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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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 / 安岳 3號墳'''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북한의 국보 제67호.
인근 고분군 중에서 무덤 벽화의 내용, 표현법, 상태 덕분에 고구려 벽화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영화13년(永和十三年)라는 글자로 인해 357년(고국원왕시기)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북한측은 고국원왕릉으로 단정하고 있고[5] 남한에서는 중국 출신 귀화인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복 직후 일제 학자가 아닌 우리 민족이 스스로 유적들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1949년 발굴했다고 하며, 1958년 첫 보고서가 나온 이래 꾸준히 조사 연구되고 있다. 무덤의 벽화는 초기 형태로 이후의 고구려 고분 벽화 발전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연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석실봉토분으로 남쪽으로 뚫린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안은 돌기둥과 석벽으로 분리된 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전후로 크게 전실, 후실 구조에 좌우 곁방 있는 구조는 현세에서의 가옥을 상징하는 구조로써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구조다. 고구려는 같은 시기 수도였던 집안과 제 2 도시였던 평양의 묘제가 확연히 다르다. 내심 민족주의적인 경향 속에서 유사성을 도출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누가봐도 다른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무덤자체는 중국계 석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짙은 편이지만 벽화의 내용이나 벽화의 화풍, 묵서명의 내용 등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무덤 또는 중국계 고구려인의 무덤 등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또한 3~4세기 평양의 고분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도 완벽한 고구려인에 의해 완전히 점유된 영역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낙랑의 유민, 낙랑에 포함되어 있던 재지토착민, 중국계 귀화인이 혼재한 양상 또는 그 영향이 희석되어 가는 과정 등으로 다양한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안악 3호분의 구조적인 측면을 완전히 "고구려적인 것", "고구려의 무덤의 전형"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다. 3세기 후반 낙랑의 쇠퇴과정에 연이은 313년 낙랑의 축출 과정 속에서 어떻게 고구려의 영역으로 포함되어 가는 가를 보여주는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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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벽화. 서쪽 방에는 묘주로 보이는 왕의 인물과 그 부인의 그림이 있으며 그 외 곳곳에 악단, 무용수, 부엌, 마구간, 푸줏간, 수레, 가마 등등 당시 생활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신하, 군대 등을 묘사한 출행도도 있는데 최근 디지털 복원되어 상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묵서명 자체의 내용은 동수임이 맞지만 그 위치 때문에 묵서명이 누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인지가 논란이다. 일반적으로는 묘주라고 생각하지만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직책명이 쓰여진 인물의 머리 위로 묵서명이 쓰여져 있어서 다소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다.
참고로 안악 3호분에서는 장하독(帳下督)의 직책이 표기된 인물이 4명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 한명이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것이다. 장하독이라는 직책명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 위의 사진으로는 잘 판독되지 않는다.[6]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쟁점은 '''묵서의 내용''', '''벽화의 제재와 내용''', '''무덤의 규모와 위계, 계보'''에 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왕릉이냐 귀화인의 무덤이냐는 것이지만 내재된 함의로는 왕릉으로 비정될 수 있을 만큼 큰 무덤이 313년 낙랑이 축출당하고 난 뒤(357년)에 생기는 무덤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안악 3호분을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의 논지 전개를 살펴보면 안악 3호분의 고구려 고분 문화의 역사고고학적인 전개상에서의 위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낙랑은 평양에 있지 않았다.'''를 반증하기 위해서 안악 3호를 왕릉으로 봐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릉설을 주장하는 문단에서 소위 "소장파"라고 학파의 호칭은 일반적 역사, 고고학계에서는 없고 보통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집단에서의 사용되는 미칭(?)이기도 하다. 또 낙랑의 소재지와 관련된 논란에서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북한학계 또한 체고조넘에 의해 특정한 사관이 강제되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7]
그래도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가 지닌 저의가 어찌되었든 식민사학이라는 식의 단순 비난 일변도의 토론 불가능한 다른 논쟁들에 비해서는 훨씬 구체적 근거에 의한 주장을 펼치고 그에 따라 논단할 수 있는 비교적 건강한 토론에 해당하는 편이다. 또한 왕릉설을 주장하더라도 위처럼 소위 낙랑 평양 부재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 학술적 접근인 경우도 있다.
왕릉설과 왕릉이 아니라는 설, 즉 귀화인이라는 설 2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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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를 그린 벽화. 얇은 흰색 관, 왕만이 쓸수 있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상당한 수준의 무덤이다보니 당연히 묘주의 정체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있어왔다. 크게 고구려의 고국원왕 또는 미천왕 아니면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에 투항한 요동의 동수의 묘라는 주장이 있다.
무덤 주인의 초상 벽화는 서쪽 곁방의 정면에 그려져 있으며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 2명이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좌측(남쪽)과 우측(북쪽)의 호위 무사 장하독의 두명의 그림 위에는 각각 묵서가 총 두개 쓰여 있는데 좌측(남쪽)의 장하독의 묵서에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신하가 된 동수의 묵서가 쓰여 있고 우측(북쪽)의 장하독의 묵서는 오랜 기간이 지난 무덤 특성상 자연 훼손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는 영화 13년 고구려의 관직에 있던 동수라는 글이 쓰여 있고 우측의 장하독에도 묵서가 쓰여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이 고구려의 왕의 무덤인지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 등장하는 동수의 무덤인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8]
동수의 무덤이라는 설은 무덤 안의 묵서명에 적힌 대로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온 동수(冬壽)[9] 하독장의 위에 쓰인 묵서명을 증거로 쓰는데 묵서명에 '동수'의 이름이 남겨져 있는 데서 동수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안악 3호분을 전후해서. 1949년 발굴 당시 무덤 발굴 담당자였던 도유호가 처음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면서 동수의 무덤임을 주장했고, 월북 미술사가 근원 김용준이 이 학설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동수의 이름이 쓰인 문제의 묵서명이 묘주 옆이 아니라 문간에 그려진 묘주의 부하로 보이는 장하독이라는 관원 그림의 머리 위에 쓰여져 있는 데다, 이 장하독의 맞은편에 그려져 있는 다른 한 명의 장하독의 그림 머리 위에서도 묵서명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묘주가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 및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 관원이 동수이며, 동수가 고국원왕을 위해 어떤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특별히 동수의 이름을 묵서명으로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무덤 주인이 쓰고 있는 흰색 관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을 썼다는 중국 기록(수서)와 대응되며, 유명한 대행렬도에는 무덤 주인공이 행차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주인공이 탄 수레 위에 '성상번(聖上幡)'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은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성상'은 왕만이 받을 수 있는 존칭이므로 그런 깃발을 자신의 수레에 달고 있는 무덤 주인은 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또한 동수가 투항하여 고국원왕을 모신 신하(장하독)이였다는 중국 사서(수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안악 3호분이 정말 왕릉이라고 하면 '''어떤 왕의 무덤이냐'''도 문제가 되는데,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했을 때 왕이었던 고국원왕으로 보자니 고국원왕은 371년에 평양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우다 죽었는데 왕의 무덤이면 당연히 수도 가까운 곳에 묻는 것이지 않겠냐는 설이 있으나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으니 수도 근처가 아닌 백제가 퇴각한 남쪽이 아니겠느냐 하는 주장이 있고 1963년에 북한의 주영헌 등이 342년에 전연이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가 퇴각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뒤로(시신은 1년 뒤에 찾아오기는 했다) 고구려 무덤을 쓰게 되었고 시신을 반환받는 과정에서 동수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또는 무덤 축조와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의 벽화를 그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왕을 모시는 장하독의 그림 위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고 다른 장하독에도 신하였던 다른 인물의 이름을 적어놨다고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학설의 문제는 미천왕의 시신이 343년에 있었고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늦어도 동수가 사망한 357년 이전의 일인데 시신을 찾아오고 나서 무덤 축조까지 왜 10년 넘게 걸렸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10]
결론부터 말하면 안악 3호분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중원계 석실이다. 중국은 횡혈식 장법이 일반화되면서 무덤을 집처럼 꾸미는 현상이 보편화되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무덤의 형태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사례이다.
또한 동수라는 묵서명이 석실의 안쪽 벽에 그려진 묘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묘주가 왕이라는 근거는 오로지 백라관이라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러한 벽화의 내용은 고구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령성에 더더더욱 많다. 머리에 쓴 관의 모양도 매우 흡사하다. 요령성에 있는 것이 다 백라관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악 3호분만 놓고 보더라도 "벽화에 그려진 관=백라관"임을 증명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행렬도조차도 중원계 석실의 벽화 구성요소 중의 하나다. 묘주가 왕이라서 행렬도가 크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 귀족층의 무덤에서는 원래 저렇게 구성요소로써 그리던 것으로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아닌 더더욱 중원계의 무덤임을 반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원계 석실이 있다는 것이 마냥 낙랑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후의 변화양상에 있다. 낙랑의 쇠락에 즈음하여 낙랑은 중국 본토와의 직접적인 네트워크가 약해지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반증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다실분 유형의 무덤들이 중국의 다실분 변천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 중엽부터 평양에 소재하는 낙랑의 목곽묘와 전실묘(塼室墓)들의 변화는 중국 본토의 목곽묘 변화와는 다르게 재지화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낙랑 또한 전형적인 중국계 전실묘였지만 4세기 중반 낙랑 멸망 이후에는 벽돌과 그냥 평편한 돌을 섞어만드는, 사실상 일반적인 돌로 쌓는 석실로 변화하거나 궁륭형의 천장이 아니라 궁륭형으로 조금만 만들고 개석을 두는 형태로 중국적인 요소가 점차 퇴락하고 재지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11]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를 통해 볼 때 4세기 중엽, 평양지역의 낙랑의 추세는 313년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의 영향으로 구 낙랑집단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돼 사실상 고구려의 아래에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한다.
가장 먼저 간단하게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 흙으로 쌓은 봉토분이라는 점에서 외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4~5세기 횡혈식석실(굴식돌방무덤)의 순서와 연대, 편년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지역(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과 낙랑군 축출 이후의 점령 지역인 평양지역 2개로 크게 구분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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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소재하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도. 동실묘라는 특이한 묘제를 제외하면 적석총이 대부분의 점들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집안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졸본, 국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고구려의 역사적 내용과 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무수한 고구려의 유적들, 특히 적석총(돌무지무덤)의 형성과정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동북지역에 만연했던 적석묘 문화는 기원 이후부터는 고구려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형태로 무기단식 적석총에서 기단, 계장, 계단식 적석총으로 발전해나간다. 고구려 적석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3세기와 그 이전 시기의 한반도 중부지역 및 그 남쪽은 일부 백제의 적석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광묘 문화를 채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적석총 문화와는 확연히 대비되고 있다. 백제도 석촌동 고분군 및 즙석봉토분을 제외하면 적석총, 적석형태의 무덤을 축조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종언을 맞이하고 특유의 석실문화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4세기 말까지는 동북아시아에서 적석총=고구려의 등식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반면 평양지역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전형적인 중원계 목곽묘와 전실묘가 채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곽묘라고 하는 것도 한반도의 목곽묘가 아니라 귀틀묘라고 하는 나무판으로 곽을 짜서 만드는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어 나가며 그마저도 수혈식의 장법은 존속기간이 짧고 곧 횡혈식의 장법으로 변한다. 이렇게 횡혈식의 장법으로 변하는 것이 이미 기원전의 일이다. 이랬던 목곽묘(귀틀묘)들이 나중에는 전실묘라는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무령왕릉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빼박 중국계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실묘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이러한 중원계 무덤들은 3세기말 낙랑군의 쇠퇴와 순수 한화의 실패, 313년을 기한 고구려의 점령 등의 이유로 중원계 문물 요소와 재지계의 문물 요소들이 혼재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의 묵서명의 연대를 기준으로 4세기, 같은 시기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에서는 이미 고구려 전통의 적석총으로 대표되는 고분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묘제 역시 집안지역에서는 아직 명백히 석실이라는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고 논자에 따라서 그 시점은 다르지만 4세기는 분명히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더라도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는 소위 맹아기로써 두 지역의 고분 문화 전개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아래의 도면들이 매장주체부만 놓고본 고구려 적석총의 전개과정.
그렇기 때문에 4~5세기의 기간에서는 두 지역의 역사적, 역사고고학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더 큰 틀에서 "고구려 고분문화의 변천"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이다. 이후 5세기를 즈음하여 고구려도 횡혈식 장법을 보편적으로 채용하고 적석총의 축조가 둔화되고 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평양과 국내지역의 구분이 점차 사라진다.
낙랑의 설치 이후 평양지역에 형성되었던 중원계 물질문화는 3세기 말, 4세기 경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본토와의 교류가 줄어들게 되고 힘을 잃으면서 중원계의 요소가 고구려의 영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새롭게 점령한 곳(낙랑군 고구려현의 관점이나 예, 맥의 관점이라면 수복)이기 때문에 이미 멀쩡한 수도를 냅두고 왕이 점령지에 무덤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 물론 평양천도가 장수왕 이전에도 시도는 약간씩 있었지만 장수왕의 천도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바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만 따로 뚝 떨어져서 간다는 것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기가 쉽지 않다. 귀장이라는 풍습 아래에 전통적인 묘제인 적석총이 만 여기에 이를 정도로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통구 고분군의 성격과 분포양상, 그리고 그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왕릉의 존재를 고려하면 더더욱 '''''평양이라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중국스러운 묘제로 나라의 왕이 묻힐 가능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라 중국계의 무덤이지만 고구려적 요소가 있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묵서명의 내용 그대로 걸맞는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이 타당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양에 중국의 무덤의 계속 축조되는 것이라면 313년의 기록은 부정되는 것인가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바로 직접적으로 지배를 한 것이 아니라 낙랑과 관련하여 유존해있던 집단들을 활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는 또 한편으로 동수라는 귀화관리가 묻히기에 평양이 적절하다는 반증 이기도 하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 '''안악 3호분은 왕릉이다''' 라는 주장과 근거는
백라관이라는 것은 고구려 왕의 의복이며, 대행렬도와 거기에 표현된 성상(聖上)의 깃발은 무덤의 주인이 왕인 것을 반증하므로, 관리(官吏)인 동수의 묵서명은 묘주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 반면 '''왕릉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 근거는
결론에 즈음하여 사족을 덛붙이면,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서는 고고학적인 분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헌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해석이 요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자자료가 기록된 곳이 바로 무덤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분석은 역사고고학적인 관점이 요망된다. 역사고고학적 관점이라함은 최소한 해당 유적이 "특정 국가의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가진 않으며, 최대한 객관적이고 많은 자료와의 비교검토 끝에 소기의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안악 3호분을 미천왕이나 고국원왕릉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그러한 관련 고분자료와의 비교검토의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백라관이 고구려 왕의 것이라는 것도 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 기준이되는 것이 불분명하다. 대행렬도에 대한 관점, 무덤의 규모에 대한 관점도 동시기 고구려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집안지역과의 비교검토가 선행되어야하며 왜 집안지역이 아닌 평양인근의 안악군에 자리하였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비교검토 끝에 다소간의 논리성과 타당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본격적인 역사적 해석이 가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재야역사학계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고고학적인 이해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자료는 읽고 이해하며 비교 검토를 해나가며 사료비판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선학에 의해서 이미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료는 끊임없이 발굴되고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문헌사의 사료비판과 같은 맥락에서의 고고학적 검토는 필수적이다. 그러한 과정없이 단순히 357년이고 평양이면 고구려니깐 고구려 무덤일 수 이겠구나라는 대전제를 쉽게 깔고 해석만을 향해나가면 근거적 측면에서 약점이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안악 3호분 말고도 안악 1호, 안악 2호의 석실벽화분이 조사된 바 있으며 안악 1, 2호분은 안악 3호분으로부터 북동쪽으로 몇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안악 4호분은 안악 3호분의 바로 서쪽 5m 거리에 있는 무덤으로서 사실상 안악 3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안악 3, 4호분이 위치한 곳이 안악군 오국리기때문에 오국리 고분군으로도 불리며 특히 안악 4호분은 오국리무덤으로도 불린다.
안악 4호분은 구조적으로도 안악 3호분과 같은 계통으로서 묘실이 하나만 있는 T자형의 평면구조의 무덤으로서 안악 3호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고분명칭은 시군단위+하위 행정단위를 같이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일찍이 1949년에 조사되었다 보니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탓도 있다. 그럼에도 안악 3호분이 너무 유명해서 안악군의 이 고분들은 안악 몇 호라고 여전히 불리는 편이다.
안악군에는 안악 1~4호분 외에도 안악군의 구월산 남록과 남산 남록에 많은 중국계 석실들이 조사되었으며 대방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안악 3호분 왕릉설에 따라 백라관을 묘주도를 기반으로 고증했다.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안에 안악 3호분의 실물대 모형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실물 크기로 안악 3호분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고. 부산 복천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 때도 안악 3호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기도 했지만 특별전이 끝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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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 / 安岳 3號墳'''
1. 개요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북한의 국보 제67호.
인근 고분군 중에서 무덤 벽화의 내용, 표현법, 상태 덕분에 고구려 벽화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영화13년(永和十三年)라는 글자로 인해 357년(고국원왕시기)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북한측은 고국원왕릉으로 단정하고 있고[5] 남한에서는 중국 출신 귀화인 동수의 무덤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복 직후 일제 학자가 아닌 우리 민족이 스스로 유적들을 보존하자는 취지로 1949년 발굴했다고 하며, 1958년 첫 보고서가 나온 이래 꾸준히 조사 연구되고 있다. 무덤의 벽화는 초기 형태로 이후의 고구려 고분 벽화 발전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연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조사 내용
2.1. 구조
석실봉토분으로 남쪽으로 뚫린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며 안은 돌기둥과 석벽으로 분리된 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전후로 크게 전실, 후실 구조에 좌우 곁방 있는 구조는 현세에서의 가옥을 상징하는 구조로써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구조다. 고구려는 같은 시기 수도였던 집안과 제 2 도시였던 평양의 묘제가 확연히 다르다. 내심 민족주의적인 경향 속에서 유사성을 도출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누가봐도 다른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무덤자체는 중국계 석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짙은 편이지만 벽화의 내용이나 벽화의 화풍, 묵서명의 내용 등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무덤 또는 중국계 고구려인의 무덤 등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또한 3~4세기 평양의 고분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도 완벽한 고구려인에 의해 완전히 점유된 영역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낙랑의 유민, 낙랑에 포함되어 있던 재지토착민, 중국계 귀화인이 혼재한 양상 또는 그 영향이 희석되어 가는 과정 등으로 다양한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안악 3호분의 구조적인 측면을 완전히 "고구려적인 것", "고구려의 무덤의 전형"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다. 3세기 후반 낙랑의 쇠퇴과정에 연이은 313년 낙랑의 축출 과정 속에서 어떻게 고구려의 영역으로 포함되어 가는 가를 보여주는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2.2.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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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벽화. 서쪽 방에는 묘주로 보이는 왕의 인물과 그 부인의 그림이 있으며 그 외 곳곳에 악단, 무용수, 부엌, 마구간, 푸줏간, 수레, 가마 등등 당시 생활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당시 신하, 군대 등을 묘사한 출행도도 있는데 최근 디지털 복원되어 상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2.2.1. 묵서명
안악 3호분의 전실에 붙은 서측실의 입구의 위쪽 모서리에 쓰여진 묵서명. 서측실은 묘주의 그림이 그려진 공간이며, 전실에서 서측실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볼 때 이 묵서명이 입구 좌측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묵서명의 내용자체는 동수라는 인물의 사망과 직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나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이 모용황의 왕위를 둘러싼 정쟁 속에서 336년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기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묵서명의 내용을 고려하여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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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3년, 무자일(戊子)인 10월 26일 초하루 계축(癸丑)에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 현도, 대방태수 도향후 유주 요동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의 자는 "▨안"인 동수가 69세의 나이로 벼슬하다 죽었다
묵서명 자체의 내용은 동수임이 맞지만 그 위치 때문에 묵서명이 누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인지가 논란이다. 일반적으로는 묘주라고 생각하지만 장하독(帳下督)이라는 직책명이 쓰여진 인물의 머리 위로 묵서명이 쓰여져 있어서 다소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다.
참고로 안악 3호분에서는 장하독(帳下督)의 직책이 표기된 인물이 4명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중 한명이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것이다. 장하독이라는 직책명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 위의 사진으로는 잘 판독되지 않는다.[6]
3. 묘주는 누구인가?
3.1. 쟁점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쟁점은 '''묵서의 내용''', '''벽화의 제재와 내용''', '''무덤의 규모와 위계, 계보'''에 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왕릉이냐 귀화인의 무덤이냐는 것이지만 내재된 함의로는 왕릉으로 비정될 수 있을 만큼 큰 무덤이 313년 낙랑이 축출당하고 난 뒤(357년)에 생기는 무덤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안악 3호분을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의 논지 전개를 살펴보면 안악 3호분의 고구려 고분 문화의 역사고고학적인 전개상에서의 위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낙랑은 평양에 있지 않았다.'''를 반증하기 위해서 안악 3호를 왕릉으로 봐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릉설을 주장하는 문단에서 소위 "소장파"라고 학파의 호칭은 일반적 역사, 고고학계에서는 없고 보통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집단에서의 사용되는 미칭(?)이기도 하다. 또 낙랑의 소재지와 관련된 논란에서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북한학계 또한 체고조넘에 의해 특정한 사관이 강제되어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7]
그래도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가 지닌 저의가 어찌되었든 식민사학이라는 식의 단순 비난 일변도의 토론 불가능한 다른 논쟁들에 비해서는 훨씬 구체적 근거에 의한 주장을 펼치고 그에 따라 논단할 수 있는 비교적 건강한 토론에 해당하는 편이다. 또한 왕릉설을 주장하더라도 위처럼 소위 낙랑 평양 부재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 학술적 접근인 경우도 있다.
왕릉설과 왕릉이 아니라는 설, 즉 귀화인이라는 설 2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3.2. 고구려의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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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주를 그린 벽화. 얇은 흰색 관, 왕만이 쓸수 있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상당한 수준의 무덤이다보니 당연히 묘주의 정체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있어왔다. 크게 고구려의 고국원왕 또는 미천왕 아니면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에 투항한 요동의 동수의 묘라는 주장이 있다.
무덤 주인의 초상 벽화는 서쪽 곁방의 정면에 그려져 있으며 서쪽 곁방 입구 양쪽 벽에는 왕을 호위하는 무관인 장하독 2명이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좌측(남쪽)과 우측(북쪽)의 호위 무사 장하독의 두명의 그림 위에는 각각 묵서가 총 두개 쓰여 있는데 좌측(남쪽)의 장하독의 묵서에는 고구려에 투항하여 신하가 된 동수의 묵서가 쓰여 있고 우측(북쪽)의 장하독의 묵서는 오랜 기간이 지난 무덤 특성상 자연 훼손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는 영화 13년 고구려의 관직에 있던 동수라는 글이 쓰여 있고 우측의 장하독에도 묵서가 쓰여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이 고구려의 왕의 무덤인지 좌측 장하독의 묵서에 등장하는 동수의 무덤인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8]
동수의 무덤이라는 설은 무덤 안의 묵서명에 적힌 대로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온 동수(冬壽)[9] 하독장의 위에 쓰인 묵서명을 증거로 쓰는데 묵서명에 '동수'의 이름이 남겨져 있는 데서 동수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했다. 아울러 안악 3호분을 전후해서. 1949년 발굴 당시 무덤 발굴 담당자였던 도유호가 처음 이를 보고서로 작성하면서 동수의 무덤임을 주장했고, 월북 미술사가 근원 김용준이 이 학설을 체계화했다.
하지만 동수의 이름이 쓰인 문제의 묵서명이 묘주 옆이 아니라 문간에 그려진 묘주의 부하로 보이는 장하독이라는 관원 그림의 머리 위에 쓰여져 있는 데다, 이 장하독의 맞은편에 그려져 있는 다른 한 명의 장하독의 그림 머리 위에서도 묵서명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묘주가 고국원왕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소장파 학자들 및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 관원이 동수이며, 동수가 고국원왕을 위해 어떤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특별히 동수의 이름을 묵서명으로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무덤 주인이 쓰고 있는 흰색 관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을 썼다는 중국 기록(수서)와 대응되며, 유명한 대행렬도에는 무덤 주인공이 행차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주인공이 탄 수레 위에 '성상번(聖上幡)'이라고 붉은 글씨로 적은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성상'은 왕만이 받을 수 있는 존칭이므로 그런 깃발을 자신의 수레에 달고 있는 무덤 주인은 왕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또한 동수가 투항하여 고국원왕을 모신 신하(장하독)이였다는 중국 사서(수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안악 3호분이 정말 왕릉이라고 하면 '''어떤 왕의 무덤이냐'''도 문제가 되는데,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했을 때 왕이었던 고국원왕으로 보자니 고국원왕은 371년에 평양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우다 죽었는데 왕의 무덤이면 당연히 수도 가까운 곳에 묻는 것이지 않겠냐는 설이 있으나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으니 수도 근처가 아닌 백제가 퇴각한 남쪽이 아니겠느냐 하는 주장이 있고 1963년에 북한의 주영헌 등이 342년에 전연이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가 퇴각하면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뒤로(시신은 1년 뒤에 찾아오기는 했다) 고구려 무덤을 쓰게 되었고 시신을 반환받는 과정에서 동수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또는 무덤 축조와 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의 벽화를 그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왕을 모시는 장하독의 그림 위에 그의 이름을 기록했고 다른 장하독에도 신하였던 다른 인물의 이름을 적어놨다고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학설의 문제는 미천왕의 시신이 343년에 있었고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늦어도 동수가 사망한 357년 이전의 일인데 시신을 찾아오고 나서 무덤 축조까지 왜 10년 넘게 걸렸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10]
3.3. 왕릉이 아니라 귀화인의 무덤
3.3.1. 안악 3호분의 중원계 요소
결론부터 말하면 안악 3호분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중원계 석실이다. 중국은 횡혈식 장법이 일반화되면서 무덤을 집처럼 꾸미는 현상이 보편화되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무덤의 형태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사례이다.
또한 동수라는 묵서명이 석실의 안쪽 벽에 그려진 묘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묘주가 왕이라는 근거는 오로지 백라관이라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러한 벽화의 내용은 고구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령성에 더더더욱 많다. 머리에 쓴 관의 모양도 매우 흡사하다. 요령성에 있는 것이 다 백라관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악 3호분만 놓고 보더라도 "벽화에 그려진 관=백라관"임을 증명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행렬도조차도 중원계 석실의 벽화 구성요소 중의 하나다. 묘주가 왕이라서 행렬도가 크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 귀족층의 무덤에서는 원래 저렇게 구성요소로써 그리던 것으로 왕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아닌 더더욱 중원계의 무덤임을 반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원계 석실이 있다는 것이 마냥 낙랑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후의 변화양상에 있다. 낙랑의 쇠락에 즈음하여 낙랑은 중국 본토와의 직접적인 네트워크가 약해지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반증 중의 하나가 안악 3호분과 같은 다실분 유형의 무덤들이 중국의 다실분 변천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 중엽부터 평양에 소재하는 낙랑의 목곽묘와 전실묘(塼室墓)들의 변화는 중국 본토의 목곽묘 변화와는 다르게 재지화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낙랑 또한 전형적인 중국계 전실묘였지만 4세기 중반 낙랑 멸망 이후에는 벽돌과 그냥 평편한 돌을 섞어만드는, 사실상 일반적인 돌로 쌓는 석실로 변화하거나 궁륭형의 천장이 아니라 궁륭형으로 조금만 만들고 개석을 두는 형태로 중국적인 요소가 점차 퇴락하고 재지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11]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를 통해 볼 때 4세기 중엽, 평양지역의 낙랑의 추세는 313년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의 영향으로 구 낙랑집단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돼 사실상 고구려의 아래에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한다.
3.3.2.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과의 비교
가장 먼저 간단하게 돌로 쌓은 무덤인 적석총, 흙으로 쌓은 봉토분이라는 점에서 외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4~5세기 횡혈식석실(굴식돌방무덤)의 순서와 연대, 편년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지역(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과 낙랑군 축출 이후의 점령 지역인 평양지역 2개로 크게 구분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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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소재하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도. 동실묘라는 특이한 묘제를 제외하면 적석총이 대부분의 점들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집안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졸본, 국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고구려의 역사적 내용과 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무수한 고구려의 유적들, 특히 적석총(돌무지무덤)의 형성과정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동북지역에 만연했던 적석묘 문화는 기원 이후부터는 고구려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형태로 무기단식 적석총에서 기단, 계장, 계단식 적석총으로 발전해나간다. 고구려 적석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3세기와 그 이전 시기의 한반도 중부지역 및 그 남쪽은 일부 백제의 적석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광묘 문화를 채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적석총 문화와는 확연히 대비되고 있다. 백제도 석촌동 고분군 및 즙석봉토분을 제외하면 적석총, 적석형태의 무덤을 축조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않고 금방 종언을 맞이하고 특유의 석실문화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4세기 말까지는 동북아시아에서 적석총=고구려의 등식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반면 평양지역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전형적인 중원계 목곽묘와 전실묘가 채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곽묘라고 하는 것도 한반도의 목곽묘가 아니라 귀틀묘라고 하는 나무판으로 곽을 짜서 만드는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어 나가며 그마저도 수혈식의 장법은 존속기간이 짧고 곧 횡혈식의 장법으로 변한다. 이렇게 횡혈식의 장법으로 변하는 것이 이미 기원전의 일이다. 이랬던 목곽묘(귀틀묘)들이 나중에는 전실묘라는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무령왕릉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빼박 중국계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실묘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이러한 중원계 무덤들은 3세기말 낙랑군의 쇠퇴와 순수 한화의 실패, 313년을 기한 고구려의 점령 등의 이유로 중원계 문물 요소와 재지계의 문물 요소들이 혼재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의 묵서명의 연대를 기준으로 4세기, 같은 시기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에서는 이미 고구려 전통의 적석총으로 대표되는 고분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묘제 역시 집안지역에서는 아직 명백히 석실이라는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고 논자에 따라서 그 시점은 다르지만 4세기는 분명히 횡혈식 장법이 나타나더라도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는 소위 맹아기로써 두 지역의 고분 문화 전개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아래의 도면들이 매장주체부만 놓고본 고구려 적석총의 전개과정.
그렇기 때문에 4~5세기의 기간에서는 두 지역의 역사적, 역사고고학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더 큰 틀에서 "고구려 고분문화의 변천"이라는 하나의 틀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이다. 이후 5세기를 즈음하여 고구려도 횡혈식 장법을 보편적으로 채용하고 적석총의 축조가 둔화되고 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평양과 국내지역의 구분이 점차 사라진다.
3.3.3. 동수의 무덤
낙랑의 설치 이후 평양지역에 형성되었던 중원계 물질문화는 3세기 말, 4세기 경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본토와의 교류가 줄어들게 되고 힘을 잃으면서 중원계의 요소가 고구려의 영향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새롭게 점령한 곳(낙랑군 고구려현의 관점이나 예, 맥의 관점이라면 수복)이기 때문에 이미 멀쩡한 수도를 냅두고 왕이 점령지에 무덤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 물론 평양천도가 장수왕 이전에도 시도는 약간씩 있었지만 장수왕의 천도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바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릉만 따로 뚝 떨어져서 간다는 것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기가 쉽지 않다. 귀장이라는 풍습 아래에 전통적인 묘제인 적석총이 만 여기에 이를 정도로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통구 고분군의 성격과 분포양상, 그리고 그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왕릉의 존재를 고려하면 더더욱 '''''평양이라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중국스러운 묘제로 나라의 왕이 묻힐 가능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무덤은 '''왕릉이 아니라 중국계의 무덤이지만 고구려적 요소가 있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묵서명의 내용 그대로 걸맞는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이 타당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양에 중국의 무덤의 계속 축조되는 것이라면 313년의 기록은 부정되는 것인가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바로 직접적으로 지배를 한 것이 아니라 낙랑과 관련하여 유존해있던 집단들을 활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는 또 한편으로 동수라는 귀화관리가 묻히기에 평양이 적절하다는 반증 이기도 하다.
3.4. 소결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 '''안악 3호분은 왕릉이다''' 라는 주장과 근거는
1. '''벽화의 내용''' : 왕들만이 쓰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대행렬도가 그려져있다.
2. '''벽화의 묵서명''' : 동수라는 귀화한 관리가 보이지만, 그것은 아래의 인물이고 결국 묘주 그림엔 묵서가 없다. 묘주도와는 무관.
3. '''무덤의 규모''' : 크고 화려한 장식들은 왕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로 요약될 수 있으며 고구려의 왕릉이므로 357년의 연대를 통해서 미천왕 아니면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2. '''벽화의 묵서명''' : 동수라는 귀화한 관리가 보이지만, 그것은 아래의 인물이고 결국 묘주 그림엔 묵서가 없다. 묘주도와는 무관.
3. '''무덤의 규모''' : 크고 화려한 장식들은 왕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 안악 3호분에 표기된 357년의 연대는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의 무덤임을 뜻한다.
[4] 1993년 12월 북한최고인민회의의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994년 문화유물보호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국보, 보물 등의 지정번호를 일괄적으로 갱신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5] 위 사진의 무덤 앞 안내판을 더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보면 그냥 '고국원왕무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6] 다만 다른 부분의 벽화에서는 붉은 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것이 확인되기도 한다.[7] 북한에서의 고고학적 연구는 고대의 경우 민족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거나 아예 고려, 조선시대와 관련된 유적, 유물이라면 비교적 생산적이고 교류가능한 견해와 주장이 개진되고 있는 반면 특히 고구려 고분과 같은 경우에는 체고조넘의 교시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 이미 누적이 되버린 상태이다. 특히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대부분이 관학자의 성격이 짙어졌으며 최근에 발굴된 낙랑구역의 보성리 벽화무덤의 경우 무수한 비교자료와의 검토 속에서 명백히 5세기대의 마구(馬具)임에도 불구하고 7세기라고 못박는 단절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고고학적 성과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내용만큼은 북한이 고구려사를 중점으로한 민족주의 고취를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근저에 깔려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8] http://contents.nahf.or.kr/goguryeo/mobile/html/03_vod.html[9] 중국 사서인 수서에서는 전연 모용황의 동생 336년 모용인의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 모용인이 죽자 고구려에 투항했다. 안악 3호분 묵서명에는 영화 13년인 서기 357년에 향년 69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10] 이덕일은 미천왕의 부인으로 고국원왕의 모후였던 주씨가 사망한 즈음에 미천왕의 무덤에 합장하기 위해 무덤을 다시 열었고 그 기간 사이에 동수가 사망한 사실이 무덤 안에 특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는 했다.[11] 심지어 토기제작에 있어서도 점차 재지적인 요소가 강해지는 것이 확인된다.
백라관이라는 것은 고구려 왕의 의복이며, 대행렬도와 거기에 표현된 성상(聖上)의 깃발은 무덤의 주인이 왕인 것을 반증하므로, 관리(官吏)인 동수의 묵서명은 묘주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 반면 '''왕릉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 근거는
1. '''무덤의 구조''' : 요령지역에서 확인되는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 규모도 비슷함
2. '''벽화의 내용''' :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에 똑같은 모양의 관, 똑같은 행렬도 등의 동일한 벽화
3. '''적석총과의 비교''' : 이미 고구려는 수도와 왕들의 묘역이 정해졌는데 뜬금없이 평양에 축조될 수 없음
위와 같이 요약될 수 있으며, 묵서명을 굳이 묘주의 것이 아니라고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주를 설명하는 묵서로 인정하고 있다.2. '''벽화의 내용''' : 전형적인 중원계 무덤에 똑같은 모양의 관, 똑같은 행렬도 등의 동일한 벽화
3. '''적석총과의 비교''' : 이미 고구려는 수도와 왕들의 묘역이 정해졌는데 뜬금없이 평양에 축조될 수 없음
∴ 안악 3호분은 고구려 왕릉이 아니며, 동수라는 묵서명은 무덤의 주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에 즈음하여 사족을 덛붙이면, 안악 3호분이 고구려 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서는 고고학적인 분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헌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해석이 요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자자료가 기록된 곳이 바로 무덤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분석은 역사고고학적인 관점이 요망된다. 역사고고학적 관점이라함은 최소한 해당 유적이 "특정 국가의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가진 않으며, 최대한 객관적이고 많은 자료와의 비교검토 끝에 소기의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안악 3호분을 미천왕이나 고국원왕릉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그러한 관련 고분자료와의 비교검토의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백라관이 고구려 왕의 것이라는 것도 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인지 기준이되는 것이 불분명하다. 대행렬도에 대한 관점, 무덤의 규모에 대한 관점도 동시기 고구려 고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집안지역과의 비교검토가 선행되어야하며 왜 집안지역이 아닌 평양인근의 안악군에 자리하였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비교검토 끝에 다소간의 논리성과 타당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본격적인 역사적 해석이 가미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재야역사학계의 유적에 대한 인식은 고고학적인 이해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자료는 읽고 이해하며 비교 검토를 해나가며 사료비판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선학에 의해서 이미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료는 끊임없이 발굴되고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문헌사의 사료비판과 같은 맥락에서의 고고학적 검토는 필수적이다. 그러한 과정없이 단순히 357년이고 평양이면 고구려니깐 고구려 무덤일 수 이겠구나라는 대전제를 쉽게 깔고 해석만을 향해나가면 근거적 측면에서 약점이 노출될 수 밖에 없다.
4. 안악 1, 2, 4호분
안악 3호분 말고도 안악 1호, 안악 2호의 석실벽화분이 조사된 바 있으며 안악 1, 2호분은 안악 3호분으로부터 북동쪽으로 몇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안악 4호분은 안악 3호분의 바로 서쪽 5m 거리에 있는 무덤으로서 사실상 안악 3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안악 3, 4호분이 위치한 곳이 안악군 오국리기때문에 오국리 고분군으로도 불리며 특히 안악 4호분은 오국리무덤으로도 불린다.
안악 4호분은 구조적으로도 안악 3호분과 같은 계통으로서 묘실이 하나만 있는 T자형의 평면구조의 무덤으로서 안악 3호분과는 위계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고분명칭은 시군단위+하위 행정단위를 같이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일찍이 1949년에 조사되었다 보니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탓도 있다. 그럼에도 안악 3호분이 너무 유명해서 안악군의 이 고분들은 안악 몇 호라고 여전히 불리는 편이다.
안악군에는 안악 1~4호분 외에도 안악군의 구월산 남록과 남산 남록에 많은 중국계 석실들이 조사되었으며 대방군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5. 기타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안악 3호분 왕릉설에 따라 백라관을 묘주도를 기반으로 고증했다.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안에 안악 3호분의 실물대 모형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실물 크기로 안악 3호분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고. 부산 복천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 때도 안악 3호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기도 했지만 특별전이 끝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