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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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무용총, 오른쪽이 각저총이다.
角抵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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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 소재의 우산하 고분군의 벽화분. 우산하 992호와 태왕릉의 중간 지점에 무용총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며 무용총과 마찬가지로 씨름하는 모습의 벽화 때문에 각저총(角抵塚)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장군총, 태왕릉과 같은 고구려 왕릉들과 함께 중요 고분으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보632호에 등록된다.
2. 무덤의 구조
4세기 후엽부터 나타나는 묘도 양 옆으로 이실(耳室)이 달린 형태의 석실봉토분이다.[6] 비슷한 형태의 벽화고분들로는 마선구 1호, 왕자묘[7] , 무용총, 산연화총, 마조총 등이 있다. 이러한 석실이 유행함과 동시에 벽화가 점차 그려지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4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초보적인 형태의 벽화였다면 4세기중엽부터는 무용총과 각저총처럼 벽화 내부에 다양한 요소로 생활의 풍속, 장면 등을 그려넣는 것이 유행이 되기 시작한다.
각저총도 씨름하는 장면을 통해서 네임드가 되었다보니 씨름하는 장면만 떠올리기 쉬운데, 안악 3호분처럼 무덤의 주인의 그림도 현실의 가장 안쪽벽에 무덤 주인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악 3호분처럼 기둥이 표현되어 있고 기둥이 표현한 집의 형상 가운데에 묘주와 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근시(近侍)들이 시중을 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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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진 덕분에 이름이 각저총이라고 명명되었다. 네이밍은 만주국시절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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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이 씨름하는 장면의 벽화으로 인해서 씨름의 역사도 대략적으로 유추도 가능했을 뿐만아니라 벽화에서 보이듯이 왼쪽에 서서 오른쪽을 바라보는 코가 구부러진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서역인으로 판단하여 서역과 고구려와 교류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추측일 뿐이고 어째되었건 고구려인 둘이 씨름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참고로 이러한 씨름하는 장면이 있는 벽화는 통구 고분군의 장천 고분군의 장천 1호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그 벽화에서도 코가 큰 이국적인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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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산하 귀족묘구의 여러 석실 봉토분들과는 달리 무용총과 각저총은 들어갈 수 없다. 근처에 민가도 없고 표지판만이 간단하게 가리키고 있어서 찾아가기 쉽지 않다. 사실 민가는 있다. 위치는 중국 서안성 23로지 33번쪽이다. 김해공항에서 우한쪽에 내려야 하는데 지금은 못간다.
4.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평면형태로 따지고 보면 '早' 또는 '古' 처럼 생겼다.--[7] 둘다 각저총보다는 약간 먼저 생기는 고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