]의 아들 홍여와 가례를 올렸는데, 남편인 홍여는 당성위에 봉해졌다.
중종은 혜정옹주가 출합할 때를 고려하여 옹주의 집을 지어주려고 하였는데, 집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사치스럽다고 신하들이 상소하였다. 이에 중종은 "지금 혜정 옹주의 집은 단지 70간으로 비록 제도보다 지나친 듯하나 반드시 용도를 헤아려 지었을 것이니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5]
1527년(중종22) 작서의 변이 일어나 어머니 경빈 박씨와 오빠 복성군이 경상도 상주 지방으로 유배를 갔고[6], 옹주의 남편 홍여는 경빈 박씨의 사주로 세자를 저주하는 익명의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1533년(중종 28)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의심 받아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홍여는 소년이었는데, 형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7]
나중에야 일의 진상이 밝혀지고,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안로에게 모든 책임이 넘어간다.

그 옥사를 추국할 적에 김안로가 추관(推官)이었는데, 홍여의 집안으로 죄를 돌리고자 하여 이는 작서(灼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그 집의 노비(奴婢)들이 무수하게 형장을 받고 그가 묻는 대로 자복(自服)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2년 11월 26일

그리고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8]과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면서, 옹주의 직첩을 돌려받고 살게 되었다.
[1] 선원록에 기재되어 있다. [2] 본관은 남양이다. [3]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의 손자이자 윤흥인의 아들이 윤호다. [4] 홍서주의 아버지 홍숙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이 된 인물이다. [5] 중종실록 47권, 중종 18년 4월 25일 병신 4번째기사. # [6] 경빈 박씨의 아버지 박수림이 상주 지방의 사족이었으므로 고향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7]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5월 26일 무진 3번째기사. # [8] 복성군이 군부인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나중에 유학 최예수와 혼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