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 전투

 


1. 개요
2. 평가
3. 기타
4. 같이보기


1. 개요


1216년 발발한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와중, 1218~1219년 고려-몽골-동진[1]이 서로 연합하여 강동성(江東城)[2]에 침입한 거란족을 물리친 전투.

2. 평가


일단 고려는 강동성에 침입했던 거란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이후 몽골과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
왜냐하면 이를 계기로 이후부터 몽골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듯 행세하며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다. 이때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서 과장 좀 보태 소위 깽판도 부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1225년 저고여 피살 사건 등과 더불어 1231년 발발하는 여몽전쟁의 배경이 된다.
하지만 애초에 고려여요전쟁대와 달리 강동성에 침입했던 거란족을 자체적으로 소탕하지 못했던게 근본적인 문제긴 했다. 몽골 입장에서야 군대 보내줬으니 돈 내놔라고 할 수 있는 노릇이기 때문. 물론 점점 커져가는 규모나 사신의 무례한 행태 등으로 보아 걍 침공 명분 쌓기 어그로 끈거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런 빌미를 안주면 될 것을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 실권자 최충헌은 몽골 개입 전 빨리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던 전쟁을 자만하여 초기 국경군의 구원 요청 배척 등 황당한 판단 미스로 장기화시켜버렸다.

3. 기타


강동성 전투에서 활약한 고려의 장군 김취려는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왔을 정도로 길어서 예복을 입을 때마다 두 명의 여종들에게 수염을 나눠들게 한 후 허리띠를 메었다고 한다. 당시 몽골군의 사령관이었던 카치운[3]이 김취려의 풍채와 긴 수염을 기이하게 여겨 나이를 묻고는 형으로 모시며 후대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4. 같이보기


[1] 금나라 말엽에 함평로 선무사 '포선만노'가 세운 여진족 나라. 이후 동진(대진)에서 동하(대하)라고 이름을 바꾼다. 이시기엔 사실상 몽골의 위성 국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사마씨의 동진이 아니다. 아예 한자가 東眞으로 東晉과 다르다.[2] 지금의 평양 동쪽 부근 지역.[3] 고려사고려시대를 다룬 대중역사서에서는 주로 '합진(哈眞)'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칭기즈 칸의 동생과는 동명이인이다.