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노동자 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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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언론과 중산층의 반응
4. 출처
5. 보충 자료


1. 개요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성행한 민주화 이후 최대 노동운동. 그 이전에 노동운동의 주를 이루었던 경공업 여성노동자[1]에서 중공업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번져간 일대 사건이었다. 1987년 6월 항쟁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최고의원이 6.29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7월부터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건설,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노동조합 수, 조합원 수가 크게 증가했고 민주노조 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 대폭적인 임금인상 등의 성과를 성취했다.

2. 전개


6월 항쟁의 승리와 6.29 선언으로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공간이 확대되자 가장 먼저 진출을 시도한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것은 7월 5일,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엔진(주)[2]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비밀리에 울산 옥교동의 한 디스코텍에서 권용목 노동자(1958~2009)를 위원장으로 앉힌 노동조합 결성대회를 치룬 게 시발점이었다. 그 열기는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종합목재(현 현대리바트) 등의 현대그룹 계열사 전체로 퍼져나갔다.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울산 전체로, 그리고 전국으로 번져갔다. 그 와중에 일어난 7월 16일 현대미포조선의 노조결성 서류 탈취사건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기름을 붓게 되었다.
삼성의 이병철처럼 현대의 왕회장 정주영 역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는 허락될 수 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러면 당신 눈에 흙을 넣어주겠다."'''면서 노조 결성에 나섰다. 그런 한국 최대 재벌 현대도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 그 싸움은 8월 17일에 현대그룹 계열 6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벌인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중장비를 앞세운 노동자들의 시위에 경찰은 아예 최루탄 쏘기를 포기했다. 경찰이 물러서면서 이날 시위는 큰 유혈사태 없이 끝났으나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날의 시위는 노동자 대투쟁의 절정으로 꼽혔다.
이때의 노동자 투쟁은 6.29 선언 이후부터 8월 초순까지는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되어 8월 중순에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8월 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정부의 대응이 강경 일변도로 변하여 9월 3일에 임금협상이 진행 중인 울산 현대중공업과 9월 4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대해 각각 강제진압을 감행함으로써 그 기세가 꺾여 다시 원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 식은 건 아니었다. 다만 점거농성과 파업 등 과격한 투쟁형태가 줄어들 뿐이었지 노조 건설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한 연대조직의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는 1988년에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등의 기업/업종/지역별 협의체로, 1990년에는 전국구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로 이어지게 된다.
이 두달 사이의 투쟁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는 1987년에 일어난 노동쟁의 3,749건 중 총 3,241건에 달해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으며, 이는 1980년 서울의 봄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동쟁의와 비교해도 6배가 넘는 수치였다.[3] 단기간에 너무 많은 노사분규가 발생하자 87년 8월에는 공장가동률이 일시적이지만 81%에서 69.4%로 급락하고 국제수지 흑자규모가 그 전달의 7분의 1로 감소한다. 또 이런 폭발적 노동자 투쟁은 '민주노조'라는 조직적인 성과로 이루어져 1987년 6월 30일 당시에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1987년 6월 말과 비교해 각각 106%, 66%라는 경이적 성장을 나타냈다.[4]

3. 언론과 중산층의 반응


6월 항쟁과 6.29 선언까지만 해도 기회주의적으로나마 '반군부', '반 권위주의'의 목소리를 내던 언론이 노동자 대투쟁 때부터 변신하여 기존 체제 보호에 힘쓰는 보수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당시 언론들은 <우리 경제 뿌리채 흔들린다>라는 선동적인 기사 제목을 내건 채 "계급혁명과 노동해방이념 하에", "불법 집단사태", "악성분규를 주도하는" 등의 표현으로 노동자 대투쟁을 좌경폭력적 운동으로 각인시키는 데에 열을 올렸다. 이들의 은폐 및 왜곡보도는 어용노조 퇴진 요구로 인한 사건을 노조 주도권 싸움으로 격하한다든지, 노동운동을 분열 및 탄압하기 위해 관리직 등으로 구성된 구사대의 폭력 등을 미화하고 노동운동의 원인을 왜곡하거나 축소/은폐하고 경찰 및 구사대의 폭력행위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 식으로 나타났다.
또 야당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도 다른 자세를 취했는데,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보다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했고, 집권당인 민정당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분규 해결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산층 역시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 거리를 두었는데, 임영일 교수는 그들이 6월 항쟁에서 얻은 성과에 대한 훼손을 우려해 거리를 두었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6.29 선언이 이루어진 때는 3저호황 시기였다.[5]
이러한 반응 때문에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과 달리 바로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데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6월 항쟁에 비하면 대단히 인지도가 낮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주체를 분리해서 보는 경향은 훗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게 된다.

4. 출처


  • <대한민국 50년사> 2권. 임영태 저. p187~188.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권. 강준만 저. p183~185.

5. 보충 자료



[1] 이 시절의 대표적 경공업 여성 노동운동가 중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청계천 노동자의 어머니로 불리우던 이소선 여사가 있다. 전태일의 집안은 전태일의 부친부터 쭉 섬유피복 쪽 수공업을 했어서 이소선 여사 역시 남편과 함께 원래 그쪽 업계 종사자였고, 아들 전태일의 분신후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서 나선 것.[2] 1989년에 현대중공업에 합병.[3] 원 출처 : <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김장한 외 공저)>. 조국. p156.[4] 원 출처 : <새벽을 여는 함성(한국노동연구소 편)>. 현장. p11~12.[5] 원 출처 : <한국의 노동운동과 계급정치(1965~1987)>. 임영일 저.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