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서의 변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작서의 변
3.2. 유생 이종익이 일으킨 파란
3.3. 가작인두의 변
3.4. 이후의 일
4. 소설
5. 드라마


1. 개요


조선 중종 22년(1527) 일어난 무고사건.[1] 작서(灼鼠: 불에 탄 쥐)의 변(變)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사건의 계기가 불로 지져진 쥐였기 때문(...) 시작은 작서의 변이지만 가작인두의 변과 그 이후까지 사건의 흐름이 길게 이어진다. 중종, 김안로, 경빈 박씨복성군, 그리고 어쩌면 문정왕후도 엮였을지 모르는 복잡한 정치적 음모이다.

2. 배경


중종은 평생 3번 결혼하였다. 제일 먼저 연산군 5년(1499), 아직 진성대군이던 시절에 신씨와 결혼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아내 신씨 또한 단경왕후가 되었으나, 사실 반정이 성공하자마자 중종과 갈라져서 이레 만에 폐출되었다.
그해에 중종은 후궁으로 새 여자를 받아들여 숙의(淑儀) 칙접을 내렸는데, 그중 파평무원군 윤씨의 딸을 골라 결혼하였으니 바로 인종의 친어머니인 장경왕후이다. 장경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미래의 인종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빈 박씨중종에게 총애받던 후궁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임금이 왕후를 후궁 중에서 뽑은 관례가 있었으므로, 경빈 박씨는 어쩌면 중종의 세 번째 왕후가 되었을 수도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 장경왕후 또한 원래는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이후 왕후로 간택되지 않았는가. 중종도 처음에는 이런 관례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이미 국본(國本), 즉 장차 임금이 될 적장자가 있으므로 후궁 중에서 새로 왕후를 찾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성리학적 종법질서는 기본적으로 한 번 정해진 상하관계가 뒤집히는 것을 거부했다. 임금의 어머니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한은 없으나, 그런데도 어머니로서 아들-임금보다 윗사람이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위이고, 이 상하관계를 뒤바꾸는 것은 큰 패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생각해보자. 자식이 있는 후궁이 왕후가 된다면, 그 후궁이 낳은 자식은 본디 서자였다가 적자가 된다. 만약 경빈 박씨가 왕후가 된다면, 중종의 적장자는 박씨의 아들 복성군이 된다. 한 번 정해진 국본과 임금의 다른 자식들간 서열이 뒤바뀌는 것이다. 만약 경빈 박씨가 복성군을 낳지 않았다면, 또는 인종이 태어난 후에 낳았다면, 경빈 박씨가 중종의 왕후가 되었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성군은 중종 4년(1509), 인종보다 6년이나 먼저 태어났다. 그래서 경빈 박씨가 왕후가 된다면 인종과 복성군간 종법질서가 깨질 수 있었다.
성리학적 질서가 약했던 조선 초였다면 이 정도 결격사유가 덜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종 시기는 성리학적 질서가 강해지는 때였고, 결국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은 그해에 기존 후궁이 아닌 새로운 여자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으니 바로 문정왕후이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세자, 즉 미래의 인종에게 원한이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문정왕후는 작서의 변이 일어난 중종 22년(1527), 중종과 결혼한 지 10년이 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만약 세자가 없어진다면, 그리고 문정왕후가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복성군이 세자가 될 수도 있었다.[2] 경빈 박씨는 아들 복성군이 차기 임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며 설레발을 쳤다.
또한 김안로는 아들 김희(金禧)가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인 데다가 자신도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관이 되는 등, 확실히 인종의 편에 선 사람이었다. 공주의 시아버지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다가 정적들에게 미움을 사서 중종 19년(1524) 탄핵되어 유배를 떠났다. 김안로는 아들 김희나 며느리 효혜공주를 통해 어떻게든 귀양살이를 끝내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고 싶어 했지만, 남곤이나 심정 등이 반대하여[3]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해 원한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

3. 전개



3.1. 작서의 변


중종 22년(1527) 3월 22일, 좌의정 이유청(李惟淸)과 우의정 심정 등이 중종을 알현하면서 지난 2월 25일, 세자(미래의 인종)의 생일에 누군가가 죽은 쥐의 사지를 찢고 불에 태워 세자의 침실 창 바깥쪽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를 보고했다. 중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실록에서 사관이 부연한 바에 따르면, 세자의 외할아버지(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尹汝弼)이 우의정 심정에게 이야기했고, 심정이 다시 좌의정 이유청과 상담한 다음 같이 중종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중종은 "이 일이 밖에 알려졌는데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고 말하고 사건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이튿날 조사해보니 죽은 쥐가 동궁 거처에 매달리긴 하였지만, 세자의 침실 창문 밖이 아니라 여러 전(殿)의 하인들이 오가는 곳에 걸렸던 관계로 쉽게 범인을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세자의 생일만이 아니라 3월 1일에도 비슷한 짓을 또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주술로 세자를 해하려 했다면 은밀한 곳에 했을 텐데, 이처럼 뻔히 보이는 곳에 하였으니 틀림없이 그로써 누군가 이득을 보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 하였다.
동궁의 시녀들을 불러모아 조사해보니 이렇게 증언하였다. 2월 25일(세자의 생일)에 시녀들이 동궁의 북서쪽 담장 밖 살구나무(唐杏樹) 가지 끝에 허리가 삼끈에 감겨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은 쥐를 목격했는데, 근처에 준치의 머리와 물푸레나무 조각도 함께 매달려 있었다. 처음 이것을 본 시녀는 누군가 액땜하고자 행한 주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이튿날 다른 시녀가 찾아가 쥐를 묶은 줄을 풀고 살펴보았더니, 쥐는 꼬리가 반쯤 잘렸고 주둥이와 눈코입이 모두 불로 지져져 있었다. 세자의 생일에, 하필이면 쥐가 동궁의 해방(亥方: 북북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세자를 노린 주술로 여겨[4] 대비전(정현왕후)에게 보고했더니,[5] 대비는 근처의 통행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사건이 알려진 뒤 시강원 보덕 황사우黃士祐 또한 위 시녀와 같은 논리로 틀림없이 세자를 저주하는 주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취조를 받은 시녀는 3월 1일에도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大殿)의 곡란(曲欄)[6] 아래에 꼬리와 네 발이 달리고 불로 지져진 쥐가 버려져 있었는데, 대전의 시녀들이 세자궁으로 가지고 올 때만 해도 살아있었지만 금방 죽어버렸다고 증언했다. 그 쥐를 목격한 시녀들은 다들 "틀림없이 지난 번에 쥐를 매단 자가 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하였다.
4월 3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은 시녀가 증언한 바를 접하고 "강녕전(대전)에는 곡란이 없다." 하면서 좀더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알고 보니 중종은 대전의 고란(高欄)에 앉아 있을 때 아래에 죽은 쥐가 있는 것을 보고 별 생각 없이 갖다 버리라고 나인들에게 명령했는데, 바로 그 쥐가 주술에 사용된 쥐였다고 한다. 나인들이 쥐를 버리려다가 불에 지져진 것을 보고 다른 궁인들에게 이야기하고 보여준 것이다.
조선의 법률에 따르면,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나 죄인들을 풀어줄 때에도 저주를 행하다가 잡힌 자는 풀려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저주를 극악한 범죄로 보았다. 하물며 왕이나 세자, 왕비 등을 저주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는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에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오가는 궁인들을 모아 형벌을 가하면서까지 조사했지만 아무도 범인을 보았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경빈 박씨를 모시는 시녀 범덕(凡德)이 증언을 실수했다. '3월 1일 홍 귀인(희빈 홍씨)은 대비전에 갔지만 경빈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쥐를 태운 자가 경빈이라고 억측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 것이다.
실록에 직접 나타나진 않지만, 다른 부분의 내용까지 합쳐 보면 3월 1일 홍씨와 경빈 박씨가 모두 대전에 있다가 홍씨만 대비전으로 가고, 경빈은 시녀 범덕과 함께 계속 대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전 근처에 쥐를 버린 자가 경빈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이 궁인들 사이에서 돌았던 모양이다. 또한 이때 경빈을 모신 시녀가 범덕이었고, 경빈의 지시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였다.
범덕이야 자기 나름대로는 모시는 주인을 변호하고자 꺼낸 말이지만, 다른 증거를 잡지 못해 답답해하는 입장에서는 용의자가 제 발로 나선 격이었다. 만약 경빈이 교사범이라면 범덕은 실행범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중종에게 보고하자 중종도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고문을 추가로 가하며 심문하라고 허가했다. 그리하여 관리들이 모질게 고문하며 심문했지만, 범덕은 끝까지 견디며 범행을 부인했다. 신료들은 중종에게 저주 사건의 범인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용의자는 범덕뿐이었고[7] 그마저도 철저히 혐의를 부인했다. 범인을 벌하려 해도 범인이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중에 4월 14일 정현대비가 한글로 글을 내렸다. 대비가 쓴 글의 내용에 따르면 3월 28일 경빈의 첫째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계집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 하고 저주하여 욕설을 했다 하였다. 대비가 이 일을 듣고 관련자들을 모아 추궁하니 일부는 자복하고 일부는 자복하지 않았지만, 대비는 관련자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른 혐의자가 없으니 경빈 박씨의 계집종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현대비가 경빈을 직접 범인이라고 지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번 용의자라고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경빈과 혜순옹주를 모시는 시비들을 모아 고문을 가하며 추궁했지만 이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4월 21일자 중종실록에서 심정이 중종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경빈과 혜순옹주를 모시는 시비들이 6번이나 고문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범행을 자백하지 않으니 임금(중종)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날 중종은 경빈 박씨를 폐서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승정원에서 교지(敎旨)[8]를 작성해야 했는데, 범인이 경빈이라고 자백한 사람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 폐서인하는 사유를 교지에 뭐라고 적어야 하는가? 그래서 승정원에서 중종에게 뭐라고 적으면 좋을지 지침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중종도 할 말이 궁했는지 은근슬쩍 책임을 정현대비에게 돌렸다. 대비께서 박씨를 의심하는 글을 보내셨으니 그것에 의지하여 작성하란 것이었다.
하지만 정현대비도 자기가 경빈 박씨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4월 23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정현대비는 다시 중종에게 글을 보내어 '내가 경빈을 의심하긴 했어도 반드시 범인이라고 확정한 것은 아니다.' 하는 뜻을 강경하게 표명했다.
사건이 불거진 어느 시점부터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궐 밖에서 머물렀다. 삼사(三司)나 유생 등은 폐서인에 그치지 않고 법에 따라 벌을 주라고 중종에게 상소했지만, 중종은 두 사람을 박씨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로 보내는 데에 그쳤다. 범덕을 비롯하여 문초를 받았던 나인들이나 시비들도 저마다 벌을 받았다.
중종 24년(1529), 김안로의 아들이며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가 중종에게 아버지를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중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사면하였다. 김안로는 사면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다.
중종 25년(1530), 정현대비가 사망하여 문정왕후가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다.

3.2. 유생 이종익이 일으킨 파란


유생 이종익(李宗翼)은 벼슬도 없으면서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당시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가 중종 22년(1527) 6월에 처음 올린 상소는 당시 한재(旱災 가뭄 피해)가 영산군 등이 억울한 일로 벌을 받아 생긴 것이니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산군은 역모의 도당들에게 추대된 혐의로 중종 18년(1523) 유배를 떠난 사람이다. 중종실록에는 그가 올린 상소문 내용은 길게 싣고 중종의 반응은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파장은 제법 있었던 듯하다.
실록에 따르면 이종익은 이후로도 중종 24년(1529) 10월, 25년(1530) 9월, 27년(1532) 3월까지 모두 다섯 번 상소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조용한 못에 돌을 던지듯 파란을 일으켰다. 중종 25년(1530) 9월에는 자신이 과거시험의 정시에서 합격하지 못하고 낙방한 것은 심언광(沈彦光) 때문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대사간이던 심언광은 억울하다면서 중종에게 체직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상소로 이종인은 한양으로 끌려와 옥에 수감되었는데, 이번에는 옥 안에서 '남곤(南袞), 이항(李沆), 심정(沈貞), 김극핍(金克愊)에게 박씨(경빈)가 비단 5필씩 뇌물로 보냈는데, 남곤만 거절하고 나머지는 다 받았다.' 하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이종익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고양군수 임계중(任繼重)을 조사해보라고 중종은 명령했다.
이종익이 폭탄을 던진 시점에서 경빈 박씨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출사한 사람은 심정밖에 없었다. 이종익은 미친 소리를 한단 이유로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를 갔지만 심정은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받았다. 결국 심정은 파직되었는데,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는 그를 확실히 찍어내고자 하였다. 두 사람이 중종에게 올리며 말하기를, 작서의 변 때 경빈 박씨가 심정에게 뇌물로 비단과 호박영자(纓子)[9]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중종 25년(1530) 11월 21일자 실록에서 사관은 일을 논평하며 '김근사와 권예가 모두 김안로의 무리이니, 중종과 이미 의논을 마치고 심정을 찍어낸 것'이라고 하였다. 사관은 중종과 김안로 일파가 서로 미리 뜻을 맞추고 심정을 찍어내었다고 본 것이다.
중종 26년(1531)에는 종로에 걸린 비방서가 심정의 아들 심사순(沈思順)이 썼다는 이유로 심사순은 고문을 받다 죽고 심정은 사사되었다. 여기에는 작서의 변에서 심정과 심사순이 경빈 박씨와 모종의 모의를 했다는 혐의도 걸렸다.
또한 이해 4월에는 효혜공주가 병으로 죽었고, 같은해 10월에는 남편 김희가 죽었다.
중종 27년(1532) 3월 이종익이 귀양지에서 보낸 상소가 당도했는데, 유자광, 심정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벌주었던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이종익이 귀양지에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하며 그를 다시 한양으로 끌고와 투옥하여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3월 20일에는 옥중에서 이종익이 쓴 상소가 올라왔는데, 여기서 그는 '작서의 변은 경빈 박씨복성군과는 무관하고, 김안로의 아들이자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김희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중종에게는 상당히 중대한 도전으로 보인 듯하다. 중종이나 대신들은 틀림없이 이종익의 배후에 근원이 있으리라 여겼지만 캐지는 않았다. 이종익은 이해 3월 26일,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인터넷으로 '작서의 변'을 검색해보면, 작서의 변이 김희가 한 짓이라고 이종익이 상소를 올림으로써 드러났다고 말하는 자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종익은 옥에 수감된 채 근거를 대지도 못하고 그저 '김희가 아버지 김안로의 지시를 받아 작서의 변을 꾸며내었다.'고 주장했을 뿐이고, 조정은 이 말이 사실인지 조사하지 않았다. 또한 이종익은 이 일로 사형을 받았다. 그가 도대체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김희가 작서의 변을 꾸민 범인이라고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3.3. 가작인두의 변


중종 28년(1533) 5월 17일, 동궁의 남쪽 파자(把子) 울타리에서 또다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종이로 사람 머리를 만들어 눈·코·입과 머리카락을 그리고 목패에 꽂았는데, 앞면에는 세 줄로 아래 내용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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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자를 능지하고

이처럼 세자의 아버지 임금을 교살하며

이처럼 중궁(문정왕후)을 참(斬)할 것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五月十六日, 兵曹書吏韓忠輔等十五人爲白乎事。

5월 16일, 병조(兵曹) 서리(胥吏) 한충보(韓忠輔) 등 15인이 행한 일임

이 사건을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假作人頭).' 하여 '가작인두(假作人頭)의 변(變)', 또는 목패(木牌)에 꽃혀 있었다 하여 '목패의 변'이라고 부른다.
궁중에 대놓고 저주하는 물건을 가져다 놓고 '내가 했소.' 하고 적어둘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조정은 목패에 이름이 씐 '병조 서리 한충보'를 모함함으로써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을 위주로 조사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자 한충보를 조사했는데, 그가 언급한 다른 사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의 하인들이 실행범이라는 자백이 나왔다. 홍여는 폐서인된 경빈 박씨의 둘째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의 남편이다. 홍여의 하인들이 자기 주인의 명령을 받아 임금과 세자를 저주하는 가작인두를 만들어 목패에 꽂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의 집에서는 저주에 쓰인 목패와 재질이 같은 널빤지가 나왔다.
홍여는 불려와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계속 부인하다가 5월 26일 옥사했다.
중종은 가작인두의 변이 박씨에게 잘 보이려 한 무리들이 벌인 짓이라며 경빈 박씨에게 5월 23일 사약을 내렸지만, 아들 복성군은 어머니가 연루되었을 뿐 그 자신은 관련이 없으니 멀리 안치시키라고만 하였다.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중종은 복성군을 지켜주려는 의지가 없었던 듯하다. 다만 아버지로서 아들을 죽이란 명령을 쉽게 내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므로 짐짓 복성군을 두둔하는 모습을 취한 것 같다. 경빈을 사사하고도 복성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중종은 고작 사흘이 지난 26일 복성군을 사사하고 두 옹주를 폐서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중종이 정말로 아들을 지켜주려 했다면 고작 사흘 만에 죽이라고 했을까?
홍여의 아내 혜정옹주는 폐서인되어 작호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도성 밖으로 내쫓겼고, 시아버지 홍서주(洪敍疇)는 유배를 떠났다.
중종 29년(1534), 문정왕후가 가례를 올린 지 17년 만에 첫 아들 경원대군(慶原大君: 미래의 명종)을 낳았다.

3.4. 이후의 일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중종의 눈밖에 나서 사사되었다. 그 뒤 김안로의 술책에 걸려 억울하게 죄를 얻었다 하는 이들을 풀어주거나 했지만,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그런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중종실록의 재위 36년(1541) 11월 9일자 3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날 세자가 아버지 중종에게 용서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중종이 가납했다. 그런데 여기서 세자가 청원한 내용이 아래와 같다.

천총(天聰)을 범함이 황공하오나 정(情)이 격발하여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현지친(天顯之親)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자연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비상(非常)한 변(變)이 있었더라도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 중엔 오히려 은혜로 감추어 준 자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이미(李嵋: 복성군의 이름)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嵋)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洪礪)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翁主)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신은 천자가 되었는데 아우는 필부(匹夫)로 있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세자로서 모시고 있어 천총(天寵)이 지극한데, 두 누이와 조카딸 하나가 아직도 천민에 버려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이란 형제간에는 원망도 노염도 간직하지 않고 서로 친애할 뿐인 것인데, 신은 형제간에 무슨 원망과 노염이 있어 친애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에도 같이 화락하게 즐기지 못하여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衷情)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요약해보자. 세자, 즉 미래의 인종은 복성군이나 경빈 박씨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박씨가 죄를 지었다 해도 복성군이 연루되진 않았을 테고''', 그가 낳은 딸 하나는 민간으로 버림받아 평민과 다름없이 사는 모습이 불쌍하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딱히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된 것이 아니다. 세자 또한 그네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고, 계속 불쌍한 모습을 부각하며 형제의 정으로 견디기 힘들다고 중종에게 자비를 청했다. 중종은 세자의 청을 받아들여 복성군에게 군호와 왕족의 예를 허락했지만, 딱히 경빈 박씨 - 복성군 모자가 무고하게 죽었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저 위에 기록된 세자가 한 말을 보면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라고 하지 않는가. 비록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전에도 세자가 같은 말을 올렸으나 중종이 거부한 것이다. 또한 나중에라도 임금이 몸소 나서서 풀어주지 않았고, 세자가 '형제의 정으로' 간청한 것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즉, 중종은 조금도 자신의 위엄에 손상이 될 일을 하지 않았다.
만약 중종이 복성군을 정말로 아들로서 사랑했다면, 설마하니 세자가 먼저 이복형의 신분을 되돌려달라고 운을 뗄 때까지 기다리고 그마저도 한 번은 반려했을까. 중종 또한 복성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스스로 납득하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행동했음이 분명하다.
이후로 실록에서 복성군은 '복성군'이라고 불리지만, 경빈 박씨는 '박빈' 또는 '박씨'라고만 언급된다. 공식적으로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작인두의 변 때 홍여의 하인들이 고문을 받아 억지로 죄상을 실토했다거나, 홍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은 실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지만, 이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폐서인된 옹주들의 신분을 되돌려주었을 뿐이다. 이후의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것 같기는 한데 오래된 일이라 증거도 없고, 임금(중종)의 체면도 있고 하니까 이 정도로 덮고 가자.'는 식이었다.
유생 이종익이 김안로의 (상소 당시엔 이미 죽은) 아들 김희가 작서의 변을 실행했다고 주장한 것은 근거가 없었다. 또한 그가 누구에게 말을 들어 그런 주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로도 이종익의 주장이 검증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다만 김안로가 작서의 변이나 가작인두의 변을 사주했을 가능성은 크다.
김안로는 세자(미래의 인종)의 사람이었다. 작서의 변 이후 귀양에서 풀려나자, 김안로는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으므로 세자를 옹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정적들을 처리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두 사건은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눈에 보이는 물증으로 작용한 것이다. 두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사람이 바로 김안로이다. 그래서 증거는 없지만, 김안로가 일을 꾸민 배후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문정왕후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문정왕후가 중종과 가례를 올린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중종 16년(1521)에 의혜공주를 낳는 등 불임은 아니었다. 아직 아들을 못 낳는다고 희망을 놓칠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은근히 다음 왕위를 기대하는 경빈 박씨나 복성군이 고까워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미래의 임금인 세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서 김안로와 힘을 합쳐 두 모자를 찍어내고자 했다면, 이 또한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미래의 명종)을 낳은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자의 편에 서서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김안로와, 자기 소생의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의 관계는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는 자기 남동생 윤원로, 윤원형을 불러 벼슬을 주며 자기 세력을 키웠고, 김안로와 충돌했다.
야사에 따르면 이항복이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 복성군의 혼령이 나타나서 자신이 이미 신원된 줄이야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항복이 '모두들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고 전하자, 복성군은 매우 기뻐하면서 이항복에게 '그대는 장차 귀하게 되리라.'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왕자라고 민간에서도 가련하게 여기고, 군호를 되돌려받자 복성군이 신원되었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4. 소설


고전 소설 윤지경전이 이 사건과 기묘사화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고전 소설에서 드물게 국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5.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이 작서의 변의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김안로가 귀양간 곳에 몰래 잠입하여 김안로와 손을 잡고 김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동궁전 은행나무에 작서를 걸어두었다고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1] 후술하겠지만 무고 여부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당초 경빈 박씨가 범죄자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정황과 심증만으로 처벌받은 것이므로 무고사건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은 없다.[2] 종법질서상 적장자가 없으면 적차자가 뒤를 잇고,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잇는다. 따라서 중종에게 더 이상의 적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서장자인 복성군이 왕위를 계승한다. 즉 작서의 변이 일어난 시점에서 왕위계승순위는 1번이 세자(훗날의 인종), 2번이 복성군이었다.[3] 남곤은 "그가 하루 밖에 있다면 조정도 하루 편안하고, 그가 한 해 밖에 있다면 조정도 한 해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맞아떨어졌다. 여기에는 없지만 김안로 축출에 앞장서 나섰던 이들 중 이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김안로 축출을 강하게 밀어붙인 후 수시로 "김안로 돌아오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도 맞아떨어졌다.[4] 인종은 중종 10년(1515 을해) 2월 25일에 태어났으므로 을해년생 돼지띠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세자의 생일에, 또한 돼지로 상징되는 해방(亥方) 쪽에 쥐를 매달았으니 세자를 노린 주술이라는 것이다.[5] 중종의 어머니 정현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내명부의 수장은 임금의 왕비인 문정왕후가 아니라 대비가 맡았다. 그래서 궁녀들이 대비에게 일을 보고한 것이다.[6] 꺽어지는 계단에 설치하는 난간[7] '은이'라는 나인이 도둑으로 몰렸다며 억울하니 액땜을 해야겠다고 죽은 쥐를 한 마리 가져와달라고 환관에게 부탁했으나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은이가 잠시 범인 물망에 올랐으나 곧 혐의대상에서 제외되었다.[8] 승정원에서 임금의 이름으로 작성하는 명령서.[9] 벼슬아치의 갓끈을 꿰는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