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분

 

1. 情分
2. 鄭苯


1. 情分


사귀어서 정이 든 정도. 또는 사귀어서 든 정. 주로 "정분나다"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2. 鄭苯



정분
鄭苯

<colbgcolor=#94153e> 시호
충장공(忠莊公)
본관
진주 정씨(晉州 鄭氏)
성명
정분(鄭苯)

자유(子㕀)

애일당(愛日堂), 성재(省齋)
출생
1394년
사망
1454년 조선 전라도 낙안군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건축가.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 또는 성재(省齋), 시호는 충장(忠莊). 본관은 진주로, 예문관 대제학과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시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했던 문정공 교은 정이오와 안동 권씨의 외동아들[1]이다. 부인으로는 정인지의 누나인 하동 정씨와 원주 변씨가 있었으며,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장릉배식록삼상신 중 하나다.
음서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공조판서와 호조판서를 거쳐 우찬성까지 진급했다. 문종 때는 좌찬성이 되었고 문종이 붕어한 뒤에는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단종을 보필했다. 남지가 병으로 사직하자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우의정에까지 오른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신임에도 토목에 조예가 깊어 토목 공사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우의정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공사를 지휘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신료들이 체신머리에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공사를 할 때 크고 아름답게 했다고 한다. 숭례문을 개축했고 서산의 해미 읍성도 그의 작품이며, 그 외에 세종~문종조의 건축이나 토목 공사는 정분이나 민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강직한 김종서보다는 성격이 원만한 황보인과 더 비슷했던 인물로, 김종서와 뜻을 같이 했으나 그의 독단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약간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계유정난 직전 하삼도의 도체찰사로 나갈 때는 단종이 친히 배웅하고,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이후 부임지에서 돌아오던 중에 유배를 당했고, 수양대군에게 먼저 포섭된 처남 정인지의 거듭되는 회유를 모두 뿌리친 끝에 교형에 처해졌다.
숙종 때 황보인, 김종서와 같이 벼슬이 환원되었고, 영조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영의정이었던 황보인이나 6진 개척 등으로 널리 알려진 김종서보다 인지도가 낮은데, 공주의 남자관상에는 나오지 않았고 왕과 비에서는 적은 비중으로나마 나오기는 했는데 작품이 전체적으로 세조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었다 보니 힘 없는 노인으로 묘사된다. 조선 초기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는 토목과 건축의 전문가라는 특성 상 거의 빠짐없이 등장해서 장영실, 정인지와 함께 갈려들어간다.
후사는 사촌 형인 홍주 목사 정효안에게 당부하여, 오촌 조카인 정지산[2]이 봉사손이 되어 이었고, 도망가서 미친 척 하며 숨어 살던 아들의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같이 복권됐다. 이 바람에 봉사손의 후손인 공주계와 나중에 나타난 후손 계통인 광양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묘는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는 그와 그의 양아들인 정지산을 함께 모신 정려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그의 15대손이다.

[1] 교은선생문집에는 4형제 중 장남으로 적고 있으나, 문정공 본인이 직접 외아들인 분이 죄를 짓고 외지에 나가있어 거동이 불편하다고 세종대왕께 상소를 올린 기사가 실록에 존재함.[2] 당시 호조 정랑.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양어머니(정인지의 누나는 계유정난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후처인 원주 변씨)를 모시고 공주시 동혈에 숨어 살았다. 김시습 등과 계룡산 초혼각지에서 초혼제를 올렸으며,(단묘초혼칠현신) 평소에 친분이 있던 세조가 등용하고자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