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일본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03년 11월 9일
43회 중원선
(매니페스토 총선)


2005년 9월 11일
'''44회 중원선
(우정 민영화 총선)'''

2009년 8월 30일
45회 중원선
(정권 교대 총선)

}}}
'''투표율'''
67.51%
'''선거 결과'''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비율'''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3CA324,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자유민주당)]
'''219석'''
'''77석'''
'''296석'''
'''61.7%'''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da2128,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민주당)]
'''52석'''
'''61석'''
'''113석'''
'''23.5%'''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F67E27,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공명당)]
'''8석'''
'''23석'''
'''31석'''
'''6.5%'''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E61919,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일본 공산당)]
'''0석'''
'''9석'''
'''9석'''
'''1.9%'''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00a7db,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사회민주당)]
'''1석'''
'''6석'''
'''7석'''
'''1.5%'''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fcd800, 사이즈=.9em, 글자색=#000000, 내용=국민신당)]
'''2석'''
'''2석'''
'''4석'''
'''0.8%'''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409f29,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신당대지)]
'''0석'''
'''1석'''
'''1석'''
'''0.2%'''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bc002d,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신당일본)]
'''0석'''
'''1석'''
'''1석'''
'''0.2%'''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808080,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무소속)]
'''18석'''
'''-'''
'''18석'''
'''3.7%'''
1. 개요
2. 선거 이전
2.1. 일본우정 민영화 문제와 고이즈미의 승부수
2.2. 두번째로 벌어진 자민당 분당 사태
3. 선거 결과
3.1. 주요 정치인 당락
4. 정당별 획득 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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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5년 9월 11일에 실시된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다. 사실 2003년에 열렸던 43회 총선과 2004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으로 여당 자유민주당이 잇달아 부진한 성적을 거둔데다가 2005년에 치러진 도쿄도의회 선거마저 127석 중 57석 당선에 그쳤다.
정권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직접 야심차게 추진하던 우정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여당의 반란표 속에 17표 차이로 부결되자, 내각 회의를 개최하여 중의원 총선거를 선언했고 이에 반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대신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해임시켜버렸다. 결국 일본우정의 민영화 문제에 대한 찬반투표 성격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2. 선거 이전



2.1. 일본우정 민영화 문제와 고이즈미의 승부수


참의원에서 나온 당 내 반란표 때문에 우정민영화 법안이 부결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내각 각료를 그 자리에서 해임해버리는 초강수까지두면서 중의원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당시 자민당 내부에서는 연이은 선거 패배와 당 내 의견 분열로 인해 조기 총선을 열면 대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아소 다로 등 중의원 해산을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고이즈미는 승리를 자신했고 실제로 해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총선을 '''우정민영화 총선'''으로 정의하며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할 경우 미련없이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본격적인 총선 정국에 들어가자, 고이즈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중진 의원 40명을 공천 배제해버리며 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고 대신 젊은 이미지의 정치 신인들을 영입해 그 자리에 공천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자객 공천으로도 유명한 도쿄도 제10구에 공천된 고이케 유리코. 거기에 경기 부양, 연금 개혁 등 다양한 현안들이 산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우정 민영화에 대한 찬반 여부로 선거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정리하여 선거 이슈를 선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문에 제1야당인 민주당은 민영화 반대, 고이즈미 반대 외에 새로운 선거 프레임을 내놓지 못해 선거전 내내 자민당에 끌려다녔다.

2.2. 두번째로 벌어진 자민당 분당 사태


다만, 이 과정에서 고이즈미에게 공천 학살을 당한 당내 중진 의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전 중의원 의장이었던 와타누키 타미스케, 건설대신이었던 가메이 시즈카 등 고이즈미 반대파 의원들이 탈당을 선택해 국민신당, 홋카이도 지역 정당인 신당대지, 신당 일본 등을 새롭게 창당해 자민당이 분당되고 만다. 이번 선거 이전 자민당의 분당 사태가 벌어졌던건 1993년이었는데 당시 연이은 자민당 정권의 부패 비리에 실망한 당 내 리버럴 계파들이 각각 신당 사키가케, 신생당 등을 창당해 탈당해나갔고, 1993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이 수적 우위를 점하면서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8개 정당의 연립정권을 만들어 일본의 55년 체제를 붕괴시킨 바 있다.

하지만 당내 부패와 정경유착을 비판하며 혁신파가 전격적으로 탈당해나갔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 분당 사태에는 탈당파들이 오히려 당내 혁신에 반대하는 세력이란 이미지가 있었고, 원래 지역 유지 출신의 세습 정치인들이 자기 기반만 믿고 탈당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일본 공직선거법상 정당 자격 인정을 위해 탈당파들이 창당한 정당끼리 '의원 꿔주기'를 벌이는 등 추태를 보이며 선거 기간 중 국민들의 신뢰를 전혀 받지 못했다.

3. 선거 결과


선거일
2005년 9월 11일
선거내용
지역구(소선거구제) 300명 + 권역별 비례대표 180명(석패율제 시행)
선출인원
480명
투표율
67.51%(소선거구), 67.46%(비례대표)
'''의석 구성'''
'''연립여당[1] - 327석 (68.1%)'''
'''야당 - 135석 (28.1%)'''
정수 : 480석

3.1. 주요 정치인 당락



4. 정당별 획득 의석


개표 결과 자민당이 296석, 공명당이 31석으로 여당이 327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자민당 자체 의석으로는 1986년 중참의원 동시선거 이후로 최다 의석을 획득했다. 야당은 민주당이 113석으로, 선거전의 177석에서 무려 64석이나 감소해 오카다 가쓰야 대표가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원래 야당으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같은 의석을 유지했지만, 자유민주당 분당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국민신당과 신당일본은 참패했다. 우정 민영화로 인해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 무소속 의원은 단 2명이었다.

[1] 자유민주당, 공명당[2] 고이즈미의 우정 해산에 반대했다가 대신직에서 파면되었다. 하지만 자민당을 탈당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