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와 더불어 '''일본 영화계의 4대 거장'''#[2] 으로 꼽히는 감독이며, 일본 영화계 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계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영화 감독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거장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세계 영화계의 거장이다.[3]
2. 생애
2.1. 출발과 전성기
1910년 일본 도쿄 근교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화가를 지망하여 한때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4] 26세에 화가 생활을 접고 [5] 오늘날 토호(東宝) 영화사의 전신인 P.C.L 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영화 감독의 경력을 시작했다.
1943년 흑백 영화 스가타 산시로를 통해 영화 감독에 데뷔하였다.[6] 이후 주로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다룬 《가장 아름다운 자》(1944년), 《우리 청춘 후회 없다》(1946년) 등을 제작하며 토호의 간판 감독으로서 활약했다. 그 후 토호가 공산당 계열의 노조로 인해 노동쟁의가 일어나자 토호에서 퇴사하고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영화예술협회'를 설립, 다이에이 등 타사에서 영화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에이와 함께 1950년에 만든 영화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였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대해서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배우 미후네 토시로 배우와 만났다. 야마모토 가지로의 영화에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떨어진 미후네를 보고서 소위 필이 꽂힌 구로사와가 야마모토를 적극 설득해서 캐스팅했으며 1948년 자신의 영화 《주정뱅이 천사》에 미후네를 캐스팅하여 스타의 반열로 밀어 올렸고 이후 구로사와와 미후네는 찰떡 콤비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 미후네가 주연으로 활약하였으며 구로사와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영화 《7인의 사무라이》가 개봉.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으며 단순히 한 영화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이후에도 그 아우라를 드리운 작품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의 이후 작품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났으며,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1957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일본풍으로 바꿔 만든 《거미집의 성》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1958년에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만들어 흥행 성공. 이 성공 이후 아예 독립 프로덕션인 '''구로사와 프로'''를 설립하고 1961년 《요짐보》, 1962년 《천국과 지옥》 등을 만들며 대감독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다만 이 독립 프로모션은 사실 구로사와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서 단물만 빼먹고 싶었던 토호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제작 예산이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돌자 토호는 구로사와에게 제작비 초과에 따른 리스크를 떠넘기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 설립을 유도한 것. 결국 1965년 개봉한 《붉은 수염》이 촬영 기간과 예산의 대대적인 초과로 인한 불협화음을 빚고 원래부터 계산적이었던 양자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2.2. 굴곡과 재부상
이 무렵 할리우드에서 감독직 제안이 들어오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미련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폭주 기관차》의 감독을 맡아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 각본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구로사와가 각본을 뜯어고친 데다가 흑백 35mm 촬영을 원한 미국 프로듀서와 컬러 65mm 촬영을 원한 구로사와와의 갈등으로 결국 영화제작이 무산되었다.[7] 1968년에는 미일 합작으로 진주만 폭격을 다룬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총감독을 맡았지만 미국측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사, 일본 측 제작사인 토에이 영화사와 촬영 일정 등의 문제로 대립했고 결국 감독에서 강판되고 말았다.[8] 이때의 정신적 타격에다 다른 여러가지 문제들이 겹쳐 1970년에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구로사와처럼 이미 대감독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감독 역시 5년에 한 편이나 영화를 내놓을수 있을까말까할 정도로 여건이 열악해졌다. 이에 그는 1975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 일본 합작 영화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의 제작을 주도하고 감독을 맡았고, 이 영화로 1975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금 게오르기상(대상)과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9] 이후 구로사와는 해외 자본을 끌어와 영화를 만드는 합작영화 제작방식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여러 작품들을 만드는데 1980년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구로사와에게 제작비를 조달해 준 대작 《카게무샤》(당시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 달러가 투입)가 26억 엔의 수익을 올리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10]
2.3. 말년
1985년에는 프랑스와 합작하여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일본풍으로 각색한 영화 《란》을 제작, 이 역시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워너브러더스가 제작을 맡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프로듀서를 담당한 영화 《꿈》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이후 80대에 접어든 90년대에도 《8월의 광시곡》[11] , 《마다다요》[12] 를 연출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차기작 '바다는 보고 있었다'와 '비 그친 후'의 각본을 집필하던 중 교토의 여관에서 골절에 따른 부상으로 요양생활에 전념하다 뇌졸중으로 인해 1998년 9월 6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제작 스타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었는데 일례로 초기의 걸작인 《라쇼몽》도 열명 가량의 배우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영화 제작에 드는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선 그는 아래에도 서술하는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제작 방식을 고수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에 따르면 1.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연출로 유명하고, 2. 몇 개월에 걸쳐 진행하는 배우들의 연기 리허설은 물론, 3.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기시키면서 연출 의도에 따른 적절한 날씨를 며칠씩 기다리기도 했으며, 4. 카메라가 찍히지 않는 곳까지도 세심하게 디테일에 신경썼던 건 기본. 거기다 말을 빌리지 않고 몇 십 마리를 통째로 구입해 장기간 다시 조교하고 사용했다든가 촬영지의 민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예산으로 사들인뒤 철거를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 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 촬영한다는 멀티캠 수법까지도 사용했다.
이들 모두 돈이 무수하게 들어가는 일로 7인의 사무라이 이후 블록 버스터급 영화들의 제작비는 예산 초과는 기본이었고 이에 일본 내에서 제작비를 조달하기 어렵자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 나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에 관련된 일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의 손으로 고지라 영화를 만들고자 평생 스폰서를 구했지만 실패했다.[13] 그 발단은 어떤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감독님도 한번 고지라 같은 거 찍어보시면 어때요?"라고 농담삼아 묻자 구로사와는 "한번 만들어볼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토호의 촬영소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 씨가 진지하게 고지라를 만들면 토호가 망할지도 모른단 말야!"라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줬다고 한다.(고지라는 토호가 판권을 가진 작품이다.)
한편 영화 제작의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특수촬영(특촬)에 대해서는 심드렁했다. 상술한 토호의 '고지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토호의 장기였던 미니어처 세트 촬영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란》과 《꿈》에서는 미니어처 세트 촬영과 특촬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거장이긴 했지만 카게무샤가 대박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 영화계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제작비와 규모가 너무 커서 일본 영화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게무샤의 경우도 결국 미국에 건너가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도움으로 20세기 폭스사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완성되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나타나 거액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하는 두 거장에게 구로사와가 놀라서 이유를 묻자 '''"헤헤 우리가 님 팬인데 다음 영화 나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라고 답했다고. 그 덕분에 일본영화 개봉 금지 시절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미국 영화(?)로" 개봉하려고 한 바 있었다. 그러다 무산되고 결국, 일본영화 개방 후 국내 정식개봉된 두 번째 일본영화(1998년 12월)가 되었다. 원래 첫 개봉작으로 예정되었으나, 프린트를 다시 뜨는 작업에 시간이 걸려 버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HANA-BI'에 최초개봉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영화적인 완성도나 인기는 카게무샤 쪽이 더 높지만 정작 감독 본인은 후속작인 란을 위한 서막 정도로 생각했다고. 실제로 두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나 허무주의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란 쪽의 테이스트가 너무 지독해서 문제지만…[14]
4. 평가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 영화사에서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 전개 방식과 영화적 테크닉을 만들어낸 거장이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여러 명의 히어로가 동일한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친다는 서사 구조를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며, 《라쇼몽》에서는 그 이전까지 과거 회상의 기능으로만 사용되었던 플래쉬백이라는 영화 테크닉을 영화사상 처음으로 개별적인 인물들이 자기 입장에서 주장하는 주관적인 스토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요짐보》에서는 정의로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써 '안티 히어로'라는 캐릭터성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70~80년대의 할리우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유산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미국 영화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15] 뉴욕 대학교 영화과에서는 감독의 이름을 딴 감독론 수업이 단 네 개만이 개설되어 있는데, 그 네명의 감독이 알프레드 히치콕, 존 포드, 루이스 부뉴엘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영상의 회화적인 미학성'''으로 꼽히며 특히 독특한 색채와 구도의 시각적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서양화가 생활을 한 경력 덕인지 그의 영화에는 화면속의 운동감, 회화적인 색채감, 구조가 매우 뛰어나다. 기타노 다케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아무 장면이나 정지시켜 놓아도 그 자체로 완벽한 사진이 된다고 감탄하기도 했으며, 로버트 알트만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움직임과 구도는 나에게 클래식 음악의 베토벤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적절한 몽타주,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 역시 특징으로 특히나 《쓰바키 산주로》, 《천국과 지옥》에서 보여준 자연물을 통한 인물의 성격, 내적인 심리 변화, 상황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연출이나 뛰어난 운동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그의 영화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휴머니즘 의식이다. 순수함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낌없이 드러나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가. 예를 들면 《라쇼몽》같은 경우 끝없이 비극적인 상황을 펼쳐주다 마지막에 이르러 희망적인 낙관을 하게끔 만드는 엔딩은 그 백미로 꼽히며 소위 시대극에 있어 매우 독특한 서사구조를 남겼다. 물론 이는 비단 시대극뿐만 아니라 현대물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세대간의 갈등, 반전 영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또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어느 문학 작품 못지 않게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살다》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어느 말단 공무원이 이야기라던가, 《카게무샤》에서 타인을 흉내내다가 정작 자신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모습 등에서 쿠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할리우드의 감독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어, 그에게 깊이 감명받았음을 항상 언급했던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를 만들면서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스토리를 거의 베끼다 싶히 했으며,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캐릭터나 오프닝, 엔딩 등에서 숏을 그대로 따올 정도로 표현하며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외에도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의 전철 장면은 구로사와의 《천국과 지옥》의 기차 시퀀스를 참고했다고 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에서 《거미집의 성》의 한 장면을 따라했고, 레이더스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이는 장면을 《요짐보》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컬러 부분은 《천국과 지옥》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신 중 자신의 팔이 절단 된 팔을 들고 있는 남자의 샷은 《란》의 전투신에서 여짐없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미국평론가 로저에버트가 언급, 아울러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전투신 중에 활을 당기는 장면을 《7인의 사무라이》에서 활을 당기는 장면에서 따왔다고 하며,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여러 장면들이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인용되어 온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으로 오면 조스 웨던이 어벤져스를 감독할 때 《7인의 사무라이》를 '''당연히''' 참고했다고 한다.[16]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세르조 레오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무단으로 표절하여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효시로 평가받는 데뷔작 《황야의 무법자》[17] 를 만들기도 했다. 세르조 레오네는 《황야의 무법자》가 《요짐보》를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은 무단 번안이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컷바이 컷으로 도장 찍듯이 베낀 수준이었기에, 말썽이 되자 결국 흥행수입의 15%를 구로사와 감독에게 주고 구로사와는 이 영화가 리메이크라는 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18] 여담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영화관련 사이트 nKINO에서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쓴 세르조 레오네 관련 칼럼에 따르면 구로사와가 《황야의 무법자》를 본 뒤 세르조 레오네에게 "당신의 영화를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영화더군요."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 편지를 받은 레오네는 환호하면서 주변인들에게 "구로사와가 내 영화를 재밌게 봤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칼럼에 따르면 결국 표절 판결이 난 뒤 흥행 수입의 15%가 아니라 《황야의 무법자》의 아시아 배급권을 넘겨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며 여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구로사와가 《요짐보》로 번 돈보다 《황야의 무법자》로 번 돈이 더 많았다는 안습한 후일담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요짐보》는 이후 월터 힐 감독의 《라스트맨 스탠딩》을 통해 정식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한편 《7인의 사무라이》도 존 스터지스 감독의 서부극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영화연구자들은 서부극의 역사는 존 포드의 정통 서부극에서 시작되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를 거쳐, 세르조 레오네의 수정주의 서부극(소위 말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다만 세계적인 거장임에도 정작 일본 내에서는 그 독선적인 스타일 때문에 여러 영화 관계자와 마찰을 빚었으며 당시 영화 제작자나 감독에 대한 낮은 인식도 한몫하여 상당히 무시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하던 인물[19] 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영화 관련 기구가 그를 부정적으로 보며 해외 영화제 시상을 딴지걸던 일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1950년대 《라쇼몽》이 비평에서 대박을 거두고 《7인의 사무라이》가 흥행과 비평으로 세계적 대박을 거둘 때조차도 그는 제작자들에게 별별 모욕을 다 당했는데 일례로 《라쇼몽》 같은 경우 제작사인 다이에이의 대표 나가타 마사이치가 계속 제작비를 아끼라며 끼어들고 영화 내용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며 악평만 늘어놓는 통에 스스로 제작을 포기하려다가 참았으며,[20]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도 '''"(나가타)저 놈을 확 두들겨 패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라쇼몽》은 등장인물이 10명도 안 되고, 배경도 한정한 나름 저예산 영화였다. 그런데 항상 구로사와를 혹평하던 나가타는 정작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타자, "내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 라는 투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데 바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연히 구로사와의 기분은 아주 나쁠 수 밖에 없었고... 이외에도 《7인의 사무라이》 역시 제작비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어서 매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쪽은 제작자들이 아주 "당신 영화계에서 아주 매장시킨다?"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하면서 끼어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게다가 목과 손목을 그어 자해하며 자살 파동을 일으킬 당시, 일본의 극우파 중 일부에게도 정신나간 감독이라고 억울하게 까이기도 했었으며 이후 한동안 해외 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 때도 일본 영화계에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1990년에 그와의 인터뷰를 게재한 한국의 월간 영화잡지 로드쇼 기사에 의하면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감독님이신데 일본에서는 뭔가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라는 질문에 '''"해외에서만큼, 아니 그 절반이라도 일본에서도 인정했더라면 더욱 좋을 텐데 말이죠."''' 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이다.[21]
다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런저런 불만과 달리 실제로 그가 일본 국내에서 거장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76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85년에는 영화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비록 사망한 이후에 받기는 했지만 국민영예상(1998년에 14호)을 수상하는 등, 일본 국내에서도 거장으로서의 대우를 꾸준히 받은 영화 감독이었다.
구로사와는 아시안위크와 CNN이 선정한 '예술문학문화' 부문에서 ''''세기의 아시아인''''으로 선정되며 20세기에 아시아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다섯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5. 그에 대한 말들
'''구로사와 아키라는 우리 시대의 그림이 포함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구로사와는 영화의 진수 중 하나였다. 비전을 강력한 예술 작품으로 바꾸는 그의 능력은 비할 바 없다.'''
''''거인'이라는 용어는 예술가를 묘사하는 데 너무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이 용어가 들어맞는 드문 예 중 하나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들의 알려져 있는 걸작 하나를 가지고 있다. 구로사와에게는 적어도 8개나 9개가 있다.'''
''''펠리니, 구로사와, 부뉴엘은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필드에서 있다. '''
6. 일화
6.1. 출연 배우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에는 대개 주성치 사단처럼 같은 배우가 계속 나왔다. 상술한 대로 그의 페르소나로 불린 미후네 토시로(16작품)가 그 필두로 보통 미후네는 건달 깡패 떠돌이 사무라이 등 강자 역할을 맡으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한편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7인의 사무라이》와 《살다》에서 명연을 펼친 시무라 다카시로 무려 21작품이며 그는 보통 스승, 지도자, 나약한 인간을 맡았다. 이외에는 《백치》, 《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와 《라쇼몽》의 모리 마사유키나 초중기작품 모두에서 주요 조연을 맡은 지아키 미노루, 히다리 보쿠젠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참조.
6.2. 기행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관련 기행은 거미집의 성 등 일본에서 활동하던 적에도 유명했지만 할리우드 진출작인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극에 달했다.[22]
-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일본 최대 화학회사 사장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역을 맡기고, 마찬가지로 연기 경험이 없는 저명한 일본인 사업가 15명을 주요 배역에 캐스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자본가들에게 대가로 제작비를 투자받기 위해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모든 실내 장면에 대한 촬영은 오후 4시에서 자정 사이에만 해야했다. 또한 모든 스태프들은 본 영화의 제목이 쓰여진 맞춤복과 해군모를 착용해야하며, 배우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해야 했다.
- 전함 내부에 칠한 흰색 색조가 마음에 들지 않다하여 24시간 분량의 촬영물을 폐기하고, 전 스태프들에게 오후 동안 다시 색칠하라 지시했다고 한다.
- 또 한번은 슬레이트[23] 를 치는 스태프의 머리를 말은 종이로 때렸고, 이를 말리는 조감독을 구타하고서 조감독에게 전 스태프의 머리를 때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감독이 거부하자 그를 해고시켰고, 이에 경악한 영화사 관계자들이 찾아와 구로사와를 질타했다.
- 이렇게 스태프들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영화사에서도 압박을 가하자 보디가드, 철모, 방탄 리무진을 요구했고, 실제로 얻어내서 타거나 대동하며 다녔다. 이에 더해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다고 생각해 차를 탈 때는 항상 시트 아래로 몸을 구부리며 다녔다. 이에 영화사 관계자들은 정신과 의사를 보내어 진정제 수십 알을 처방시켰다.
- 크리스마스 며칠 전, 새벽 2시에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스탠리 골드스미스를 호출해 전 스태프를 해고해달라 요청했으나, 잘린 것은 구로사와였다. 언론에는 피로 누적으로 인해 강판되었다고 발표되었으며, 구로사와가 '도라 도라 도라'를 촬영한지 23일째 되던 날이었다. 덤으로 구로사와의 23일에 걸친 촬영분 중 단 8분 만이 영화에 실렸다.
- 《거미집의 성》의 마지막 씬 촬영을 할때 실감나는 연출을 위해 주연 배우 미후네 토시로에게 진짜로 화살을 쐈다. [24] 그 탓에 미후네는 그 장면에서 정말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트릭으로, 사전에 화살을 낚시줄로 고정해서 날아가는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미후네 토시로가 진짜로 화살에 맞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후네 토시로는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고 결국 '실감나는 연기'를 해버렸다. 촬영이 끝난 후에 미후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일단은 참고 귀가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촬영시의 생각이 떠오르자 술김에 산탄총을 들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자택에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당시 사건은 도호에서 유명한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도 법정 싸움이나 그 이상의 상황까지는 번지지 않았고, 후에 화해했다.
사실 이 자체는 촬영상의 6.3. 《8월의 광시곡》 논란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Rhapsody In August, 1991년)은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평가들과 평화운동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다. 덧붙여서 이 영화는 1991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그 어떤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25] 이 영화의 줄거리는 나가사키의 피폭자 친척을 일본계 미국인(리처드 기어 분)이 방문하여 미군의 잔인한 원폭투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일본인 피폭자들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피해자처럼 묘사한 반면, 전쟁의 원인이나 일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만 보면 미국만 나쁜놈이고 일제는 그런 미국을 용서해주는 대인배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 영화의 1년 전에 개봉한 전작 《꿈》에서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 2차 대전 당시 옥쇄를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죄다 죽게 하고 홀로 살아남은 장교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하들의 원령이 나타나 절규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장교가 울면서 사죄하며 "미안하다! 전쟁을 일으킨 우리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어 한국 비평가와 관객들에게서 충격과 공포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본인 역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 이 엄청난 돌변에 당시 한국 영화기자가 인터뷰에서 "《꿈》을 만들고 극우파에게 살해협박이라도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나요?"라는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정도.[26]
다만 이 영화에 대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전쟁은 정부, 국가들 사이의 것으로 민중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6.4. 황당한 청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이 짙어지자 일본인들은 집단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여자친구인 야구치 요코(여배우)에게 청혼했는데 그 청혼문이 뭔가 대단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은 결혼. 이후 집단 자살도 없었고 부부는 39년을 해로했다."일본이 패전할 것 같다. 만일 일본 국민 전체가 집단 자살해야한다면, 우리 역시 죽어야해. 죽기 전에 결혼생활이 어떤지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6.5. 관동대지진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집안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집은 무너져 내렸고, 혼란 중에 그가 살던 마을에도 조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루머가 돌아 집집마다 보초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구로사와의 형은 비웃음을 보내며 보초에 나가지 않으려했기에, 어쩔 수 없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죽도를 들고 보초로서 나갔는데, 엉뚱하게도 고양이 한마리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하수관에 조선인들이 드나들 수 있다는 이유로 보초로 배치되었다.
하루는 어른들이 마을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탔다며 그 증거로 흰색 분필로 휘갈겨 놓은 낙서를 지목했는데, 그것은 당시 13살이던 구로사와가 별 이유없이 장난으로 쓴 것이었다고.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결성된 자경단은 수염을 기른 사람[27] 을 무조건 조선인으로 지목하고 뒤쫓았는데, 구로사와의 아버지도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일가족이 미친 자경단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로사와의 형은 무리를 비웃고 있었고, 어린 아키라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들을 에워싼 무리를 향해 '바보자식들!' 이라고 호통치자 어리둥절한 자경단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고 한다.
이 유년시절 기억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28]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7. 여담
- 참고로 이름의 청탁음을 확실히 구분한 표기는 쿠로사와 아키라지만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라 구로사와로 표기하며 이는 당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모든 작품에도 공통된다.[29]
- 고기를 무척 많이 먹는 식습관이 있었고 그 육식 체질에 기타노 다케시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기타노에게 "식사는 밸런스가 중요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야채나 과일도 먹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의미였다고.(…) 고기를 자주 먹는 서양의 식사와는 달리 고기를 적게 먹는 일본의 식사 문화의 입장에서는 진보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성 때문인지 1910년대 출생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182cm#의 엄청난 거구였다. 본 문서에도 실린 아카데미 영화제 공로상 시상식에서 루카스, 스필버그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보자면 그 덩치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다수.
- 술도 엄청나게 마신 애주가였다. 이에 관련된 일화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일본에 방문해서 구로사와를 만났을 때 그가 웬일로 술을 안 마셔서 그 이유를 묻자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더 이상은 안돼요!' 라고 신호를 보낸 탓에 어쩔수 없이 끊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도 있다. 젊었던 시절에는 워낙 말술을 마시는 탓에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가 취한 듯 보이면 도망쳐 버리고 대신 다른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붙들려 고생 좀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 미야자키 하야오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통해 알고서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장녀 구로사와 가즈코의 말에 의하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고 하며, 미야자키의 작품들 중에서는《이웃집 토토로》를 제일 좋아했다고.[30] 다만 《반딧불이의 묘》를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착각해 찬사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미야자키가 일순 굳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1] 한편, 일설에 의하면 '미야자키가 실사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그가 없는 자리에서 한 적도 있다고 한다.[32]
- 대한민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영화를 재밌다면서 즐겨보곤 했다고 한다. 각기 한일 양국 영화계에서 거장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다. 1990년 월간 로드쇼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임권택 3대 걸작'을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다라와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이 바로 그것이다.
-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랑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둘이 술을 마시면서 7인의 사무라이 주제가를 합창할 정도였다고.
- 서양권으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영화감독답게 타임지 아시아판이 2006년에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60년간 아시아의 영웅 65명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7인의 사무라이나 라쇼몽, 거미집의 성 등을 본다면 자막판을 추천한다. 일본인들도 제대로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는 평이 많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름이 오랜 기간 열화되어 그렇다거나, 대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의도적인 장치라는 설도 있지만 영화 개봉 당시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깨끗하게 소리를 입힐 수 있는 후시녹음을 택하지 않고, 일부러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동시녹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감독의 성격을 보았을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 일본 영화 최초로 극중에 재즈를 삽입한 감독이다. 해당 장면은 1948년작 '주정뱅이 천사'에 나온다.
-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년기 감상한 영화들 #
- 2020년 PS4로 출시되는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흑백 모드 플레이는 '구로사와 모드'란 이름이 붙여졌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공식 허가를 받고 이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 세가타 산시로라는 캐릭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를 패러디했다.
8. 필모그래피
제목 번역은 모두 국내 개봉명 혹은 수입명을 따른다. 다만 공동 감독을 맡았으나 후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한 明日を創る人々(미국 개봉명 Those Who Make Tomorrow)의 경우 국내 번안 제목이 확인되지 않아 임의 번역으로 기재한다.
[1] 그래서 미국 영화계의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감독이란 20세기에 남은 유일한 중세 유럽의 왕 같은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영화계의 천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 영화계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별칭은 한편으로는 촬영 현장에서의 독재자스러운 모습을 비꼰 것이기도 했지만, 원래 구로사와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중에는 촬영 현장에서 독재자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감독들이 많다. [1][3]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앨런 (우디 앨런은 '리어왕'을 영화로 옮긴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보고 나서 "셰익스피어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구로사와밖에 없다."고 평한 바 있다.#),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로버트 알트만 등등, 전세계의 수많은 거장들로분터 존경받고 있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4]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 1928년에는 일본의 미술가 단체 중 하나인 이과회(二科会)에서 개최한 이과전(二科展) 회화 부문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 프롤레탈리아 미술가 동맹에 참여했는데 이 때 프롤레탈리아 화가이자 서양화가인 오카모토 토키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5]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고, 취미+스토리보드용으로 계속 그렸다. 감독으로써 명성이 생긴 이후로는 그의 그림이 영화 포스터에 쓰이기도 할 정도. 화풍은 본인이 좋아했던 빈센트 반 고흐를 위시한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6] 이 영화는 흥행에서 대히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영화 전문 잡지 '영화평론'에서 실시한 1943년도 우수 영화 전형에서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평단의 호평도 받았다.[7] 후에 이 영화는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감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줄거리는 두 죄수가 탈옥을 감행하여 기차에 올랐다가 그 기차가 폭주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을 다루는데, 구로사와는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기차가 폭주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점차 인물들의 사정이 밝혀지는 구조를 원했었으나 안드레이 감독의 손으로 완성된 영화는 그냥 두 죄수가 탈옥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따라간다.[8] 이후 구로사와 대신에 투입된 일본 쪽 감독은 한국에서는 《배틀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다.[9] 다만 외국어 영화상 수상국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 받았다.[10] 카게무샤의 배급 수익은 당시 일본 영화 역대 1위를 기록했다.[11] 이 영화는 그 내용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12]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유작이며, 일본 작가 우치다 햣켄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13] 이 일화는 로버트 슈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에서 고릴라로 오역되었지만 그 일러스트는 누가봐도 고지라이므로 고지라를 잘못 번역한 것이 확실하다.[14] 란은 인간성을 처참히 부정하는 배드 엔딩으로 끝마치는 영화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보다도 인간성을 더 비관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15] 70~80년대에 할리우드의 두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미국의 영화감독들은 젊은 시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매료되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공부한 세대다.[16] 출처 글 두 영화 모두 서로 다른 여러 인물이 한데 모여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어벤져스를 7인의 사무라이의 히어로 버젼이라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17] 그래서 흔히 《황야의 무법자》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표절작이라고 부른다.[18] 단, 일각에선 구로사와가 동의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9] 일본의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진정한 일본인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다면서 구로사와 아키라를 다른 일본 감독들과 비교해서 깎아 내리기도 했다.[20] 나가타는 라쇼몽 시사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21] 다만 해외에서 인정받은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조차도 생전에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은 수상작은 커녕 후보작조차 내지 못했다. 아카데미상의 경우 20세기에는 외국어 영화에 작품상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백인 영화 감독들이 만든 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傾倒)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2] 사실 구로사와는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과의 공동 프로젝트인 줄 알고 승락한 것인데 막상 와보니 데이비드 린은 구로사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고, 애초에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무관계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구로사와는 사기 계약에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23] 촬영 시작, 종료를 알리는 소품[24] 당시 촬영 장면을 보면 근거리에서 스태프들이 직접 화살을 쏜 것으로 보인다.[25] 다만 해외에서의 혹평과 달리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작품상, 우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그럭저럭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26] 당시 한국의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도 1990년 칸 영화제 특집 기사 때 구로사와의 영화 꿈에 대해서 엄청 크게, 호의적으로 기사를 실어 주었던 거랑 달리 8월의 광시곡에 대해서는 비판 일색의 기사를 내보냈다.[27] 당시 조선인들은 대부분 면도를 하지 않았다.[28]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 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29] 간혹 구로자와라고 표기하는 매체가 있지만, 구로사와가 맞다. 여담으로 같은 성을 쓰고 있는 영화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30] 이웃집 토토로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0선에도 포함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유일하다.[31] 참고로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이었다. 물론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긴 하다.[32]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해 구로사와의 발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가 실사 영화와 비교해서 애니메이션을 낮잡아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은 구로사와의 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33]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스토리라인을 이 영화에서 대부분 가져왔다.[34] 직역하자면 "아직이야"란 뜻인데 숨바꼭질에서 "아직 다 안 숨었다."라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