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1. 개요
2. 상세
2.1. 1996년까지 이어진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대한 의견
2.1.1. 옹호론
2.1.2. 비판론
3. 대책 및 후유증
4. 관련 문서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1980년대 정부가 내세웠던 대표적인 가족계획 캠페인 표어

[image]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

차범근과 그의 아내 오은미 씨, 장녀 차하나 씨와 같이 등장한 산아 제한 캠페인 포스터.


1. 개요


대한민국에서, 1983년 계해년(癸亥年)부터 1987년 정묘년(丁卯年)까지 일어난 출산율 하락 현상 및 저출산 경향.[1]


2. 상세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산아제한정책)을 해왔지만, 그 성과가 미미하자 1970년대부터는 둘 낳는 집안은 각종 혜택을 본다는 식으로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 인구들이 출산할 시기가 되어도 출생자가 좀처럼 줄지를 않자 결국 1980년대와서는 '하나씩만 낳자'고 매우 강력하게 나갔다. 이로 인해 1983년에는 합계 출산율이 인구 대체 마지노선인 2.1명에 조금 미달했다가(2.06명 769,155명)[2], [3] 이듬해인 1984년부터는 그보다 훨씬 아래(1.74명 674,793명)로 떨어졌다. [4] 특히 1987년의 출산율(1.53명 623,831명)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출산율과 비슷한 수준.[5] 당시 출산 가능 연령대 인구에 1차 베이비붐 세대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태어난 아이의 수는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 때까지의 출산율[6]을 생각해보면 심각하게 낮은 수준이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형제가 없는 외동인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금 전세계 기준으로 외동 인구 비율(30대 이하)로 따진다면 2위일 정도로 흔하다고 한다. 그럼 1위는(...)... 아시다시피 계획생육정책을 실시한 중국.
다만 당시 산아제한 정책을 느슨하게 시행시킨 일부 시골 소도시 지역이나 특히 제주도 전 지역[7]의 경우 평균 출생아 수가 2.0명을 훌쩍 넘긴 2명대 중반이었으나 이들 지역도 80년대 후반에 와서야 2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렇게 1980년대 이미 대체출산율 2.1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당시 정부에선 '''1996년까지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는 오판을 하고 만다.'''[8] 이런 정부의 오판은 산아제한 정책 폐기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1996년에 와서야 겨우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하였다.
1990년 이후 산아제한 정책을 실질적으로 중단하자 외환위기 이전까지 경제호황에 따른 사치풍조로서 늦둥이 출산이 급격히 늘어 출산률과 출생아 수가 반등하는 현상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외환위기 이후에도 밀레니엄 베이비 유행이 끝나고 난 2002년 이후이며,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출산률이 다시 늘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산아제한을 너무 일찍 종료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9] 다만 늦둥이 출산이 반짝 늘은 것으로 출산율이 안정화될 수 있는게 아니었던 데다, 산모가 될 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별 의미 없는 주장이었다. 이후 외환위기가 오면서 출산율은 다시 고꾸라치고 만다.[10]
2002년에 출산율이 1.18명을 찍어 초저출산으로 돌입하자 뒤늦게나마 출산장려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출산율은 큰폭으로 올라가지 않고, 1.1~1.2명대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11] 그 이후 등락을 반복하다가 2018년 1.0명이 붕괴해 0.98명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 태어난 남성들이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병무 대상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 중반이었다면 절반 정도가 방위로 빠졌을 남성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얄짤없이 현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12] 이로 인해서 이 시기부터 현역 기준이 많이 완화되었다. 병역비리 등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여러 가지 병역 면제나 보충역 대상이었던 신체/장애/학력미달 기준이 줄줄이 강화/삭제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중반생들의 인구가 조금 많아서 일시적으로 기준이 올라가기는 했다. 물론 이 세대가 병역을 끝내는 2020년 이후에는 오히려 더 강화된다.
이 시기에는 낮은 출산율과 남아선호 사상이 겹쳐서 남초 현상이 매우 심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선호 사상 그 자체로는 남초 현상을 유발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발달로 태아의 성별을 미리 감별할 수 있게 되면서 딸을 임신하면 낳는 게 아니라 아예 낙태 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급격하게 성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에게 큰 해악을 끼치기 시작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 참조. 물론 현 세대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줄어들고 워낙 출산율이 줄어들어 낙태가 남초 현상을 유발한다고 볼 수 없지만 아직도 셋째 출산성비는 109로 자연성비 이상을 보여주고 있기에 여전히 위험성은 도사리고 있다. 2017년 들어 셋째 성비도 107 밑으로 떨어졌다.[13]
또한 이 시기에 태어난 학생들이 주로 보는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지원자 수와 응시생 수가 70만명을 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저출산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1983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1년 11월 시행) 부터 매년 응시생 수가 감소하였으며, 1990년생들이 주로 응시했던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2008년 11월 시행) 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이는 출산율 이외에도 대학입시 정책의 변화 등도 한몫하였다. 또한 2016년에 역대 최저 출생아 수를 기록했던 것도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무렵에 혼인 및 출산 세대로 진입해서라는 분석도 있다.[14]
그리고 30대 이후 성인이라면 각자 자신이 졸업한 초, 중, 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최신 입학 인원수가 몇 명인지 검색해 보자. 아무리 못해도 30~40%, 심한 곳은 70% 넘게 줄어있을 것이다. 물론 동탄신도시세종특별자치시같은 신흥 신도시의 경우 농촌 학교의 이전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어 감소폭이 작을 수 있으나[15], 대한민국 초, 중, 고등학교의 90% 이상 해당하는 얘기라 생각하면 된다. 다만 강남3구만은 예외다. 한 학년에 심하게는 20반까지 있던 학교의 학급 수가 많아봐야 6~7학급이 된 것을 보면 저출산이 확실히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전세버스의 경우 28인승 우등고속형 차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이는 고급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주 원인이 아니라 '''저출산으로 인해 학급 인원 수가 25명 선으로 줄어서'''가 주 원인이다. 담임교사 합해도 28석을 다 못 채우는데 영리가 제1의 목표인 전세버스 회사 입장에서는 45인승 버스를 넣으면 인원은 적은데 좌석이 좁다고 고객들이 기피하게 된다.

2.1. 1996년까지 이어진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대한 의견



2.1.1. 옹호론


인구 대처 문제에 대해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 아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기는 뭐한 것이, 당시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인구관이 맬서스의 그것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구호가 1984년 국민총생산으로 미국 수준의 개인소득을 올리려면 '''1천만 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일 정도로 인구 압력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당시 담당자들의 인식으로 인해서 김종인의 얘기에 의하면 "'출산율이 2명 아래로 떨어졌으니 산아제한을 슬슬 폐기해야 되지 않나'라는 투로 얘기를 해놓았다가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라는 지금보면 도저히 웃지못할 얘기도 있었다(…) # 그 만큼 당시 당담자들의 인식이 맬서스 트랩에서 벗아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당시 북한 경제가 급속도록 어려워지면서 구 동구권처럼 북한도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던 때였다. 따라서 통일도 염두에 두었던 것. 하지만 북한 체제 특성을 고려하면 동구권과 다르게 예측이 빗나갔다.
물론 당시 담당자들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데 있어서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만 하더라도 2020년에 인구 120억을 예측하기도 했으며, 국제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강조하였다.[16]

2.1.2. 비판론


이미 1983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수준으로 떨어진 이상, 산아정책을 즉각 폐기하지 않은 건 당시 정부의 책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당장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참고하는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1962년 출산율이 대체출산율까지 떨어지자 즉각 산아제한 정책을 폐기해 2.0~2.2명 수준으로 유지했지만 이후 70년대 중반 오일쇼크에 의한 경제 악화로, 80년대 버블경제 탓에 집을 구하기 어려워진 청년들의 결혼 기피로 이미 80년대에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또한 프랑스만 해도 출산율이 1.87명으로 떨어지자 바로 1983년부터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사례만 검토를 했어도 지금 당장 인구가 늘어난다고 '''대체출산율을 넘어 씨를 말려버릴 기세로''' 산아제한 정책을 지속하는 무리한 정책은 펴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을 염두에 둔 까닭도 있었다고 하는데, 출산율이 대체출산율인 2.1명 이하로 떨어진 1983년에는 아직 소련이나 동독이 건재하던 상황이었는데다 북한의 경제도 고난의 행군 이전이라 그적 저럭 괜찮았기에 단순히 통일에 대해 근거 없이 낙관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게다가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동시기 서독처럼 통일을 위한 활발한 교류나 지원 활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막연히 통일이 되겠거니 생각하면서 정책을 짰다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당시 1인당 GDP를 늘리기 위해선 인구가 줄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름 힘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로 출산율이 4-5명대에 달하는 후진국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70년대는 이 주장에 부합했을지 몰라도 80년대엔 아니었다. 또한 출산 제한을 통한 인구 감소는 전세대에서 동일한 비율로 줄어드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경제는 경제활동인구(만 15세 이상 만 64세 이하)가 비경제활동인구(만 15세 미만, 만 65세 이상) 뒷받치는 구조라는 거다. 윗세대 인구는 많은데 아랫세대 인구는 적은 구조가 이어지면 인구 많은 세대가 비경제활동인구라 되었을 때 아랫세대들의 부담은 점점 커진다. 이는 당연히 국가 경제에 큰 리스크가 되고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이 앞둔 상황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이미 80년대에 출산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따져봐도 1970년 출생자가 백만명이었는데 1987년 출생자는 62만명이었다. 이게 훗날 문제가 될 것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 건 그 당시 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부는 바뀐 세태에 대해 빠르게 파악하고 다른 나라 사례들을 참고하면서 기존의 출산 정책을 수정할 의무가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이전 정책을 답습하기만 했던 것은 옹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세월이 흘러 이들이 가임기에 들어서면서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출산율이 점점 줄어드는데 2차 베이비붐세대의 가임기가 한창인 2012년을 정점으로 1.3명이었던 출산율이 해를 거듭할 수록 점점 내려갔기 때문이다.
1986년에는 주교위원회 가정사목담당 박토마 주교(춘천교구장)가 11월 26일 '하나낳아 알뜰살뜰'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80원짜리 우표를 가톨릭신자들이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우편이 주요 통신수단인 시대에 우표로 정부정책을 홍보할 정도면 정부의 책임은 매우 분명하다.

3. 대책 및 후유증


성비 불균형 문제를 막기 위해 1987년에 아예 태아의 성별감별을 금지하고 의사가 태아의 성별을 알더라도 가족에게 알려주지 못 하도록 법을 만들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남초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었다.[17]
1989년 실질적인 산아제한 완화조치를 취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에는 오히려 출산율이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1992년(1.76명 730,678명)의 출산율은 1984년보다 약간 높아졌다. 하지만 이 때는 1984년보다 출산 가능 연령대에 접어든 여성의 수가 월등히 많이 늘어나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수 없으며, 너무 급격한 출산율 하락에 따른 일시적인 반등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90년부터 피임약과 피임기구 보급 사업비를 절반가량 줄여서 가족계획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도 한몫했다.[18]
사실, 현대 한국의 여성 사회진출이 활발해짐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국가차원의 '''보육'''문제나 양육비 등 때문에[19] 1990년대 중반(공식적으로 1996년당시 기사) 이후 산아 제한 정책을 멈춘 뒤에도 계속 출산율이 감소했으니 단지 산아 제한 때문에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할 순 없다.[20] 산아제한이 출산률을 떨어트렸다기 보다는, 슬슬 떨어지려는 출산률의 등을 밀어 준 셈.[21] 일단, 이 시기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 들더니 2013년까지 출산율이 세대 교체율을 넘어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의료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증가하니 2050년 즈음엔 고령화 현상[22]이 심각할 거라는 예상이 나오게 된다.
일단 정부는 출산장려와 국제결혼을 권하고 있지만 애초에 비용 절감을 우선시하는 기업문화나 이로부터 파생되는 비정규직 문제와 육아문제, 그 외에 수요-공급 논리와 맞지 않는 주택문제[23]가 단기적으로 해결될리가 만무해서 출산장려정책은 큰 효과가 없는걸로 나오고 있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은 대부분 이민을 주장하는 상황. 특히 UN이나 IMF는 한국이 적어도 인구의 10%. 많게는 35%의 이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고, 주요 언론들도 다문화를 사실상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거론하면 한다. 게다가 국제 사회의 흐름도 일본처럼 자체 증가는 별 효과가 없고, 있더라도 인구의 자질 저하를 피할 수 없으며 독일처럼 적극적인 이민수용국이 오히려 상황이 양호해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역시 출산장려책 자체는 계속 하되, 인구 유지에 있어서는 결국 대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완전히 순수한 혈통의식'''(민족주의)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 특성상 이민 정책이 빛을 발할 때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제노포비아가 판을 치는 것도 이것이 바탕이다.
그런데 이민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 사회적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출산을 안 한다기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문제들로 못 하는 사람들이 사실상 절대 다수인데 그걸 메우려 이민을 받는다? 아무리 방송에서 떠들고 다민족국가를 장려해 봐야 경제적 문제로 아이를 못 낳는 상황에서 이민을 받아 해결하려 하는 건 설득력 자체가 없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어거지로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려도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면 이제 민족 단위로 갈등이 증폭되거나 이민자 2세들의 집단탈선과 사회문제까지 덤으로 예상된다. 요즘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적응하는 과정만 봐도 이미 답이 나온다. 북한이면 같은 민족인데 백안시당하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데 간첩소리를 듣거나 집단차별을 당하는 현실이 방송까지 타는 상황에서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는다? 벌써부터 싹수가 노랗고 대혼란만 예상된다. 이미 인터넷 등에서는 이민자 혐오정서가 만연하고 있는데 이게 확산되고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확율도 매우 높다.
다만 북한의 경우 그 당시 심한 저출산은 아니였기에[24] 그나마 남북통일이 된다면 가능 하겠지만 2010년대 후반에 와서는 이들도 혼인적령기가 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고난의 행군시기 때문에 출산율이 한국의 80년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도 확 줄어들어 2명대에 근접했기 때문에 그쪽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연상 선호와 북한 남자를 거들떠도 보지 못할 것이 안 봐도 비디오 수준이기 때문에 상황은 더 심각해질듯 하다. 다만 남성의 경우 60세까지는 아이를 가질 수 있기도 하고 북한 남성과 비교해도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좀 나은 상황. 때문에 이 경우 여자가 훨씬 불리하다. 다만 말이 좋아 한 민족이지, 결혼적령기에 있는 세대의 경우 남한 출신은 선진국 태생이고 북한 출신은 최빈국 태생인지라 심각한 아비투스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크기에[25] 결혼이 성사되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남북간의 결혼은 현재의 국제결혼이나 다를 바 없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경우를 살펴봐도 기존의 문화와 인종이 완전히 달라버린 국가들의 이민으로 인해 현재 유럽에서 일어나는 혼란상을 봐도 위험성은 분명하다. 더구나 한국보다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좀 덜한 편인데도 받아들인 많은 외국인들의 상당수가 중하류층에 머물러 있거나 불만세력이 돼서 극단주의에 심취해 자생적 테러 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보면 무작정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성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인건비의 상승문제와 겹쳐 기술의 발전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 문제를 감안하면 교육수준이 낮은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아 인구 숫자를 무작정 늘린다는 것 자체가 바보짓에 가깝다. 국방 문제 역시 마찬가지인데 징병제로 4급 받기도 힘든 젊은이들을 끌어다가 머릿수로 메꾸는 짓거리만 하지 말고, 과학기술을 동원한 첨단병기와 자동화로 그 갭을 메울 생각을 해야한다.
결국 출산율을 근본적으로 올리려면 출산을 비용으로 보는, 그러니까 출산에 대한 인식이 산아제한 시절에 머물러 있는 국민들의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실제 일본은 이러한 부분에 직접 칼을 들이대서라도 출산율을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출산율이 1.4명 수준까지 오르기는 했다. 자세한 건 일본/출산율 문서 참고.

4. 관련 문서



[1] '''결과적으로는''' 1983년생까지도 인구대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선진국화로 인한 유아사망률 감소와 외국인 순유입으로 인한 것이고, 당시로서는 빨간불이 켜졌다고 봐야 한다.[2]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해마다 약 85~87만명이 태어났으나 갑자기 1984년이 되면서 70만명 이하로 크게 하락했다.[3] 1983년 당시의 2.0명대의 출산율은 요즘의 선진국이면 인구대체수준이 얼추 된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었다.[4] 1984~89년의 출산율은 일본보다도 낮았다.[5] 출산율은 1997년의 1.536보다도 낮으며, 출생아 수를 기준으로 할 경우 1998년2000년보다도 적다.[6] 이에 관해선 대한민국/출산율 항목 참조.[7] 제주도의 경우 인구수 때문인지는 몰라도 타 지역에 비해 산아제한정책이 매우 느슨했다.[8]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89년 이후 산아제한 정책을 중단하였다.[9]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80년대 중후반생(85~89)은 출생신고 기준 약 319만 명인데, 이 숫자는 80년대 초중반생(80~84, 약 402만)은 당연하고 산아제한 중단 직후인 90년대 초중반생(90~94, 약 353만), 심지어 완연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90년대 중후반생'''(95~99, 334만)에도 밀린다.[10] 사실 당시 인구정책 담당자들과 관료들은 외환위기만 끝나면 출산율이 안정적인 수준으로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경제가 어려워질 때 출산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만도 했지만 그 예측은... '''제대로 망했다'''. 외환위기를 끝낸 방법을 생각해보자. 게다가 외환위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금융위기가 찾아왔다.[11] 2012년에 출산율이 1.30을 찍으면서 2001년 이후 11년만에 출산율이 높았던 예외도 있다.[12] 실제로 1986년생들이 주로 받았던 2005년 징병검사에서 병력 수급 부족을 이유로 그 해 신체검사를 받는 대학생에 한하여 4급도 현역 판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예상 외로 병력 수급이 원활해져서 후에 이들도 보충역으로 다시 환원되었지만. 이미 입대한 경우가 문제 되었을텐데, 병역처분 내지는 병역통지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하더라도, 병역 수급에 관한 행정청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되어 기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3] 韓 11년만에 超저출산국 탈출 임박…출생아 3년째 ↑ [14] 다만 최저 출산율을 기록했던 2005년보다는 출산율이 높은데, 이는 출산율에서 '분모'에 해당하는 가임기 여성의 인구가 줄어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15] 그나마 이 두 지역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유소년인구가 가장 많은 신도시이다.[16] 세계인구는 전세계 평균 합계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인구 증가폭이 줄고 있고 2020년 현재 78억 명으로 당시 인구 120억 명 전망은 잘못된 추계치이다. 한편, 세계인구는 2100년에 110억명까지 늘어날 거라고 한다.[17] 특히 1990년, 1993년, 1994년이 그 절정. 출생성비가 각각 무려 '''116.5,115.3,115.2'''까지 치솟았다! 이 중에서 1990년은 '''역대 최고치.''' 1990년은 여자의 팔자가 드센 백말띠의 해라는 근거 없는 속설이 퍼져서 엄청난 여아 낙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근거 없는 속설은 21C에도 살아남아 2006년 쌍춘년설으로 인한 결혼붐과 2007년 황금돼지해 베이비붐으로 이어졌으나 2010년대가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2019년에도 황금돼지해 마케팅이 있었지만 출산율은 0명대를 기록했다.[18] 아이 안낳는 한국, 1990년대생이 마지막 희망 [19] 그 외에도 사교육비의 지속적인 증가와 외환위기 이후의 일자리 질의 하향평준화 경향(평생직장 개념의 붕괴, 비정규직의 대두)의 영향 및 눈높이도 컸다.[20] 실제로 1995년(1.63명,715,020명)부터 2005년에 사상 최저점(1.08명 435,031명)을 찍기전까지 출산율이 계속 하락하는 추세였다.(2000년(즈믄둥이, 1.47명), 2003년(1.18명)은 제외)[21] 정부 정책도 그렇지만 특히 대다수 기업들의 기업문화도 철저히 '''산아제한''' 정책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출산율 감소의 일등 공신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아제한 정책은 1996년에 폐지되었지만, 대다수 기업들은 이를 모른 다. 비용 절감이 최우선 목표인 기업 입장에서 산아제한 정책은 매우매우 입맛 당기게 하는 정책이지만, 출산장려 정책에는 아직도 수많은 기업들이 반감을 표시한다. 산아제한 정책은 장래의 인건비를 절감시키지만, 출산장려 정책은 반대로 이를 증가시킨다.[22] 노인 인구는 많은데 이들을 부양할 청년층 인구가 엄청나게 적음.[23] 주택가격 하락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무난하다.[24] 그 당시 3명대 ~ 2명대였다.[25] 실제로 201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의 결혼 풍조는 철저한 게급동질혼이다. 같은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 간에도 출신성분과 사회지위를 따져가며 결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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