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화문'''
光化門 | Gwanghwamun


'''경복궁의 정문'''
'''창건'''
1395년(태조 4년) 9월 창건
'''재건'''
1867년(고종 4년) 12월 재건
1927년 9월 15일 해체 이전[1]
1968년 12월 11일 재건[2]
2010년 8월 15일 재건[3]
'''설계'''
김사행[4]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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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지는 광화문의 야경.

1. 개요
2. 역사
2.1. 편액 갈라짐
3. 지역으로써의 광화문
4. 광화문광장
5. 교통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왕조정궁경복궁의 정문. 다만 현대에는 '광화문'이란 명칭 자체가 궐문으로서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등을 포함한 법정동 세종로 및 그 주변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감이 있다. 실제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선 약 600~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사거리)'라고 많이 불린다. 의정부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조선 시대부터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으로, 숭례문 등과 더불어 '''서울의 역사가 함축된 곳''' 중 한 곳이라 볼 수 있다.[5] 즉,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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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유산채널 #
1395년(태조 4년) 9월에 경복궁이 건설될 때 처음 지어졌으며, 원래는 그냥 정문(正門)이라고 했다가 1425년(세종 7년)에 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태조때 이미 광화문이라고 불렸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세종 때 붙여진 것이 맞다.[6] 세종 전까지 쓴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실록에서는 이런 이름은 당대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성종 때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 흥례문(홍례문), 근정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정괄이 저지하였다[7][8].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9] 같이 무너졌다. 이후 273년간 공터로 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1865년 재건되었다. 이때의 현판은 당대의 서화가 정학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1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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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 북측(현 국립 민속 박물관)으로 옮겨진 광화문(1927년 경)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경복궁 앞뜰을 때려부숴가면서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었고, 이 때 광화문도 헐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들조차 반발할 정도라서(특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11]가 철거를 반대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광화문은 일단 보존되었다. 이에 대해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수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조선총독부를 가로막기 때문에 때문에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건춘문 북쪽으로 해체 이전해버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원래 광화문과 다르게 5도 가량 동쪽을 바라보도록 각도를 틀어 남산의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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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광화문의 목조 문루 부분은 6.25 전쟁 때 포탄을 맞아 완파되어 사라지고 석축만 남았다. 그러다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남아있던 석축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하고 그 위에 복원했다. 그러나 이 복원은 문제가 많았다. 우선 석조가 아닌 콘크리트 복원이었고(관련 링크) 석축도 깨진 부분이 많아 전부 활용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기단부 안쪽에 넣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12] 아울러 복원된 광화문은 중앙청을 기준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원래 지어질 때의 자리에서 후퇴하여 지어졌고 각도도 원래 육조거리 각도에 맞춘 게 아니라 중앙청에 맞춰 지어져 3.75도 가량 틀어졌다. 원래 근정전,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이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 거리가 보이도록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근정전과 근정문만 원래 축 자리에 남았고 흥례문은 헐렸으며, 광화문은 동쪽으로 옮겨졌다. 이어지는 축이 광화문 부근에서 꺾여버리게 된 것이다.[13] 또한 복원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은 문루에 한자가 아닌 자신이 쓴 한글 현판을 걸어놨다. 다만 철근 콘크리트를 쓴 복원 자체는 당시 수준에선 평범한 결정이었을 지도 모른다.[14] 식민지 잔재는 청산해야 하고 민족주의적 열망은 채워야겠는데 딱히 전문 인력도 없으니.. 시대적으로 봐도 이 쪽으로 꽤 꼼꼼하다고 알려진 일본도, 1957~1963년 동안 시텐노지[15] 복원하면서 철근 콘크리트를 부어버린 바 있었다.
또한 콘크리트 광화문 시기에는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세워져 중앙청 정문 역할도 했고, 통행량이 많은 세종로에 있다보니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념 현수막이 여러 차례 걸리기도 했다. 이는 중앙청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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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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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의 경복궁 모습. 잘 보면 광화문과 나머지 경복궁 건물들의 축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광화문은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철거되었다. 이후 콘크리트 문루를 철거하고 다시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16] 이때 광화문 앞의 월대도 함께 복원하기로 했으나, 서울시에서 교통 체증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월대 복원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울시에서는 광화문 자체가 남쪽으로 14.5m 내려오는 데다가, 광화문 앞 옛 월대의 길이가 40m나 돼, 차로를 55m나 줄여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월대를 복원하는 대신 광화문광장에 월대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2010년 8월 완공. 15일 광복절에 현판식이 거행되면서 광화문 복원 공사는 모두 끝났다.[17] 이때 교체가 된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도 당시엔 나름 뜨거운 감자였는데, 정치 구도상 이념 대립도 있고 한글이냐 한자냐 논란도 있었다. 다만 한글, 한자 논란의 경우 둘 다 일리는 있는게, 전통이란 것은 박제가 아니기에 현실의 반영이란 측면에서는 한글 현판도 가치가 있으며, 반대로 문화재의 충실한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대측의 주장도 가치가 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틀리고 할 문제는 아닌 것.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의 수준 자체에 대한 서예 전문가들의 평가는 문화재로 지정해 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현판식이 있었던 날, 당시 국회의원이자 이름난 서예가였던 윤제술이 냅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는 일화도 있다.(...)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식겁한 표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키자 윤제술은 다시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여담으로 자세히 보면 1968년 광화문 현판 제막 행사 사진에 드러난 한글 현판과, 2000년대까지 걸려있었던 한글 현판의 글씨가 서로 다르다. 둘다 박정희 대통령 본인의 글씨체이지만 전자는 정자체, 후자는 반흘림체이다. 정자체로 썼던 먼젓번 현판 글씨가 실제로 후자보다 다소 조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따로 현판 교체 행사를 갖지도 않고 며칠만에 슬그머니 반흘림체로 쓴 새 현판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자기 글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새로 써서 교체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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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5일 이후로 공개된 광화문의 모습. 현판이 다시 조선 시대처럼 한자로 바뀌고[18] 소나무와 화강암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복원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돌 색깔이 어떤 것은 말끔하고 어떤 것은 지저분한데 그 까닭은 옛 돌과 새 돌을 같이 썼기 때문이다. 요즘 복원 추세는 과거에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지저분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숭례문 석축의 돌 색깔이 맞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조금은 줄어드는 셈.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새 돌도 때가 타 옛 돌과 어우러질 것이다.

2.1. 편액 갈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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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완공 이후 3달이 지난 2010년 11월 즈음, 갑자기 편액이 갈라져 버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연적인 균열인지, 복원 기간 단축으로 인한 부실 복원으로 생긴 균열인지에 대해 한동안 설왕설래하기도 했는데, 일단 정부는 목재를 잘못 썼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 원래 이런 데 사용하는 목재는 몇 개월 이상 잘 말린 것을 사용해야 뒤틀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목재를 담당한 장인과 전각을 담당한 장인은 서로 네 탓이오(...)를 시전하며 다투기도 했다.
2016년 2월 29일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였다는 주장이 2014년에 이어[19] 또 다시 제기되었다.[20] 기사, 기사. 이와 더불어 궁궐 전각에 걸린 편액 가운데 4분의 1이 엉터리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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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화재청에서 2017년 7월 직접 광화문 편액의 위치에 검은색 바탕에 세 가지 광(光)을 쓴 현판을 올려 원본을 유추하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하나는 금색 글자를, 하나는 금박을 입힌 글자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흰색 글자를 그려 당대의 편액을 알아보았고, 최종적으로 현재 편액에서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자 광화문(光化門)을 쓴 편액으로 2020년 중에 교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2018년 12월 27일 발표된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 따르면 위 논문의 저자 김민규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광화문의 편액이 현존하는 근정전의 편액처럼 금동판을 글자 모양으로 자른 뒤 목판에 붙이고 금칠을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3. 지역으로써의 광화문


명실상부한 서울특별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바로 앞에는 50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있고, 그 뒤에는 청와대, 그리고 광화문광장과 광화문 앞에는 정부서울청사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국 의회정치의 상징이 여의도인 것처럼[21] 혹자는 광화문을 한국 행정정치의 상징지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다만 지금은 경기도 과천시, 대전광역시세종시 등으로 정부의 행정 기능이 꽤 분산되어, 인식과 달리 (차라리 경복궁 너머 청와대라면 몰라도) 현재는 광화문이 한국 행정에서 생각만큼 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아닌 대신 다른 여러 나라들의 개선문 역할로 바뀌었다.
민주화 항쟁이나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 등 시민 집회 다수가 광화문 앞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면서, 현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연관해 알쓸신잡 2기에선, 조선 시대 종묘, 사직이 조선의 정신적 기둥, 물질적 욕망 비슷한 것을 기원하는 상징물이었다면, 21세기엔 광화문과 마천루가 이에 비견되는 상징물 아니겠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광화문 일대는 정부 기관 뿐만 아니라 고층 빌딩에 각종 기업 본사 등도 많이 입주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업무 지구 중 한 곳이다. 외교부 역시 광화문 일대에 있는 관계로 미국, 일본, 호주, 핀란드, 멕시코, 오만 등의 각국 대사관들도 광화문 인근에 많이 모여있는 편이다. 덕분인지 관광객들도 많다. 이 지역에 들어선 주요 시설들은 다음과 같다.(광화문 지역에 포함되기도 않기도 하는 건물들은 ★ 표시.)
  • 청와대
  • 정부서울청사
  • 의정부[22]
  • 광화문광장
  • 경복궁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주한미국대사관[23]
  • 세종문화회관
  • 외교부 청사
  • 농협은행
  • KT 광화문지사
  • 세종문화회관
  • 교보문고 광화문점
  • 서울특별시청
  • 덕수궁
  • 서울광장
  • 숭례문[24]
구 6조와 의정부, 경복궁의 기능은 청와대정부세종청사[25], 외교부 청사로 넘어갔고, 정치적 의사표현 의 장은 광화문광장, 서울광장으로 넘어갔다. 거기에 한 때 한국 대중지식의 상징이었던 교보문고, 통신 시장에서의 매우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는 KT 본사, 각종 문화시설들과 박물관들, 한국의 랜드마크인 경복궁이 존재하고 서울시청도 있으니 과거보다 더욱 많은 기능을 하는 한국의 중심지로 변화했다.

4. 광화문광장




5. 교통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180m'''로 가장 가깝다.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의 경우 역명과는 달리 광화문과는 '''470m''' 정도 떨어져 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가는 것보다 광화문역에서의 거리가 대략 2.6배 멀다. 실제 광화문역을 광화문광장역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
그러나 5호선에 있음에도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경복궁역으로 가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환승저항과 배차 시격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더 실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폭염이나 한파 같은 부담스러운 날씨가 아니라면 광화문역에서 내리는 게 훨씬 낫다. 광화문역에서 내려도 광화문의 정면이 보인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광화문에 가장 가까운 출구는 2번 출구이며, 광화문광장으로 나 있는 9번 출구로 나와도 된다.
세종대로 사거리 중앙(이순신 동상 앞)에는 서울과 다른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도로가 시작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즘 같이 자동차로 붐비는 세종로 한복판에 조형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 도로원표 조형물은 실제보다 151m 떨어진 코리아나 호텔 북쪽에 있다.
광화문 앞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성산대교서부간선도로를 지나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져 1번 국도 종점인 목포 신항교차로까지 갈 수 있고 동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져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온천장교차로까지 갈 수 있다.[26]

6. 여담


  • 아직 광화문광장이 생기기 전인 200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불도저를 개조해 만든 전차 부대를 김진영 대령이 회군시키는 씬을 광화문 앞 대로에서 촬영했었다.
  • 2017년 방영된 TV조선 프로그램 중에는 '정보통 광화문 640'이라는 프로도 있었다. 이전 명칭은 '생방송 광화문의 아침'이었고 2015년 6월 8일부터 평일 아침 7시 30분에 신설되어 방송되었는데 이래저래 표류하다 2017년 7월 3일부터 여름 개편으로 평일 저녁 6시 40분으로 변경되어 1시간 10분간 방송되었다가[27] 이후 편성이 수요일 ~ 목요일로 단축되었는데 날씨, 체조, 각종 생활 정보, 정치 이슈 등을 다뤘다. 다만 오래 가진 못하고 2017년 12월 28일에 종영되었고, 1월 1일부터 '야생의 왕국'으로 대체되었다.
  • 고려의 광화문, 즉 고려왕조의 궁궐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이다.
  • 고려왕조 만월대황성 정문 이름도 광화문이었다. 다만 한자는 다른데 조선은 화문인 반면 고려는 화문이다. 또 조선 광화문은 궁성의 남문인 반면 고려 광화문은 황성의 동문이다.
  • 2010년대 후반 들어 광화문에 있는 현수막은 모두 철거되었고, 대신 그 사이에 잔디랑 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졌다. 나름대로 시에서 자구책을 마련한듯 하다.
  •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0시, 14시에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수문장 교대식으로.
  • 2020년 기준 상당히 이미지 개선이 된것은 맞으나, 여전히 각종 개인 시위꾼들의 난투장이 진행되고 있다. 정말 별의 별 시위를 다 한다.

  • 서울에서 타 도시까지 거리를 잴 때 서울의 기준이 되는 지점이 바로 광화문이다.

7. 관련 문서



[1]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면서 광화문을 해체해 이전하였다.[2] 6.25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박정희 정권 시절 콘크리트를 사용해 복원했다.[3] 현재의 광화문.[4] 고려 말 조선 초의 환관. 고건축에 뛰어났으며 경복궁의 설계를 담당했다. 흔히 설계자로 알려져 있는 정도전의 경우 도시의 전반적인 틀을 그리고 이름을 작명하기는 했으나 건축학적인 의미의 설계는 아니었다.[5] 참고로 GPS 측량을 통한 서울의 지리적 중심은 남산 정상부에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도로원표는 1914년 일제가 한반도 18개 도시의 거리가 표시된 표석을 설치한 것에 불과하다. #[6] 실록에 보면 태조 실록 1395년 9월 29일 기록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지만 똑같은 태조 실록(1395년 10월 7일)을 보면 정도전이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 이름을 지은 뜻을 밝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남쪽의 문을 정문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이 충돌하는 이유는 태조 실록은 두 번에 걸쳐 찬집되었는데, 현존하는 태조 실록은 세종 30년(1448년) 8월에 찬집된 본이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세종 재위기에 이미 쓴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삽입하였기 때문이다.[7] 《성종실록》 성종 5년 3월 3일 무자 1번째기사: (전략)근래에 부역이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경복궁(景福宮)의 근정문(勤政門)·홍례문(弘禮門)·광화문(光化門)에 청기와를 덮기 위하여, 백성을 역사시켜 구워 만들게 하니 그 공(功)이 갑절 내지 다섯 갑절이나 듭니다. 인군(人君)은 마땅히 검소한 행실과 덕(德)을 숭상(崇尙)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첫 정사(政事)이겠습니까?(중략)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함이 아니고, 또 백성을 고달프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궁궐(宮闕)이 장차 무너지게 되어 부득이 수즙(修葺)하게 한 것이다." 하므로 정괄이 아뢰기를, "청기와를 구워 만드는 데는 물가의 비용이 적지 않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후략)[8] 중종이 경회루에 청기와를 올리려 하면서 꼭 정사를 처리하는 곳만을 청기와로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며 주장을 펼치는데, 중종의 예시는 정사를 처리하는 곳 외에 청기와 건물이 존재했다면 들 수 없는 것이므로 경복궁의 청기와 건물이 근정전과 사정전 뿐이었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종실록》 중종 15년 12월 18일 임인 2번째기사: 전교하였다. 경회루(慶會樓)는 바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 누(樓)를 본 중국 사람들은 모두 장려(壯麗, 웅장하고 화려함)하게 여겼다. 그런데 전부터 청와(靑瓦)로 이지 않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근정전(勤政殿)은 모두 청와로 이었는데 만약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렇게 했다면, 함원전(含元殿)·서현전(瑞賢殿)도 모두 청와로 이어야 한다.(후략)[9] 일본군이 방화했다는 설도 있고, 민중들이 방화했다는 설도 있다. 전자의 경우 당시 같이 갔던 종군승이 경복궁을 보며 "여기가 용이 사는 곳이냐 아니면 신선이 사는 선계냐.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라고 기록을 남겼는데, 이 말은 즉슨 왜군이 한성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은 온전했다는 말이다. 후자의 경우 조선 왕조 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다.[10] 조선 왕조 실록 고종 실록 참조[11] 일본의 민예 연구가, 미술 평론가로 한국 민속 예술이나 미술 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일본인임에도 조선에 대한 미술 서적을 발간했다. 연구에 대한 깊이나 정도가 훌륭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인물 연구 서적, 그의 연구에 대한 평론, 연구 서적 등이 현재에도 나올 정도다(다만 그의 주장 중 하나인 '조선의 예술은 억압과 탄압에서 비롯돼서 그에 따른 '한(恨)' 모티브가 존재한다.'란 부분만큼은 여러 학자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의 광화문 철거 반대는 동정표도 섞여있을지는 모르나 워낙 그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꽤나 민예, 미술계에서의 그의 평가가 대단했고 그 당시 입지 역시 상당한 것으로(그러니 파문이 일었겠지만) 민예, 미술 연구가로서도 광화문만한 연구 소재가 사라지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알든 모르든 언론이나 민중(일본이든 조선이든)이 당시 상황(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그가 발언한 광화문 철거 반대는 크나큰 떡밥이었으리라. 덧붙여 한자로 쓴 이름이 유종열(柳宗悅) 로 조선 이름처럼 들리는 이름이라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웬 조선인이 헛소리를 한다, 혹은 그새끼 실은 조선놈 아니냐, 하고 대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2]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년).[13] 1968년의 광화문은 조선 총독부에 맞춰서 지었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 철거 이후에도 근정전 앞 월대에서 앞을 바라보면 광화문이 틀어진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광화문 광장에서 근정전을 보려면 세개의 문 중 가운데 문이 아니라 왼쪽 문을 바라봐야 일직선 축에 맞게 보였다.[14] 지금도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이 철근 콘크리트 식으로 남아있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신각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이다.[15] 곤고구미로 나름 유명한 절이다.[16] 서울시립박물관 외부에 철거 때 남겨둔 광화문 콘크리트 단면 조각이 남아 있다.[17] 12월 완공 예정이던 걸 G20 회의 때문에 9월로, 다시 광복절에 맞춘다고 8월로 앞당겨 부실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보안과 형사들까지 현장에 전화질에 방문질을 해댔다고..[18] 옛 광화문의 사진을 바탕으로 디지털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다만 이 현판은 서예 전문가들에게는 글씨 자체만 놓고 보면 썩 좋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직접 손으로 쓴 글씨에는, 디지털 복원한 글씨에는 없는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기 때문이란 것이 요지. 다만 광화문 현판은 예술성뿐만 아니라 역사 고증도 중요하기 때문에 디지털 복원은 불가피한 일이었다.[19] 기사 참조.[20] 사실 경복궁의 다른 문들을 비롯하여 각 주요 전각들을 보면 편액들이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대표성을 봐도 상당히 근거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발견된 사진만으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진 역시도 조선 초기의 경복궁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진 속 광화문조차도 임진왜란 후 2백여 년 후에 복원된 건물이기 때문이다.[21] 사실 여의도로 이사가기 전까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도 현 서울특별시의회가 있는 옛 부민관 자리(현 서울특별시청 맞은편)에 있었다. 참고로 경기도청도 경복궁 건너편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22] 근시일 내 복원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복원되면 인지도가 크게 올라갈 것이며 관광자원으로서 기능할 것이다.[23] 곧 이전 예정. 부지는 추후 재개발될 것이다.[24] 세종대로에 접하나 광화문 지역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다.[25] 정부과천청사정부세종청사로 상당수 넘어가 예전의 위상보다는 덜하긴 하다.[26] 온천장교차로애서 온천장로가 일방통행이라 못 간다.[27] 대신 기존 시간대에 방송되었던 행복한 저녁은 종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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