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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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당. 2012년 당시 중원선을 앞두고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계파와 가다 유키코 시가현지사가 만든 정당이다.
2. 노선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답게 노선이 일정하지 않다. 미래당 당시에는 제3지대를 주장했다. 원자력 발전소 폐기를 주장하고 생태주의를 주창하며 TPP 반대를 내보이는 등 진보 성향도 있지만, 당의 중심인 오자와 이치로는 자민당, 신진당, 자유당 때는 보수 인사이기도 했다.[2]
3. 역사
3.1. 정당
민주당 내 오자와 이치로의 계파의 의원들이 탈당하여 처음에는 '국민의 생활이 제일'(国民の生活が第一)이라는 병맛 넘치는 이름으로 창당했다.[3]
일본 미래당은 가다 유키코 시가현 지사가 창당한 정당이다.
2012년 11월 27일, 가다가 결성을 발표하고 아울러 당론으로 '비와코 선언'을 발표했다. 이듬해 11월 28일 8명의 국회의원으로 창당했다.
여기에 국민 생활이 제일(오자와 이치로 계파 의원) + 감세일본·반TPP·탈원전을 실현하는 당(감세일본[4] +민주당에서 탈당한 야마다 마사히코 전 농림상[5] +국민신당을 탈당한 가메이 시즈카) + 사민당을 탈당한 아베 도모코[6] + 녹색바람에서 탈당한 의원 일부가 합류하였다. 창당 멤버 중에 이나모리 가즈오도 있었다.
우선 민주당에서 탈당한 이후 당을 급조했지만,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쫄딱 망했다. 121명을 공천했으나 원래 62석이었던 중의원 의석이 9석으로 쪼그라드는 대참패. 물론 원판인 민주당도 231석에서 57석으로 줄어들었긴 했지만, 선거의 화신으로 불리던 오자와 이치로가 직접 만든 정당이 두자리도 못되는 의석으로 쪼그라드는 대참패를 당한 것. 오자와 이치로는 중의원에 이와테현 제4구에서 아슬아슬하게 당선은 됐지만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장나 버렸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민주당 계열이 뭉쳤어도 자민당에 대패할 것이 확실했던 상황에서 굳이 민주당과 미래당으로 쪼개지고 말았고 결국 대패함으로써(...) 민주당 정권의 처참한 인기를 다시 한번 못 박아 확인시켜준 셈.
선거 후 가다와 오자와의 사이는 나빠지면서 서서히 분열이 되었다. 가메이 시즈카는 녹색바람으로 탈당했고, 24일 가다는 시가현청에서 미래당을 분당하기로 결정, 오자와계 의원 15명이 생활당을 창당, 아베 도모코와 가다는 정치단체 일본 미래당을 설립하게 된다.
결국 오자와는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동대표직 사임 및 자진 탈당을 하였다.# 한편 2012년 12월 25일 민주당 대표로 가이에다 반리가 뽑히면서 민주당에 흡수합병 가능성이 상당히 올라갔다. 결국 12월 27일 해산했다.
3.2. 정치단체
가다와 아베는 정치단체 미래당을 세웠으나, 현의회에서 당 대표 직과 지사직의 겸임을 해소하라는, 다시 말해 중앙 정계에 그만 기웃거리라는 요구를 해 결국 가다는 1월 4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1월 20일 공식으로 물러났다. 이후 아베 도모코가 대표 겸 간사장에 올랐다. 아베는 미래당 당적을 유지한 채로 녹색바람에 합류해 대표 대행이 되면서, 미래당은 공식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유령 정당이 되다가 2014년 12월 31일 해산했다.
4. 역대 대표
5. 기타
여담으로 미래당에서 진행한 인터넷 투표에서 "원전의 추진에 찬성합니까?"와 "소비세 증세에 찬성합니까?"[8] 이 두 질문에 네티즌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진 일이 있었다[9] .#
[1] 누구나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를.[2] 신진당과 1998년 자유당은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성향이었다.[3] 심지어 민주당 시절부터 쓰고 그때도 쓰고 있던 '국민 생활이 제일'이라는 슬로건을 그대로 당명에 붙여서 스틸해갔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의 포스터에는 민주당 슬로건이었던 '국민 생활이 제일'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포스터가 많았고, 신당으로 옮긴 의원들이 포스터를 교체하지 않고 '민주당'이라는 글자만 가려서 계속 사용하던 시기도 있었다.[4] 카와무라 타카시 나고야 시장에 의해 창당된 지역정당[5] 오자와 신당에는 합류하지 않았다.[6] 후쿠시마 미즈호 대표와의 갈등이 있었다.[7] 누구나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를.[8] 당연히 미래당의 입장은 둘 다 반대였다.[9] 투표의 전개 양상과 그에 대한 미래당의 대응까지 파맛 첵스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