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역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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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수원화성의 세계유산 등록에 공헌
4. 바깥고리


1. 개요


華城城役儀軌.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 1월부터 동왕 20년인 1796년 8월까지 총 2년 8개월간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10권 10책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박물관, 연세대학교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수원화성이 축조되던 1790년대 당시 정조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에게 화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편찬할 것을 명령하여, 이에 1796년 11월에 최초 완성한 것이다.
당시 축성 과정에서 사용된 각종 공사법과 성을 공략할 때 사용될 각종 무기들에 대한 대응 방안, 공사에 사용된 각종 기자재의 상세한 모습과 사용 방법, 축조 과정에서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일지, 각 담당 관청들의 명칭과 관원들의 이름, 왕인 정조의 윤음 및 각종 전달문과 전달 사항문, 현장에서 왕 및 관련 관청에 올렸던 각종 보고문 및 장계, 축조 과정에서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2년 8개월간의 공사 기간 중 있었던 모든 내용들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 기술이 매우 자세한데 건물의 격자 하나하나가 가진 모양이나 축성에 사용된 재료를 어느 지방에서 출처하여 공수해왔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있으며, 심지어 건설 과정에 참여한 기술자 석수(石手) 642명, 목수 335명 및 기타 일반 백성들의 명칭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3. 수원화성의 세계유산 등록에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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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전세계인의 문화 가치 자산이 되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유네스코가 수많은 동아시아의 성 중에서[1] 수원화성을 세계유산으로 결정한 데에는 수원화성 자체가 가진 문화적 가치 뿐만 아니라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를 통해 수백여년 전의 성을 100%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 가능하다는 사실에 심사위원들이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타국에는 이런 기록들이 매우 희귀한 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유명 영화 제작자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제작할 당시 자신의 영화에 영감을 줄 만한 일화를 찾고자 전국 시대 관련 사료들을 모두 찾아 뒤집어 보았지만 관련 민간 자료가 거의 없고 내용도 부실하여 반쯤 내용을 창작할 수 밖에 없었음을 한탄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근현대 격변기 당시 본토에 전화()를 거의 겪지 않아 고전 사료들이 소실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는 일본에서조차 정치사를 제외한 이런 미시사적인 고전 민간 사료들은 매우 부족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건축물들 또한 자세한 설계도 같은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오사카 성 같은 유명 건축물들도 실제로는 몇몇 글 또는 그림 자료에만 의지하여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한 후 현대식 철근에 시멘트로 회칠한 것들이어서 시대에 맞지않는 양식이 섞여있다는 비난을 듣는 경우가 많다.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성곽 벽돌 하나하나마다 1700년대 당시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100% 복원이 가능한 유일한 성이었고 이것이 유네스코 전세계 심사위원들을 경악케 한 것이다.

4. 바깥고리



[1] 동아시아에 있는 수 많은 성 중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은 중국만리장성일본히메지 성등 소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