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활석 남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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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옛 황룡사지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출토된 7세기(서기 600년대) 경 신라시대 딜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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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두 최대 직경 4.8㎝, 남은 음경 길이 7.9㎝.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 황룡사 터를 발굴조사하며 총 25,000평의 사터에서 4만여점이 넘는 신라시대 문화재를 발굴하였는데 그때 발견된 유물 중 하나이다.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이 남근이 최초 발견되었고, 이후 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또 다른 남근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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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나온 남근(왼쪽)과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나온 황룡사 활석 남근석(우측)
이전부터 신라의 성생활 문화가 다른 왕조와 비교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古)신라시대인 3세기~5세기 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된 토우장식 장경호에도 섹스를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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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남근석이 다른 곳도 아니고 당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던 불교 사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문화적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딜도가 실전용(?)이 아닐 거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대표적으로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 교수는 “이러한 신라의 남근은 실제 유희용이라기보다는 부처님께 아들 낳기, 혹은 풍요를 바라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조사 결과 귀두 양쪽에 달린, 여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혹’이 발견되었고, 출토 지역 근처에서 음경의 자루 부분이 부러진 상태로 추가 발굴됐는데, 전체적으로 손을 많이 타 반질반질하였으며, 부러진 곳의 색깔과 손을 많이 탄 부분의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자들은 이 음경이 실제 신라 여성들의 유희용이었으며, 한참 즐겁게(?) 사용하다가 음경 부분이 부러지자 요즘 말로 치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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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비례미나 귀두의 곡선 부분,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마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극(極)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밤중에 남성과 여성들이 함께 모여 탑을 돌면서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 여자 쪽에서 원나잇 스탠드나 애인 요청을 하곤 했다던 신라 탑돌이 문화와 함께 고신라시대 한국 여성들의 성관념 및 성문화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신라시대에는 본 유물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딜도가 발견되고 있다. 아래는 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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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남근. 크게 돌출된 혹으로 미루어보아 이 역시 실제 유희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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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경주 반월성 남쪽의 인용사에서 발굴된 대형 목제 남근. 잔존 길이가 30㎝에 이르는데 귀두형과 몸통 사이에 파여진 홈의 역할을 연구한 결과 역시 실전용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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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남근. 경주 쪽에 비해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역시 조사결과 실제 여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시기 한국의 다른 고대 왕조였던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아직 고구려 쪽은 남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백제는 1999년에서 2000년도 사이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옛 부여 지역에서 목제 남근을 하나 출토하긴 했다. 다만 형태로 볼 때 전체 크기가 너무 작고 특히 귀두부분이 너무 작아 신라와는 달리 실전 유희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제례용으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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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남근. 전체 길이 3.7㎝.
1. 개요
1996년 옛 황룡사지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출토된 7세기(서기 600년대) 경 신라시대 딜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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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두 최대 직경 4.8㎝, 남은 음경 길이 7.9㎝.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 황룡사 터를 발굴조사하며 총 25,000평의 사터에서 4만여점이 넘는 신라시대 문화재를 발굴하였는데 그때 발견된 유물 중 하나이다.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이 남근이 최초 발견되었고, 이후 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또 다른 남근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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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나온 남근(왼쪽)과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나온 황룡사 활석 남근석(우측)
이전부터 신라의 성생활 문화가 다른 왕조와 비교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古)신라시대인 3세기~5세기 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된 토우장식 장경호에도 섹스를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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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남근석이 다른 곳도 아니고 당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던 불교 사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문화적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딜도가 실전용(?)이 아닐 거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대표적으로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 교수는 “이러한 신라의 남근은 실제 유희용이라기보다는 부처님께 아들 낳기, 혹은 풍요를 바라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연구조사 결과 귀두 양쪽에 달린, 여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혹’이 발견되었고, 출토 지역 근처에서 음경의 자루 부분이 부러진 상태로 추가 발굴됐는데, 전체적으로 손을 많이 타 반질반질하였으며, 부러진 곳의 색깔과 손을 많이 탄 부분의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연구자들은 이 음경이 실제 신라 여성들의 유희용이었으며, 한참 즐겁게(?) 사용하다가 음경 부분이 부러지자 요즘 말로 치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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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비례미나 귀두의 곡선 부분,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마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극(極)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한밤중에 남성과 여성들이 함께 모여 탑을 돌면서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 여자 쪽에서 원나잇 스탠드나 애인 요청을 하곤 했다던 신라 탑돌이 문화와 함께 고신라시대 한국 여성들의 성관념 및 성문화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3. 기타 유물들
신라시대에는 본 유물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딜도가 발견되고 있다. 아래는 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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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남근. 크게 돌출된 혹으로 미루어보아 이 역시 실제 유희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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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경주 반월성 남쪽의 인용사에서 발굴된 대형 목제 남근. 잔존 길이가 30㎝에 이르는데 귀두형과 몸통 사이에 파여진 홈의 역할을 연구한 결과 역시 실전용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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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남근. 경주 쪽에 비해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역시 조사결과 실제 여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시기 한국의 다른 고대 왕조였던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아직 고구려 쪽은 남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백제는 1999년에서 2000년도 사이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옛 부여 지역에서 목제 남근을 하나 출토하긴 했다. 다만 형태로 볼 때 전체 크기가 너무 작고 특히 귀두부분이 너무 작아 신라와는 달리 실전 유희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제례용으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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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남근. 전체 길이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