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훈

 

'''성명'''
홍계훈(洪啓薰)
'''본관'''
남양 홍씨
'''출생'''
1842년
'''사망'''
1895년 10월 8일
'''국적'''
조선
'''자'''
성남(聖南)
'''호'''
규산(圭珊)
1. 개요
2. 생애
3. 청군차병 건의사건
4. 미디어


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5시 50분, 6시) 을미사변일본군을 막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초명은 재희(在熙),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2. 생애


신원은 확실치 않으나, 무사 집안 출신으로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난리통에 명성황후 민씨를 그의 동생 홍 상궁으로 속인 다음 자신의 등에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전라 병사의 후임으로 189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했고 이경호가 의정부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을 표창하자고 했다.[1]
을미사변 때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죽었다. 그런데《고종실록》에서는 광화문 밖에서,《한국통사》에서는 궁궐 안에서,《대한계년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매천야록》에서는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광화문 앞에서 죽었다고 여겨지는 듯.[2]
그는 역시 명성 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함께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현은《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을 “졸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라고 호평했다.

3. 청군차병 건의사건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군차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인데 '''동학군을 과대평가해 청군차병을 정부에 건의한 것이 홍계훈이다.'''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을 국왕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 하여 청군차병을 요청하는 문건을 정부에 보냈고 그 사료가 남아있다.[3]
동학군의 실상은 관군을 동원하여 전투하면 금방 몰락할 상황인데 과대평가라는 실책으로 청군차병을 건의했다. 홍계훈이 조선정부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 측에 확실히 남아있다. 음력 4월 19일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있다.[4] 물론 이는 고종의 의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보은집회 당시 1893년 3월에 고종은 청군출병 의사를 보였고 신하들이 거부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사표명을 하며 반복적으로 의견을 구했다.

여(고종): 요충지가 모두 몇개나 됩니까?

심순택: 수원과 용인이 직로입니다. 심영과 기영의 병정들을 먼저 수원과 용인 등지에 파견하여 주둔케 하고 경군은 상황을 보면서 조용함이 좋을 듯 합니다.

여(고종): 경군은 절대 절대 파견할 수 없습니다. 타국의 군사를 차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나라에 전례들이 있습니다만 군을 차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심순택: 그것은 아니됩니다. 만약 타국 군사를 차용하면 군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여(고종): 중국에서도 일찍이 영국군을 차용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범조: 어찌 중국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여(고종):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청병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범조: 청병을 차용하는 것은 비록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는 것과 다르지만 처음부터 차용하지 않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

이런 대화 내용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고종실록》세가지 자료에 교차검증이 된다.[5]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보은집회 당시 고종의 청병차병안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고종이 “동학의 세가 창궐하여 충청병영의 병정으로는 진무할 힘이 없고, 경병 역시 파송할 수 없으므로 청병을 빌려서 뿌리 뽑고 자”한며 비밀리에 박제순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청 병력 파견을 의논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도 있다.[6]
이런 고종에게 홍계훈이 동학군을 과대평가해 청군차병을 건의했으니 고종이 오판을 한 것이다.

4. 미디어


명성황후(드라마)[7] 명성황후(뮤지컬)에서는 이런 일화들을 묶어 명성황후를 지키려다 죽어간 순정남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줄리엣 모리오는 소설 운현궁에서 그와 명성 황후의 로맨스를 다루기도 했다. 또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주인공 무명(조승우 분)도 홍계훈을 모티브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녹두꽃에서는 윤서현이 배역을 맡았다.

[1] 때문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한 일본군이 쓰러져 있는 홍계훈 앞에서 "참으로 수미일관한 삶을 사셨군. 왕비를 구해 출세하고 왕비를 구하지 못해 죽고" 라고 했다.[2] 신뢰도를 보면 고종실록이 가장 높고, 한국통사와 대한계년사의 내용이 그에 비견될만하고, 매천야록은 '그런 풍문이 있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매천야록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사실 관계가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별로 없다.[3] 김명섭(1994),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 5~6; 강문호(2004),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17, p. 16; 신영우(2009),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51, p. 26.[4] 강문호(2004),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p. 120~121; 유바다(2017),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336[5] 김명섭(1994),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단국대학교 석사논문, p. 7; 구선희(1999),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p.229; 강문호(2004),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p. 109; 엄찬호(2006),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25, p. 5; 신영우(2009),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51, p. 19~20, 26; 유바다(2019),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p. 339.[6] 구선희(1999),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p. 220~221; 김보경(2004),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숙명여자대학교 박사논문; 엄찬호(2006),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25, p. 5.[7] 정확히 말하면 드라마 OST <나 가거든> 뮤직 비디오가 그렇다. 드라마에선 전하와 중전마마를 지켜드려야 한다며 소수의 부하만 대동하고 싸우다 마지막화 초반에 죽는다. 드라마판과 뮤직비디오는 명성황후와 홍계훈 배역을 맡은 배우부터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