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메이 시즈카
[image]
亀井静香 (かめい しずか)
1936.11.01~ (87세)
일본의 정치인. 히로시마현 제6구 중의원, 운수대신, 건설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국민신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히로시마현 쇼바라시에서 출생.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중퇴 후 상경해 도쿄도립 오오이즈미 고등학교로 편입해 졸업, 이후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안보투쟁 당시 경찰의 대처를 보고 분노해 경찰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경찰이 된다. 합격 성적이 매우 좋아 다른 부처들의 스카우트를 받았으나 원래 목표하던 경찰이 되기 위해 경찰청에 들어간다. 이후 돗토리현, 사이타마현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경찰청 경비국 공안제1과 이사관, 경찰청 장관관방 조사관을 마지막으로 퇴임한다. 퇴직 당시 계급은 경시정.
경찰 퇴직 후 퇴직금으로 정치인을 지망한 그는, 1979년 당시 정계 은퇴한 나가야마 다다노리 의원의 후임으로 구 히로시마현 제3구에 자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의정활동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지 등에 반발해 “대한민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단교해야한다.”라는 망언을 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실시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건설대신을 역임한다. 1999년에는 자민당 정조회장을 역임한다. 그 뒤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밀려 2위에 그쳤다.
그러다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추진하는 우정 민영화에 반발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한다. 창당 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기업인 호리에 타카후미를 꺾고, 자신의 지역구인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국민신당 대표 대행을 역임한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국민신당 소속으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해 민주당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6만 표 이상의 표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국민신당 대표를 맡는다. 이후 민주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해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 우정 개혁 담당 대신 등을 역임한다. 허나 2010년 6월 경 우정 개혁 법안이 무산되면서 대신직을 사퇴한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한다. 그러다가 노다 요시히코 내각이 추진하는 소비세 인상 법안에 반대해 국민신당 대표로서 연정 탈퇴를 선언하면서 당내 연정 유지파와 대립 끝에 국민신당을 탈당한다. 탈당 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반TPP당’을 창당, 이후 감세일본, 일본 미래당, 녹색바람 등에 합류하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 은퇴했다.
가와이 가쓰유키가 현금을 뿌린 사람 중에 가메이 시즈카의 비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亀井静香 (かめい しずか)
1936.11.01~ (87세)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히로시마현 제6구 중의원, 운수대신, 건설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국민신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히로시마현 쇼바라시에서 출생.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중퇴 후 상경해 도쿄도립 오오이즈미 고등학교로 편입해 졸업, 이후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안보투쟁 당시 경찰의 대처를 보고 분노해 경찰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경찰이 된다. 합격 성적이 매우 좋아 다른 부처들의 스카우트를 받았으나 원래 목표하던 경찰이 되기 위해 경찰청에 들어간다. 이후 돗토리현, 사이타마현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경찰청 경비국 공안제1과 이사관, 경찰청 장관관방 조사관을 마지막으로 퇴임한다. 퇴직 당시 계급은 경시정.
경찰 퇴직 후 퇴직금으로 정치인을 지망한 그는, 1979년 당시 정계 은퇴한 나가야마 다다노리 의원의 후임으로 구 히로시마현 제3구에 자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의정활동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중지 등에 반발해 “대한민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단교해야한다.”라는 망언을 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처음 실시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건설대신을 역임한다. 1999년에는 자민당 정조회장을 역임한다. 그 뒤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밀려 2위에 그쳤다.
그러다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추진하는 우정 민영화에 반발해 자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한다. 창당 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기업인 호리에 타카후미를 꺾고, 자신의 지역구인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당선 후 국민신당 대표 대행을 역임한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국민신당 소속으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해 민주당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6만 표 이상의 표차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국민신당 대표를 맡는다. 이후 민주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해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담당), 우정 개혁 담당 대신 등을 역임한다. 허나 2010년 6월 경 우정 개혁 법안이 무산되면서 대신직을 사퇴한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한다. 그러다가 노다 요시히코 내각이 추진하는 소비세 인상 법안에 반대해 국민신당 대표로서 연정 탈퇴를 선언하면서 당내 연정 유지파와 대립 끝에 국민신당을 탈당한다. 탈당 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반TPP당’을 창당, 이후 감세일본, 일본 미래당, 녹색바람 등에 합류하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 은퇴했다.
가와이 가쓰유키가 현금을 뿌린 사람 중에 가메이 시즈카의 비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 소속 정당
4. 기타
- 상술했듯이 한국과의 단교를 주장하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한일합병에 대해서는 식민지 수탈론의 입장을 취했다.
- 다나카 마키코가 그를 가리켜 “조용하지 않은 사람(静かじゃない人, 시즈카쟈나이히토)”[1] 라고 비난했다.
- 마쓰시마 미도리 전 법무대신이 기자 시절 그를 취재했다고 한다.
- 다케다 료타 총무대신이 정계 입문 전 그의 비서로 근무했다.
- 하라구치 가즈히로 총무대신이 3월 16일에 참의원 총무위원회에 지각을 했었는데, 본인은 직전까지 있던 중의원 본회의가 어린이 수당 법안 표결을 위해 시간을 연장했다고 해명했었다. 하지만 같은 중의원인 가메이 시즈카는 참석하고 있었기에 재평가를 받았다.
- ‘시즈카(静香)'는 전형적인 일본 여성의 이름이지만, 남성이다. 가메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자신의 형과 같이 형의 친구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형의 친구는 시즈카라는 이름만 듣고 '어떤 미소녀일까' 기대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남자여서 대실망했다라던(...) 에피소드가 있다.#
[1] 시즈카는 일본어로 '조용함'을 뜻한다. 일종의 언어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