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마키코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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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중의원 (니가타 5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2대
다나카 마키코'''

'''제42대'''[13]
호시노 유키오
'''제42대'''
호시노 유키오

'''제43~45대
다나카 마키코'''

'''제46~47대'''
나가시마 다다요시
-
'''일본 외무대신'''
'''제123~125대'''
고노 요헤이

'''제126대
다나카 마키코'''

'''제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14]
-
'''일본 문부과학대신'''
'''제16대'''
히라노 히로후미

'''제17대
다나카 마키코'''

'''제18-19대'''
시모무라 하쿠분

'''일본 제126대 외무대신'''
'''일본 제17대 문부과학대신
((なか(((
다나카 마키코
'''
'''출생'''
1944년 1월 14일 (80세)
도쿄도 분쿄구
'''학력'''
와세다대학 (상학 / 학사)
'''가족'''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 어머니 다나카 하나
배우자 다나카 나오키[1], 슬하 1남 2녀
'''정당'''

'''의원 선수'''
'''6''' (중)
'''의원 대수'''
40, 41, 42[2], 43, 44, 45
'''지역구'''
니가타 5구
'''현직'''
에치고 교통 대표이사 회장
'''약력'''
연극 배우
니가타현 제5구 중의원
과학기술청 장관
외무대신
중의원 문부과학위원장
중의원 외무위원장
문부과학대신
1. 개요
2. 생애 및 정치 활동
3. 발언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1. 개요


일본의 정치인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장녀로 유명하다. 원래 당적은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으나 민주당으로 이적해 활동했다. 니가타현 제5구 중의원, 과학기술청 장관, 제126대 외무대신[3], 제17대 문부과학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1944년 도쿄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녀로 출생. 본적지는 니가타현 카시와자키시. 치요다구 구립 후지미 소학교, 일본 여자 대학 부속 중학교 및 고등학교,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당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연극을 했으며, 대학 졸업 후에도 1년 간 배우로 활동했으나 결혼을 이유로 배우를 은퇴한다.[4] 아버지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총리 재임 당시 어머니의 건강 문제 때문에 마키코 본인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다.[5]
그러다가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인 구 니가타 3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인다.[6] 한편, 마키코 본인의 당선 이후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는 그 해 12월 사망한다. 이듬해인 1994년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파란을 일으켰고, 이후로도 한동안 큰 인기를 가졌다. 이후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고이즈미의 자민당 총재 선거 당선에 기여한 공로로, 외무대신을 역임하면서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대신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2002년, 외무대신을 역임하면서 대신으로서의 업무에 무능을 드러내면서 경질당했다. 경질 직후에는 비서의 급여 횡령 문제가 불거지면서 중의원 직을 사퇴했다. 외무대신에 경질될 때 까지만 해도 그녀의 외무대신 경질에 반대하는 여론이 더 컸으나[7] 비서의 급여 문제가 터진 뒤에는 여론이 당연히 반전되었다.[8]
이후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본인의 지역구였던 니가타현 제5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원내에 재진입했다. 당선 이후 무소속의 신분으로 원래 소속이었던 자민당이 아닌 민주당과 협력하면서 자민당을 호되게 비판했으며,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는 아예 남편 나오키와 함께 민주당에 입당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민주당 당수는 마키코 부부의 민주당 입당을 환영했다.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 뒤 중의원 문부과학위원장을 역임하다가, 2011년 6월 경에 간 나오토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당원권 정지 처분을 받는다. 이후 노다 요시히코 내각 당시에는 중의원 외교위원장을 역임하다가 문부과학대신으로 임명되어 입각한다. 문부과학대신 역임 당시 2013년 봄에 새로 개교할 예정이던 대학 3곳의 인가에 대해 대학이 너무 많고 질이 저하된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3곳의 대학에 예정대로 인가를 했다.
그 뒤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자신의 지역구인 니가타현 제5구에 출마했으나 자민당의 나가시마 다다요시에 3만표 이상 밀리며 석패율제 구제도 못 받고 낙선했다. 공교롭게도 선거일이 아버지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일이었다. 마키코 본인은 지역에 대해 책임이 있다며 차기 선거 재도전을 시사했으나 현재까지도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다나카 가문의 62년 간의 니가타현 장기 집권이 막을 내렸다.
현재는 다나카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의 버스 회사인 에치젠 교통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3. 발언


현역 정치인 시절에 여러 정치인들을 비난한 적이 많다.
  •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3명에게 이렇게 평가했다. 오부치 게이조에게 '범인'[9], 가지야마 세이로쿠[10]에게 '군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괴짜'라고 평가했다.
  • 2000년, 오부치 게이조의 사망 이후 군마현 제5구에 출마한 오부치 유코에게 "아무 것도 모르시는 공주님이 선거에 나간다"고 야유했으며, 당시 언론들도 유코를 야유했었다.
  • 가메이 시즈카를 가리켜 “조용하지 않은 사람(静かじゃない人, 시즈카쟈나이히토)”[11]라고 비난했다. 모리 요시로에게는 신기루라고 디스했다.
  • 호소다 히로유키를 가리켜 “카레 먹고 설사해 얼굴이 가늘어진 듯한 사람”, 후쿠다 야스오를 가리켜 “69세 복제 인간, 곧 70으로 요양원에 가야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3 - 1994
정계 입문

1994 - 2003
입당

2003 - 200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9 - 2012
입당
정계 은퇴
현재까지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불명.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니가타현 제3구

'''93,319 (19.9%)'''
'''당선(1위)'''
'''초선'''[12]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니가타현 제5구

'''96,759 (48.9%)'''
'''당선 (1위)'''
'''재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7,866 (68.6%)'''
'''당선 (1위)'''
'''3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112 (49.1%)'''
'''당선 (1위)'''
'''4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5,484 (51.2%)'''
'''당선 (1위)'''
'''5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202 (49.1%)'''
'''당선 (1위)'''
'''6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1,503 (29.3%)
낙선 (2위)


6. 기타


  • 외무대신 시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했다.
  • 와세다대학 재학 당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동기 중에 아나운서 쿠메 히로시가 있었다.
  • 2001년, 김정남이 출입국관리법 관련 위반으로 도쿄 입국관리국에 구속되어 있었다. 마키코가 "이런 인간을 일본에 두면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라 온다.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큰일난다. 빨리 쫓아내라"라고 발언해 중의원에서 스즈키 무네오가 질문했었으나, 당시 중의원 의장 마치무라 노부타카는 그런 발언은 찾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 2003년 10월 경, 후지시마 마사유키 후보의 지원 유세 도중 납북 일본인의 가족에 대해 “납치가족의 아이는 북한에서 태어났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북한으로 보내야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발언해 납북 일본인 가족들에게 항의를 받았었다.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노다 요시히코를 가리켜 자폭테러 해산을 했다고 비난했다.
[1] 제10대 방위대신을 역임했다. 원래의 성씨는 스즈키. 일본은 보통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장인이 전직 총리인지라 부인의 성을 따른 듯하다.[2] 중도 사퇴.[3]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대신이다.[4] 당시 나오키와의 결혼을 아버지인 가쿠에이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코 본인이 결혼을 강행했다고 한다.[5] 이 점 때문에 한국에서는 마키코를 가리켜 ‘일본의 박근혜’라고 말한 적이 있으나, 오히려 마키코를 박근혜와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지도 모른다.[6] 소선거구제로 변경된 이후의 지역구는 니가타현 제5구.[7] 어느 정도였냐면 마키코가 경질 당한 것 하나 때문에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이 폭락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마키코의 대중적인 인기가 많았다는 것이다.[8] 다카키 요시아키 의원이 2002년 7월 5일, "우리는 이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국회자리에서 진상 규명 할 것을 호소했다. 여당은 조사와 함께 할 일이지만, 민주당은 예산위원회 등 공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겠다"고 그녀를 비판했었다.[9] 범죄를 저지른 사람 말고 평범한 사람을 뜻한다.[10] 가지야마 히로시의 아버지.[11] 시즈카는 일본어로 '조용함'을 뜻한다. 일종의 언어유희.[12] 일본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중의원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