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조합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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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회원들의 행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全國勞動組合協議會
'''약칭'''
전노협
'''창립일'''
1990년 1월 22일
'''해산일'''
1995년 12월 3일
'''임원진'''
초대
'''위원장'''
단병호
'''조직국장'''
심상정
'''조합원 수'''
약 12만명, 456개 단위노조 (1991년)
'''슬로건'''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
1. 개요
2. 창립 이전의 역사
2.1. 노동자 대투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
2.2. 민주노조 건설운동
2.3. 건설, 전노협
2.4. 눈보랏길 속의 전진
2.5. 결실을 맺다
3. 여담
4. 역대 지도부
5. 전노협 진군가


1. 개요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6.25 전쟁 이후 최초의 전국단위 민주 노조[1]
현재 존재하는 민주노총의 전신, 거의 모든 들의 뿌리이자 노동운동계의 거두. 슬로건은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이었으나 전노협 진군가의 영향으로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을 더 많이 썼으며, 대체로 PD성향이었다.

2. 창립 이전의 역사


대충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순까지의 모든 노동운동이 전노협의 깃발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면 된다.

2.1. 노동자 대투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


1987년 조국은 끝끝내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기계적인 의미의 민주화였지 노동, 시민사회, 언론 전 분야에서 군사 파쇼의 독버섯같은 잔재가 남아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전태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곳곳에 방직, 섬유피복, 여성 생산직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지만, 이중 2~3년 이상 가는 곳은 몇 곳 되지 않았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건설은 꿈에도 꾸지 못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성공으로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억눌렸던 진보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그중 가장 억눌렸던 계층, 노동자들의 각성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난 직후인 1987년 7월, 최소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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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투쟁의 막을 올린 현대 노조의 봉기
울산 권역에서 비밀리에 시작된 현대차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탄압 국면을 맞자, 7월 5일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이 창원, 마산을 거쳐 계속해서 북쪽으로, 북쪽으로 확산되어갔다. 전국적으로 3천여회의 파업이 일어나, 하루에 40회가 넘는 동시 파업이 이어졌으며, 겨우 4천여개에 불과하던 노동조합은 이후 7천 1백여개가 되었고, 노조 조합원의 수는 180만명으로 전해의 두배, 노조 조직화율은 거의 20%에 육박했다.[2] 하지만 8월 28일경 노조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에 백골단이 투입되는 것을 기점으로 진압은 강경 일변도로 변했다. 정권이 안정되자 언론도 다시 보수 우익의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연신 과격, 좌익용공집단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언론에 노출되어 조금씩 노동운동에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민주당계 정당들 마저도 집회의 자제를 요구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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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그러나 노동운동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으로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한 노동운동은 이제 산별, 점조직별 민주노조 건설 운동을 넘어 전국적이고, 진보적인 민중과 연대할수 있는 새로운 상설 합의체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 갈망이 바로 '''전국적 민주노조 건설운동'''으로 계승되었다.

2.2. 민주노조 건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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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기념 가두 집회 모습, 1989년 4월
'''민주노조'''라는 단어 자체는 노동조합이면서도 독재정부에 기생해 고용자들을 탄압한 한국노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진보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뜻했고, 이미 70년대부터 이어내려오고 있었지만, 이는 산발적이었고, 전국적이지 못했으며, 복수노조 금지법에 의해 계속해서 탄압당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의 거의 모든 노동운동가들은 한국노총에 가입한 채로 민주적인 운동을 펼치는 일명 '민주파'라고 불리었다.
개별으로의 민주노조 건설운동의 한계는 이미 뚜렷했다. 대투쟁 전에도 노동운동가들은 점차 지역별, 업종별, 기업별 노동조합 연대체를 건설하며 전국 단위의 민주노조를 건설할 토대를 세웠다. 전태일이 세운 청계피복노조를 계승하여, 85년 6월에 심상정, 박노해, 유시민등이 서울노동운동연합을, 87년 6월, 노회찬이 주도하는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을 건설하였고, 그해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13개 시,도,군에 노동조합 연맹이 생겨났다. 또한 그에 발맞춰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연구전문기술직노동조합협의회 등 업종별 노동조합, 현대차 노조, 풍산금속 노조 등 기업별 노동조합도 생겨났다.
이들은 꿈에 그리던 전국 연대체를 건설하기 위해 88년 6월, (가)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를 건설했다. 하지만 창립식에는 어김없이 백골단과 구사대의 탄압이 몰아쳤고, 수십명의 노조 지도부가 줄줄히 잡혀갈 수 밖에 없었다. 전국단위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법에 명시되어있는 세 가지의 독소조항. 바로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 금지, 공익사업 직권중재등을 폐지시켜야만 했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투쟁본부를 설치하고 11월부터 서명운동, 연좌 투쟁, 학생들과의 연대를 통한 여론 조성에 힘썼다. 전경련과 정부는 노조 조직원들에게 임금을 의도적으로 체불하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노동자들을 전부 연행해가면서, 오히려 6월 항쟁때보다도 많은 연행자들을 발생시켰다. '노조가 경제를 망친다'라는 오래된 프레임도 이 시기부터 주요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결국 일반 시민들의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88년 12월22일 민주노조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가 결성되었고,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비롯한 17개의 지역노조협의회,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를 비롯한 4개의 업종협의회가 참여했다.[3] 이들의 목적은 하나, 어용적 한국노총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국단위 민주노조의 건설이었다. 이들은 창립을 약 1년 후인 90년 1월 22일로 비정하고, 준비기간동안 실무, 규정, 각 노동조합들의 결집등을 위해 노력하기로 정했다. 전국회의의 이러한 물밑작업은 경찰과 정부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고, 정부도 수백명의 민주노조 준비위원들을 체포하고, 89년 12월부터 갑호 비상령을 선포하는 등 탄압에 물을 올렸다. 그 와중에 노동운동계에선 '한국노총 개혁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2.3. 건설, 전노협


우리는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 비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로써 탄생했습니다... (중략)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새 날이 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전노협 초대 위원장 단병호, 창립선언문에서.)

1990년 1월 21일, 이미 수십 지부의 노조위원장들이 체포되거나 가택연금된 상태였고, 노태우 정부는 '전노협 엄단'을 선포하며 모든 경찰병력을 창립대회 개최지로 보이는 지점에 배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22일이 되면 갑호 비상령까지 선포할 계획이 언론으로 퍼지면서, 전노협의 창립대회는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노협 준비위원들의 투표로 초대 위원장에 추대된 단병호 마저도 수배중이었다. 전노협의 중앙위원들은 서울이나 경기권의 특정한 장소를 물색중이었지만, 모든 대학, 광장, 심지어 조금 넓다 싶은 지하철역들까지에도 모두 전경이 배치된 상태였으므로, 창립대회의 강행 자체도 1월 21일 밤에나 확정되었다.
하지만 1000여명에 가까운 전노협 대의원들을 경찰에 들키지 않고 출범식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노조간부들에게 사복경찰 미행이 붙었던데다가, 초대 전국위원장 단병호는 장신에 깡마른 체형, 매서운 눈빛 때문에 쉽게 눈길이 가는 외모였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중앙위원들은 처음엔 단병호 위원장을 포기하고 총회를 가질까 생각했지만, 그가 가진 상징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떠오른 묘안이 바로 성동격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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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창립대회가 경희대학교에서 열린다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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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출범식을 서울대, 성균관대, 한양대에서 연다는 포스터와 언론 인터뷰도 만들어 놓았다. 각 지역의 대학들도 전노협 결성식이 자기네학교에서 열리는것처럼 꾸며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1월 22일 새벽, 전노협의 주요 간부들이 의정부역을 통해 도봉산역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경찰에 들려왔다. 이들이 예상했던 도보나 산개후 집합이 아닌 서울지하철 1호선을 타고 빠른 속도로 서울 중심부를 향한다는 소식이 접수되자, 서울 경기 지방에 흩어져있던 대부분의 경찰병력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주변에 있는 대학가와 광장을 포위하기 위해 위치를 벗어났다. 수원, 광명, 고양등의 전투경찰들도 수십, 수백대의 전경버스에 나눠 탄 채 서울로 올라왔고, 경기권의 대학가는 한순간에 상주 경찰인원을 제외하고 텅 비어버렸다.
1시가 될 무렵에는 창립 대회가 진행될만한 1호선 주변의 대학가들은 모두 소개되어있었다. 의정부에서 전철을 타고 움직이던 대의원 백여명이 체포되었던 데다. 전노협이 출범식을 12시에 연다고 공표했는데 1시가 가까이왔는데도 아무일도 없었던 만큼, 전노협 창립대회가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가 언론에서 돌기 시작했다. 정부 또한, 단병호를 체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전대협 출범식은 원천봉쇄를 성공했다고 조금씩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폭풍은 다른 곳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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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은 몇몇 대의원들을 희생시켜 경찰병력을 서울로 집중시킨 다음 기습적으로 성균관대학교 수원 자연과학캠퍼스에 집결했다. 1월 22일 새벽을 기점으로, 서울권역의 노동자들이 이 작전을 각 대의원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 어찌나 비밀 엄수가 확고했던지 경찰은 이들의 숫자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도봉산으로 향한 유인조의 인원들도 절반 넘게 체포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1호선을 돌아 수원으로 향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4]
이들은 수원행 전철 속에서 그대로 인원을 파악한 후[5], 바로 성대 수원캠퍼스로 돌진했다. 수원 캠퍼스에는 상주 경찰 몇 십명만 남은 상황이었고, 전노협 대의원들은 백여명이 사전체포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8~900명이나 되는 대규모였다. 경찰들이 줄행랑을 치고, 주변이 어수선해지자,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회는 자신들의 학교가 전노협 출범식의 장소로 간택(...) 되었다는 것을 알고 환호를 불렀다. 각 대학의 공대생들은 '전노협 건설지원 공대위원회'를 구축하고 내로라하는 사수대인원들을 뽑아 성균관대 수원캠퍼스로 보내기 바빴다. 당연히 수원 전경들은 모두 서울로 가 있으니 전노협 창립식을 방해할 병력은 하나도 없었다.
수원으로 복귀한 첫 진압부대는 이미 전노협 창립대회가 끝나 학내 가두행진으로 번져나가는 상황에서 도착했다. 시위대가 두 세 배 불어 수천명이 된 상황이었기에, 그나마도 수적으로 부족하여 금방 패퇴하였다. 하지만 다음으로 들이닥친 두번째 진압부대는 백골단과 구사대를 위시한 엄청난 숫자로 수원캠퍼스를 포위했다. 단병호와 전노협 중앙위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전노협 선봉대와 대학 사수대들의 치열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눈이 내리고 땅이 얼어 던질 돌도 없던 데다가, 비밀리에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화염병도 전혀 챙기지 않았던 사수대원들은 말 그대로 맨몸을 던져 단병호를 학교 바깥으로 탈출시켰다. 전원 체포를 각오한 141명의 노학연대 사수대는 장렬하게 전경들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그 희생 덕분에 전노협은 위원장을 잃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같은 날, 노태우, 김영삼이 야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서로 극과 극인 두 집단이 같은 날 같은 눈보라를 맞으며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2.4. 눈보랏길 속의 전진


출범하자 마자, 전노협은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출범일인 1월 22일부터 그해 6월까지, 900여명의 남은 대의원 가운데 262명이 체포되고 10여명이 수배되었다. 국제노동기구는 전노협 창립을 폭력적으로 방해한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고 시정조치를 권고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이를 들을리가 없었다.
전노협은 3당 야합 저지, 노동 개악 저지를 모토로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대규모 연좌 단식과 파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전노협 산하 160개 노조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압수수색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전노협의 세는 점차 불어났고, 1990년 끝 무렵에는 20만 조합원과 600여개의 단위노조를 거느린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이 강행한 3당 합당, 임금 억제와, 공안 정국등으로 서민, 화이트칼라층도 전노협에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서며, 언론과 방송도 방송 민주화 투쟁으로 전노협에 화답한다.
그러나 계속된 탄압은 전노협의 조직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1991년경 100여개에 가까운 전노협 산하 노조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하거나, 전노협에서 탈퇴했고, 1991년의 대기업 업무조사로 현대, 대우등의 대기업 노조들이 간부를 잃었다. 1993년까지 체포된 노동자들의 수는 총 1,973명에 이르렀다. 심지어 제 3차 전노협 결의대회는 대부분의 대의원이 구속되어있던 관계로(...) 구치소에서 개최되기까지 했다. 조금씩 전노협의 활동력은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 방향성도 '''합법적 민주노조의 결성''' 인지, 아니면 '''변혁적 노동해방의 실천'''인지 확실하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별 노조, 지역별 노조 그대로 활동하며 산업별 노조로 확장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점또한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1991년부터 2천여명이 넘는 구속자와 5천여명이 넘는 해고자를 낸 거대한 전노협 투쟁은 골리앗 크레인 파업과, 마창노련의 파업 실패, 단병호문성현 등 수십명의 지도부가 구속되는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막을 내리고 있었다.

2.5. 결실을 맺다


전노협을 시작으로 전국단위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는 조직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권영길 위원장이 이끄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와, 국제기준을 따르자는 ILO공대위,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운동 진영 전체가 탄압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고, 1993년, 권영길을 위원장, 단병호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전국노동운동대표자회의를 건설했다. 이들은 94년부터 모든 민주, 좌파적 노동조합을 포괄하는 전국조직 건설을 목표로 실무협의에 돌입했다. 새로운 노조는 기존의 생존권 쟁취 투쟁에 더해,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 허가 투쟁, 사회개혁 투쟁을 임금인상 투쟁과 결합하여 주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등 대중성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이른바 '''민주노총 준비위'''가 시작된 것이다. 1995년 후반기가 되자 흔들리는 전노협을 대신할 새로운 전국단위 노조가 윤곽을 드러냈다. 11월 11일, 세 민주노조가 합쳐져 40만 조합원, 천여개의 노조가 참가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즉 민주노총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바로 다음해부터 권영길 위원장을 위시한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반대 총파업을 주도하며 제1노조라는 위상을 과시했다. 민주노총의 건설은 흔들리던 전노협에게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고, 전노협은 민주노총이 결성된 그해 12월에 발전적으로 해산하면서 흡수되었다.민주노총은 노사분규간 제3자 참여 허가, 복수노조 건설 허용이라는 전노협의 염원을 대신 이루어주며, 말 그대로 전노협의 후예가 되었다.

3. 여담


흔히 평등파의 세 거두,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를 부르는 노심조라는 단어는 사실 전노협의 평등파 거두들 즉 단병호, 문성현, 심상정을 부르는 '''단문심'''에서 파생된 단어였다. 노회찬, 조승수도 마찬가지로 전노협 출신이었다.
흔히 민주노총에서 '중앙파'라고 부르는 이들이 바로 전노협의 금속연맹, 전문노련, 사무금융노련 등의 집행부를 거친 온건 평등파들이다.

4. 역대 지도부



  • 초대 ~ 4대 단병호 (1990~1993)
  • 5대 양규헌 (1994~1995)

5. 전노협 진군가



1절
2절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1] 전쟁 전에는 전평이 있었다.[2] 이는 현대 미국에 가까운 정도의 조직화율으로, 당시 전 세계 진보 좌파 정당과 노조들에 비교해도 많이 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서구의 노조운동가들이 한국의 열정을 본받고 싶어했을 정도..[3] 이 외에도 전교조, 운수노조 등 수십개의 비합법 민주노조들이 참관, 참여했다.[4] 나중에 티비로 전노협 창립식을 보았던 이 체포된 대의원들은, 자신들과 함께 유인조로 있던 동지들이 수원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서대문경찰서에서 전노협 간부들끼리 대의원 분회를 연 건 덤...[5] 전철 내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서로를 확인했다고 한다. 전철역 내 경찰들이 서로 완전히 모르는 시민들이 따로 탑승한 건 줄 알고 그대로 무시해버렸을정도로 연기력이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