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감
1. 개요
고려-조선 왕조의 관직.
2. 특징
왕실의 액정서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있으며 왕실의 심부름 및 시위(경호 임무)를 맡았다. 소속 직책에 따라 대전(왕의 거처) 별감, 중궁전(왕후의 거처) 별감, 동궁(왕세자의 거처) 별감으로 불리었다. 사극을 보면 국왕을 호위하는 인원 중 붉은색 철릭과 누런 갓을 쓴 무사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바로 별감이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오렌지족'이기도 했다. 이들은 왕의 옆에서 활동한다는 위치 때문에 그 위세와 권력이 결코 작지 않았다.[1] 따라서 이들은 반인, 검계와 함께 화류계의 큰 손으로 꼽혔다. 기방의 지배자들로 이들의 생활은 매우 사치스러웠으며, 각종 유흥을 선도하는 위치에 속했다. 아전이 으레 그렇듯 아랫사람들 뜯어먹는 일도 많이 했다.
이들은 중인 내부에서도 체아직 잡직에 속하는 아전이지만 아전 중에서는 제일 부귀영화를 누렸다. 참고로 잡과 출신은 체아직 정직이라서 이들보다 신분이 높다.
3. 액정서
掖庭署
액정서는 1392년(태조 1) 7월 문무백관의 관제를 반포할 때 내시 담당 관서로 설치된 것으로, 고려시대 액정원·액정국 등을 계승하였다. 액정이란 액문(掖門) 안에 있는 뜰을 의미하며, 액문이란 궁중의 작은 문을 가리키는데, 작은 문이 정문 옆에 있어 마치 사람의 겨드랑이와 같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액정서는 이조의 속아문이었다.
설치 당시 직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대체로 고려 후기의 내용이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2년(태종 12)에 직제 중 일부인 봉어대부를 봉승으로, 통어랑을 통봉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실록 자료를 보면 사약과 사알, 좌·우반전직, 내알자, 내반종사 등의 관직이 확인된다. 1457년(세조 3) 사알과 사약 각 1자리[窠]씩 감축하는 한편 부사약·공봉·알자·좌반전직·내반종사 등을 추가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일부 내용이 개정되어 수록되었는데, 정6품의 사알·사약 각 1명, 종6품 부사약 1명, 정7품 사안 2명, 종7품 부사안 3명, 정8품 사포 2명, 종8품 부사포 3명, 정9품 사소 6명, 종9품 부사소 9명 등이었다. 이 가운데 7품 이하는 별감(別監)이라 통칭되었다.
이들은 궁궐 내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세자궁 등에 배속되었는데, 대전에는 사알 2명, 사약 3명, 서방색(書房色) 2명이 배속되었고, 중궁전에는 사약 2명, 세자궁에는 사약 2명이 배속되었다. 사알과 사약·서방색은 2번(番)으로 나누어 근무일수 600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주고 정6품이 되면 그치며, 7품 이하인 별감의 경우 역시 2번으로 나누되 근무일수가 900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 주되 종7품이 되면 그 직(職)에서 떠나도록 규정되었다.
액정서의 직무는 관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사알은 궐내에서 왕명의 전달과 알현 등의 일을 담당하였고, 사약과 부사약은 궁궐문과 궐내 각 문의 자물쇠를 관장하였으며, 사안과 부사안은 가례(嘉禮) 등 궐내 각종 의식에 설치되는 어좌(御座)나 향안(香案), 책안(冊案) 등의 설치와 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사포와 부사포는 궁궐 내정에서의 설비 시설을 담당하였고, 사소와 부사소는 궁궐 내 청소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액정서 소속 관원은 주로 궁궐 내에서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1484년(성종 15)에는 액정서 소속 관원 밑에 중금(中禁) 40인을 두도록 하고 이들을 4번으로 나누어서는 조하(朝賀)·조참(朝參) 및 동가(動駕) 때에 엄(嚴)을 전하는 것과 방방(放榜) 때에 전창(傳唱)을 하고, 거둥 때에는, 문 안에서는 별감 앞에서 수가(隨駕)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이들의 복식에 대한 규정도 마련되어, 자적관(紫的冠)·도금토환(鍍金吐環)·오색사문직대(五色絲文織帶)·은이환(銀耳環)에 겉옷은 자적단령(紫的團領)을 착용하고, 속옷은 여름에는 일편초록사겹비개(一偏草綠紗裌飛介)를, 겨울에는 필단(匹段)을 쓰게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1월 23일).
액정서는 내시부의 잡직 관서로, 항상 국왕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비록 잡직이고 품계는 낮지만 권력이 따르면서 이로 인해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왕명의 전달을 맡은 사알의 경우, 내시부 소속 승전색의 명령을 받아 왕명을 전하거나 혹은 국왕이 직접 명해 명령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간혹 지체되는 우려가 있어 단속하는 경우도 있었다(『중종실록』 36년 6월 1일).
특히 연산군 때 국왕은 조정의 정상적인 행정 계통을 무시하고 액정서 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거나 처리하도록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으며(『연산군일기』 11년 7월 17일), 이를 위해 별도로 추비전패(追飛電牌)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는 또한 새로이 사활(司活)과 사권(司券)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액정서에 소속시켰다. 이들 관직은 아마도 중종반정 이후 혁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이들에 대한 견제가 계속되었다. 이는 액정서 및 소속 관원들을 국왕의 사인(私人)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공론 정치 및 공개 정치를 지향했던 사림들은 정상적인 행정 계통을 통한 명령의 집행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액정서를 통한 왕명의 전달은 사적인 경로라고 말하며, 이들을 명령 계통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액정서의 모든 일은 승정원에서 관장하도록 하였고(『인조실록』 3년 7월 11일), 1776년(정조 즉위) 3월에는 즉위 직후 이전의 내시와 액정서 소속 108자리[窠: 한자 중복 삭제]를 모두 줄이고 궁인도 줄였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5일).
조선후기에는 이들의 작폐가 끝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1776년에는 액정서 소속의 하례들 가운데 작당하여 시민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자를 경중을 분간하여 혹은 형벌을 가하고 혹은 형장을 가하여 여러 도에 분산하여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9일). 그러나 이런 작폐는 끊이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4. 궁녀
효종 이후부터 궁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양인 출신을 선발하기 시작하는데, 영조 이후로 가면 별감 집안 출신 궁녀들이 궁녀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혜경궁부터 왕세자 보좌 궁녀가 별감 집안인 건 당연하다고 했으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보좌하던 별감 홍계훈이 자기 누나라고 속이는 게 가능했던 것도 별감 집안 출신 궁녀가 조선후기로 가면 주류층이 되었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외국인들도 별감 집안 출신에서 궁녀를 선발한다고 기술한다.
참고로 희빈 장씨는 잡과인 역관의 딸이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말하면 궁녀 중 가장 높은 신분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구한말로 가면 완전히 사회제도가 붕괴되어 양반 출신까지 나타나지만 그건 당시 시대의 특수상황이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