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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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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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0일에 치러진 일본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 여러모로 대기록을 남긴 선거였는데 민주당이 무려 308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55년 체제 성립 이후 자민당 이외의 타 단일정당으론 처음으로 원내과반과 정권교체[2] 를 이루어냈다.[3] 그냥 원내과반과 정권교체도 아니고 '''전후 단일 정당 중의원 최대의석 확보'''이자 '''1955년 이후 54년만의 비 자민 정당의 과반 승리'''였던 여러모로 일본 정치사상 특기할만한 선거였다.
2. 선거 이전
2.1. 자민당의 위기
2005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우정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지며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전체 의석의 68.1%를 확보하며 압승, 정권을 지킨 자민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이 시기를 전후하여 90년대를 즈음하여 작은 정부론이 일본의 대세가 되면서 시작된 복지제도 축소가 촉발한 소득불균형 심화로 고이즈미 총리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결국 2006년 9월, 지난 총선 승리를 거둔 지 1년만에 자민당 총재 임기 만료로 총리직을 떠나야했다.
이후 전후 세대를 자임한 아베 신조 내각이 야심차게 출범하지만 각종 부정부패와 스캔들, 그리고 아베 개인의 심각한 건강 악화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1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다음 총리인 후쿠다 야스오는 민주당이 장악한 참의원에서 전후 헌법 처음으로 문책 결의안을 가결당해 신임 표결까지 해야하는 수모를 당했다. 결국 1년만에 비교적 중도파로 분류되던 후쿠다 총리마저 사퇴를 선택했다.
그 후임 총리가 된 아소 다로는 극우 성향으로 원래 유명했던데다가 그야말로 막장의 극치를 보이는 행정으로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고[4] , 하필 이 시기에 전세계를 덮친 최악의 경기 대침체로 인해 절치부심하던 민주당에게는 정권교체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2.2. 민주당의 돌풍
한편 민주당은 2009년 5월 11일에 오자와 이치로가 정치자금 스캔들로 대표직을 사퇴하고 하토야마 유키오 체제가 성립하면서 다소 위기에 봉착한듯 보였지만, 자녀수당 신설 같은 사회복지정책의 대폭 확대와 정경유착 철폐 등의 공약을 내걸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전화위복하게 된다.
그 결과 2009년 7월 도쿄도의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자민당은 벼랑 끝에 몰렸고, 그동안 총리직 사퇴 및 조기 총선을 거부하며 끈질기게 버텨왔던 아소 다로 총리는 중의원 4년 임기 만료를 2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결국 중의원 해산을 선언했다.
민주당 총재 하토야마 유키오는 선거 유세 기간 동안 부정부패 척결과 관료주의 정치로부터의 탈피를 외쳤고, 각종 선거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민주당의 압도적인 리드가 이어졌다. 그래도 설마 그 자민당이 이렇게 무력하게 정권을 내줄까 의구심을 품던 국민들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3. 선거 결과
3.1. 주요 정치인 당락
- 아소 다로(내각총리대신): 당선 (후쿠오카 8구)
- 오타 아키히로(공명당 당수): 낙선 (도쿄 12구)
- 아베 신조(전 내각총리대신); 당선 (야마구치 4구)
- 후쿠다 야스오(전 내각총리대신): 당선 (군마 4구)
- 가와무라 다케오(전 내각관방장관): 당선(야마구치 3구)
- 요사노 가오루(전 내각관방장관): 당선(도쿄 1구 낙선, 석패율 비례대표 당선)
- 스가 요시히데(전 총무대신): 당선 (가나가와 2구)
- 이시바 시게루(전 농림수산대신): 당선 (돗토리 1구)
- 이시하라 노부테루(전 국토교통대신): 당선 (도쿄 8구)
- 다니가키 사다카즈(전 국토교통대신): 당선 (교토 5구)
- 노다 세이코(전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당선 (기후 1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아마리 아키라(전 경제산업대신): 당선(가나가와 13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이부키 분메이(전 재무대신): 당선 (교토 1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누카가 후쿠시로(전 재무대신): 당선 (이바라키 2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에토 세이시로(전 방위청 장관): 당선(오이타 2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고이케 유리코(전 방위대신): 당선 (도쿄 10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하토야마 구니오[9] (전 총무대신): 당선 (후쿠오카 6구)
- 모리 요시로(전 내각총리대신): 당선 (이시카와 2구)
- 기타가와 가즈오(전 국토교통대신): 낙선 (오사카 16구)
- 규마 후미오(전 방위대신): 낙선 (나가사키 2구)
- 고이즈미 신지로: 당선 (가나가와 11구)
- 오무라 히데아키: 당선 (아이치 13구 낙선, 석패율제 비례대표 당선)
- 오부치 유코: 당선 (군마 5구)
- 에토 다쿠: 당선 (미야자키 2구)
- 스즈키 에이케이: 낙선 (미에 2구)
- 하토야마 유키오(민주당 대표): 당선 (홋카이도 9구)
- 오자와 이치로: 당선 (이와테 4구)
- 간 나오토: 당선 (도쿄 18구)
- 노다 요시히코: 당선 (치바 4구)
- 겐바 고이치로: 당선 (후쿠시마 3구)
- 가이에다 반리: 당선 (도쿄 1구)
- 히라오카 히데오: 당선 (야마구치 2구)
- 조지마 고리키: 당선(가나가와 10구)
- 구로이와 다카히로(전 참의원): 당선 니가타 3구)
- 오하타 아키히로: 당선 (이바라키 5구)
- 하타 쓰토무(전 내각총리대신): 당선 (나가노 3구)
- 다나카 마키코(전 외무대신): 당선 (니가타 5구)
- 쓰지모토 기요미: 당선 (오사카 10구)
- 미카즈키 다이조: 당선 (시가 3구)
- 이즈미 겐타: 당선 (교토 3구)
- 가메이 시즈카: 당선 (히로시마 6구)
- 다마키 데니: 당선 (오키나와 3구)
- 히라노 히로후미: 당선 (오사카 11구)
- 데루야 간토쿠: 당선 (오키나와 2구)
- 와타나베 요시미(다함께당 당수): 당선 (도치기 3구)[10]
- 나카무라 기시로(전 건설대신): 당선(이바라키 7구)
4. 각 당 반응
4.1. 자민당
'''망했어요'''
선거후 자민당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냥 참패도 아니고 창당 이후 최저 의석 + '''최초의 제2당'''을 기록하면서 불명예를 안았다. 사실 자민당이 야당이 된 것은 1993년 이후 최초였는데, 그나마 1993년 총선때는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한 채 과반에만 미달하여 야권이 연정을 통해 비 자민 연립정부를 출범한 것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2009년 총선은 비 자민 정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한 사실상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에 충격이 더했다.
결국 아소 다로 자민당 총재는 30일 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당내 유력 인사들도 줄줄히 낙선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후 모든 계파가 해산되고 한동안은 당의 생사마저 불투명한 상황이 이어졌다.
4.2. 민주당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정권교대를 이루다'''
단독 과반은 물론 상임위 장악에 필요한 의석수인 269석까지 훌쩍 넘기면서 당은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 이 압승을 바탕으로 제2의 장기집권이 가능할지도 관심이었다. 이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가 사민당, 국민신당과 함께 연립내각을 구성해 총리에 취임함으로써 민주당 정권이 출범했다.
다만 압도적인 의석수를 가지고 시작한 만큼 결과도 좋아야했지만, 하토야마 총리 취임 직후부터 정경유착을 철폐한다던 공약과 반대로 오히려 선거자금 스캔들이 터지고, 사민당이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문제 관련하여 정부 방침에 반대하면서 결국 연립에서 탈퇴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지지층의 신망을 잃으면서 하토야마 총리는 정치자금 문제 및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사민당이 연립정권에서 이탈한 데 책임을 지고 결국 취임 1년이 채 안된 2010년 6월 8일 사임하고 만다.
5. 관련 항목
[1] 영상에 달린 사람들의 댓글은 대체적으로 이 선거를 후회하고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는 의견이 대다수이다.아무래도 역사적인 선거였던만큼 중의원 선거중에서도 관심도가 지금까지도 높은편. 영상에서 사회를 보는 인물은 총 3명으로, 각각 코미디언 시마다 신스케, 인기를 끌던 아나운서 코바야시 마오 등이다. 코바야시 마오가 일찍이 당선이 유력시되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이 영상에서 인상적인 포인트(...)[2] 일본어 상용한자표에 代/替 모두 실려있어 交代/交替를 둘 다 쓸 수 있고, 일본어에서도 약간 의미가 다르다고 하나 신문에서는 交代로 통일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일본 한자음은 こうたい로 동일하다.[3] 55년 체제 이후 첫 정권교체는 1993년 총선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의 출범으로 이미 이뤄낸 바 있다. 당시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함에 따라 야권의 연정을 통해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 하지만 이땐 원내 1당이 자민당이었고, 연립정권도 10개월만에 깨지면서 망했어요(...).[4] 거기다가 기본 자질마저 의심되는 훈독 실수가 너무 잦아서 더 까였다.[5] 신당일본 1석, 신당대지 1석[6] 신당일본[7] 신당대지 [8]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신당[9] 민주당 당수인 하토야마 유키오의 동생. [10] 행복실현당 후보와 1:1구도로 95.3%를 획득해 소선거구제 이후 최다 득표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