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왕후

 



'''정현왕후(貞顯王后)'''
'''시호'''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
(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
윤창년(尹昌年)[1]
'''출생지'''
신창(新昌) 관아(官衙)[2]
'''사망지'''
경복궁 동궁 정침
'''본관'''
파평(坡平)
'''배우자'''
성종(成宗)
'''아버지'''
영원부원군 윤호
'''어머니'''
연안부부인 전씨
'''생몰'''
'''기간'''
음력
1462년 6월 25일 ~ 1530년 8월 22일
양력
1462년 7월 21일 ~ 1530년 9월 13일(향년 69세, 만 68세)
'''재위'''
'''기간'''
1473년 ~ 1480년(숙의)
1480년 ~ 1495년(왕비)
1495년 ~ 1506년(왕대비)[3]
1506년 ~ 1530년(왕대비)[4]
1. 소개
2. 생애
2.1. 숙의 시절
2.2. 왕비 시절
2.3. 왕대비 시절
3. 사후
4. 자녀


1. 소개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3번째 왕비이자,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모후이다. 또한 조선의 역대 왕비 중에서 운이 좋게 후궁 출신으로 중전이 되었다가[5] 왕대비가 된 유이한 인물이다.[6]

2. 생애



2.1. 숙의 시절


영원부원군 윤호와 부부인 전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호는 좌명공신 윤곤의 손자로, 윤곤은 한명회에게 고모부가 되고, 정희왕후의 5촌 당숙이다.[7] 이러한 배경으로 간택후궁으로 뽑혀 입궁했다. 그러나 중전 윤씨가 폐서인된 후 1480년에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의 많은 후궁들 중에서 정현왕후만한 명문가 출신이 없었기 때문에 새 왕비 후보로 1순위나 다름없었다. 왕비로 책봉됐을 당시 정현왕후의 나이는 19살이었다.

2.2. 왕비 시절


새 중전이 되어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돌보았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왕이 된 후에야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연산군에게 잘 해줬던 모양.
1488년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을 낳았다.

2.3. 왕대비 시절


그러나 연산군갑자사화 당시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정현왕후의 침전 앞까지 쳐들어와 침전 밖으로 나오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정현왕후는 두려워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
연산군은 의붓어머니 정현왕후를 폐비 사건의 동조자라고 생각해서 저런 행동을 한 듯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정현왕후가 숙의였을 당시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인걸 제외하고는 자녀가 옹주가 한 명 있었고,[8] 또한 폐비 사사 당시 겨우 19살이었기 때문에 귀인 정씨귀인 엄씨와 달리 별 영향력도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중전 신씨가 나와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고 말려서 연산군이 물러났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아들 중종이 옹립되자 '''"진성대군이 아직 어려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찌 나라를 이끌 수 있겠소"'''라며 한 번 튕겼다가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내 따르리다.[9]" 하며 마지못해 승인하는 듯 어보를 찍었다.
새 임금이 왕위에 올랐지만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않고 그대로 왕대비였다. 정현왕후가 중종의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연산군의 비였던 신씨도 폐위되어 왕대비 자리에 새로 오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며느리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문정왕후는 명종의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
중종 시절에는 왕후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문정왕후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내명부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큰 어른이었고, 연산군 시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연산군 일기를 보면 생일마다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의 모습인데, 중종실록을 보면 승정원에서 알아서 정현왕후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고 정치적 조언을 듣는 상황이 자주 언급된다. 심지어 본인이 죽었을 때 중종과 인종은 기력이 약하니 무조건 유교식 FM대로 하지 말고 상황 봐서 적당히 조절하라고# 미리 조언을 주기도 했다.[10] 참고로 이건 별세하기 8년 전 이야기. 승하 10년전부터 지병인 천식과 담질환(심장질환)으로 오랫동안 시달렸다.
1530년 69세 나이에 천식과 노환으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사후 남편 성종이 묻혀 있는 선릉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묻혔다. 그런데 지금 정현왕후의 시신은 선릉에 없다. 임진왜란 당시 선정릉이 모두 파헤쳐졌는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잿더미만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선정릉에는 새로 지어올린 의복만 묻혔다.

4. 자녀


  • 첫째 : 순숙공주(順淑公主, 1478년 혹은 1479년 - 1488년 7월 14일)[11][12][13]
  • 둘째 : 공주(公主, 1485년 11윌 - 1486년 2월 13일 )[14][15]
  • 셋째 : 중종(1488년 3월 5일~ 1544년 11월 15일, 재위 1506년 ~ 1544년)
  • 넷째 : 공주(公主, 1490년 11월 - ? )[16]

5. 사극


정현왕후가 살아온 시대는 조선 왕실사의 격동기였다. 시어머니가 인수대비, 의붓아들이 연산군, 며느리가 문정왕후니 말 다했다. 그래서 주연으로는 안 나오더라도 조연으로는 꾸준히 나온다. 특이한 점은, 사극에서는 한번도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이 같이 나온 적이 없단 거다. 연산군대와 중종대가 분위기상 하도 따로 노는 시대라, 정현왕후의 삶은 항상 반토막으로 나온다. 성종~연산대 사극을 보다가 중종대 사극을 보면 '''"저 사람이 저 사람이야?"'''라고 생각될 정도. 앞서 말했듯이 젊은 시절에는 후궁이었고 노년 시절에는 왕대비였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실제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일기에서 기록된 정현왕후는 왕실에서 연산군의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에 가까운데, 중종반정 이후에는 중종도 갈팡질팡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대신들이 조언을 받으러 대비전을 가끔 찾아오는 기록이 종종 있다.
왕대비 시절을 묘사하는 대중매체에서는 보통 정현왕후보다는 자순대비의 호칭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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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의 정현왕후
《풍란》의 정현왕후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의 3탄 《설중매》와 4탄 《풍란》에서 모두 최명길이 맡았다. 《설중매》에서는 숙의 시절부터 인수대비의 사망(왕대비 시절)까지 나온다. 조용하고 현숙한 이미지로 묘사되었으며 연산군(임영규 분)이 갑자사화를 거쳐 흑화한 이후로는 연산군을 걱정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듬해 1985년 방영한 후속작 《풍란》에서는 중종반정 이후의 정현왕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 이따금 중종(최상훈 분) 내외에게 문안을 받는 장면으로 간간히 등장하나 일찍 친어머니를 잃은 세자(인종)의 배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김안로(김길호 분)에게 작은 힘이나마 실어주는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비록 두 작품에 걸쳤지만 역사 상 정현왕후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배우가 연기한 유일한 케이스. 그래서 앞서 말한 이미지 갭이 좀 떨어진다. 그런데 이 때 며느리 문정왕후김혜자가 연기했다. 최명길이 김혜자의 딸뻘인데도 시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최명길은 1962년생, 김혜자는 1941년생)
여기서는 자순대비가 아닌 후궁부터 한명회 사후까지만 출연했고 연산군 시기는 출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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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정현왕후
드라마 줄거리가 중종반정부터 시작하기에 자순대비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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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비》의 정현왕후
숙의 시절부터 등장. 연산군(안재모 분)을 많이 위해주고 중종반정 후에도 연산군을 폐주가 아닌 선왕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산군이 자신의 친아들 진성대군을 화풀이 삼아 여러모로 내리갈굼을 많이 하자 불똥이 튀길까 두려워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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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정현왕후
기존 사극에서의 정현왕후는 착하고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였으나 여기서는 자애롭고도 강단 있는 인물로 나온다. 이미지가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이전 사극에서는 죄다 후궁~왕비 시절이었지만 여인천하에서는 왕대비 시절이기 때문. 그래서 여기서는 자순대비란 칭호로만 나온다. 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 분)도 극 초반부에는 시어머니 정현왕후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한다. 나중엔 문정왕후를 많이 도와주긴 하지만. 극 중 초반에는 문정왕후와 대립하는 경빈 박씨(도지원 분)를 총애하나, 경빈이 아들인 복성군(안홍진 분)에게 건네준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의 존재를 알게 되고[17] 과거 갑자사화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정현왕후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 경빈의 적으로 돌변한다. 경빈의 적이 된건 그녀 역시 후궁 출신으로 내명부의 암투가 왕실과 조정에 얼마나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너무도 똑똑히 봤고 기억하기 때문. 이후 경빈이 사사당할 때 가장 앞장서서 중종(최종환 분)에게 경빈의 사사를 주장했으며, 중종이 극구 거부하자[18] 그 충격으로 몸져 누워 얼마 안가 사망한다. 같은 시기 경빈도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어찌보면 동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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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 (극 초반)
대비 (극 후반)
중종(임호 분)의 치세에만 나오기 때문에 《여인천하》와 마찬가지로 자순대비의 신분으로 나온다. 스토리상으로는 의도치 않게 악역을 도와주어 장금(이영애 분)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인물. 본인은 올곧고 흠잡을 데 없는 성품이나, 가까이 두고 있는 대신이나 상궁들이 오겸호(조경환 분)나 최 상궁(견미리 분), 전 제조상궁 박 상궁(박정수 분) 같은 사람들인지라 은연중에 장금과 한 상궁(양미경 분)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금이 궁녀가 되기 위한 시험에서 진가루(밀가루)를 잃어버려[19] 숭(배추)으로 만두를 만드는데, 상궁들은 장금이 정해진 재료로 만두를 만들지 않았다며 탈락시키지만, 숭채만두를 본 정현왕후가 장금을 선발하라고 명한다. 이후 최고상궁 경합 1차전에서 장금이 꼼수를 쓴 탓에 한 상궁이 패배하자 한 상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명나라 사신 접대 사건을 문정왕후(박정숙 분)에게서 전해듣자 제조상궁과 최 상궁을 꾸짖고 2차전은 한 상궁이 이겼다고 선포한다. 3차전에서는 중종의 뜻을 따라 엉겁결에 한 상궁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이후 최 상궁 등이 반발하자 후회하는 모습을 내비쳤고, 결국 문정왕후에게 내명부 권한을 위임한다. 장금이 의녀가 되었을 무렵, 이러저러한 일로 중종과 대립하면서[20] 치료를 거부하다가 장금이 나서서 수수께끼를 빙자한 설득으로 치료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앞서 치료를 거부한 탓에 몸이 허약해 져서 탕약을 마실 수 없었고, 그런 정현왕후에게 장금은 자순대비가 싫어하는 마늘로 만든 환을 올린다. 뒤에 열이(이세은 분)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윗전에 알렸으나, 이미 환약으로 병세에 차도가 생겼던 시점이라 크게 화를 내진 않고 장금에게 어떻게 마늘 맛을 감췄는지를 물은 뒤 편식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후 오겸호, 최 상궁 일파의 악행이 밝혀지면서 이들과 학을 떼지만, 중종이 장금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자 당시 임신 중이었던 연생(박은혜 분)이 장금과 중종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이유로 꾸짖어서 조산 + 생명의 위기를 겪게 하였고, 급기야는 석고대죄를 시전하여 결국 중종이 명령을 철회하게 한다. 그 이후로도 중종이 장금에게 종종 심리상담을 받자, 그 뜻을 오해한 자순대비는 그럴 것이라면 장금을 후궁으로 삼으라고 중종과 문정왕후를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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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정현왕후
숙의 시절부터 중종반정 전까지 나온다. 매우 선량하며 친아들이 아닌 연산군에게도 따뜻하게 대한다. 그래서 연산군도 정현왕후에게 대들 때 '왜 나를 박대하느냐'라고 화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비록 아껴주긴 했지만, 내가 잘못할 때 회초리를 때리고 꾸짖어 주었으면 했다'라는 식으로 섭섭해한다. 숙의 시절부터 자신의 윗전인 폐비 윤씨를 누구보다도 공경하였으며, 다른 후궁들이 폐비 윤씨의 폐위를 간청할 때 혼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폐비 윤씨를 감싸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성종의 후궁들 중 가장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불이익을 감수하는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결과적으로 윗전 대비들로부터 새 중전으로 낙점된다.
인수대비(채시라 분)에 치우쳐져서 분량은 별로 없다.
  • 김경화[21] - 2017년 MBC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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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의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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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의 왕비》의 정현왕후
이 배우가 바로 다음 시대를 다루는 《여인천하》에서 정현왕후의 서(庶)며느리 경빈 박씨#s-1로 출연해 이름을 날린 것을 보면 배우개그. 주인공인 7일의 왕비 단경왕후를 며느리로 둔 역할이기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분량이 꽤 많다. 보통 연산군을 아끼고 사랑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부분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연산군(이동건 분)과 약간의 애증 관계라고 나온다.

[1]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350)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2] 現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3] 연산군 시절[4] 중종 시절. 연산군이 폐위 됨에 따라 중전 신씨도 대비가 되지 못하고 폐비됐기 때문에 자순대비가 그대로 왕대비직 승계.[5] 조선의 역대 왕비 중 후궁 출신 왕비는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세자빈이 된 후에 사망해서 이후 왕비로 추존된 문종비 현덕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숙종비 희빈 장씨가 있다.[6] 나머지 한 명은 예종의 세자 시절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되고 왕대비까지 오른 안순왕후. 다만 안순왕후는 부군 예종이 즉위하고 오래지 않아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금방 왕대비에 올랐고, 정현왕후는 성종이 두 비를 떠나보낸 후 세 번째로 맞은 왕비라 성종 즉위 한참 뒤에야 왕비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왕대비가 되었다.[7] 즉, 윤호는 정희왕후의 7촌 조카이다.[8] 아래 자녀 문단에 나오는 순숙공주다. 일찍 죽었다.[9] 여인천하에서 이 대사가 그대로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진심으로 연산의 폐위를 슬퍼하였다[10] 앞 시대의 태종(조선)세종대왕보고 본인 상중에는 고기(육류)를 먹으라고 조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11] 기해년에 옹주(翁主)를 낳으셨고...(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2] 순숙 공주(順淑公主)가 졸(卒)하니, 조시(朝市)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공주는 주상의 딸인데, 나이가 열 한 살이다. 전교하기를, "공주는 나이 어린 미성인(未成人)이므로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일체 반드시 횡간(橫看)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참작해 할 것이며, 빈소(殯所)를 없애고 바로 장사하도록 하라." - 《성종 19년 7월 14일 을해 1번째기사》[13] 중종실록에서는 옹주가 기해년(1479년)에 태어났다고 적혀있는데 이 옹주가 순숙공주(태어날 당시, 어머니 정현왕후가 후궁이었기때문에 서녀 신분이었다.)의 또 다른 동생일 수도 있으나 작호까지 받은 순숙공주만 쏙 빼놓고 중종과 작호도 받지 못한 요절한 딸들만 기록되는 점이 이상하다. 그래서 중종실록에 나온 기해년 출생 옹주는 순숙공주일 확률이 높다. 즉, 성종실록과 중종실록 중 하나가 잘 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4] 을사년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5]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16] 을사년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7] 경빈이 복성군에게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며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라고 준 것이었다. 문제는 갑자사화의 발단이 바로 성종 시절 폐비 윤씨의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인데다 당시의 피해자 중에 정현왕후도 있다는 것...[18] 해설에 따르면 실제 역사에서 무려 19차례나 경빈의 사사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19] 명나라 사신에게 겁탈당한 (이는 잘못된 정보다, 이후 나오는 묵계식 장면에서 노 상궁이 밝힌 내용을 서술함을 알림.) 노 상궁 수하의 나인이 낳은 어린 궁녀가(그녀의 생모였던 나인은 결국 궁녀의 법도에 따라 노상궁이 직접 자진하게끔 하였고 그 여린 궁녀는 노 상궁이 어미라고 생각하게 하고 궁에서 키우게 한 것), 노 상궁이 연로하여 궁을 떠나게 되자, 마지막으로 만둣국을 올리고 싶어서 장금의 진가루를 훔친 것. 장금은 이 사연을 알고 차마 진가루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20] 배후에는 중종의 정치개혁에 반발하는 오겸호 일파의 농간이 있었다.[21] MBC 아나운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