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사무라이
1. 개요
1954년 4월 26일에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로 상영시간 207분의 흑백 영화이다. 작중 시대적 배경은 센고쿠 시대로 추정된다.
2. 등장인물
2.1. 7인의 사무라이
- 시마다 칸베에(島田勘兵衛) (배우: 시무라 타카시)
7인의 사무라이의 대장. 과거 한 성의 성주였지만 전쟁에서 패하고, 섬기던 다이묘도 멸망했는지 작중 시점에서는 나이든 낭인 신세이다. 하지만 군략에 탁월하고, 노련한 무술 솜씨와 탁월한 식견 그리고 인후한 품성을 지닌 문무겸비의 사무라이로 묘사된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추정된다. 극 초반에 강도에게 잡힌 아기를 구하기 위해서 머리를 삭발하고 승려로 위장했으며, 때문에 영화 내내 삭발한 상태로 등장한다. 곤란하거나 고민할 때 삭발한 머리를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다.
- 시치로지(七郎次) (배우: 카토 타이스케)
7인의 사무라이 중 부관격 인물로 과거 칸베에를 모시던 가신이었다. 그러나, 칸베에가 몰락하면서 같이 낭인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칸베에를 탓하거나, 신세 한탄하지 않으며, 여전히 칸베에의 충실한 부관으로써 살아간다.
- 하야시다 헤이하치(林田平八) (배우: 치아키 미노루)
7인의 사무라이 중 분위기 메이커로 소탈하고, 익살 맞은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로 밥값 대신 장작을 패주다 밥을 미끼로 한 칸베에에게 낚였다. 실력 자체는 낚은 고로베에부터가 뛰어나지 않다 평하나, 특유의 성격 덕에 주변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지녔다.
- 가타야마 고로베에(片山五郎兵衛) (배우: 이나바 요시오)
7인의 사무라이의 일원으로 실력과 감이 뛰어나 칸베에의 시험[1] 을 가볍게 통과한다. 작중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개성이 약해 비중은 적으나, 칸베에처럼 인품이 선하며 군략에도 어느정도 지식이 있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 오카모토 카츠시로(岡本勝四郎) (배우: 기무라 이사오)
7인의 사무라이 중 막내로 아직 성년식을 치루지 않은 10대 중후반의 청년이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혈기가 앞서는 면이 있으나, 근본은 성실하여 칸베에와 같은 무사에게서 배움을 얻고자하여 쫓아다닌다. 그 때문에 자연스래 도적 토벌 부대에 합류하게된다.[2]
- 큐조(久蔵) (배우: 미야구치 세이지)
7인의 사무라이 중 최고의 칼솜씨를 지닌 인물로 과묵, 냉철해보이지만 속은 다정하다. 수련을 위해 세상을 방랑하던 인물로 시비가 붙은 인물을 단번에 제압한 것이 눈에 띄어 칸베에에게 영입 제의를 받으나 거절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칸베에들이 머무는 숙소에 찾아와 토벌 부대에 합류한다. 영화의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캐릭터 모티브는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한다.
- 키쿠치요(菊千代) (배우: 미후네 토시로)
7인의 사무라이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로 불분명한 과거[진실] 와 사무라이답지 않은 난폭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매우 긴 칼을 어깨에 걸치고 다니며 무사에 관한 정식 교육을 배운 적이 없기에 뭘 하던간에 어딘가 어설프지만 힘 하나는 장사다. 첫 등장부터 술에 취해서 나타나더니 대뜸 토벌대에 합류하겠다며 날뛰다가 알아서 골아떨어진다. 이후 멋대로 토벌대를 따라가다 결국 칸베에의 마음에 들어 어찌저찌 토벌대에 합류한다. 칸베에 다음으로 준 주인공급의 비중을 가진 인물로 포스터에도 칸베에 다음으로 크게 묘사된다.
2.2. 마을 주민
- 리키치
마을 주민 중에서 가장 비중이 많은 인물. 아내를 도적떼에게 빼앗겼으며 이를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두고 있다. 사무라이 중에서 헤이하치와 특히 접점이 많다.
- 요헤이
초반에 리키치와 함께 사무라이들을 찾으러 나간 주민들 중 하나. 훈련을 받을 때와 도적떼와 싸울 때 보면 죽창으로 무장한 다른 주민들과 달리 사무라이에게서 빼앗은 진짜 창으로 무장한다. 사무라이들 중 키쿠치요와 특히 접점이 많다.[스포일러]
- 만조
초반에 사무라이들을 찾으러 나갔다가 먼저 돌아온 주민. 전투 1일차 밤에 조총에 저격당해 쓰러졌으나 다행히 생채기만도 못한 부상에 그친다.
- 시노
만조의 딸. 처음 사무라이들이 마을에 올때 사무라이와 정분이 날 것을 우려한 아버지에 의해 머리를 짧게 깎이고 남장까지 당하나, 결국 카츠시로와 사랑에 빠진다.
- 기사쿠
마을의 원로. 원래는 본작의 마을 출신이 아닌, 다른 마을 출신이지만 과거 도적의 습격을 받아 마을이 망해서 도망쳐왔다. 마을 외곽의 물레방앗간에서 거주하나, 도적들이 쳐들어올 때 지른 불로 건물과 함께 운명한다.
2.3. 기타
3. 시놉시스
주민들은 황폐한 땅에서 어렵게 수확한 식량으로 한해 한해를 넘기는 빈촌에 살고 있다. 이 빈촌엔 보리 수확이 끝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산적들(노부시=로닌)이 찾아와 모든 식량을 모조리 약탈해 간다. 싸워도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던 촌장의 결단으로 사무라이들을 모집하는데, 이들은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가진 시마다 칸베에(島田勘兵衛)를 포함한 7명이었다. 칸베에의 지휘하에 마을은 방위태세를 갖추고 전투훈련도 시작한다.
4. 줄거리
작은 마을 근처 언덕에 도적떼(노부시)가 몰려든다. 한 도적이 마을을 약탈하자고 주장하자, 다른 도적은 "얼마 전에 털었으니, 별 것 없을 것이다."며 기다릴 것을 주장한다. 이에 도적들은 "보리가 익으면 다시 오겠다." 다짐하며 떠난다. 그리고, 이를 숨어 들은 마을 주민 "요헤이"는 다른 주민들에게 도적의 습격을 알린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중앙에 모여 신세를 한탄한다. 리키치는 "불평만 해봐야 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주민 하나가 "영주(다이묘)께 가서 말해보자" 주장하나, 다른 주민들은 "도적이 다 털고나서야 올거다."며 비관한다. 그러자 리키치는 "죽창을 만들어 도적에 맞서자" 주장하나, 요헤이는 겁을 먹어 싫다하고, 만조는 "해서는 안될 짓"이라고 말한다.
리키치는 분개해 만조에게 "낙오 사무라이는 죽이면서[4] , 도적은 못 죽이냐!"고 비난한다. 이에 리키치와 만조간에 싸움이 벌어질 뻔 하나, 마을 주민들에의해 막아진다. 만조는 한층 더 무기력해진 목소리로 "평민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죽지는 않게 좁쌀이라도 남겨달라 빌어보자"고 말한다. 리키치는 "놈들이 잘도 그러겠다!"며 화를 낸다.
그러던 중 주민 하나가 "마을 원로(기사쿠)에게 물어보자"고 주장하고, 이에 주민들은 원로를 찾아가 살 방법을 묻는다. 원로는 한참 생각하더니 "옛날 사무라이를 고용한 한 마을만 도적떼로부터 무사했다. 우리도 사무라이를 고용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우리는 사무라이 고용할 사정이 안된다." 말하지만, 원로는 "굶주린 사무라이를 찾아라, 배고프면 뭐든 한다."고 답한다.
원로의 말을 따라 리키치, 요헤이, 만조 외 1명은 사무라이를 찾아 도시로 상경한다. 하지만, 열흘간 사무라이 하나 고용하지 못한다. 결국 그날도 허탕을 치고 숙소로 돌아온다.
하지만 우연히 시마다 칸베에와 만나게 되어 리키치의 요구에 응하게 되고 시마다는 일곱 사무라이를 규합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노부시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5. 평가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에 빛나는 《라쇼몽》(羅生門, 1950)과 함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서구권에는 라쇼몽보다 더 널리 알려져 생동감있는 액션, 훌륭한 짜임새의 각본, 개성적인 캐릭터성, 자연스럽게 스며든 휴머니즘 그리고 동양적 미학을 잘 보여주는 영상미를 가진 '영화라는 종합 예술'의 한 경지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소위 '전문가들이 모여 일을 벌이는' 팀업 장르의 원조격으로 자리잡아 이후 이 영화를 감명깊게 본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하나의 장르적 특성으로까지 확립되었다.[5]
같은 각본가가 쓴 하라키리(영화)와 함께 사무라이를 서구권에 알린 대표적인 영화로 꼽힌다.
또한 본 작품이 가진 특성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주역들의 행위와 사상에 대한 묘사라고 평해진다. 7인의 사무라이들은 농민들의 요청으로 도적떼를 물리치기 위해 산골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물질, 정신적 보상을 위함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사무라이들과 차별화된다. 이에 본 영화의 주역 사무라이들은 기존 사무라이의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인 귀족적인 고위 계층으로서 묘사되는 것이 아닌, 비록 추레한 떠돌이 낭인이지만 직접적인 곤란에 처해 있는 마을 사람들 이상으로 산적들에 대한 저항 의식, 즉 진정한 무사 정신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며 본인들도 승리를 쟁취했지만, 그 대가로 동지를 잃는 희생을 치르며 이상을 품고 벌인 전투중 벌어진 각종 부조리와 회의감 등으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만족감보다는 씁쓸함을 맛보는 것이 자세히 묘사된다.
특히 마지막 씬인 전후 농사짓는 농부들의 모습과 그 모습을 돌아보는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의 강렬한 대비는 많은 해석을 낳았다. 천민이란 자기 안위만 무사하면 영웅의 희생 따위 괘념치 않아한다는 비분강개한 해석부터 군인이란 본분인 외적 방어에만 충실해야지 공을 세웠다고 권력을 탐하려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훈계를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웅변한다는 해석까지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존재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전국시대가 끝나면서 싸움을 업으로 삼는 무인들은 몰락하고, 이어지는 에도 시대, 즉 농부와 상인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되었지만,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서부극과는 분명한 변별점을 지닌다. 구체적으로는 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보호를 위해 고용된 사무라이들 간의 절대적인 이질감을 강조함으로 서구 영화의 원형에서 탈피하였다는 것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함께 동맹해서 싸우지만 가정과 생존을 위해 투쟁한 마을 사람들과 직업적인 영광을 구하기 위한 사무라이들 사이의 분리는 이 영화의 주된 요소이며, 조화를 이룬 듯 하면서도 결코 섞일 수 없는 개인간의 관계 내지는 집단간의 문제를 자주 다루는 구로사와 특유의 연출력이 잘 살아나는 점이 백미로 꼽힌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고 세계의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기에 본 영화를 오마주하거나 리메이크한 영화도 상당수 있다. 본 문단에서는 그러한 작품들 중 대표적인 일부를 소개한다.
존 스터지스 감독이 연출한 서부극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극으로 리메이크하였다.
앤트완 퓨콰 감독이 연출한 황야의 7인의 2016년 리메이크판.
7인의 사무라이 50주년을 맞아 2004년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본 작품을 원작으로 SF 판타지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벅스 라이프의 경우 공개적으로 원작을 7인의 사무라이에서 기반했다고 밝혔다.[7]
인다아나 존스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이 7인의 사무라이를 오마주한 것이라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밝혔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유명한 등장인물인 요다는 자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을 하는데 이는 스님 행세를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른 시마다 칸베에의 행동을 오마주 한 것이라고 한다.
에피소드 중 하나를 본 영화에서 따왔다.
-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에서 렌 기사단의 단원의 수가 7명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오마주로 추측된다.
- 더 만달로리안
시즌 1의 4화에서는 주인공 만달로리안(딘 자린)이 용병 카라 듄과 함께 행성 소간에서 새우 양식을 하는 주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한다. 주민들을 전투 훈련시킨 후 약탈자들을 물리친 후 마을에 남아 달라는 요청도 받으나 마을에 해를 끼치지 않고자 행성을 떠난다.
나팔 산성의 전투에서 벌어지는 빗 속의 전투를 본 작에서 따왔다고 한다.[8]
조스 웨던은 영화를 만들면서 7인의 사무라이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 세븐맨 사무라이(7MEN待)
서커 펀치 프로덕션이 개발한 2020년 PS4 전용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 개발진들이 직접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아예 이 게임의 흑백 모드 이름을 '구로사와 모드'라고 지었을 정도.[9]
잭 스나이더 감독은 영화 전체가 7인의 사무라이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오마주도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촬영 도중 개인적인 가정사로 하차하고, 조스 웨던과 제프 존스 사단으로 대체되며 영화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지만, 이후 잭 스나이더가 관계자들과 팬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인해 극적으로 돌아와 그만의 비전이 담긴 저스티스 리그가 나올 예정이다.
여기서는 타마유라족중 타마유라 브라더스의 어머니의 밑의 7전사들의 모티브와 맴버들의 이름부터가 이 영화의 사무라이 7인에서 따온거다. 특히 존재가 뚜렷한게 칸베에(국내 비디오판은 용, 대원판은 일봉이)인데 영향을 준 이 영화의 사무라이 리더 칸베에의 이름을 따온 만큼 이 영화에서도 리더로 취급되며, 7전사들중 유일하게 헥슨의 공격을 1번 버텨내고, 유효타를 먹였다.
혼노지의 변을 소재로 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사극 영화.
6. 수상
7. 일화
- 엄청난 제작비와 가혹한 제작 과정으로 유명하다. 먼저 제작비는 1억 2천 5백만 엔으로 인플레이션을 계산해보면 현재 가치로 약 7억 6천만 엔(약 100억)이라는 거금이 나오는데, 이는 1950년대 일본 영화계의 평균적인 제작비인 2천 6백만 엔의 5배 정도이다.[출처] 21세기 들어서 제작비 인플레가 심해진 탓에 별로 많지 않아 보이지만, 1990년대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던 정지영 감독의 대작 남부군, 하얀전쟁 두 편의 제작비를 모두 합쳐도 34억원[11] 이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6억 정도가 모자란 94억이다. 이렇게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이유로는 271일에 달하는 긴 촬영 기간과 세트 비용, 잦은 로케이션과 로케이션 장소를 위한 세트 비용 그리고 클라이맥스 장면인 마을 방어전 촬영을 위한 카메라 8대 동시 동원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제작자들과 구로사와간의 다툼이 잦았는데, 그 다툼은 구로사와가 '전투 장면을 추가 촬영해야겠다'며 제작비를 또 요청하자 제작자들이 몰려와 "영화계에서 매장되고 싶지 않으면 작작하라"는 경고를 했고, 결국 구로사와가 영화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났다.
- 일본에서 약 2억 6천만엔을 벌었다. 극장과의 수익 배분을 감안하면 박스오피스 흥행은 그다지 못 벌었는데 다행히 2차 시장 및 판권비로 적잖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 7인의 사무라이의 초기 구상은 어느 하급 무사의 평범한 하루를 그린 일상물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사무라이의 일상 따위를 기록해 놓은 것은 없었고, 오히려 일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마을 농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용해 외적으로부터 마을을 지켰다.'는 기록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기반으로 지금의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 영화가 공개되고서 자위대에서 찾아와 영화에 나오는 군사 작전을 어디서 배웠느냐 물었다고 한다. 이에 구로사와는 '어디서 배운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해서 지어낸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자위대원이 '미군 군사 작전 프로그램과 똑같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최후반의 비 내리는 장면은 '서부극은 날씨가 맨날 맑다. 이 영화는 그것과는 다른 특유의 맛을 가지고자 한다.'는 구로사와 감독의 기획 아래 실제로 비내리는 날 강행군으로 찍은 장면이라고 한다. 의외로 현장 분위기는 배우, 제작진 모두 다 활기찼으며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에 묵즙을 뿌려 날리는 방식으로 보다 격한 호우를 표현했다고 한다.
- 키쿠치요가 훔친 가계도에 적힌 출생연도와 작중 나오는 대사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본작의 배경년도는 1586년이다. 일부 영어 자막에는 종종 1587년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나이 계산법에 대한 서양의 무지 때문으로 추측된다.[12]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나이 계산법으로는 생일이 지났느냐에 따라 1586년이 될 수도 있고 1587년이 될 수도 있지만, 어디서 훔쳐왔는지 모를 무사의 가계부 상의 키쿠치요의 생일이 텐쇼 2년 (음력) 2월 17일. 영화에서 계절은 보리가 익을 무렵인 가을이므로 생일이 지났다고 보면, 1586년으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다.
8. 미디어 매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명작으로 추앙받는 작품이기에 거의 모든 영상 매체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원본 필름(네거티브 필름)이 관리 소흘로 인해 훼손되어 저화질로 보아야 했으나,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복원 작업을 성공해내었고, 4K로 리마스터까지 진행하였다. 참조(영문).
일본에서는 본 영화의 제작사이자 배급업체인 도호의 주도로 BD를 발매하였는데 원래 1채널 모노였던 영화 음성을 5.1 채널로 가상 분할시켜 넣었다고 한다. 이런점에서는 고평가 받으나, 화질 면에서는 크라이테리온에서 발매한 복원판에 비해 밀린다고 평해진다.
한국의 경우 BD 발매는 커녕 DVD도 겨우 나왔는데 그 수준이 실로 처참해 울며 겨자먹기로 일본판이나 미국판을 사야했다. 그러나 다일리 컴퍼니에서 블루레이 정발하였다.
9. 관련 문서
[현재•가치•제작비] 2019년 기준으로 약 7억 6천만 엔, 달러로는 약 1천만 달러[현재•가치•박스오피스] 2019년 기준으로 약 16억 3천만 엔, 달러로는 약 2천 3백만 달러[1] 카츠시로에게 문 옆에 서서 들어오는 자를 후려치라 명했으나, 고로베에는 사전에 이것을 눈치채고 '이러시면 곤란하다'며 가볍게 웃어 넘겨버린다. 이 장면은 츠카하라 보쿠덴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2] 원래 칸베에는 카츠시로가 너무 어리다하여 두고 가려 했으나, 그전에 고용비로 준비해온 쌀을 잃어버린 리키치에게 자신의 돈을 주는 선행을 베푼 덕에 리키치가 칸베에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해 같이 갈 수 있게되었다.[진실] 사실은 사무라이가 아니라 어릴 적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 즉 일반 백성이다. 키쿠치요라는 이름도 칸베에에게 사무라이인 척 하기 위해서 훔친 무사 가문의 족보를 보고 적당히 고른 이름이다.[스포일러] 전투 2일차에 활을 든 도적의 화살에 맞고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키쿠치요는 말문을 완전히 닫으며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 준비를 막 시작한 시기이다. 그리고 6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공했다.[4] 전국 시대 농민들은 패잔병을 습격해 수급을 취하고 갑옷이나 무기, 장신구 따위를 강탈하여 팔거나, 도적의 습격을 대비해 모아 두고는 하였다.[5] 이렇듯 세계 영화계에 있어 엄청난 작품이지만 아카데미상에서는 작품상 후보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카데미상의 경우 20세기에는 외국어 영화에 작품상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백인 영화 감독들이 만든 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傾倒)되어 있었기 때문이다.#[6] 원제는 1960년판과 2016년판 둘다 The Magnificent Seven이지만 국내에서는 2016년판에 원제를 그대로 갖다 붙였다.[7] 그러나, 실제 내용물은 오마주라기 보다는 패러디에 가깝다고 평해진다.[8]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의 빗 속 전투 역시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9] 처음에는 '사무라이 시네마'라는 명칭이었지만, 이후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공식 허가를 받고 '구로사와 모드'라는 명칭으로 변경했다고 한다.#[10]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엘리아 카잔의 워터프론트, 미조구치 겐지의 산쇼다유[출처] BFI: Still crazy-good after 60 years: Seven Samurai[11] 남부군은 1989년 당시 14억원을 들여 만들었는데,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약 2~3억원 정도였다.[12] 현재 일본에서는 생일로 나이를 따지는 만 나이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바꾼 것이고 그 이전까지는 한국식 나이와 동일하게 나이를 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