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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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시호'''
'''충익(忠翼)'''
'''직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영집현전경연사(領集賢殿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본관'''
순천 김씨
'''이름'''
김종서(金宗瑞)
'''자'''
국경(國卿)
'''호'''
절재(節齋)
'''출생연도'''
1383년 (고려 양광도 공주목)
'''사망연도'''
1453년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 71세, 조선 한성부)
1. 개요
2. 일생
2.1. 출세가도를 달리다
2.2. 북방의 대호(大虎)
2.3. 쿠데타에 희생된 고명대신
3. 후일담
4. 현대 매체에서
5. 기타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초기의 정치인(문신[1]), 군인.
세종 대인 1433년부터 1437년까지 6진을 개척했으며 단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고명대신으로서 섭정을 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인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2. 일생



2.1. 출세가도를 달리다


출생 연도에는 1383년 설과 1390년 설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1451년 기록을 보면 김종서가 다음 해에 나이 70세가 된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역산하면 1383년이 정확한 생년이 된다. 또한 과거 급제 연령이나 활약 시기를 감안해도 1383년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1390년설의 경우는 16살에 급제한 것이 되어서 조선 시대 과거 급제 연령에서 연소자 쪽에서 2위가 된다. 1위가 고종황제 시기의 이건창으로 당시 15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좀 애매하다. 참고로 17세는 선조 시대에 문과 장원급제를 한 박호와 종친이기는 하지만 무과 장원급제를 한 남이 등이 존재한다. 여튼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는 김종서의 생년이 점차 1383년으로 수정되어 가는 추세인데 도서 쪽은 아직도 1390년으로 기록한 도서가 많다.
출생지는 충청남도 공주시이고[2] 선대와 부친의 고향은 전라남도 순천시. 1405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은 인물로 초기에는 주로 간언하는 간관직과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감찰직을 주로 맡았으며 세종대왕에게 크게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다.

2.2. 북방의 대호(大虎)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세종 대 북방개척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종서의 시조로 유명하다. 그의 변방 정벌의 포부를 엿 볼수 있는 구절이다.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몰아치는 북풍은 나뭇가지를 스치고 중천에 뜬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을 비춰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성루에서 긴 칼을 짚고 서서,
휘파람 길게 불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세상에 꺼릴 것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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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연사준도>. 북방 개척 중 관아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중앙의 술항아리에 꽂혀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김종서는 "간사한 자가 나를 시험하려 한 것"이라며 태연히 연회를 즐겼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 누각 안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종서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활약은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국경선을 확정짓게 된 세종의 북방 개척 때 활약이다. 1433년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에 임명되어 북방에 파견된 이후 8년 동안 변방에 있으면서 4군 6진 중 6진의 개척을 총지휘하고 두만강 이남을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이 때의 포스가 대단했는지 "큰 호랑이"라고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북방으로 파견되기 전에 세종은 김종서를 불러 활과 화살을 주며 "항상 가지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라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에 김종서는 북방에 파견되었다.
북방에서 돌아와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직을 역임하다가 세종 말년에 명나라 황제 정통제타타르족에게 사로잡히는 사태(토목의 변)가 발생하여 요동 지역이 어수선해지자 다시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 체찰사로 북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는 최영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인다. 세종은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이라는 말로 김종서의 공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북방에 있으면서 세종에게 "제발 한양으로 올라가게 해 주세요"라고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렸던 것을 보면 북방에 짱박힌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듯. 박시백조선왕조실록에서는 힘을 가진 신하가 변방에 오래 있으면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그랬다고 표현했다. 사실 북방에서 계속 있는 것은 누구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테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게다가 모친상과 부인상을 제대로 치뤄주지 못했고 박호문의 농간에 휘말려 더욱 싫었을 것이다.
북방 개척 때의 활약 때문인지 세종 당시 영의정이자 원로였던 황희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황희가 자신의 후계자로 김종서를 점찍어놓고 맹사성이 말릴 정도로 사정없이 굴렸다. 오죽했으면 김종서가 황희 앞에서 늘 각 잡고 지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런데 분명 전형적인 문신 코스를 밟았는데도 장군이미지가 강하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도 여러 외직과 언관직을 거치며 훌륭한 행정 수완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예학, 경학, 역사에도 밝아 고려역사서인 <고려사>와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김종서의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본디 유신(儒臣)으로서 몸집이 작고, 관리로서의 재주는 넉넉하나 무예(武藝)는 모자라니 장수로서 마땅하지 못하다.''' 다만 그가 일을 만나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일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며, 4진(鎭)을 새로 설치할 때에도 처치한 것이 알맞아서 갑자기 그 효과를 보았으니, 이것은 포상(褒賞)할 만하다." -<세종실록> 세종 22년(1440년) 7월 5일

고려사 편찬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은 '김종서는 궁예후손일 수도 있다'는 거다. 김종서의 본관인 순천 김씨족보가문의 시조 김총의 할아버지가 궁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족보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에는 의문이 들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면 김종서는 자신의 선조를 부정적으로 그린 역사서 편찬에 참여한 셈. 다른 고려사 편찬위원 이선제의 본관인 광산 이씨도 마찬가지인데 광산 이씨도 궁예의 6대손인 이종금이 가문의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기는 한데 족보 외에는 증거가 없는 이야기니 이런 얘기도 있다는 것 정도로 알아두자.

2.3. 쿠데타에 희생된 고명대신


세종 사후에 정승이 되어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고,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고명대신으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과 정국을 주도했다. 이 때 인사와 관련된 '황표 정사'라는 것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권신(權臣)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절대 아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황표정사'를 이들 3대신만 하였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수양대군도 하고, 안평대군도 했다. 권신이 되려면 국법을 어기고 전횡을 부리며 부정부패를 해야하는 데, 김종서는 청렴결백했을 뿐 아니라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단종실록은 세조 시절 "노산군일기"라는 제목으로 기술되며 사관이 알 수 없는 세조의 잠저 시절 음모 꾸리는 장면까지 대놓고 나오며, 따라서 계유정난 승리 후 이 정난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단종실록에도 김종서의 집이 호화스러웠다거나, 매관매직을 했다거나, 국정을 농단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김종서나 황보인의 아들이나 사위 등이 파격 승진을 했다, 성묘 길에 환송객이 장안을 메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박시백은 이런 그의 모습을 "공인으로서의 절도를 잘 지켜나갔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두고 다투던 수양대군에게 눈엣가시가 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살해 0순위로 지목되게 된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만 죽이면 나머지 무리는 걱정할 것도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는데 후에 진짜 그렇게 되긴 했다. 김종서는 문종 즉위년에는 의정부 좌찬성였다가,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고, 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사직하면서 좌의정이 된 것과는 다르게, 황보인은 세종 29년에 우의정에, 31년에 좌의정에, 문종 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렇게만 보면 황보인이 정권의 최고자여야 하지만, 대체로 김종서가 황보인보다 앞서는 것은 원래부터 조선시대의 의정부 영의정은 전 기간 내내 신료들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명예직에 가까웠고, 국초인 이 시기에는 더더욱 명예직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좌의정은 조정의 좌장으로 주요 사업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단종 즉위년에 좌의정 남지가 와병으로 빠지면서 좌찬성이였던 정분이 이에 따라서 우의정으로 승진할 수 했으나, 사람이 토목에 집중하던 인사라 실권이 없기도 하였고, 원래 정인지 보다 아랫반열이였다가 문종이 순서를 바꾸면서 올라갔기에 경력이 많은 편도 아니였으며, 계유정란 시기에는 하삼도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한성이 있지도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불시에 김종서의 집에 들이닥친 수양대군이 "사모뿔을 좀 빌리고 싶다"는 한 마디 이야기를 하고 편지를 읽어보라고 김종서에게 건네주자, 김종서는 편지를 달빛에 비추었으며, 그 후 수양대군의 종인 임어을운이 철퇴를 휘둘러[3] 그를 살해...한 줄 알았으나, 눈치를 챈 아들 김승규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몸으로 감쌌고[4] 양정이 칼로 찌르자 아들인 김승규만 절명하고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살아남아 다시 깨어난 김종서는 궁에 들어가 수양대군과 대결하기 위해 '''여장'''을 해 부인의 가마를 타고, 4대문을 모두 돌았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둘째 며느리 친정인 사돈댁에 들어가 숨었는데 날이 밝자 있는 곳이 들통나 다시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였던 양정, 이흥상, 홍달손 등에게 결국 살해당했다. 향년 71세. 살해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였다. 그리고 목이 길에 내걸리는 효수형을 당했다.
세조가 즉위한 이후 역적으로 남아서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삭제되고 권력을 탐한 신하로 남았으나 상술된 대로 정작 승자의 기록인 실록에도 김종서의 비리나 개인적 결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아들들 벼슬을 올려줬다는 것 정도인데, 이 정도는 당시 관행으로는 '애교'였고 그나마 높은 벼슬로 올려준 것도 아니었다.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에 비하면 이건 애교도 안 된다. 단, 당시 관직체계에서 소헌왕후가 사망하고서 몇 년 지나자마자 세종이 붕어하였고, 또다시 몇년 지나 문종이 붕어하면서 고위관직자들이 교체되지 못하면서 인사적체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승진이 된 것이니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없는 흠이라도 만들어낼 법도 한데 실록의 기록이 이렇게 된 것은 그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막나가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오히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 일파야말로 갖은 부정축재와 비리 사건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한명회홍윤성이 대표적인 예. 다시 말하자면 수양대군 일파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핑계를 꾸며냈는데 김종서의 경우에는 권신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실제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승자의 기록이라는 실록에서도 그에 대한 나쁜 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도를 걸었고 세종대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었던 신하였다. 김종서 뿐만이 아니라 세종 시대의 많은 명신들이 이때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았다면 세조의 편에 선 정인지신숙주 정도.
의외로 단종을 지키려는 뜻은 같았으나, 한 뜻이 되지 못했던 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였다. 그 이유는 김종서의 전례없는 독단 때문이라고... 한 학사가 그의 황표정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대신을 참소하니 죽어 마땅하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김종서는 그때 서슬퍼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선 집현전 학사들이 계유정난을 반대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폐지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선왕들의 뜻을 받들어 단종을 모신 충신이자 명신이면서도, 의정부서사제로 권력의 최정점에서 초기 조선을 호령한 권신이란 모습도 보여진다. 그 활약상과 명성에 걸맞게 야사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현재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데 활약한 걸 생각하면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5]

3.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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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있다. 원래 공주시 장기면이었다가,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소가 있는 곳임을 알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장군면'으로 개칭됐다. 세조에게 죽고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신 수습을 제대로 못하여 현재 묘에 묻혀 있는 것은 김종서의 '''다리 하나'''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위치한 공주 지역의 어른들은 '대교리'란 이름의 지명을 그를 기억하여 한 다리 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사실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니 정확히는 다리도 묻지 못한 '''가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그래도 업적도 많이 남겼고 나라의 중추였던 충신이자 노신이었던 그가 이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대목.
전설에 의하면 김종서의 서자 하나[6]가 요행히 탈출해서 수양대군의 악행 때문에 가출한 서녀랑 만나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다른 버전은 나중에 온천에 온 수양대군을 이 부부가 만나서 욕을 한바탕 해주었다고도 한다. 이는 고종 대에 출간된 야사집 금계필담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전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세조로 인해 권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졌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신하였고 그 죽음도 억울한 것이었기 때문인지 실제로 그를 역신이라고 하거나 나쁘게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백년이 지난 정조 시대에 정약용도 자신의 책인 <경세유표>에서도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라고 말하며 김종서를 높이 평가했다. 이에 대해 단종이 묘호를 받은 것이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때에야 되었기에 중간에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민심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며 정약용이 왜곡을 할 이유도 없기에 당시 인식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함경도와 관련된 입장이 있다는 것과 정약용 역시 북벌에 관련된 말이 있다는 것에서 이를 넣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이 3대에 걸쳐 신임받은 충신과 전란이 터지자, 전에는 보일듯말듯 찍어 누르던 것을 노골적으로 박해를 당하고, 그 사후 다음 대와 그 다음 대에까지 또 다른 전란으로 인한 굴욕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면, 시호도 못 받았을 비운의 충신과 같은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 어쩡쩡하다는 평가를 넣을 수도 있었다. 비교되는 인물이 서로 민망한 일이 되는 셈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선 왕조 최초로 사초를 왜곡하다 걸린 사람이기도 하다. 단종 원년(1453년) 5월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당시 책임자였던 김종서가 안숭선(安崇善)의 가장사초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발견했는데, 내용은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송골매를 조공할 것을 요구하여 전국 일대를 뒤져 겨우 일곱 마리를 잡았을 때 당시 좌승지였던 김종서가 세종에게 아첨하기 위한 목적에서 2마리를 몰래 빼돌려 바치려다 세종의 분노로 실패한 일이었다. 이걸 그대로 적어놓은 걸 보고 기사관을 시켜 구절을 삭제한 것인데 곧 들켜버렸다. 단, 들킨 당시에는 김종서가 고명대신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고 이런 연유로 진짜 사초 왜곡질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종 때의 민수옥사[7]를 첫 케이스로 본다. 다만 단종실록이 엄청난 왜곡과 미화로 악명높은 실록인지라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
황희가 일찍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주시하다 보니, 황희와 연관된 야사들이 몇개 있다.
  • 김종서가 의자에 비딱하게 앉아서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황희는 "여봐라. 김 판서 저 놈이 앉은 의자 다리가 한 쪽이 망가진 모양이니 나무 토막을 가져다 받쳐 놓도록 해라."라고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세를 고쳤다.
  • 황희를 비롯한 정승들이 일을 하던 도중 식사 시간이 되자, 김종서가 아랫 사람들에게 명해서 음식상을 차려 정승들을 대접했다. 그러자 황희는 고맙다는 말 대신 "관리들을 대접하는 일은 조정의 예빈시가 맡아서 하는 것인데, 왜 자네가 멋대로 월권 행위를 하는가? 당장 치우게!"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또는 황희가 밤늦게 일을 하느라고 시장할까봐 김종서가 정승들을 위한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는데, 문제는 당시에는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라 든든히 먹어 두고, 저녁은 자기 전이므로 적게 먹는게 관례였다. 그래서 황희가 김종서가 예의를 어겼다고 정승들 앞에 세워 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최영과 유사한 면모가 자주 나온다. 급제조차 뼈까지 무장이였던 그와 문신 출신인 김종서가 다르다면 다르달까, 60세가 넘은 둘다 각각 제주도와 평안도로 발령 받았었던 적이 있고, 주군이던 우왕단종을 끝까지 보좌하며 당시의 정국을 이끌던 권신이었다. 충신으로 현재 평가되어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것마저 같다.[8]
300년 뒷날 영조 시대에 복권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현대 매체에서


단종세조에 관련된 사극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 시대를 다룬 사극 속에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두냐에 따라 권력을 탐한 권신,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충신 둘 중 하나의 평가를 받게 된다.
1980년대 어른의 사정으로 조기종영된 전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신구가, 1990년도 KBS 2TV에서 새로 연출한 파천무에서는 이순재 옹이 불멸의 연기를 보여주었고,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전운 씨가 역시 불멸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순재 옹의 경우 21년 뒤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통해 또 한 번 연기하게 되었다.[9]
사실 체구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거의 무인(武人)형의 캐릭터로 등장했다. 특히 왕과 비에서는 조경환 씨가 연기하였는데, 계유정난 부분에서는 원래 대본은 '김종서를 업고 달린다'였던 게 업어서는 도저히 배우의 몸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 가마를 타는 것으로 수정할 정도의 엄청난 거구였다. 실제로 조경환은 전직 보디빌더 출신으로 거구로 유명했고, 말년에는 몸무게가 세 자릿수가 넘었다. 훗날 제국의 아침에서 박술희를 연기하는데, 선왕의 고명을 받들어 현왕을 보위하지만, 쿠데타 세력에게 결국 살해당한다는 점이 김종서와 유사하다. 물론 여기는 진짜 무신이지만... 예외가 있었다면 한명회에서의 임동진 씨와 대왕 세종이병욱 씨. 특히 임동진[10] 씨의 김종서는 정말 강한 포스를 남겼다. 이병욱의 경우 오히려 문인에 가까운 인상이며(실제로 문인이지만), 극중에서 등장한 담이[11]라는 소녀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바람에 키잡이 되는 거 아니냐며 다들 궁금해 했으나, 결국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담이가 죽었기에 커플이고 뭐고 없었다. 왕과 비에서 덧붙이자면, 지나친 수양대군 미화의 대표적 피해자. 안평대군혜빈 양씨 등과 더불어 수양에게 대립각을 세운 캐릭이라면 부정적으로 묘사해 빈축을 살만 하다. 강압적이고 오만방자하게 권력을 농단하는 권신으로의 모습은 마치 고려시대를 다룬 사극 무인시대에서나 나올 법한 난신적자를 방불케 한다.
2011년 작 인수대비에서는 굵직한 연기를 하는 걸로 알려진 배우 한인수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특유의 굵은 목소리와 근엄해보이는 얼굴이 제대로 포텐셜을 터뜨려 14부까지 극의 중심축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어린 단종에게 군왕이란 이렇게 해야 한다며 눈물짓는 연기는 이 드라마의 명장면 중 하나. 한인수가 정인지, 한확 등 동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자주 등장했는데, 그때에 본 김종서를 새로운 모습으로 연기했다.
2013년 작 영화 관상에서는 무인형 캐릭터가 아닌 백윤식[12]이 김종서로 등장했으며, 여기서는 권력을 놓고 수양대군과 경쟁하는 권신 이미지.

5. 기타


웹툰 신과함께의 신화편 차사전에 이 인물을 본딴 것으로 추정되는 토벌대장이 등장한다. 이름이 '''김맹호'''이며, '''북방의 국경선을 넓히려고''' 조정에서 파견한 점이라든지, 별명이 '''호랑이'''라는 것이라든지…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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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05년(태종 5)에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를 13위로 급제했다.[2] 어머니의 고향이며 김종서의 입장에서는 외가. 여말선초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처가살이를 3년 정도 하는게 관례였다. 데릴사위제 참조. 참고로 고향은 부계 혈통의 본적지로 여겨졌다.[3] 이 공으로 황보인의 집을 상으로 받는다.[4] 왜소한 김종서와 달리 김승규는 당시 장사로 이름이 높을 정도로 거구였다고 한다.[5] 위 그림에 남겨진 대담함과 관련한 일화도 많지만, 선배 정승격인 황희에게 자주 혼나는 이야기가 많다. 가령 친구에게 바로 옆에 화살이 날아와도 두려움이 없지만 황희만 만나면 오금을 못 펴겠다고 징징거린 일화가 있다.[6] 기록, 구전에 따라 적자라고도 하고 손자라고도 한다.[7] 사초에 이름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바른 말을 썼던 것을 수정을 했다가(임꺽정의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실록에 사관의 생각이 쓰여져 있다.) 고쳐쓰여진 것을 검열관이 발견해 사초를 고쳐쓰고자 관련 요청을 받았던 사람들, 요청을 허락한 사람들이 줄줄히 참형 당하거나 귀향가거나 고치고자 요청한 것을 거절했음에도 태형을 당하고 군역 편입되버린 적이 있던 사건.# 이후 다시 사초에 이름을 넣지 않게 돌려놓는다.[8] 최영은 당시 다른 무장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침입에 전국 각지에 파견되었으며, 중국으로도 원정을 간 적도 있었다. 제주도도 당시 반란 진압을 이유로 파견된 것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에 파견되어서 행정과 군사업무를 통괄한 김종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9] 참고로, 공주의 남자 일본어 더빙판 성우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원로 성우인 오오츠카 치카오. 참고로 오오츠카 치카오는 이산, 마의에서도 이순재의 더빙을 맡았다.[10] 얄궂게도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 역을 맡았다.[11] 영화배우 민지가 연기한 북삼도 백성인 소녀로 극중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여진정벌의 계기가 되는 중요 인물.[12] 동시대를 다룬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성삼문 역을 맡았고 1980년에 방송된 파천무에서는 문종 역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