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브라운
1. 소개
독일 태생의 혁명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1932년 중국 공산당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939년까지 활동했다. 중국 이름은 이덕(李德), 중국인들이 붙힌 별명은 화부(華夫). 프로이센의 수상을 지낸 오토 브라운(1872~1955)과는 동명이인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00년 9월 28일 오전 6시 45분 바이에른의 이스마닝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빌리발트는 소상인 겸 회계사였으나 브라운이 태어난지 얼마 안된 1902년 9월 13일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인 아만다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1906년 브라운을 카톨리 고아원에 보냈고 브라운은 학교에 갈 만한 나이가 될 때까지 7년을 거기서 성장했다. 1913년 여름, 뮌헨의 사범학교에 들어갔으며 5월에 시험을 통과했으나 1918년 6월 25일 바이에른 왕국군으로 징집되어 10월 말에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11월 26일 소집 해제 이후 사범학교로 돌아갔으나 선생이 되진 않고[1] 1918년 12월에 FSJ(Free Socialist Youth)에, 1919년 4월에 스파르타쿠스단에 가입하여 바이에른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는 혁명에 참여했다. 바이에른의 혁명이 실패하자 독일 공산당 당원으로써 남부 바이에른에서 FSJ 재건을 위한 사업에 돌입했다. 1919년 여름, 경찰의 검거를 피해 북독일로 이주하여 함부르크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1년 베를린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중앙위원회에 들어가 활발히 활동했다. 이후 1923년까지 공산당 산하 준군사조직 창설과 정보 수집 업무 등에 종사했다.
1921년 여름에 한차례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23년과 24년에 걸쳐 혁명활동을 벌였으나 1926년 9월 다시금 체포, 모아비트 감옥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1928년 봄에 동료와 애인인 올가 베나리오의 도움으로 탈옥하여 베나리오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소련으로 망명하여 6차 코민테른 회의에 출석, 코민테른의 활동가로 합류했고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소총사단에 입대했다. 그는 레닌학교를 거쳐 1929년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하여 1932년 초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가 베나리오와 결별했고 올가 베나리오는 브라질 혁명가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테스와 함께 하게 된다.
2.2. 중국에서의 활동(1932~1939)
2.2.1. 상하이 임시당중앙 시절(1932~1933)
대학을 졸업한 브라운에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의 투쟁활동을 군사적 조언으로 도우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은 브라운은 오스트리아 여권을 소지한 상태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중소 국경의 만저우리에 도착했다. 만저우리에서 하얼빈에 당도한 브라운은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몇차례 상하이를 여행하는 등 중국의 형편을 알아보았고 1932년 가을에 최종적으로 상하이에 정착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국민정부가 공산당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어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검거되는 등 공산당원에게 매우 위험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브라운은 독일 활동 시절의 동지였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 대표 알토워 에벨트와 연락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박고[2] 와 낙보[3] 와 접선, 그들과 정치, 군사 문제를 토의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역사, 중국에 대한 정치적 지식을 습득하고 아그네스 스메들리나 쑹칭링같은 인사들과의 접선을 가졌다.
당시 장제스는 공산당이 장악한 소비에트들을 분쇄하기 위해 초공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제스의 세차례에 걸친 공격에 각 소비에트들이 입은 타격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당시 중국 공산당에겐 소비에트 지역을 안정,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경제정책 당기관과 지구조직들이 개편되었고 정규군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군사위원회 위에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군의 보충과 파견, 예비군 훈련, 독립부대와 빨치산 작전지도를 맡게 되었는데 이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장제스가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현대화된 중앙군을 바탕으로 한 제4차 초공작전을 감행하자 호북과 하남 일대의 장궈타오, 쉬샹첸의 홍군 제4군 근거지는 소멸하였으며 하룡의 제2군도 본 근거지를 버리고 장강 남쪽의 근거지를 버리고 호남-사천-귀주 성경으로 이동해야 하는 등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독립16사단은 호남군의 소규모 공격에도 붕괴되어 사실상 도적떼로 전락한 처지였다. 그나마 2군과 4군의 주력이 소멸했다고 오판한 장제스의 전략적 실수와 오토 브라운이 입안하고 상하이 지도부가 실행한 중앙방면군의 남풍에서의 반격이 성공하고 때마침 일본이 열하사변을 일으켜 장제스가 4차 초공작전을 중단시킴으로[4] 중국 공산당은 한차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브라운은 4차 초공작전에 대한 전훈을 수집하여 앞으로 다가올 국민당의 제5차 초공작전에 대비하게 된다.
우선 오토 브라운은 위태로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 1933년 1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항일을 명분으로 장제스에 반감을 가진 1933년 항일 연합군을 칭한 펑위샹이나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분전한 19로군 지휘관 차이팅카이 등의 군사실력자들과 접촉하여[5] 이들과 연합할 계획을 꾸몄다. 공산당은 소비에트구 및 홍군에 대한 일체 공격의 중지, 민주적 권리 및 각종 자유의 승인, 민중의 무장 3개 조건을 바탕으로 이들과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 했고 이에 따라 임시혁명정부와 홍군총사령부과 마오쩌둥과 주더의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베이핑에서 계획되었던 펑위샹과의 접촉이 연락원이 체포됨에 따라 무산되었고 베이핑으로 파견된 브라운은 러시아어를 쓰는 수상한 자들의 접촉에 위기를 느껴 에드거 스노우를 방문하여 그들을 피했고 에드거 스노우에게 펑위샹과의 만남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에드거 스노우는 오토 브라운을 믿지 않고 가벼운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속을 떠볼 뿐인지라 실패했다. 차이팅카이와의 접촉 역시 차이팅카이가 소극적으로 나오면서 없던 일이 되었으며 결국 펑위샹의 봉기 역시 실패로 끝났다.
1933년 여름, 코민테른 요원 만프레트 슈테른이 차이팅카이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니 먼저 홍군의 힘을 보여준 다음에 홍군의 편이 되도록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하이의 서기국, 루이진의 혁명군사위원회와 중앙 정치국도 동의했고 코민테른이 승인하면서 복건침공이 시작되었다. 19로군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으며 홍군은 많은 전리품을 거두었으나 이틈을 타서 장제스의 주력부대가 강서성 북부 지역을 절명하였고 19로군과도 더 이상 연락할 수 없게 되어 복건침공은 손해로 끝났다. 코민테른도 노선을 바꾸어 동맹자를 찾는게 아니라 국민당 진영 내부 모순을 활용하는 내전 지지 노선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2.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33~1934)
2.2.2.1. 중앙 소비에트로
상하이 당중앙에 대한 중화민국 당국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더 이상 상하이에서의 활동은 불가능해졌고, 보구, 뤄푸를 비롯한 임시당중앙와 중앙위원회 등은 일찍이 루이진의 중앙 소비에트로 이동한 후였다. 오토 브라운과 코민테른 요원들도 중앙 소비에트로의 이동준비를 서둘러 1933년 9월 말에는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이동 전 최후의 회의에서 코민테른 요원 만프레트 슈테른은 소련의 군사지원을 상정하여 정규군의 건설, 비행장 건설 등을 언급하며 국민당과 전면전을 치뤄야 하며 난창 일대로의 진공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토 브라운은 이 의견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이후 오토 브라운은 활동자금이 든 가방을 들고 영국배에 탑승하여 강서성으로 향했다. 그는 고대사 연구자로 위장하여 국민당의 검문을 피했고 상륙 후에는 홍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다. 당시 오토 브라운은 보통화는 조금 구사할 수 있었으나 그와 동행한 중국인들은 모두 광동어나 민남어를 썼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였다. 루이진에 도착하자 당 중앙위원 겸 보안부장 등발이 그를 맞이했다. 다음날 뤄푸와 보구가 그를 찾아와 그의 주거에 대해 설명했고 이천의 함락을 비롯하여 위태로운 전황에 대해 언급했다. 이후 마오쩌둥, 항영등과도 두루 만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형식적인 태도로 그를 환대했지만 북부전선에 대한 그의 지난 조언에 대해 칭찬했다.
오토 브라운은 비정규군을 동원하여 국민당에게 진지전을 강요함으로 그들의 진군을 늦추고 5군을 여천에 투입하여 방어하게 하고 1군과 3군을 가지고 북동부에 반격을 가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은 채택되었다."그 반격작전을 제안한 것이 당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민첩한 작전행동으로 국민당군의 외부 연락선 또는 내부 연락선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제안을 하신 일로 미루어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2.2.2. 제5차 초공작전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상당수의 소비에트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국민당 지배영역에서는 유격전과 파괴공작도 쉽지 않아 중앙 소비에트는 오로지 중앙 소비에트에 의존해야 했다. 경제적 상황은 국민당의 경제봉쇄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아직까진 자급자족할 수 있고 외부와의 교역도 가능했다. 중앙 소비에트는 국민당과의 싸움에 맞서 4만명의 신병을 충원하는 등 정규군의 군세를 급속도로 증강하고 있었다.[6] 국민당으로부터 많은 무기를 노획해 무장 상태는 호전되었으나 중화기 부족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리고 수송능력이 결핍되어 있던 것도 큰 문제였다. 이때 류보청이 정규부대의 편성에 대한 건의를 올려 오토 브라운의 심의 이후 혁명군사위원회의 재가를 받았다. 이는 홍군을 소련군 편제를 모방하여 개조한 것이었지만 무장과 인력의 턱없는 부족 때문에 소련군보단 당연히 심각하게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정치공작으로 군기가 엄정하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오토 브라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체류한 기간 동안 심각한 대민범죄는 강간 1건이 전부였으며 이 역시 신속하게 범인이 총살되었다고 한다.
간부들의 질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토 브라운은 일찍이 상하이에서 육군대학을 만들어 간부들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루이진에 도착한 상태에 육군대학이 개교하여 100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류보청과 저우언라이를 제외한 간부들은 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의 대부분을 포로가 된 국민당 장교들이 맡았기 때문에 독일군의 중화기 중심의 전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오토 브라운은 경장비만을 갖춘 유격부대를 위한 전술규범을 창안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민당 출신 장교들이 새 전술을 배우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자 오토 브라운은 이들을 서서히 교체했다.
한편 토치카 전술을 앞세운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오토 브라운은 11월 건녕의 전적사령부에서 저우언라이, 주더와 전술회의를 가졌다. 오토 브라운은 총사령부와 전적사령부를 통합하고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건녕에서 루이진으로 이동하며[7] 1군과 3군의 지휘권이 필요할 경우에 혁명군사위원회 참모에게 위임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승인되어 1934년 초에 실시되었다.[8]
2.2.3. 대장정
이후 국민당군의 초공작전에 밀려서 대륙 내부의 해방구들이 전부 무너지자 오토 브라운도 홍군 지도부와 함께 대장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장정 내내 매우 우울한 모습이었다고 하며 마오쩌둥이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 1935년 쭌이회의에서도 담배를 피우면서 침묵을 지켰다. 이후 대장정을 끝까지 완수하여 옌안에 정착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대장정 문서 참조.
2.2.4. 옌안 시절(1935~1939)
2.3. 말년
1939년 여름,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중국에서 소련으로 소환되었고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동독에서 중국 전문가로 활동했다.
1964년 중국문제에 관한 글을 최초로 발표함에 따라 자신이 '이덕'과 동일인물임을 드러냈다. 그간 마오쩌둥의 전기나 중국 혁명사에서 매번 이덕이라는 이름으로 숱하게 언급되었음에도 그 정체를 알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로 묘사되었다가 드디어 정체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제네바에서 거주하던 에드거 스노우가 그에게 이덕과 당신이 동일인물인지 확인해달라고 그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1967년 '상하이에서 옌안까지'라는 기사를 연재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오토 브라운의 중요한 저서인 <Chinesische Aufzeichnungen(1932-1939)>(중국의 기록)의 원전이 되었다. 중국의 기록은 상하이에서 옌안까지를 더 세밀하게 저술한 것이다. 사망 1년 전인 1973년 중국의 기록을 출판하였다. 해당 서적은 1984년 한국에서 <코민테른과 대장정>이라는 제목으로 정발했으나 30년도 더 전에 나온 것이라 현재는 당연히 절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금서 처분되었으나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 좀 풀어주기 시작하면서 연구용으로 허용되었다.
1974년 불가리아의 바르나에서 요양하다가 사망하여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2.4. 기타
- 1924년 이미 결혼해서 처가 있었으나 이혼하지 않고 중국에 와서 1933년 중국인 공산당원 샤오위에화와 결혼, 사실상 현지처를 두었다. 옌안을 떠나기 직전 이혼하고 홀로 모스크바로 귀환한다.
- 중국에서는 러시아어를 통해 소통했다. 이는 공산당 간부들중 상당수가 소련 유학파로 러시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 명목상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에 불과했으나, 사실상 홍군의 군권을 쥐고 총사령관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내에서는 "태상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3. 참고문헌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중국공산당역사,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Otto Braun's Curriculum Vitae - translation and commntary, Frederick S.Litten.
4. 관련문서
[1] 학교 자체는 1919년까지 계속 다녀 6월에 최종 시험에 합격했다.[2] 중국어 독음으로는 보구. 본명은 친방셴(진방헌 秦邦宪).[3] 중국어 독음으로는 뤄푸. 본명은 장원톈, (장문천 張聞天).[4] 오토 브라운은 장제스가 화북의 반독립적인 군벌들이 몰락하는 것을 구경만 하면서 실제로 5차 초공작전 준비에만 매달렸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중국 공산당 내부 사정만 알고 있던 오토 브라운의 오류이다. 자세한 것은 열하사변 문서 참조.[5] 여담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쉐량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상대할 수 없는 플레이보이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6] 하지만 여기에는 자원병으로 충당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강제 징병이 많아 20~30%에 달하는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병역을 기피했다.[7] 주더와 저우언라이가 혁명군사위원회 의장, 정치부 총주임 등을 겸임하고 있으니 중앙에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겨서 한 제안이었다.[8] 마오쩌둥은 1940년 이 주장이 오토 브라운의 지휘권 탈취 시도라고 주장했으나 저우언라이는 이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