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역대 대학수학능력시험'''
2003 수능

'''2004 수능'''
(2003.11.5.)

2005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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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최후의 6차 수능
3. 6, 9월 수능 모의평가
4. 시험의 상세
6. 최초의 수능 복수정답 인정
7. 기타


1. 개요


2003년 11월 5일 실시되었다.[1] 2003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5년 3월생~1986년 2월생이 응시했으며, 6차 교육과정이 적용된 최후의 수능이다. 그 다음해인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는 7차 교육과정이 적용되어, 수능 체제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접수자 67만 3785명, 응시자 64만 2583명이었다. 1999년 11월 17일 실시된 2000학년도 수능에서 접수자 89만 6122명, 응시자 86만 8366명으로 절정에 달한 이후 계속해서 접수자와 응시자가 줄었으며, 이러한 감소세는 2008학년도까지 이어졌다.[2]
참고로 이 수능부터 소수점 배점이 폐지되고 정수 배점으로만 표기한다. 이유는 전년도 수능에서 소수점 배점 반올림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 이로 인해 소송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언어영역의 경우 문항당 배점이 1.8점, 2점, 2.2점에서 각각 1점, 2점, 3점으로 바뀌었고, 문항당 배점이 1점, 1.5점, 2점이었던 사회/과학/외국어 영역의 경우 1.5점 배점 문항을 폐지하고 1점과 2점만 남았다. 수리영역은 진작에 정수 배점으로 바뀌여서 그대로 2점과 3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언어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과학/외국어 영역의 경우 대부분의 문제들이 1.5점 배점이었는데, 이 수능에서 해당 문제들이 1점과 2점으로 양극화되면서 문항당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이에 수험생 간의 총점 격차도 커져 배점이 큰 문제를 풀고 못 푸느냐가 당락에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상술했듯 본 수능은 최후의 6차 수능이다. 이 때까지의 수능이 2005학년도와 그 이후 수능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패러다임 자체가 영역별 성적 중심이 아닌 400점 만점의 총점 중심이었다는 것. 일반적으로 이 때까지는 수능 성적이라 하면 “400점 만점에 XXX점”이라는 식으로, 전영역 총점이 몇 점인지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영역별 성적은 부차적 요소였으나, 2005학년도부터는 수능 체제의 대대적 개편으로 총점이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영역별 성적 위주의 전형이 자리잡게 된다.

2. 최후의 6차 수능


2005수능부터 적용된 7차 수능과는 다음의 차이가 있다.
첫째, 계열별 구분이 있'''었'''다. 인문계열, 자연계열, 예체능계열로 계열 구분이 되었다. 교차지원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물론 계열 구분이 폐지되고 수험생이 전영역/과목을 임의 선택할 수 있는 7차 수능에서는 엄밀히 말해서는 틀린 말이다. 이 때에도 언어 영역과 외국어 영역은 7차 수능과 마찬가지로 모든 수험생이 같은 문제를 풀었으나, 계열 구분 탓에 백분위를 계열별로 따로 매겼으므로 같은 원점수를 받아도 계열이 다르면 백분위가 다르게 나온다.
둘째, 원점수를 공개했'''었'''다.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는 원점수를 공개하지 않는다. 5차 교육과정 때는 선택과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6차 교육과정 때는 선택과목 제도가 있었지만 선택과목 비중이 400점 만점 중에서 인문계는 15점, 자연계는 24점에 불과하여 그 영향이 미미해서 원점수만으로도 충분히 진정한 실력자 우열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7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전 영역'''이 선택사항이 되면서 원점수만으로는 진정한 실력자를 우열하기 어려워져 원점수가 폐기된 것이다.
셋째, 총점과 5개 영역 종합등급을 제공했'''었'''다. 종합등급이 있었기 때문에 총점이라는 획일화된 기준에 의한 전국석차 추정이 비교적 쉬웠던 편이었다. 7차 수능에서는 계열 구분이 폐지됨에 따라 응시집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총점과 영역 종합등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총점은 이미 2002학년도 수능부터 등급제가 실시되어 이때는 이미 성적표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원점수가 공개되기는 해서 이것을 다 더하면 나오기는 했지만.
넷째, 교육과정상의 차이
다섯째, 제2외국어영역에 아랍어1과 한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섯째,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중 택일하여 응시하는 7차 수능과는 달리 전 계열이 사탐과 과탐을 둘 다 풀'''었'''다. 일단 공통영역[3]은 인문계, 자연계, 예체능계가 다 공부해야 했다. 다만 인문계는 사회탐구에 심화선택[4]이 있었고, 자연계는 과학탐구에 심화선택[5]이 있었으며, 예체능계는 두 영역 모두에 심화선택이 없었고 공통영역에서만 문제가 나왔다.

3. 6, 9월 수능 모의평가


기존에 6, 9월 시행하는 교육청 학력평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모의수능으로 대체되며, 고3과 졸업생들에게 응시 기회가 부여됐다. 6월 11일과 9월 2일, 2차례 시행되었으며, 이때부터 수능 모의평가 체제가 굳어진다.
6월에 치러진 모의평가는 재수생이 초강세였으며, 지난해 수능 대비 10 ~ 14점 상승하였다.
9월에 치러진 모의평가는 신유형이 등장했으며, 지난해 수능과 난이도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올라갔다.
N수생은 6월 모평을 5월 2일부터 16일까지, 9월 모평을 7월 21일부터 8월 6일까지 학원 또는 출신학교에서 접수할 수 있었고, 응시 수수료는 6천원으로 인상되었다. 또한 학원에서 신청하는 경우 시험감독료 등의 추가 수수료를 부담하기도 했다.

4. 시험의 상세


시험은 다음과 같이 총 5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는 2000학년도에서 2001학년도로 넘어가면서부터 언어와 외국어에서 각각 5문항씩 문제 수가 줄고 이에 따라 시험 시간도 10분씩 줄어든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면 6차 수능(1999학년도~2004학년도) 모두에 있어서 동일했다.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는 같은 교시에 시험을 치렀는데, 두 영역 간의 시간 배분은 따로 없이 제한 시간인 120분 안에 두 영역의 문제를 모두 풀면 되는 체제였다.
교시
영역
계열 구분
문항
배점
시간(분)
1
언어 영역
공통
60
120
90
2
수리 영역
인문, 자연, 예체능
30
80
100
3
사회탐구 영역
인문, 예체능
48
72
120
자연
32
48
과학탐구 영역
인문, 예체능
32
48
자연
48
72
4
외국어 영역
공통
50
80
70
합계
220
400
380
계열을 막론하고 언어 영역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는 것이 11년에 걸친 5차 및 6차 수능의 특징이다. 2001학년도에 신설된 제2외국어 영역은 원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응시할 수 있었으며 총점 산정에서도 제외되었다.

5. 난이도


언어영역은 직전 2개년도의 수준을 따라 상당히 어려웠으며, 만점자 '''6명(인문계 2명, 자연계 4명)'''으로 작년(인문계에서만 1명)보다 늘어났으나 1등급컷은 120점 만점에 인문계 '''99'''점, 자연계 '''102'''점으로 줄어들었다. 110점 이상이 문과 1059명(0.345%), 이과 1337명(0.660%)이었으며 115점 이상이 문과 129명(0.037%), 이과 137명(0.067%)였다. 이 시험 역시 잘하면 5개 틀린것까지 백분위 100을 받을 수 있던 시험이다. 문과의 경우 원점수 105점까지 받아도 1.5% 이내라서 백분위 99가 나올 수 있었다. 02, 03수능 언어영역까지는 최상위권 수험생 절대인원이 문과가 더 많았으나 04수능 언어영역은 이과가 더 많아 강세였던 시험이다.
수리영역은 문이과 막론하고 쉬워졌으며 만점자가 이과는 '''4874명(2.412%)'''으로 이과는 2%를 넘었으며 하나 틀리면 1등급 컷에 걸리는 수준이었다. 문과도 꽤 쉬워 만점자 '''2822명(0.822%)'''이었고, 75점 이상이 7994명(2.33%)에 달했다.
외국어는 문이과, 예체능 포함해 만점자 3804명으로 작년에 비해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쉽게 출제되었다. 이과의 경우 75점 이상이 27000명대로 13%를 넘어갔다
과학탐구 영역이 전 계열 모두에서 끝내주게 어려웠다. 과탐만 놓고 보면 6차 수능 최고의 핵폭탄. 이과는 72점 만점자가 '''8명'''밖에 없었으며 60점 초반에서 1등급컷이 형성되었다. 문과는 더욱 처참하여 48점 만점을 받은 사람이 2명이었다. 원점수 38점을 받으면 1%가 찍혔고 35점(100점 만점에 72점 정도)을 받아도 4% 이내였다. 사회탐구는 03수능보다는 쉬웠던편.
전체적으로는 수리와 외국어가 자연계의 경우 만점자 수가 전체 응시자 수의 1%를 상회할 정도로 상당히 쉬운 축에 속했기에 언어와 과탐의 2개 영역이 총점의 판도를 좌우했다. 이과의 경우 400점 만점에 380점을 받은 경우 0.1%로 추정될 정도로 어려웠다. 전영역 만점자는 2002학년도, 2003학년도에 이어서 이해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수준은 2002학년도 수능보다 낮았으며 2003학년도 수능과는 비슷했다. 문과의 경우 과탐을 제외하면 2003수능보다 쉬웠던편.

6. 최초의 수능 복수정답 인정


사상 처음으로 수능 복수정답이 인정된 해이기도 하다. 언어영역 17번 문항이 논란이 되었던 그 문제다.
이 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중도 사임했다.
관련 논란은 대학수학능력시험/복수정답 사태에 정리되어 있다.

7. 기타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시작으로 도입된 수리영역 I 주관식의 음수 문제 및 30번 문제의 소수점 마킹이 이 수능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6] 이유는 마킹시 실수가 잦기 때문. 이후 수능은 음수나 소수가 아닌 '최대 세자리 자연수'를 마킹하게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1] 여담으로, 수능이 2번 치뤄졌던 94년 1차 수능(93.08.20)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통틀어 가장 빨리 실시된 수능이다.[2] 2000학년도 수능 당시 고3이였던 1981년 생의 인구가 약 87만 명으로 많았던 것도 있고 1983년 이후 산아제한으로 인해 1982년 생과 1985년 생의 인구 차이는 '''20만 명'''에 육박한다. 1980년대 최저 출산율(1.53명)을 보인 1987년 생과 1981년 생의 인구 차이는 '''26만 명'''..[3] 사탐은 윤리, 국사, 일반사회, 한국지리가, 과탐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기초과정인 이른바 "공통과학"이 공통영역에 속했다. 사탐의 국사는 근현대사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며, 공통과학은 7차 교육과정의 과학 1 과목과 비슷하게 혹은 살짝 덜 배우는 정도였다.[4] 정치, 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세계지리 중 택1[5] 물리II, 화학II, 생물II, 지구과학II 중 택1[6] 시중의 기출문제집을 풀다가 뜬금없이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반올림해서 답을 표기하라'는 말이 나오면 이 시절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