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
[image]
후보자들의 지역별 우세지

1919년 2월 11일
1919년 대선

1925년 3월 25일
'''1925년 대선'''

1932년 3월 13일
1932년 대선
}}}
'''투표율'''
77.0%-%p
'''선거 결과'''
'''후보'''
'''가톨릭 중앙당''']]
'''빌헬름 마르크스'''

'''파울 힌덴부르크'''

'''에른스트 텔만'''
'''득표율'''

45.3%
'''48.3%'''
6.4%
'''득표수'''
13,751,605
'''14,655,641'''
1,931,151
'''당선인'''
'''무소속'''
'''파울 폰 힌덴부르크'''
1. 개요
2. 후보
3. 선거 결과

[clearfix]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이며 투표율은 '''77.0%'''였다. 독일의 불경기와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로 인해 기존 정당의 지지를 받던 빌헬름 마르크스가 낙선하고, 민족주의 계열 군인 출신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었다.

2. 후보


'''결선 진출'''
본래 에른스트 텔만은 4위로 결선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오토 브라운 사민당 후보가 빌헬름 마르크스를 지지하며 사퇴하여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인물'''
  • 카를 야레스 ( ) : 1차 투표에서 1위였으나, 결선 투표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 오토 브라운[1] ( ) : 1차 투표에서 2위였으나 가톨릭 중앙당과의 연정으로 빌헬름 마르크스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 ) : 바이에른 지역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에도 밀리면서 20만표 득표에 1%로 광탈(...). 이후 정계에서 아웃된다. 나치당 차원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지지.
  • 빌리 헬파흐 ( ) : 1차 투표에서 5위로 낙선했다. 오토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빌헬름 마르크스 지지.
  • 하인리히 헬트 ( ) : 1차 투표에서 6위로 낙선했다.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지지를 선언했다.

3. 선거 결과


'''1925년 독일국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빌헬름 마르크스

13,751,605
45.3%
2
낙선
2
파울 폰 힌덴부르크

'''14,655,641'''
'''48.3%'''
1
'''당선'''
3
에른스트 텔만

1,931,151
6.4%
3
낙선
사민당, 중앙당, 민주당 등 중도보수~중도진보 진영에서 밀었던 '''빌헬름 마르크스'''와, 강경 보수, 민족주의 정당들이 지지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격돌하였다. 3지대 후보로 공산주의 성향의 에른스트 텔만이 결선에 진출하였으며, 선거 결과 90만여표차, 3%p 차이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빌헬름 마르크스를 꺾고 승리했다.
지역별로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는데, 구 프로이센 지역이었던 동부는 보수파였던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반면 라인란트 지역은 상대적으로 진보였던 빌헬름 마르크스를 지지했다. 에른스트 텔만베를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전하긴 했으나 모든 지역에서 2위나 3위에 그쳤다. 당초 서부 공업지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마르크스와 동부 농촌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던 힌덴부르크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접전이 예상되었나, 전쟁 영웅이었던 힌덴부르크가 인물론으로 근소하게 승리하게 된 것이다. 또 1920년대 독일의 불경기로 중앙당, 사민당 등 기성 정당들이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던 것 역시 힌덴부르크의 승리를 견인했다.
빌헬름 마르크스는 이후 법무부장관을 맡다가 총리로 당선되어 사실상 동거 정부가 꾸려지게 된다.[2] 그 외에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전쟁영웅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1.1%'''(...)를 받으며 바이에른 지역정당 후보에도 밀리며 광탈,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1] 대장정으로 유명한 공산주의자 오토 브라운과는 이름만 같은 동명 이인이다. 1925년부터 1932년까지 프로이센주 주지사를 지냈다.[2] 다만 당시 독일은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부제가 아니라 내각책임제였고, 대통령은 사실상 국왕같이 상징적인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